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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에 젖은 꽁보리밥 (제주 사투리로 쓴 수필)
수필 / 백록 / 유태복
퍼렁헌 풀잎덜이 서넝헌 저슬 눈보라 칼노롯에도 살아낭 땅 우티로 미쭉미쭉 오몽허연 이젠 실록이 솜빡헌 오월, 영 헌 오월은 가정의 달이앵도 고른다. 경헌디 요새 무사 이녘데로 질러 죽어 가는 사롬덜이 하영 이신고? 못 사는 빗쟁이도 싯쭈마는 잘 산뎅 허는 배우, 가수, 정치인, 대기업 회장, 고위직 공무원, 최근엔 대통령헌 분까지도 세상을 안 살아불켕 숨쉬는 걸 이시데껴불엉 세상 사롬덜 추물락허게 허염쩌. 사롬 삶이엥 허는 것이 몬 쉬왕 사는 사롬이 며치나 이심광, 나 고튼 사롬도 호건 살아 보젠 울멍 시르멍헌 입술 조물아 물엉 촘으멍 쉰일곱해 살던 삶의 이왁을 서넉장에 엥그려보쿠덴. 제주의 항쟁이여 폭동이여 허는 4.3사태인 와중에 아방은 상배(喪配)를 당허고 6.25사변경 어떵허단 또 나 어멍 만낭 1953년 오월 난 태어 나신디, 나 세설 되던 해, 시골 웃뜨르 외할망광 이신 나를, 전(前)큰어멍에 큰성님은 왕사탕으로 꼬시는 바람에 날 낳은 어멍광 옥곳 생 이별허여 부러신디. 어른들이 알 수 어신 이해관계로 어린애는 비극의 길로 좁쩌들멍 아방이 또시 선택한 새어멍 즉 다심어멍허고 어린시절을 보내사만 허였고. 배 다른 어린아시 셋 보모가 되엉 애기 업게 허멍 애기 졸바로 못봥 울렴젠 부수 매맞으멍 유년기를 보냈고 소혹교 6년간 소풍, 수학여행은 아예 갈 궁퉁이조차 못 허고 경 헌 날이민 새어멍은 나를 동새벽에 깨운다. “야 일어나라. 몬 볼감져. 해가 중천에 올라 오젠 허염쪄. 나 먼저 밭띠 강 검질 메엄시크메 혼저 밥 잘 허영 가정 오라 이-, 불껑도 잘 단도리 허여뒁 재기재기 오라 이.” 허민 “예 알아쑤다. 혼저 강 햄십서.” 대답허여 뒁, 졸린눈 비비며 일어낭 눌에 강 보리낭이나, 조칩 빠당 솥 강알에 불 지드민 메운내에 눈물이 잘잘 흘려가멍 보리밥 혼솥 허영 차롱착에 혼구덕 담앙 등따리에 질머 정 두어참 걸어 가민 보리검질 메던 새어멍은 늦게 왔쟁 욕만 허곡, 검질멜 때민 늦게 멤쟁 골갱이로 손등 조사불민 무사 경도 아픈지. 소리 내영 울지도 못허곡 눈물이영 콧물이영 흘착흘착 땅 우티 떨어지는 걸 보민 무사 경도 칭원헌지. 요놈이 해는 무사 경도 진진험광. 어린 종엔 무사 경도 아픔광. 경 아니허여도 소풍 못 강 칭원헌디. 학급 동료들은 곤밥 싸곡 좋은 반찬에 놀고 있뎅 생각허민 더 서러운다. 해가 조물어 가민 몰촐이나 지들컷 혼짐 잔득 질머 지엉 혼참(4k)을 걸엉 오지 아니 허민 보리밥 혼사발 먹기가 어려운 그때, 소혹교졸업 후 제일중 입학고사에 합격해도 입학금3,850원 못 내줭 중혹도 못 강 그자 몰태우리 허멍 지들커영 검질메는 일, 번갈아 가멍 허는 일이 일과였져. 날 낳은 어멍은 어디서 무싱거 허멍 어떵 살암신고? 