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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9장
*** 여호와가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다 ***
1.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짓기를 끝내서, 자기가 이루기를 바라던 모든 것을 마친 때에
2.여호와가 앞에 기브온에서 나타난 것 같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났다.
3.여호와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의 기도와 당신이 내 앞에서 애타게 부탁한 것을 내가 들었으니,
나는 당신이 지은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끝없이 그 곳에 두며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겠다.
4.당신이 만일 당신의 아버지 다뷛이 행한 것 같이,
마음을 다하여 바르게 하여 내 앞에서 행하며,
내가 당신에게 명령한 대로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가서, 내 법도와 율례를 지키면
5.내가 당신의 아버지 다뷛에게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를 사람이 당신에게서 끊어지지 않겠다' 말했던 대로
당신의 이스라엘의 왕의 자리를 끝없이 단단하게 하겠지만,
6.만일 당신이나 당신들의 자손이 아주 돌아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가 당신들 앞에 둔 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지 아니하고 가서 다른 신을 섬겨 그것을 예배하면
7.내가 이스라엘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에서 끊어 버릴 것이다.
내 이름을 위하여 내가 거룩하게 가려놓은 이 성전이라도 내 앞에서 던져버리리니,
이스라엘은 모든 민족 가운데에서 속담거리와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며
8.이 성전이 높다 하더라도 지나가는 사람마다 놀라고 비웃으며
'여호와가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였지?' 라고 말하면
9.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온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예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가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렸다'고 말할 것이다.' "
*** 솔로몬과 히람의 약조 ***
10.솔로몬이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두 집을 건축하는데 20년이 걸렸다.
11. (페니키아의) 투로 왕 히람은 솔로몬이 요구하는 백향목과 잣나무와 금을 공급하였다.
그래서 솔로몬 왕도 (투로와 가까운) 갈릴라이아 땅의 성읍 20 개를 히람에게 주었다.
12.히람이 투로에서 와서 솔로몬이 자기에게 준 성읍들을 보고 눈에 들지 아니하여
13.그가 말했다.
"형님 나에게 이런 성읍들을 줍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카불(불모의 땅) 땅이라 부른다.
14.히람이 금120 탈란토( 4,100 KG , 히브리어 120 키카르)를 왕에게 보냈다.
*** 솔로몬의 다른 공적 ***
15.솔로몬 왕이 일꾼을 모은 이유는
여호와의 성전과
자기 왕궁과
밀로와
예루살렘 성벽과
(이스라엘 북쪽에서 남쪽으로 오는 길목에 자리잡은) 하쪼르(요새)와
( 이스라엘 중간의 동서로 연결하고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 요충지) 므긷도(요새) 와
(이스라엘 남쪽의) 게제르를 건축하려 위해서 였다.
(참조: 하쪼르와 므긷도에는 전쟁시 성밖의 물을 성안으로 끌어 올 수 있는 터널이 있다)
16.앞에 이집트 왕 파라오가 올라와서 게제르를 빼앗아 불을 지르고,
그 성읍에 사는 카나안 사람을 죽이고,
그 성읍을 자기 딸 솔로몬의 아내를 위하여 결혼 지참금으로 주었다.
17.솔로몬이 게제르와 아래 벧호론을 건축하였다.
18.그리고 바알랕과 그 땅의 들에 있는 ('지중해 해변 길'과 '왕의 대로' 만나서가는 로마시대 팔미라) 타드모르와
(참조 : 타드모르란 타마르(대추 야자 나무)가 무성한 땅으로, 로마시대 에는 팔미라 (뜻 : Palm의 라틴어)는
다마스쿠스 북동쪽 280 킬로, 유프라 테스 강 서쪽 200 킬로 되는 곳의 오아시스가 있는 요새 겸 쉼터 이었다.
