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어장사 문순득은 1801년 12월 홍어를 사러
흑산도로 출항했다 돌아오는 길에 태풍을 만나
유구국(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광저우, 난징,
베이징 등을 거쳐 3년 2개월 만에 고향에 돌아온다.
문순득의 기구한 운명은 손암 정약전이 쓴
표해시말(漂海始末)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정약전........................
본관은 나주. 자는 천전, 호는 손암·연경재.
정약용 형이며 아버지는 진주목사 재원이다.
.
어려서부터 김원성(金源星)·이승훈(李承薰)·
이윤하(李潤夏) 등과 사귀면서 이익(李瀷)의
학문에 심취했으며, 권철신(權哲身)의 문하생.
.
1783년(정조 7) 사마시에 합격하고,
1790년 증광문과 급제 전적·병조좌랑 역임.
당시 서양의 학문과 천주교 등의 사상을 접한
이벽(李檗) 등 남인 인사들과 교유하고 이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흑산도 유배
그곳에서 복성재를 짓고, 섬의 청소년들을
가르치며 저술활동을 하다가 16년 만에 운명.
그는 서학에 깊은 관심을 가져 당시 중국에 와있던
예수회 신부 번역서 유클리드 기하원본(幾何原本)을
읽고 탐구했으며, 이벽 권유로 〈천주실의 天主實義〉·
〈칠극 七克〉 등 천주교 관계 서적을 탐독했다.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을 때 지은
자산어보(玆山魚譜)는 흑산도 근해의
수산생물을 실제로 조사·채집·분류하여
각 종류별 명칭·분포·형태·습성과 그 이용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기록한 우리나라 최초의
수산학 관계 서적으로서 실제조사에 의한 저술.
.
그밖의 저술로
〈논어난 論語難〉·〈동역 東易〉
〈송정사의 松政私議〉·〈영남인물고〉
등이 있으나 전하지 않는다.
......................................
우이도(소흑산도)에 유배되어 머물던
정약전(丁若銓)이 1805년(순조 5)에서
1816년 사이에 대필(代筆)한.,표류 기록.
이본으로 1818년에 그 섬으로
유배된 유암(柳菴)이 문순득 글을
참조하여 쓴 '표해시말(漂海始末)'이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전한다.
우이도 홍어장사 문순득은
홍어장사로 번 돈의 일부를
나라에 바쳐, 공명첩을 받아
양민에서 양반 신분이 되었다.
.........공명첩(空名帖)............
관직·관작의 임명장인 공명고신첩,
양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공명면역첩,
천인에게 양인이 되는 것을 인정하는 공명면천첩,
향리에게 역을 면제해주는 공명면향첩 등이 있다.
이 제도는 임진왜란 중에 전공을 세우거나
납속한 자에게 발급하면서 시작되었고 전쟁 후
전후복구와 흉년의 백성을 구제하기 위해 계속 실시.
현종 대에는 공명첩의 가격이 싸졌을 뿐 아니라
평민층·천민층에게 주어지던 벼슬 제한도 대폭 완화.
공명첩은 조선후기 신분제의 동요에 크게 기여하였다.
공명첩을 사는 농민들은 정부로부터
공명첩에 명시된 직위를 취득한 것이 되며,
이를 점차 합법적 신분상승 수단으로 활용했다.
................................................................
그가 공명첩을 받기 이전까지는
양민일뿐 성씨가 없었을듯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만 성씨가 있었다.
공명첩을 받아 가선대부가 된 그.
가선대부(嘉善大夫)는 관직은 없고
품계 만 있는., 일종의 '명예직 벼슬'.
조선시대 문순득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동남아를 표류하며 해외여행도 체험하였고
제주도 여송국(필리핀) 표류인들 통역도 하고
홍어장사로 돈도 많이 벌어 돈으로 양반을 산 것.
당시 조정에서
문순득에게 내린
가선대부(嘉善大夫)
조선시대 종2품의
하계(下階) 문관 품계.
벽장에서 '표해시말'을
꺼내는 문순득의
후손 문채옥 옹
종2품 공명첩은 직계 후손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다.
문순득의 묘는 전라남도 해남군 화산면 봉리리에 위치.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시제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흑산도 유배인
'정약전' 著
‘표해시말’
조선조 '유배의 섬' 흑산도
우이도 '홍어장사' 문순덕은
1801년 12월에 홍어 사러 출항.