바쁜 날은 생각 헐 여유도 어서쭈마는 비 오는 날이민 가끔 생각이 난다. 어느 날인가 동네 아주망이 “느 어멍 오일장에서 봤져. 한림 살암젠 고라라. ” 영 고르는 말에 오목가심 소곱에 담아 둬신디, 어느날 어멍 아방 싸우멍 “홍**”가 어떠코저떠코 허는 말에 아~ 나 낳은 어멍이름 홍**구나 알게 됐다. 그때 어멍보구정헌 울컥한 충동심에 14살 호끄만헌 난 어멍초지래 동네 아지망 말만 들엉 일주도로를 따라 뛰멍 걸으멍 가당 놈삐밭과 감저밭만 봐지민 “하느님 일용한 양식 고맙쑤다.” 기도허멍 누게 봠시카보뎅 엎더정 기여강 배 호꼼 채와 지민 또 도르멍 가는디 애월지낭 곽지입구쯤에서 밭띠 갔당오던 어떤 할망 안티 물어 보았다. “저 말좀 물르쿠다. 한림 얼마나 남았쑤강?” “게난 어디서 왐디?” “제주성안서 왐쑤다.” 의심 스러운 듯 또시 묻는다. “무싱거? 또시 고르라보저” “예 제주 시에서 오멘 마씀” “이거 무신말고? 게난 무시거 허래 먼먼헌 길을 영 걸엉 왐디” “예. 3설때에 헤어진 어멍 보지기리왕 걸엉 오게 됨쑤다.” “아이고 설룬 애기야. 한림은 저 산(비양도) 가기 전이난 어둑엉 아니 되키여. 가당 버스 봐지민 탕 차장이 돈내렝 허걸랑 ‘보육원에서 나왕 어멍 촞앙 왐뗑 고라보라.’ 그 꼬지사 태워 줄꺼여” 허멍 고르차 주었다. 조금 걷고 이시난 버스가 오고 있었다. 손들어서 차를 타자마자 앞조수는 “야 차비!” 허멍 큰 소리를 친다. 그 할망이 고라준 '보육원' 말이 나오질 안았다. “저 한림꼬지만 태워 줍써. 어멍 초장 가는디” 허멍 고르난. 차장이 “짜식 어멍이 차비 주난 너 과자 사먹고 공짜 차 탈려는 거지. 내려!” 허멍 한대 주어 맞고 내려야만 했다. 그 당시엔 돈이 귀한 시대라 시골애들이 그렇게 한 애들이 있었기에 나도 그런 아인줄 알고 안 태워 준거로 생각이 들었다. 50여km길 똠이영 눈물이영 흘려가멍 긴장된 모음으로 걸멍 도르멍 허단 보난 제우 어멍 산뎅허는 근처까지 왔주마는 해는 조물엉 세상은 왁왁허여가고 우리처럼 못 사는 집은 각지불, 등피불이 베롱헌 밤이고 호꼼 잘사는 집엔 번쩍번쩍헌 백열전등이 훤 허게비치난 가난한 삶에 기십 죽어 불었다. 물멍울멍 초잤주마는 나이도 얼굴도 모른 이름 석자 가지곤 어멍을 촛질 못했다. 어떤 모심 고운 아저씨가 집이 데령강 좀짜리영 곤밥에 괴기 반찬을 촐려 줬주마는 호루죙일 굶멍 걸엉오난 오장이 내큰허고 속쓰림과 지침으로 만사가 죽어사 질껏 닮았다. 우리집이선 식게맹질날 아니민 못먹는 곤밥이주 마는 배고팡 먹구정 해도 목구멍 아래서 거부할 때의 그 심정을 무신말로 어떵 고라시민 좋으코......., 뒷날 그 은인은 차를 태워주멍 “잘 알아방 또시오라 이-.” 했주만은 땡전 혼푼 어신 어린주제에 새어멍광 아방 안티 들키는 날엔 종애가 성허질 못헐 것 닮앙 포기 헐 수 밖에 어서꼬, 어멍 못 만난 설움에 눈물만이......, 조로 있을 때 마다 책을 봐둔 덕에 중혹 입시에 합격허연, 조드람시난 큰성님이 교복이영 입학금을 맨드라줭 그 덕에 야간 중혹생이 됐다. 