아브라함이 카나안 땅에 들어올 때 이곳을 지나 왔다고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있다. )
19. 자기에게 있는 모든 국고성과 병거성들과 마병의 성들을 건축하고
솔로몬이 또 예루살렘과 레바논과
그가 다스리는 온 나라에 건축하고자 하던 것을 다 건축하였다.
20.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에모리 사람과
헽(힛타이트) 사람과
프리지 사람과
히뷔 사람과
예부스 사람 가운데 남아 있는 모든 사람
21.곧 이스라엘 자손이 다 죽이지 않고
그 땅에 남아 있는 그들의 자손들을
솔로몬이 지금까지 강제노역을 시켰다.
22.다만 이스라엘 자손은 솔로몬이 노예를 삼지 않고,
그들은 군인들과 그의 신하와 높은 사람과 지휘관이며
병거와 마병의 지휘관이 되었다.
23. 솔로몬에게 일을 감독하는 감독관 550 명이 일하는 백성을 다스렸다.
24. (이집트의) 파라오의 딸이 다뷛 성에서부터 올라와 솔로몬이 그 여자를 위하여 건축한 궁에 이를 때에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하였다.
25.솔로몬이 여호와를 위하여 쌓은 제단 위에 해마다 세 번씩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바치고,
그리고 여호와 앞에 있는 제단에 향을 피웠다.
그리하여 성전 짓는 일을 마쳤다.
26.솔로몬 왕이 에돔 땅 (이스라엘.요르단, 이집트가 바다에 접하는 곳 아카바만 북쪽 끝의) )홍해 바닷가의
엘랕 근처 에쯔욘게베르에서 배들을 건조하였다.
(참조 : 2016 년 현재 에쯔온 게베르 근처는 바닷 물도 맑고 따뜻하여 이스라엘 휴양지가 되어 있다)
27. (페니키아의 투로왕) 히람이 자기 종 즉 바다에 익숙한 사공들을 솔로몬의 종과 함께 그 배로 보내니
28.그들이 오피르에 가서 거기서 금 420 탈란토(14,400 KG) 을 얻어서 솔로몬 왕에게 가지고 왔다.
(참조 :
'페니키아'라는 말은 헬라인들이 붙인 이름이다.
phoinós는 헬라어로 '진홍빛'이라는 뜻으로
이들의 주요수출품목이 바로 진홍빛 염료였기 때문이다.
진홍빛은 다른 곳에서는 얻을 수 없는 귀한 색으로
당시 페니키아해안에서만 나는 뿔고동에서 추출할 수 있었다
오로지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만을 추구했기 때문에
항구도시를 건설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공정하게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그 물건의 가치와 지불내역 등을 기록해야 한다.
그래서 페니키아인들은 쐐기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의 장점을 살려
'소리'를 표시하는 기호 '알파벳'을 최초로 만들어내었다.
BC 2세기 페니키아와 로마는 지중해패권을 놓고 대혈투를 벌였다.
120년에 걸친 치열한 전투에서 가까스로 승리한 로마제국은
카르타고를 건물 한 채 남김없이 불태워버리고
페니키아 남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도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인들에게 페니키아는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을 로마인들은 '포에니전쟁'이라고 부르는데,
Poeni는 Phoenicia 사람이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Punic war라고 한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Poenicus(Phoenician)이라고 불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 토끼sapan가 많다고 하여 토끼나라Sapania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오늘날 스페인Spain의 유래가 되었다.
페니키아인들은 자신들을
케나아니/키나아니라고 불렀다고 한다.
Kenaani/Kinaani는 바로 Canaan이다!
최초의 알파벳 문서인 성경을 제작한 가나안사람들이
바로 이들 페니키아인이었던 것이다.
히브리인과 페니키아인은 언어도 문화도 같다.
구약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바로 이들이다.
넓은 의미에서 페니키아는 안디옥에서부터
이집트의 경계에 이르는 지중해 동쪽 해변의 긴 지역을 가리키지만
원래의 페니키아는 주로 두로와 시돈의 영토를 말한다.
