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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냐? 반미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국방, 외교안보 등 모든 분야에서 생겨나는 "골치 아픈"(?) 문제들은 모두 다 우리 나라가 분단국가인 까닭에 산생된 문제들이며 이런 문제해결의 방도로는 "우리가 하루 빨리 통일되는 길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저도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남남갈등"을 비롯한 여러가지 문제들이 우리 한국이 분단되여 있는 현실속에 생겨난 극심한 이념적 대립의 결과이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저도 친미가 좋을까? 반미가 좋을까? 라는 생각을 자주 해봅니다.
그런 이유는 제가 다름 아닌 탈북자라는 사회적 신분을 가지고 살기 때문입니다.
1) 1960년대의 북한에서는 어떤 사건들이 있었나?
얼마전 중앙대학교 독일문학과 김누리교수님께서 경향신문사 후마니타스연구소가 주관하는 시민인문학에 출연하시여 하시는 강의를 통해 "68혁명"에 대하여 처음 배우면서 뜻밖에 의문이 생겼습니다.
김누리교수님께서는 "68혁명"이 일어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베트님과 미국과의 전쟁을 그 원인으로 꼽았습니다.
그 당시 세상에는 텔레비죤이라는 새로운 혁신적인 문화콘텐츠가 생겨났습니다.
TV 화면을 통해 실황으로 생중계되는 베트남 전쟁과 그속에서 비쳐지는 참혹한 전쟁 현실, 특히 미군의 의한 약소 국 베트남 인민들이 살륙당하는 현장을 안방에서 직접 눈으로 보면서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 청년대학생들과 민주주의적 진보세력들은 놀라움을 금치못해 하면서 스스로 뭉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68혁명"은 그 당시까지만해도 민주주의의 가장 선진적인 모델로 인식되던 나라인 미국이 "강자가 힘으로 약자를 집어 삼키던 중세의 야만적인 세태"를 보다 발전된 형식과 방법으로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했습니다.
저는 이를 계기로 전세계를 휩쓴 "68혁명"이 한국의 정치 상황에 끼친 영향에 대한 설명 부문에서 의문이 생겼습니다.
김누리교수님께서는 베트남의 호지명주석이(호치민주석) 북한의 김일성주석에게 "남조선처럼 지원병 파병을 해 달라." 고 요청했는데,
김일성주석은 ... "우리 상황도 녹녹치 않으니 남조선처럼 파병은 어렵고 대신 남조선이 더 이상 파병 못하게 막아 주겠다." ... 고 했다고.
그것이 바로 "1.21시태"로 기록 된 김신조가 속한 북한 인민군 특공대의 "청와대 습격사건"이다고 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박정희대통령과 한국 정부는 미국에 더이상의 "월남파병"은 어렵다고 고사를 했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여 그후로는 한국군의 "월남파병"이 멈춰 졌다(? )는 설명이 였습니다.
이부문에서 저는 의문이 들었던 것입니다.
과연 미국이 한국의 정치상황과 박정희대통령의 "딱한 처지"에 진심으로 공감했을까?
당시 미국의 닉슨행정부는 미국의 명운이 걸린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처한 어려운 현실에 그런 애처로운 동정심으로 바라보면서 받아 주었을까? 입니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한국의 "월남파병"이 중단됐다는 설명이 저에게는 개운치않게 들렸습니다.
그래서 저는 "68혁명"이 소용돌이치던 1960년대의 북한의 상황을 돌이켜 보았습니다.
저는 베트남의 호치민과 북한의 김일성 사이의 그 어떤 교감에 의해서 일어 난 일, 이 하나의 사건만으로 한국의 "월남파병"이 멈춰졌다는 해석에 의문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1960년대 중반기의 북한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나름대로 놀라운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나던 시기입니다.
김일성이 창시했다고 주장하는 "주체사상"이 바로 이시기에 들어서면서 처음으로 사상, 이론, 방법의 전일적인 사상체계로 완성되여 선포되였고,
국내외적으로도 북한의 시각으로만 본다면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나타났던 시기였습니다.