신안군 일대에서 홍어를 사들여
목포, 나주, 영산강 일대에 내다 팔며
우이도에 살았던 홍어장사 가문의 문순득.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기 위해
태사도(太砂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
..............태사도(太砂島)....................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가거도리.,가거도.
소흑산도(가거도)는 목포 남서쪽으로 145㎞.
가거도 북동쪽 약 70㎞ 지점에 대흑산도가 있다.
,
그 사이에., 상태도·중태도·하태도.
조선시대 "태사도(太砂島)"라고 불렀다.
가거도는 1800년경 나주임씨가 최초 거주.
'사람이 가히 살 만한 곳.'이라 하여.,가거도.
목포에서 출발하는 정기여객선이
대흑산도를 경유하여 가거도를 운항.
이때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를 경유한다.
태도군도(苔島群島)는 흑산도 남쪽 20km 떨어진 군도.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3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도군도에서 사람이 가장 많이 사는 섬은 하태도이다.
중태도는 흑산도 본섬과 가거도의 중간지점.
섬 일대에 돌김이 풍부해, "태도"라고 부르며,
상태도는 목포시에서 남서쪽으로., 120㎞ 지점,
대흑산도에서 남쪽으로.,약 29.5㎞ 지점에 있다.
.................................................................
예나 지금이나
파도와 풍랑이 심한 편인
'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앞바다.
신안.,상태도 다롱개
신안.,상태도 넙덕여.
신안.,중태도
신안.,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신안.,상태도 중태도 하태도
신안.,가거도(소흑산도)
문순득 일행은
태사도에서 우이도로
귀항하다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 상륙에도 실패한다.
문순득 일행은 풍랑에 휩쓸려
남방 유구국(오키나와)을 거쳐서
여송국(필립핀)에서도 또 다시 표류.
그곳에 기착했다가
마카오, 베이징을 거쳐서
3년 2개월만에 귀국한 문순득.
구사일생.
행운이고
천운이었다.
이 무렵에 신안군 우이도(소흑산도)에는
천주학과 관련 실학자 정약전이 유배되어
문순득 씨 집안에 유배 거처를 두고 있었다.
그당시 '정약전'의 동생인
정약용은 전남 강진에 유배.
문순득이 장장 3년 넘게 표류.
그 표류 이야기는 정약전에 의해
‘표해시말’(漂海始末)로 기록되었다.
또 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이던
마카오에도 청나라 관리가 조사한
문순득에 관한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문순득은 류구국에 기착하여
필담(筆談)과 몸짓 등으로 대화.
필립핀에서는 현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과 소통, 청 표류인과도 대화.
문순득이 귀국후에는 제주도에 표류해온
여송국 난민들의 통역을 맡아 무려 9년만에
필립핀인 임을 밝혀 중국 거쳐 본국으로 송환.
문순득은 1801년 12월, 작은 아버지 등
일행 6명과 함께 홍어를 사러 태사도로
떠났다가 강풍에 밀려 11일간 망망대해를
떠다니며 기진맥진 육지에 기항하고 보니
유구국 대도(大島)였는데 조선인 표류객에게
유구인들은 친절했다.
그당시 유구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표류민들은 모두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하는 것이 관례.
당시 세상천지는
중국, 조선, 일본만
존재한 것으로 인식.
문순득 일행은 대도를 거쳐
유구국 수도인 나하로 이동
백촌에서 6개월간 머물었다.
이때 현지인들은 번갈아 가며
일행을 초대해, 환대해 주었다.
문순득은 열심히
현지 토속어를 익히고
풍습을 배워 친화력을 보였다.
유구인들은 남녀 구분없이
한자리에서 차 마시며
담배를 권했다.
담뱃대, 담배통은
늘 몸에 지니고
가래침 뱉는
타구도 휴대.
남자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어깨에 문신을 새겼다.
바지를 따로 입지 않고
긴 저고리가 발까지 내려간 차림에
신은 짚신이고 갓 대신에 모자를 썼다.
남자는 말타고
여자는 대나무
가마를 탔다.
집은 네모 반듯했고
벽과 바닥을 판자로
엮어 온돌은 없었다.
장례식은
염이나 상여는
조선과 비슷했지만
여성이 앞장서는 풍습이
달랐고 무덤은 족장(族葬)이다.
토산품 마사
식물 껍질을 벗겨
실을 만들고 베를 짰다.