페니키아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
즉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이다.
여호수아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기 전에 이 지역에는
함의 후손인 가나안 족속이 살았으며 그들은 열한 가족으로 나뉘었는데
그 중 가장 힘센 가족은 가나안 가족이었다.
바로 그들이 시돈을 세웠고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가나안 족속이었으며
그리스 사람들은 그들을 페니키아 사람들이라고 불렀다.
여호수아와 사울과 다윗과 그 이후의 왕들의 시대에 정복되지 않고
그들만이 독립을 유지하였으나 후에
그들은 앗시리아와 갈대아에 의해 정복되고
후에 다시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에 의해 정복되었다.
페니키아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유하고 문화가 발전한 사람들로
인정을 받았다.
그들은 상업 도시들의 연합체를 구성하였는데
이 도시들은 각각의 영토와 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역을 발전시켰으며
그래서 여러 지방의 산물이 그들의 시장에서
교환되었다(겔27:1-36).
초기 로마의 경쟁국이던 카르타고는 페니키아의 식민지였으며
다시스도 마찬가지였다(겔38:13 킹흠정, 세바와 드단과 다시스의 상인들과
그곳의 모든 젊은 사자들이 네게 이르기를, 네가 노략물을 취하려고 왔느냐? 네가 탈취물을 취하려고 네 무리를 모았느냐?
은과 금을 가져가고 가축과
재물을 빼앗아 가며 큰 노략물을 취하고자 하느냐? 하리라, 하라.).
그들의 말은 유대인들의 말과 거의 비슷하며
솔로몬은 성전을 짓고
배를 만드는 일에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의 영토는 해안과 레바논 산의 정상 사이에 있었으며
비옥하여 여러 가지 농작물을 많이 내었다.
이곳의 거주민들은 바알과 아스다롯을 숭배하였다.
페니키아라는 말은 히브리어 성경에 없으며 단지 가나안으로만 언급된다.
한편 신약성경은 가나안 여인 혹은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해 말하는데
(마15:22; 마르코7:26) 이는 곧 시리아의 페니키아 사람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페니키아가 시리아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세계최초로 갤리선을 발명한 해양문명 페니키아...그리고 그 후예 레바논
페니키아는 지중해 동안(東岸)을 일컫는 고대 지명으로 페니키아인들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조수의 간만이 없고 알맞은 조건을 갖춘 지중해는 해운업을 증진시켰다.
다시 말해 페니키아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
지금으로 보면 레바논을 비롯해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지역에 근거지를 둔 고대의 '해양' 문명이다.
페니키아 문명은 기원전 1200년경에서 900년경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인 해상 무역 문화를 가졌다.
그런 만큼 페니키아의 배는 뛰어난 성능으로 유명했습니다.
돛을 달기는 했지만
대개의 경우 사람의 힘으로 추진력을 얻어 항해하는 갤리선을 최초로
발명한 것이 페니키아인들이었다.
로마자 알파벳의 시조가 된 페니키아 문자
어느 배보다 뛰어난 기동력을 갖춘 노를 젓는 갤리선을 이용해
페니키아는 무역으로 크게 번성하였다.
하지만 페니키아 하면 뭐니해도
'페니키아 문자'가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해양 무역을 통해 북아프리카와 유럽에 전해진 페니키아 문자는
오늘날 가장 많이, 또 가장 널리 쓰이는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페니키아인은 초기에는 가나안(Canaanites)계(系)가 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시간이 지나면서 아리아계, 후리르계와 혼혈을 이루어졌다. 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불렀는가는 확실치 않으나,
페니키아라는 명칭이 붙여진 것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였다.
그리스인들은 그들을 포이니키스, 즉 '자(紫)색의 사람'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페니키아인들이 값 비싼 보랏빛 염료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이름은 B.C. 1200년 경 페니키아가 해상 무역으로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된다.