* 1966년 잉글랜드 월드 컵
1966년 7월 11일부터 약 20일간에 걸쳐
잉글랜드에서 열린 제8회 월드 컵 대회에서 북한은 이탈리아를 꺾고 아시아 최초로 8강 기록을 세 움.
* 1967년 "경호함 56호" 사건
1967년 1월 19일, 동해 북방한계선에서 어로작업을 하던 남측 어선들의 복귀를 종용하고 호위 할 임무를 수행중이던 대한민국 해군 경비정(당포함 PCE-56)이 인민군 쏜 122mm 해안포 포탄에 맞아 침몰 된 사건.(북한은 "경호함 56호" 라고 부름)
당시 피해 규모는 해군 장병 79명 중 39명 전사.
1967년 1월 23일 자 한국 신문들에는 "경호함 56호"의 정중앙이 포탄을 맞아 꺾이고 불타면서 침몰하는 사진이 관련 기사와 함께 보도 됨.
* 1968년 1월 21일 김신조가 속한 북한군 특수부대 "청와대 습격 사건"
저는 이 한 사건이 미국이 한국의 처지를 생각해 월남전 한국군 파병을 멈추게 했다하는 주장에 대하여 더 광폭적인 사건들과 요인들이 있을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23일, 일본 홋가이도 해협을 통해 쏘련의 울라지보스또끄 해군기지들을 정찰하고 조선동해로 내려오면서 북한 동해안 군사시설들을 정찰하던 "푸에블로호"가 북한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나포 됨.
이 "푸에블로호"에는 승무원 83명(장교 6명, 사병 75명, 민간인 2명 탑승)
미국은 "엔터프라이즈" 항공모함과 미 제7함대 소속 구축함 2척을 출동시킴.
결과는 미국이 영해 침범을 인정하고 사과문과 승무원석방 문서에 서명하고 11개월만에 판문점을 통해 생존 승무원 82명 시신 1구를 넘겨 받음.
북한은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라고 부름.
* 1969년 4월 15일 "EC-121" 미 정찰기 격추 사건
1969년 4월 15일 오후 3시 55분, 일본 아츠기 미 해군 공군기지에서 이룩한 미 해군 전자 정찰기
"EC-121호"가 북한 함경북도 청진 앞바다 남동 쪽 150Km 상공에서 인민군 공군기 "MiG-21" 에 의해 격추 됨.
당시 "EC-121호" 정찰기 승조원 31명
전원 사망.
수색을 통해 공해상에서 시신 2구만 수습 됨.
미국은 1년 전 푸에블로호 때보다 더 강력하게 보복한다고 "엔터프라이즈호" 항공모함을 비롯한 4척의 항모, 3척의 순양함, 15척의 구축함 과 1척의 호위함을 북한 강원도 원산 앞바다까지 올라가 무력시위를 하면서 위협했고,
당시 미국의 닉슨 행정부는 핵무기도 사용하
겠다고, 그때는 주일, 주한 미군에는 전술핵
무기가 실제로 배치되여 있었음.
그러나 그때도 북한에 대하여 미국은 영공을 불법적으로 침입해서 정찰활동을 한 것을 시인했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선에서 마무리가 되였습니다.
2) 미국과 한국과의 인연은 언제부터 시작되였을까?
한반도를 들러 싼 정치, 경제, 사회, 국방, 외교, 안보 등 모든 영역에서 정세가 혼란스럽게 보이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다 잘 알지만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국제사회의 정치정세 흐름속에서 우리 대한민국의 의중하고 전혀 상관없이 늘 그 소용돌이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첫 인연은 1866년 초에 미국의 상선 "저널드 샤먼"호가 인천 제물포 항에 들어 온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
"저널드 샤먼"호는 그해 여름 인천 제물포 항을 떠나 북으로 해주를 걸쳐 그 위로 진남포까지 올라 갔다가 대동강의 물길을 따라 내륙으로 들어갔는데 서해의 조수간만의 차로 인해 강 바닦이 닿을 정도로 배가 내려 앉아 갇히게 됩니다.