닥나무 종이는
귀한 제품이었다.
벼는 5월에 수확하고
고구마가 풍부하고
뱀술을 즐겼다.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 생활 8개월만에
송환선을 탈수 있었다.
당시 조선인 표류민 송환선은
조공선으로 길이 31m, 폭 8m,
중량 110톤으로 복원되어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1802년 10월 7일,
문순득 일행 6명을
포함한 표류민 32명과
유구인 60명이 중국을
향해 출항했다.
‘류구국 중산왕 조공선’이란
큰 깃발을 세우고 호위선도
대동하여 중국 복건성으로 향발.
그러나 풍랑이 심해
무려 14일이나 바다에서
헤메다가 상륙하고 보니
여송국(呂宋國)의 서남마
지방이었다.
여송국은 표류민에게
친절할 편이 아니었다.
문순득 일행은 도자기를 구워
서양으로 수출하는 청나라 사람들
마을에 의탁생활했다. 언어감각이 뛰어난
문순득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들과 소통했다.
여송국 사람들은
붓이 아닌 펜으로
글을 썼다.
인종이 다양하고
혼혈도 많아 보였다.
문순득이 필리핀에서
최초로 상륙한 샤루마귀 항구
사람들은
연 날리기를 즐기고
면포와 땔나무를 팔아
술을 사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물레, 북, 베틀은 조선과 거의 유사했다.
집은 땅바닥에 기둥을 세워 2층으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나무집이다.
식수가 귀하여 빗물을 받아 마셨다.
남자들이 밥을 짓는 것이 신기했다.
가족이 밥그릇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아 손으로 먹는 것이 특이했다.
문순득은 이곳에서
서양식 성당을 처음 구경하고
닭싸움 전통도 보고 물소도 많이 봤다.
유구인들이 여송국 당국자와
협상하여 배를 띄워 먼저 떠났다.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 등 4명도
유구인 배편으로 따라 갔다.
나중에 알고보니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는
1804년 3월 먼저 귀국해 있었다.
이제 여송국에는 조선인 2명과
복건성 사람 25명이 남았다
문순득이 여송국 측
왕(높은사람)을 만나
순풍이 오면 송환하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나
배 주인이 여송국 사람인
광둥성 무역선이 도착했다.
그러나 석달이 지나서야
출항이 결정됐다.
문순득이 배삯으로
은전 12냥을 내고
승선하여 배 안에서
밥을 지어 먹으면서
11일만인 1803년 9월 9일
마카오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형형색색
깃발이 나부끼고
노랑머리 서양인들이
나다니는 모습이 특이했다.
석달가량 마카오에 체류하면서
관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아 청나라 관리가
조선인 표류객임을 말해주었다.
이 결과 “고려난민 문순득 등이 표류하여
청 왕조 관원에게 송환을 아뢴다”는 결정으로
광둥성을 거쳐 베이징으로 떠났다.
그해 11월 4일,
조선 조공사를 만나
12월에 귀가하여 계산하니
홍어 사러 나갔다가 3년 2개월
만에 돌아온 표류였다.
집에 돌아온 문순득은
가까운 집안에 거처를 정한
정약전 선생이 묻는 말에 답변하여
‘표해시말’이 기록될수 있었다.
이무렵 전라감사 이면응이
부임길에 친구 정약용을 만나
그의 형님 정약전에게서 들은
문순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감사는 마침 제주도에
여송국 표류객이 6년째
머물고 있다면서 문순득이
통역해 주면 본국으로 송환
할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문순득이 제주도로 가보니
여송국 표류객이 목장에 거주
하고 있지만 ‘막가외’(莫可外)라는
말뿐 어느나라 사람인지 전혀 소통이
되지 않은채 울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제주목사가
그들을 청나라로 보냈지만
다시 제주도로 되돌아와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연이었다.
당초 표류
여송국인은
5명이었으나
청나라 갔다가 한명 죽고
제주도로 되돌아와 한명이 죽고
3명만 살아 있었다.
문순득이 여송국 말로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니
표류한지 9년만에 처음으로
말문이 열린 감격에 엉엉 울어댔다.
제주목사가 조정에 고하고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했으니
문순득이 ‘조선을 깨웠다’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 문순득에게 내린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공명첩은
직계 후손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다.