페니키아는 본래 이집트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B.C. 1500년 경까지 이집트 파라오 투트모스 3세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나 B.C. 14세기에 들어 히타이트와 아모리인(Amorites)이 이집트를 공격하면서
페니키아는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독자적인 해양 세력으로 성장했다.
B.C. 1250년경에 이미 페니키아는 동지중해연안과 에게해 연안을 장악했으며,
티레, 시돈, 트리폴리, 아라두스, 비블로스 등의 도시 국가들이 크게 발전했다.
B.C. 12세기에 이르러 이집트의 영향력이 매우 약해지면서,
페니키아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했으며, 스스로 식민지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연안의 사이프러스, 코카서스, 사르디니아, 이베리아 반도 등을 식민지화 한 것은 물론이며,
뛰어난 항해술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서안과 동인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해상 교역과 문화 전파를 통한 페니키아의 전성기는 약 40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B.C. 9세기에 이르러 앗시리아 세력이 팽창하면서 페니키아의 독립성은 점차 축소되었으며,
기원전 538년에 이르러서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B.C. 4세기 무렵 그리이스가 성장하자 페니키아는 B.C 350년에 시돈이 공격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하여
그리이스의 한 속주가 되었다.
특히 티레는 B.C. 333년 ~ 332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직접 통치를 받았으며
, B.C. 64년 페니키아 전역이 로마의 시리아 속주로 편집되기 전까지 계속해서 그리이스의 통치 하에 있었다.
페니키아의 주요 생산품과 교역품
페니키아는 삼나무·소나무 등의 목재, 티레·비블로스·베리투스에서 생산되던
고운 아마포, 고둥의 분비액에서 추출하는 보랏빛 염료와 염색 옷감,
시돈에서 생산되던 자수제품, 포도주, 금속, 유리 공예품, 채색 유기, 소금, 건어물 등을 주로 수출했다.
또한 지중해연안, 아프리카, 아시아를 잇는 중개 무역을 통해 귀금속, 상아, 공예품 등을 사고 팔았으며,
식민지였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은을, 사이프러스에서는 구리를 생산해 거래했다.
페니키아 문화에는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에게해, 시리아의 문명에서 온 소재와 관념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오늘날 남아있는 대부분의 페니키아 유적은 주로 평면 부조로서,
가장 오래된 것은 비블로스에서 출토된 아히람(Ahiram, B.C. 11세기 말 비블로스의 왕)의 석회암 석관이다.
페니키아의 문화 유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니키아 문자이다.
페니키아는 본래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를 사용했으나
B.C. 15세기 경에 22개의 자모로 이루어진 고유한 문자체계를 발명했으며, 비블로스를 중심으로 사용되었다.
후에 그리이스인들이 이 표기법을 채택하여 오늘날 로마자 알파벳의 원형이 되었다.
1) 페니키아의 종교는 다른 나라의 여러 신들과 상당히 혼합되어 있었다.
신들은 이집트, 그리이스 그리고 로마(칼타고)를 포함한 다른 나라들의 신들과 동화되어 왔다.
으뜸가는 여신은 아스다롯(왕상 11:5) 이었을 것이다.
두로에서는 엘과 멜카르트를 섬겼다.
성전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솔로몬 성전과 몹시 같았을 것이다.
성전을 지을 때 페니키아의 일꾼들이 상당히 많이 일을 했기 때문이다.
2) 칼타고, 노라, 모티어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자녀의 희생이 몰록에게 바쳐진 신전의 형태가 있었다.
이 제의는 자녀를 불 사이로 지나서 몰록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솔로몬은 그의 시돈 여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시돈의 여신인 아스다롯을 섬겼다.
죽은 후의 사람에게 인사하도록 되어 있는 상황이 당시 사용된 장례의식으로 나타나 있다.
가장 희망을 갖고 있는 곳은 유해를 위해서 남아있는 안전한 은신처였다.