그때 집이 이서보았자 별볼일 어실 것 닮안 책가방 하나 덜렁 챙경 무단가출허연, 낮에는 신문배달을 시작으로 껌팔이, 구두닦이 여름철에는 아이스 케키 등 돈 됨쨍 허는 건 도둑질 말고 몬딱 해봤주. 구두닦인 모심냥 못허영 노타리 고참들 안티 찐냥 맞으멍 그 당시는 거이 전라도 성님들이 시내를 주룸 잡을 때라 걸렸다 허민, “야 이리 오랑께 어매 싹아지 없이 설치구먼 이-”. “ 어찌 요 구역 설쳐부냐 응”, “머리 요래 대불어라. 쾅!, 조인트 쾅! ”, 빡통(구두딲는 통) 쾅! 모두 박살내멍 “한번만 더 걸리면 사망 진단서 첨부해서 보내 불랑께.” 경 맞이멍도 벌멍 혹교 뎅기쟁 허난 홀수가 없엉 허는 차에, 군대 영장받은 고참안티 3천원이라는 거금을 줭, 동문노타리 중소기업은행 옆에 일터를 사고는 자리를 잡앙 자립 헐 수가 있었다. 책가방은 동문시장 할망 우동집에 세끼니 우동 폴아주는 조건으로 맡기고 거리를 돌멍 혼푼 두푼 벌당 해 조물어 가민 구두통 맡꼉 책가방 찾앙 학교로 간다. 책가방 한 구석엔 껌을 몇 통 담앙 강 쉬는 시간엔 학생이영 선생님께 폴아 학비에 보탰다. 비오는 어느 날밤 다방에 들어가 “아저씨 검 호나 폴아 줍써.” 허멍 내미는 순간 나의 팔 목을 잡는 분은 큰형님이였다. 그 순간 형에게 잽혀 다방 앞 골목에 끌려가 우산대로 죽사발 나게 맞고, 나의 호루자산이였던 껌상자까지 해병탑으로 뿌령 데겨불고 형집으로 끌려가 또 맞을 때 성님안티 고랐다. “ 내인생은 내가 살아 갈 것이고. 내가 성공하면 집에 오주, 성공 못허민 집에 안 들어 오쿠다. ” 허멍 그 담날 도망 나와야만 했다. 성님도 애기덜쾅 노미집 셋방얻엉 사는디 중혹입학금만 내준 것도 나에겐 감지덕지 큰 신세라고 여겨졌다. 성님이 껌 데겨분 곳에 달려와 보난 300여원 되는 껌은 모두 간곳이 없었다. 어렵게 벌언 모은 껌인디. 얼매나 칭원헌지 또 눈물이 호꼴락헌 이가심을 적시었다. 1969년 그 당시 해태 껌, 쿨민트 껌 7원 50전에 사당 10원에, 스피아민트 껌 12원 50전에 사당 20원 받앙 폴았고 구두는 혼켤레 15원씩 받앙 닦았주. 우동은 10원, 곱빼기는 20원에 사먹던 시절, 요새처럼 멋내는 사람도 별로 어성 껌도 잘 안 사곡, 구두 닦잰도 안 허연. 호루 10켤레만 닦는 날은 곱빼기 우동 먹는 날. 그날은 지꺼진 날이주. 좀짜리는 현 동문다리밑 다다미 짜는 공장에서 벼집 속에 아니면 선일건재, 평화목재 쌓아논 목재틈이나, 비오는 날은 극장에 고망치기 허영 의자에서, 또는 동문시장 속에 숨엉 자당 주인안티 걸령 파출소행. 제우사 발루왕 나오민 여느때 보다 서러운 눈물이 쏟아정 칭원헌 모음에 입술을 깨물멍 악착같이 살자고 스스로 모음을 달래멍 했쭈. 저슬이 되영 거리에 노숙도 칼노룻이 피부를 베어가난 남수각 고망닮은 무허가 하숙집에 들어 간디 그디 가난 나추룩 몬딱 불행한 집이서 태어난 도망 나온 무단가출 비행소년들 15명. 한방에 칼잠, 새우잠 자멍 밥 두끼 메겨주고 60원. 