문순득의 묘는
해남군 화산면 봉리리에
위치하며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시제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우이도에 살고있던.,홍어장사 문순득.
그가 흑산도 일대를 누비던 옛 뱃길을 따라가 본다.
그가 흑산도 홍어를 영산강까지 실어나르던.,옛 뱃길.
'조선시대 흑산도는 어떠한 곳이었을까?'
'그당시 영산강 뱃길은 어디로 다닌걸까?'
'그무렵 흑산도 주민들 삶은 어떤 모습일까?'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2008.07.08 흑산도 예리항.
2014.03.29
2014.03.29
2005.10.17 흑산도 예리항.,아침.
2004.04.20 흑산도 예리항.
2004.04.20 예리항 '조기 & 고래' 파시.
조선시대 3대 유배의 섬.
'제주도. 거제도. 흑산(군)도.'
특히, 중죄인 유배지였던 흑산도.
2013.10.07 흑산도 예리항., 일출을 기다리며
2013.10.07 흑산도 예리항.,일출
2011.04.11 흑산도 예리항
2011.04.11 흑산도 예리항
2011.04.11 흑산도
2008.12.08
........................흑산도(黑山島).........................
우리나라 행정구역 상, 최서남단 해역에 위치한 섬으로
목포 서남방 해상 92.7㎞(동경 125도 26′, 북위 34도 41′)
'바닷물이 푸르다 못해 검다.'해서 흑산도라 불리우는 섬.
본섬 면적 19.7㎢,
해안선길이 41.8㎞
산지가 대부분을 차지.
논농사는 전무한 실정이다.
'목포 ~예리항' 쾌속선 2시간.
.
흑선도는 수산업과 관광산업에 크게 의존하며, 예리항은
동지나해와 서남단 인근어장 전진기지로 중국어선들이 많이
입출항 하고 있으며, 대규모 관광개발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최서남단 소흑산도(가거도)는
어업전진기지로 개발되고 있다.
대흑산도를 중심으로 한 인근의
영산도, 다물도, 대둔도, 홍도 등은
천혜의 관광보고로 문화유적이 많으며,
신안군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또한, 해안을 따라 연장 24km 일주도로가 닦여져 있어
흑산도 아름다운 자연과 문화유적을 거의 다 볼 수 있다.
섬 여행의 제 맛인 해상관광을 하려면 예리항을 출발해
열목동굴 ~ 홍어마을 ~ 범마을 ~ 칠성동굴 ~ 돌고래바위 ~
스님바위 ~ 촛대바위 ~ 남근석~거북이바위(2시간 30분 소요).
흑산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많은 인물들이 유배생활을 하던 섬.
다산 정약용의 둘째 형이자 조선후기 문신인
정약전 선생이 유배생활 15년 동안 근해에 있는
물고기와 해산물 등 155종을 채집하여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한.,'자산어보'를 남겼다.
학자이며 의병장이기도 했던 면암 최익현 선생.
"기봉강산 홍무일월"이란 친필은 흑산면 촌리에
있는 손바닥 바위에 새겨져 있으며 지장암 앞에는
후일 그의 문하생들이 면암 최익현 유헌비를 세워
선생의 애국정신과 후학양성 뜻을 후손에게 전한다.
그리고, 한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바 있던
초령목(招靈木)은 가지를 꺾어 불전에 놓으면
귀신을 부른다는 나무인데 주위에는 상록수림과
성황당이 있으며, 진리 지석묘 군락지, 삼층석탑
및 석등과 사촌서당 같은 수많은 문화유적이 있다.
흑산도 인근 도서로는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170호로
지정된 홍도, 영산팔경과 석주대 문바위의
절경을 품은 영산도, 촛대바위와 시범마을 다물도,
연중 바다낚시의 명소로 이름난 상·중·하태도, 그리고
바다낚시와 중국 땅의 닭울음소리가 들린다는
서해의 최서남단섬인 가거도가 있다.
...................................................
흑산군도(黑山群島).
섬구성 : 본섬1 , 부속섬 10.
총면적 : 49.25 ㎡(부속섬 포함)
................흑산도 상라산성.....................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新安 黑山島 上羅山城)은
전남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에.,통일신라의 산성.
2008년 4월 11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239호로 지정.
신안 흑산도 상라산성 일원에는 상라산성을 비롯한
제사유적, 관사터, 무심사지 등 4개 복합유적이 있다.