페니키아인들은 이런 이유 때문에 훌륭한 무덤을 좋아했다.
2) 두로는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동안에 주요한 도시였다.
왕국을 통일함으로써 다윗이 페니키아와 접촉하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바다가 필요했고 두로는 농산물들이 필요했다. 페니키아의 무역은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움직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느코는 그들의 무역 중심지로 멤피스를 허락하였다.
그 결과 이사야는 이집트가 두로의 멸망을 몹시 슬퍼할 것이라고 말한다.(예사야 23:5)
3) 이들은 가끔 노예 거래를 했으며 이것이 상인으로서 나쁜 인상을 남겼다.
주전 7세기의 오딧세이는 이를 증명한다.
요엘 3장 6절에 “유다 자손과 예루살렘 자손들을 헬라 족속에게 팔아서 본 지경에서 멀리 떠나게 하였음이니라”,
그리고 아모스는 백성을 에돔에 넘겨준 두로를 비난하고 있다.(암 1:9이하)
1) 두로는 주전 1200년부터 그 도시가 느부갓네살 왕에게 멸망당했던 주전 574년까지
눈에 띄는 두드러진 도시였다.
그 후 시돈이 그곳을 지배하였다. 주전 741년에 두로와 시돈이 히람왕과
그의 후계자인 룰리(Luli)왕의 통치 아래서 연합했을 가능성이 있다.
히람은 두로의 왕들 중에 가장 유명한 왕이었다.
(주전 981-947) 이토바알 즉 에드바알은(주전 879-867) 아스다롯의 제사장이었으며
오므리의 집과 두로 사이에 동맹을 맺은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부인이 그의 딸 이세벨이었다.(왕상 16:31)
엘리야가 페니키아의 도시인 사르밧의 과부를 방문한 것이 바로 이 조약 기간 동안이었다.(왕상 17장)
1) 창세기에는 시돈인들의 기원이 가나안의 후손이라고 설명하고 있다.(창 10:5)
그들은 지파동맹 동안에 이스라엘에 약간 위협을 주었음에 틀림없었다.
여호수아는 시돈 건너 기브온을 공격한 백성들의 동맹을 추적하지 않았으며,
이것은 그들의 영토 밖이었음을 지적하고 있다.(수 11:8)
두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있어서 좀 더 두드러진 도시였던 것 같다. 그것은 요새화 된 도시로 언급되었다.
2) 이들의 건축술은 이스라엘보다 굉장히 선두에 있엇음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추방 이전과 이후의 성전들을 위해서 자료를 공급했거나 건축하였기 때문이다.
솔로몬관 다윗은 외관상 두로의 왕 특히 히람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히람은 납달리 족속의 과부와 두로의 놋점장이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것이 암시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 왕이 장인(匠人) 집 출신이었으나 성장하여 왕권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히람의 이스라엘과 혼합된 결혼을 통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적인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3) 페니키아인들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에 참고해 볼 때
분명히 드러나는 몹시 주목할만한 일은 선지자의 경고에 반영되어 있다.
히람 왕 이후 성장해 온 것 같으며 특히 추방 이후에 양자간에 상당한 증오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감정에 빠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어떤 조약이나 음모가 시편 83편 7절에 언급되어 있다.
이사야 23장은 두로와 시돈의 멸망을 슬퍼하고 있으나 빈정거리는 가시가 몇 개 들어있는 것 같다.
4) 신약성경에 두로와 시돈을 언급한 구절들은 지리적인 위치를 참고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도시들은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도록 허락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가나안 여인 마 15:21이하, 수로보니게여인 막 7:24이하 ) 페니키아는 튼튼히 요새화 되어 있고 부유하고
무역에 분주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해안에 위치해 있었고 항상 신선한 사람들, 자연 자원, 그리고 현명한 상인들로 축복받은 나라이었기에,
그들은 사방의 이웃 나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