비록 짐치에 꽁보리밥이주만은 서넝헌 추운디서 자는 것에 비허민 한량이어쭈. 그딘 혼마디로 제주의 큰 소굴이였주. 그 주인 어멍은 그 소년들이 갖다준 돈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는 세 아들을 둔 왈순어멍이었다. 경헌 소굴에서 나의 탈선을 막아준 건 하느님 즉, 천주교 교리였다. 어멍광 이별 후 성님허고 성당에 다니멍 수녀님 안티서 교리를 받게 헌 것이 나의 인생에 큰 보탬이 됐다. 그 어린 시절 수녀님이 십계명 등 외우랭 허지 않아 시민 난 그 애들처럼 철창학교 신세를 면허지 못했을꺼여. 겨울철을 그곳에서 지냉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후 여관청소 해주는 댓가로 호꼼헌 내실에서 살멍 중혹을 제우 졸업허영 보난 돈도 없고 혹교 가는 것도 지쳤다. 돈 호꼼 모으민 기술이라도 배우젠 허는차에 군보안부대 쇼리로 들어갔다. 혹교 안 가멍 일년 버난 7만원을 모다졌다. 만나는 지인마다 고교 진학을 권유허는디 그 고리에 중혹동창 여학생이 원서 갖다 주멍 권유 헌 덕에 상고 야간에 합격 됐주. 고1년 때(1971년) 전국모범청소년제주도대표로 뽑아정 박경원 내무부장관 표창, 백두진 총리 방문 등 요인들을 만나게 되난 메스컴을 타게 되고 그 영향으로 生母와 16년만에 상봉허게 됐다. 단골로 구두닦으래 오던 어떤 분이 한림시장통에 장시허는 할망초장가민 느 어멍 이신디 골라 준덴허연 토요일 오후 한림가신디 그 할망은 “느가 영 커시냐” 허멍 “고만시라보저” 허멍 수동전화를 삥삥돌리단 버천 “전화 안 받는 것 보난 밭띠 간 생이여 조물아 가건 오라” 허였다. 조물젠 허민 3~4시간이 남은 듯 허연 14살에 밥메견 재와주곡 차태워준 그릇집을 초아강 고맙뎅 말이라도 고르젠 아명 초자 봐도 그집은 신작로로 변허여불언 그 소시분들 안티 물어 봐도 모르켄만 허연 촞지도 못허고, 한림성당 성모상 앞에 앉앙 어멍 만나게 해도랜 기도 허단 조물아 가난 또시 그 시장통으로 가는디 어떤 아지망이 “ 태복아 느 어떵허연 여기 완디? ” 허는 소리에 “예 어멍 초잔왔수다. ” 허난 “기여 잘 초장 왔져. 집이 글라” 허멍 내 손을 폭 잡는 순간 그리던 엄마임을 느낄 수가 있었다. 경 어멍 초장 헤매고 기립던 16년 어린세월, 얼굴도 모르고 자란 탓인지 믿기지가 않고 말문이 막현 그저 눈물만 잘잘 흘리는디 어멍은 “느가 길에서 구두 닦고 버스 칸에서 껌포는 것 봤쪄만은 부르구정 허여도 아들이앵 못 불렁 몸을 돌려사만 했던 이 어멍 모음을 이해허라. 느 세살 때 빼앗긴 나가 이제 왕 무심거앵 변명헐꺼고, 탈선어시 굿짝 살아가는 느 모습 멀리서 지켜봐사만 허는 이 어멍 모음도 괴로웠져.......,” 母子의 눈은 토끼눈처럼 빨같게 충혈됐꼬, 그 말을 듣는 요 심정도 찹찹했주만 길에 누웡 밤별에게 물어보멍 기리던 어멍의 모습을 봤댕 헌 것에 속으론 지꺼졌주만은 그것도 잠시, 서로의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두어 시간의 상봉이었지만 아쉬움과 섭섭함을 촘으멍 母子의 갈 길은 분명히 따로 있었다. 