상라산성은 '고대~고려'시대 국제해양도시 기능 수행.
흑산도 읍동마을 수호를 위해
축조한., 관방시설로 추정된다.
읍동마을 뒤편의 계곡 초입부에는 고려시대
중국 사신들이 머물던 관사터가 위치하고 있다.
이 관사 맞은편 골짜기에는 무심사지(无心寺址).
바로 위쪽의 봉우리에 상라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상라산성 서쪽의 상라산 정상에는
봉수대와 제사유적이 위치하고 있다.
이들 유적들이 모두 상라산성을 중심으로
반경 500m 태 분포하고 있으며, 같은 시기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어 상호 관련성을 살필 수 있다.
상라산성은 신안군 흑산면 진리 2구
읍동마을의 바다와 만나는 상라산
북쪽 능선 상에 위치하고 있다.
전체길이 280m의 소형산성으로
남사면 만을 반월형으로 둘러싸고
있는데 순수 석축부만의 길이는 220m.
해안에 면한 북쪽 능선의 경우는
별도로 성벽을 쌓지 않고 100m에
가까운 깎아지른 해안 절벽을 그대로
성벽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험준한 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벽 중간지점에 있는 커다란
바위 위나 바위 사이에만 돌로 쌓는 등의 간단한
축성 만으로도 손쉽게 적을 방어할 수 있도록 자연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한 우리나라의 산성의 특징을 잘 반영.
성벽은 대체로 남사면 6부 능선을
반월형(半月形)으로 둘러싸고 있다.
일반적으로 산 정상 부근이나 중복부를
거의 동일한 레벨로 둘러싼 전형적 테뫼식과
달리 산복식(山腹式)에 가까운 테뫼식 산성이다.
성벽은 우리나라에서 돌로 산성을 쌓을 때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편축법(片築法).
상라산성 같이 높이 차이 심한 지형에 적합한 축성법.
성돌은 기저부에만 부분적으로 장대석 사용.
상·하단의 구별 없이 거의 같은 크기의 성돌로
수직으로 쌓아 올렸는데 성벽 통과선 경사도에
따라 쐐기돌로 고정하여 수평을 유지하고 있다.
면석(面石)은 성벽의 무너짐을 방지하기 위하여
대충 다듬은 면을 바깥으로 하여 가로 쌓기와
세로 쌓기로 서로 결구하고 있으며,
안쪽에는 잡석으로 뒷채움하였다.
상라산성의 부속시설로는
동문지와 건물지 1개소 있다.
관사터는 상라산 전망대에서 동쪽의 읍동마을을 향해
뻗은 능선 끝자락에 형성된 ‘해내지골’에 위치하고 있다.
읍동마을 뒤편 길이 100m, 너비 50m쯤
그리 깊지 않은 골짜기로 능선의 끝자락에는
동서로 긴 30m쯤 평탄 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건물지 방향은 남향으로 축대 일부가 남아 있다.
읍동마을 학술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고려의 절터와 건물터,
그리고 상라산성 주변에서는 통일신라
후기~고려시대의 유물이 주로 수습되었다.
관사터에서 통일신라 후기 유물
주름무늬병과 줄무늬병, 해무리굽
청자 등이 기와편과 함께 수습되었다.
무심사지(无心寺址)에서는
고려시대 삼층석탑과 석등 외에도
통일신라-고려 기와편이 많이 수습되었다.
제사유적에서는
철마와 주름무늬병,
주름병편 등이 수습.
이처럼 흑산도 상라산성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고려시대까지
한국과 중국간 활발한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당시 남방 항로 상에서
흑산도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유적이다.
......................................................
조선시대 흑산도에서 홍어를 사다가
목포에 내다 팔거나, 배를 타고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광주 나주에 팔았던 홍어장사.
흑산도와 뭍을 배 타고 오가던
홍어장사들이 살던 곳이.,우이도.
.......우이도(牛耳島).........
면적 10.7㎢, 해안선 길이 21㎞
전라남도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
동경 125°50′, 북위 34°36′에 위치하며,
목포에서 서남쪽으로 63㎞ 지점에 있다.
북동쪽에 도초도(都草島),
서쪽에 흑산도(黑山島),
동쪽에 하의도(荷衣島)가
우이도를 둘러싸고 있다.
2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우이군도 주도이다.
부속 도서로는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화도 등.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이며 섬 서쪽 양단에 2개의 반도가
돌출한 것이 마치 소의 귀 모양과 비슷하다 하여 우이도.