당시 평안남도 대동군 사람들은 난생 처음보는 이 무서운 서양에서 온 사람들의 배에 불을 질러 대동강에 수장시켜 버립니다.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남리 만경대라는 시골 촌락이 출생지인 김일성은 이 사건에도 본인의 정통성과 우상화를 위해 슬쩍 숟가락을 얹졌는데 ... ...
김일성의 증조부 김응우가 이 싸움을 주도했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왕실에 "조미상호통상 및 강화조약"을 체결 케 했습니다.
훗 날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조미간의 이 통상강화조약을 믿고 일본의 조선 침탈을 위한 검은 야심을 방치하다가 미국으로부터 크게 뒷통수를 맞습니다.
당시 미국에게 있어서 이 대한제국의 황실과 조선반도의 안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인도지나반도 동쪽 해역과 그곳에 있는 섬나라들에 대한 영유권, 지배권을 인정 받는 대신에 일본의 조선 침략을 묵인한다는 "비밀 협약"을 맺습니다.
우리 한국이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비극의 시작 된 그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미국의 정체성은 그냥 태평양 건너에서 온 침략의 열강이였음을 뼈 저리게 깨우쳐 줍니다.
미국과의 악연은 제2차 세계대전이 미,쏘,영, 동맹국 측 승리로 끝나면서 한반도 북쪽엔 쏘련군이, 남쪽엔 미군이 들어오면서 또다시 이어 집니다.
긴 얘기는 생략하고 한국전쟁 때에 북한의 공산주의 세력들을 완전히 괴멸시키지 못하고 "정전협정"으로 그냥 두루뭉실하게 한국전쟁이 끝난 것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인 아이젠하워의 "미국 식 귀찮이즘"(?)에 의해 생겼습니다.
미국은 그들이 말하는 것 처럼 동맹국들의 우상이고 미국은 정말로 자기들의 희생을 감내하면서까지 동맹국들을 지키주기 위해 싸울 것인가?
시대 별로 살펴보면 그 어느 나라든지 정치적 오판들이 있습니다만 미국은 냉전이 종식되자마자 해외 주둔 미군기지들에 전개되여 있던 전략적 핵무기들을 "평화로운 세계"라는 명목으로 모두 걷어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걸프전과 같은 자국에 직접적인 위해를 가한 국가만을 상대로 "힘의 과시"를 떨쳐보였지만 ...
미국은 누가 봐도 무책임하게 아프칸에서의 악의 근원인 탈레반세력 앞에 백기를 들고 철수함으로써 미국은 "자유 세계"의 보존 및 유지보다도 자국 이기주의에 더 민감하다는 속내를 전세계 국가들에 보여주었습니다.
현 국제정세속에서의 미국은 우크라이나 대 러시아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않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뿐 아니라 러시아와 국경을 맞댄 소수 국가들의 나토가입을 미루고 있거나 승인해주지 않고 있습니다.
서방과 동방 사이에 이른바 "완층지대"가 있어야 한다는 러시아 푸틴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아닐까?
우크라이나에는 무기와 포탄과 탄약과 같은 일부 군수물자만 제공합니다.
혹시 장삿 속?! ... 만 ... 있는 건 아닐까? ...
동북아로 돌아 와서 보면 미국은 중국과 강대강으로 첨예하게 대립하면서도 "하나의 중국"이라는 중국지도부의 기조를 존중해주면서도 대만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합니다.
미국이 세계 최고의 "초 강대국" 임을 저도 인정합니다만, 그들 미국인들은 유독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해서 만큼은 군사적 충돌을 피하고 싶어한다?!...고 의심이 듭니다.