나로 허영 행복한 어멍의 가정에 파문이라도 일카 푸덴 조들라졌다. 조로이실 때 만나기로 약속허고 어멍사는 집만 봥 헤어졌다. 경헤도 生母가 잘 산뎅 헌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어멍 인생이 따로 있고 내 인생이 따로 있댕 헌걸 19살에 느꼈다. 나 안티 새어멍이 낳은 배다른 아시 셋 공부시키는 것이 나 임무다. 누게가 아명고라도 나를 낳아준 아방이 선택한 새어멍이며, 그 아시들이다. 밑에 누이를 중학교 졸업시키고 놈이집 파출부로 보냉 상고 야간에 입학시키고, 그 밑에 남동생 나영 고찌 구두닦게 허멍 제중 야간에 입학시켰다. 경허다보난 제주신문(73.06.30)에 ‘내일에 산다’란 주인공으로 대문짝만헌 기사가 나가기도 했다. 초등교 동창보다 상고를 2년 늦게 졸업 허자마자 군 영장을 받앙 30사수색대에서 33개월 15일 만기제대 후 제주공항 한국무역개발원(제주세관지정장치장)에 취직허고, 서른살에 중매로 결혼허연 두 아들의 아방이 됐고, 호썰 숨 돌련 35살에 제주산업정보대 경영과 졸업허고. 41살에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경영학사졸업허고. 46살에 제주대경영대학원 경영석사 졸업을 했쭈만 향학열에 불타는 만학의 길, 주경야독을 늘 반복 허단 보난 그 덕에 쉰넘엉 95년3월 ‘월간 한맥문학’에 수필등단, 그해 9월에 ‘월간 문예사조’에 시를 당선허연 문학의 꿈도 이루어 졌저. 남들은 다 명퇴헌뎅허는 쉰살에 우연허게 하루 차이로 사무실을 바꾸게 된다. 1차서류전형 2차 면접, 3차로 5명이 임원과 JDC초대 이사장(정종환, 현 국토부장관)님의 날카로운 면접시험은 청문회 닮은 석사논문 발표 때 보다 더 힘든 긴장된 느낌이였주만은 당당히 합격허였고, 전천후 오토바이 탕 뎅기멍 공항에서만 보세화물 32년간 몬지그멍 살단 보난 2007년 관세청장표창도 받은 사롬도 되어져라. 형편이 어려운 삶 탓으로 어린 나를 요세말로 학대허던 울아방도 차남인 내가 군 제대를 헌 후 세상을 뜨는 날 까지 모시단 보난 내 두 아들도 孝가 뭔가를 배운 것 닮고, 19년전 고맙뎅허멍 병고와 싸우다 눈물을 흘리멍 세상 뜬 불쌍헌 울 아방, 펜안헌 안식을 빌엄쑤덴. 날 낳은 어멍광, 15살까지 키운 새어멍도 세월에 밀려 몬 노쇄허여 가고 소랑허는 두 어멍 늘 호썰씩 빼끼 생각은 못 허염주만, 새어멍은 노실허멍 날 못 알아 볼 때민 가심이 메어지게 아려온다. 어릴 때부터 날 아는 어떤 분은 “부모 원망 안 해 지느냐?” 허멍 묻는다. 경 허주만 난 어멍 아방안티 고맙땡 고르고 싶다. 호의호식 허는 집이서 태어 나시민 그 역경과 고난의 찐한 인생의 맛, 즉 ‘눈물 떨어지멍 반죽헌 조백이 맛’, ‘눈물 털어지멍 짓은 꽁보리밥’ 맛을 어떵 맛 봐신코. 