"소구섬" "우개도"라고도 불렸다.
북쪽 해안에는 사빈이 발달해 있고,
해안 곳곳의 돌출부에는 해식애 형성.
서쪽 해안은 절벽과 기암이 병풍처럼 늘어서 있어 장관.
돈목리에 있는 약 80m의 사구는 독특한 경관을 보여 준다.
섬의 중앙에 위치한 상산봉(上山峰, 361m)이 최고봉을 이룬다.
1월 평균기온은 2℃,
8월 평균기온은 26℃,
연강수량은 1,239㎜이다.
450여 년 전 파평윤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단다.
원래는 진도군 흑산면, 1896년 지도군 흑산면에 편입.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무안군 흑산면에 편입되었다.
1962년에 도초면에 편입되었다가,
1969년 신안군이 무안군에서 분군
신안군 도초면 우이도리가 되었다.
2009년 기준 인구는
162명(남 86명, 여 76명),
세대수는 89세대이다.
취락은 해안에 위치한 평지에 고립되어 발달하고 있다.
파평윤씨 후손은 대초리 마을에 남아 명맥을 이어온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으며 밭 0.81㎢, 임야 7.05㎢.
농지가 매우 부족하여 농업은 미미.
보리·콩·마늘·고추 등이 약간 생산된다.
부근 수역은 조기의 월동수역이며,
고등어·전갱이·갈치·장어 등이 회유하는
좋은 어장이며 목포에서 정기여객선 운항.
........................................................
흑산도 홍어가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
나주, 광주에 가는 동안에.,곰삭는.,홍어.
영산강은 홍어장사들에게 '삶의 터전' 뱃길.
영산강.,138.75km
......영산강(榮山江)...
전라남도 담양군· 장성군·
광주광역시· 나주시 함평군·
무안군· 영암군· 목포시 등을
지나 서해(西海)로 흘러든다.
길이 138.75㎞,
유역면적 3,371㎢.
담양군 월산면 용흥리 병풍산
북쪽 계곡에서 발원해 장성호를
이룬 후 영산강하구둑 배수갑문을
통과해 서해로 흘러든다.
영산강의 옛 이름은
금천·금강이라 했고
나루터는.,금강진.
고려 때 신안군 흑산면 영산도 사람들
왜구를 피해 이곳에 마을을 개척했다
하여 영산포라는 땅 이름이 생겼으며,
조선 초 영산포가 크게 번창하자
강 이름도 영산강으로 바뀌었다.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 유역은 중생대말 백악기에 속하는
화강암과 쥐라기 편상화강암으로 덮여 있다.
유역 하류부인 함평천·고막천의 일부지역에는
역암·사암이, 중상류 유역의 본류와 황룡강 중·
하류부 및 지석천 하류 부근에 경상계 불국사층에
속하는 화강암과 쥐라기 편상화강암이 분포되어 있고
황룡강 상류부에는 안산암·유문암 등이 주로 분포되어
있어 일반적으로 화성암류가 널리 분포한다.
영산강 유역의 충적평야는 화강암지역으로
저평한 구릉지를 이루고 토양배수가 불량한 편.
상당히 비옥하여 평야의 대부분이 논으로 이용된다.
주요평야는 나주시 일대의 나주평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일대 서석평야,
함평군 학교면 일대의 학교평야 등이며,
영산강 유역에전남평야의 핵심부를 이룬다.
유역 내에서는 쌀이 주로 나며,
나주 배·복숭아·포도, 나주·송정 근교의
채소, 학교의 양파·마늘 재배가 유명하다.
.
영산강 유역은 땅이 기름지고
바다와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
청동기시대의 지석묘군이 영암군과
나주시 일대에서, 백제시대의 고분군이
영암군 시종면. 나주시 반남면 일대에서 발견.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나주까지 조수가 밀려오는
감조하천(感潮河川)으로 바닷물 피해가
많았고, 홍수의 위험성도 매우 높았다.
그러나 1976년에 나주댐·담양댐·장성댐이 완공,
1981년 12월에 목포시 옥암동과 영암군 삼호면
나불리 사이에 영산강하구둑 완공으로 이 일대는
가뭄과 홍수, 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영산강하구둑의 완공으로
남해만·영암만·도포만 등의 바다는
영산강 유역으로 편입되었고, 지면이
높은 갯벌은 농경지화되었으며, 물은
바닷물에서 담수로 바뀌었다
(영산강지구농업종합개발사업).