때문에 한반도에서도 군사적으로 급박하고도 엄중한 사태가 일어난다면 미국이 동맹국인 한국에 대한 입장이 변함없을 것이다! 고 믿을 만 할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그들 미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에의 "역할론"을 한국전쟁시기의 희생을 빼고는 북한에 의해 깨지면서도 그렇게 높은 신뢰감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21세기에 들어 선 지금은 몰라도 60년대의 북한은 적어도 미국과의 여러차례 군사적 충돌을 겪으면서 미국을 상대로 "이기는 법"에 훈련되였고 반대로 미국은 "여차하면 질 수도 있다."를 학습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격변기에 남북한은 1972년 7월 4일,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을 분단 27년만에 최초로 자위적 의지로 채택합니다.
이 "7.4 남북공동성명"을 북한에서는 다른 말로 "조국통일의 3대원칙"이라고 부르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1. 그 어떤 외세의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조국을 통일 한다.
2. 남과 북은 그 어떤 무력 충돌도 하지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조국을 통일 한다.
3. 이념과 정견, 신앙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
여 민족적 대단결의 방식으로 조국을 통일한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평양과 서울에서 같은 시각에 동시에 발표된 이 "7.4 남북공동성명"의 맨 마지막 문구가 있는데 ...
"서로 상부의 뜻을 받들어
김영주 이후락"
이라는 그들의 친필 서명입니다.
이름하여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을 골자로하는 "조국통일의 3대원칙"은 세계적으로도 긍정적이면서도 충격적인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의미있는 "7.4 남북공동성명"은 남과 북의 독재자들에 의해 자기들의 독재집권을 영구화하려는 목적에 악용되면서 세상에 나온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휴짓조각이 됩니다.
먼저 남한의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에 이른바 "10월 유신헌법"을 채택하여 장기 집권을 꾀하였고,
뒤 따라 북한의 김일성은 1972년 12월에 이른바 "사회주의 헌법"을 만들어 자신이 스스로 북한의 "영원한 수령"이다고 선포합니다.
온 민족 겨레와 세계인들의 뜨거운 지지와 열광적인 호응을 받았던 "7.4 남북공동성명"은 발표된지 3개월, 5개월만에 두 독재자에 의해서 그 빛을 잃게 됩니다.
이시기에 미국은 한국에서의 핵 개발은 원자력발전소 정도의 평화적 이용에만 극한한다고 못박았고 나중에는 고고도 미사일 개발도 비행거리를 300Km 안팎 이다! 고 묶어 놓았습니다.
60년대와 70년대 초에 남북한에서 일어난 일런의 사건들은 한국이 "월남전 파병 중단이다는 결과를 가져왔다." 는 단편적인 주장보다 더 다양한 입체적 시각으로 그때를 살펴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현재의 남과 북을 비교해보면 한국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북한보다 훨씬 월등하고 우월한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이 지닌 우월한 지위에서의 조국통일을 이루자면 우선 그 상대인 북한이 분단 이후 어떤 행적으로 걸어 왔는가 라는, 다시말하여 북한을 잘 아는 것이 통일문제 해결의 시작이 되여야할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윤석렬정부는 집권 초기에 벌써 북한에 대한 선제타격을 운운하면서 미국의 전략핵 무기를 한반도에 다시 전개하겠다고 하였다가 미국으로부터 퇴짜를 맞았고,
또 올여름엔 "한미군사훈련"에서 핵무기를 포함한 핵전술 훈련을 진행하겠다고 했다가 이번에도 미국으로부터 ... 한국은 핵 보유국이 아니다. 또한 미국은 "한미군사훈련"에서 전술핵 무기를 동원한 군사연습을 하지 않는다. ... 고 하였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친미냐, 반미냐, 라는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어떤 경계를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처럼 만일 친미와 반미가 있다고 한다면 저는 한국은 친미와 반미, 둘 다 필요하다고 말하겠습니다.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초 강대국"의 국제적 위상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와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 국가들 사이에 얽히고 설킨 정치적 이해 관계문제 때문이라도 한국에서의 친미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적의식적인 선택이 됩니다.