경허나 아직도 모음 고생은 계속......, 세 어멍에 배다른 6남매. 4.3때에 세상 떠난 큰어멍에 성님과 누님, 울집 족보에도 어신 울어멍의 나 호나, 새어멍에 누이와 두 남동생, 또 나 어멍 재혼허연 난 배고튼 4남의 동생들, 얽히고설킨 성제덜이 보이지 않는 갈등, 이젠 데멩이가 커갈수록 성제 간에 갈등은 설룹고 멍든 이가심을 애조지게 헐 때가 하영 싰주만 모지직허게 살아산뎅 스스로 달램주. 나 돈벌멍 보태 줄 땐 오라방이 최고, 성님이 최고앵 했주마는 어느뚱안 몬 컨덜 이녘만씩 살아 점고랭, ‘경 살민 안 된뎅’ 골구정 소리도 못허곡. 속아름허멍 영 사는 것도 나 복녁인가 생각허멘. 그런 아시덜 이신 것 만으로도 고맙땡 생각햄쭈. 내 주위 환경이 날 섭섭허영 몇 번이나 죽어불구정 헐때도 있었주만 하늘이 준 질긴 목심, 그 고통과 아픔을 촘으멍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험이라 생각허고 스스로 마음을 달래멍 헌다. 영 삶을 살게 허는 것도 주위 분들광 하느님이 도움에 항상 감사허게 생각허멍 살암주. 요새 탈선허는 청소년들도 기성새대들이 탈선 허는 시늉들을 배우기 때문이앵 고르구정도 허다. 아명 시방삶이 괴롭고 죽구정 헐 지라도 ‘자신을 살인’ 허는 ‘자살행위’는 죽엉가민 펜안 헐꺼 닮아도 저승에도 그 삶의 고통을 질머정 가는 거여. 다시랑 이 세상에 자살허는 어리숙헌 이가 없기를 간곡히 바라고. 건전한 사회, 복된 사회는 나 자신의 건전한 생각과 행동 속에서 이루어져야 된다는 것을 생각허멍 약동하는 푸른 이 계절, 미래 자기 자신의 개발을 위해 충전하는데 독자들의 보탬이 된 글 이였으면 허멍 펜을 감춰본다. 끝.
※ 제주시에서 50여년 살며 사용한 사투리인 만큼 다른 동네와 다소 다를 수도 있음. |
첫댓글 퍼옴글입니다. 글을 읽는 내내 가슴 아리고 안타까왔습니다. 삶을 아름답고 성실하게 살아오신 작가분게를 보냅니다. ㅉㅉㅉ 정서적으로 충분히 공감이 갔고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요거 읽는동안 눈물이 앞을가려 몇번이나 닦아내멍 읶었는디 고거 읶다보난 나 어릴때 허고 비슷허연 그 생각을허난 더 눈물이 나불엄쩌...요거 쓴사름이 누겐지 몰르지만 대단한 사름이라는걸 느껴진다...제주시에서 한림꼬지 거리가 얼마인디 거기꼬지 14살에 걸엉가불어싱고....어멍이 무스거싸신디 원~~~그노무 웬수같은 검질 ~~~요세꺼덜은 모를겨~~~스크랩허잰허난 그것도 못허게 허여불었네...
우리들 유년에 곤궁하지 않은 삶이 얼마나 됬겠는가. 어려운 시기를 살아냈으면서도 건강한 정신력과 사고를 지니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온 작가의 성실한 삶에 그저 저절로 고개가 숙여 진다네 풀어 놓을게 복사 떠가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