그리고 바다로 흘러들었던 독립된
하천인 삼포강(三浦江 : 23.5㎞)·
영암천(靈巖川 : 14㎞)·도갑천(道岬川 : 18㎞)
등의 하천이 모두 영산강의 한 지류가 되었다.
예로부터 수운이 발달해 목포-영산강
(지금의 나주시 영산동) 간에 배가 왕래.
1977년 10월 마지막 배가 떠남으로써
수운기능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영산포는 농산물의 집산지로서
이 지역 경제의 중심지역으로 부상해
목포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급성장했다.
8·15해방 후에도 수운이 이루어져
20~30t급 어선이 20~40척 정박할 수
있었으나, 1970년대 상류의 댐 건설 이후
하상의 변동과 수량의 감소 및 영산강하구둑의
건설로 하류부 수위가 낮아져 얕은 여울이 되었다.
....................................................................
....................표해록(漂海錄).................
조선 순조 때 정약전(丁若銓)이 대필(代筆)한
어상(魚商) 문순득(文淳得)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
......................................................................
.
.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전하는
조선시대.,'표해시말(漂海始末)'
.
.
문순득은 조선후기 사람으로 우이도에 살며
흑산군도 일대 어부들이 잡은 홍어를 사다가
목포에 내다 팔던 홍어잡이 문씨 가문의 상인.
당시 우이도 유배인은 문씨들의 도움을 받으며,
흑산도에서 고된 유배생활을 견뎌 나가고 있었다.
1801년 12월 문순득은 홍어를 사러가기 위하여
작은 배에 짐을 싣고 흑산도 남쪽 태사도에 입도.
태사도는 오늘날 태도(상태도,중태도,하태도)이다.
.....................태도....................
상·하태도(전남 신안군 흑산면) 태도는
목포에서 여객선으로 3시간 거리 원도(遠島).
목포에서 짝수날 격일제로 배가 운행되는 외딴 섬.
1600년 경 흑산도에 살던 김해 김씨가 처음 입도.
1800년 경 박씨가 들어와 정착했던 목포 남서쪽 120㎞.
오늘날, 상태도는 목포에서 가거도 행 쾌속선 3시간 거리.
상태도는 중간 기착지인 흑산도에 잠깐 멈췄다가
다시 1시간쯤 가면 태도군도 중 가장 먼저 닿는다.
배에서 바라다 보이는 상태도는 가파른 절벽이 황량.
섬에는 여객선 접안시설이 없어 종선을 이용해야 한다.
마을은 남쪽해안 일대에 모여 있으며 주로 어업에 종사.
근해 일대는 제주난류 북상으로 어족이 풍부하고
전복, 톳, 돌김이나 우뭇가사리 자연산이 채취된다.
파도가 거세 양식하기 어렵다보니 대부분 자연산이다.
바다낚시로 유명한 태도
돔, 농어 등이 잘 잡히는 곳
바다낚시 매니아들이 찾는 어장.
상태도 하태도에 비하여
소수 인구가 살고 있는 중태도
아직도 여객선이 경유하지 않는다.
..................................................
우이도에서 배를 탄 사람은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 문호겸.
이백근, 박무청, 이중원, 어린동자 김옥문 등.,일행이 6 사람.
태도에서 홍어를 싣고 오다가 대흑산도에서 풍랑을 만나 표류.
문순득은 3년 2개월간 표류 생활 후
구사일생으로 우이도로 다시 돌아온다.
문순득(文淳得, 1777-1847).,표류 체험기.
이때 우이도 문순득 가문에 유배 거처를 둔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이 쓰게 된.,표해시말.
표해시말(漂海始末)은 정약전 作.,문순득 표류기.
.
그당시 포르투갈 식민지였던 마카오에도
청 관리가 쓴 문순득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그무렵, 조선에서 세상천지는 중국, 일본만 존재.
문순득은 류구국에 기착하여 필담(筆談)과 몸짓 등으로 대화하였고
필립핀에서는 현지어를 익혀 현지인은 물론 청나라 표류인과도 대화.