그러면서도 굳이 반미라고하면 노무현대통령의 "참여정부" 때 처럼 미국과의 한미 FTA 도 성사시키고 현재 오산과 평택에 걸쳐 설치된 미국의 해외주둔 군사기지들 중에서 제일 크다는 "주한미군기지"를 건설해 주면서도 "전시작전권"을 돌려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반미를 해야하며,
지난 문재인정부처럼 미국의 트럼프대통령에게는 한국의 통일에 기여하고 당신은 "노벨평화상"을 받으라고 하면서도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묶여있던 고고도 미사일 제한 규제도 풀어서 한국이 평화적 우주산업개발 뿐만아니라 보다 효율적인 한국형 미사일 개발도 자위적으로 할 수 있게 하고 또한 방위비 분담금을 엄청나게 높게 책정해서 받아내려던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압박에도 당당히 맞서 무마시킨 그런 반미는 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의 민주당 정부가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반미정책을 편다고 보지 않고 오히려 우방 동맹국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오히려 미군 해외주둔비를 올려 달라는 미국의 압력에 맞서면서 이른바 "자유 세계"를 지키려는 공산주의와의 "이념 전쟁"에서 동북아에 위치한 한국이 더 의롭게 기여한다고 보여집니다.
때문에 한국 내에서의 친미냐, 반미냐 라는 지리한 싸움은 오롯이 그 어떤 경계를 내서라도 저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만 챙기려는 사람들의 수작질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 하겠습니다.
우리의 역사속에 있는 임진왜란 직후에 류승룡이 쓴 "징비록"이라는 책속에는 오늘날 이땅에서 살아 가는 우리 후손들이 올바른 방향을 선택하고 지혜롭게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역사적 교훈이 담겨져 있습니다.
한국은 친미와 반미가 둘 다 필요하며 따라서 친미와 반미라는 이념적 이데올리기 논쟁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친미도 없고 있고, 반미도 없고 있고 입니다.
이제 더 이상 경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 살지 않는 자유인 입니다.
2023. 1. 5.
첫댓글 지미ㅡ미국을 알고
여미ㅡ미국과 함께 하며
극미ㅡ미국을 극복하고
탈미ㅡ미국으로부터 탈출하자
친미 반미 하지않고
지미 여미 극미 탈미하고 싶네요
여미와 탈미를 같이 하고 싶다니 ...
제가 써그리를 닮아 가나 봐요
깨시오님의 "약간의 분노"(?) 롤 100% 받아들이 겠습니다.
제가 이글을 다 써놓고 며칠을 두고 곱씹어 읽고 또 읽어 보다가 ...
읽을 수록 자신감이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많은 문장을 걸러서 빼게 되였고 그러다보니 앞뒤 문맥이 또 흐트러지고, 그래도 꼭 하고싶은 말이기도해서 끝내 게시글을 올리다보니 님의 지적에 수궁하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제가 참 비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그래도 내용중에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이기는 법"을 학습했고 반대로 미국은 "여차하면 질 수도 있다."에 훈련됐을 것... 이라는 말이 제가 제일루 하고픈 말이 였는데 그걸 적어서 게시했다에 만족하려고 합니다.
제가 탈북자다 보니 제 머리속에서 자체 "검증 필터"가 너무 많이 작동됐었음을 인정합니다.
그나저나 새해에 들어 섰는데 커피 한 잔 해야죠.
댓글을 받아보니 건강히 잘지내시는 것 같아 기분은 좋습니다.
@디아스포라 ㅎ 분노하지 않았고요
친미도 반미도 하지 않겠다는 말씀에
더 한 발 나아가
극미 하고 싶다 는 말이었는데
분노가 보였다면
제가 글을 잘 못 쓴 거입니다
@깨시오 극미는 저의 지향점과 딱 맞아 떨어집니다.
다만 저의 극미는 통일후로 미루자, 그때까지는 미국 좀 이용해 먹자. 라는 견해입니다.
건강하시죠?
어떻게 커피 한 잔 쏘십시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