그는 귀국한 후에는 제주도에 표류해온 여송국 난민들의 통역을 맡아
무려 9년만에 필립핀인을 밝혀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할 수 있었다.
| | |
▲ 문순덕.,표류 여정. |
조정에서는 이같은 문순득의 공적을 헤아려
종 2품 가선대부 벼슬을 담은 ‘공명첩’을 하사.
오늘날까지 이를 후손이 대대로 보존하고 있다.
문순득은 1802년 1월 18일 대흑산도 인근에서
홍어를 사서 돌아오다가 큰 풍랑을 만나게 된다.
닻줄을 풀어 다시 우이도로 향했는데,
갑자기 서북에서 일어난 큰 바람을 만나
서남쪽으로 수백리 밀려나가면서부터 표류.
사방을 둘러보니 주위에 한점 섬도 볼 수 없는 망망대해.
저녁이 되고 밤이 깊어갔으나, 여전히 바람은 줄지 않았다.
키가 꺽이고 돛은 펼 수도 없어 바람이 가는데로 표류하였다.
날이 밝아 동남쪽에 큰 산이 보였는데, 그곳이 제주도.
풍랑 때문에 바라볼 수는 있었지만 가까이 갈 수 없었다.
눈앞에 섬을 두고도 접근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문순득 일행은 제주에 접근하지 못 할 바에는
아무 곳이라도 정박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돛을 올려 빠른 속도로 항해한다.
며칠 후, 날이 밝아오자 동남쪽에 있는 큰 섬이 보였다.
배를 멈추고 해안가에 닻을 내리니 6~7인이 배를 타고 접근.
그들은 문순덕 일행에게 물을 대접하고 먹을 수 있는 죽을 주었다.
오랫동안 먹지 못하여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섬사람에게 물으니 문순득이 도착한 곳은 유구국 대도.
지금은 일본 가고시마현에 속하여 있는 '류쿠 열도'의 섬.
문순득은 작은 아버지 등 일행 6명과 함께
태사도로 떠났다가 강풍에 밀려 11일간이나
표류 중 기진맥진 기항했던.,유구국 대도(大島).
조선인 표류객에게 유구인들은 친절했다.
그당시 유구국은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나라였다.
그리하여, 표류민은 청나라를 거쳐 송환하는 것이 관례.
문순득 일행은 대도를 거쳐 유구국 수도인 '나하'로 이동.
백촌에서 6개월간 머물때 현지인들은 그들을 초대 및 환대.
문순득은 현지 토속어를 익히고 풍습을 배워 친화력을 보였다.
문순득이 표류하여
최초로 상륙한 양광촌.
류큐 열도.,아마미오 섬.
닥나무 종이는 귀한 제품이고.
유구인들은 남녀노소의 구분없이
한자리에서 차 마시며 담배를 권했다.
담뱃대, 담배통은 늘 몸에 지니고
가래침을 뱉는 타구도 갖고 다녔다.
남자는 코밑 수염을 기르고 어깨에 문신.
바지를 따로 입지 않고
긴 저고리가 발까지 내려간
상의에 짚신을 신고 모자를 썼다.
남자는 말을 타고 여자는 대나무 가마를 탔다.
집은 네모반듯 하였고 판자로 엮은.,벽과 바닥.
장례식 염이나 상여는 조선과 비슷했지만
여성이 앞장을 서는 장례식 풍습이 달랐고
무덤은 족장(族葬)일 경우에만 무덤을 조성.
토산품 마사 식물 껍질을 벗겨 실을 만들고 베를 짰다.
벼는 5월에 수확하고 고구마가 풍부하고 뱀술을 즐겼다.
.
문순득은 이곳에서 6개월간 머물면서
여송국 측의 높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고
순풍이 오면 송환하겠다는 답변도 들었다.
그로부터 두달이 지나
배 주인이 여송국 사람인
광둥성 무역선이 도착하였다.
문순득 일행은 유구국 도착 후, 8개월만에
중국으로 가는 송환선을 탈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석달이 지나서야 출항이 결정되었다.
문순득이 배삯 은전 12냥을 내고 탄 후, 11일만에
배에서 밥을 지어 먹으며 1803년 9월 9일 마카오 도착
항구에는 형형색색 깃발이 나부끼고
노랑머리 서양인들의 모습이 특이했다.
석달 가량 마카오에 체류하며
관청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말이 통하지 않자 청나라 관리는
그가 조선인 표류객임을 말해주었다.
그 결과 “고려 난민 문순득 등이 표류하여
청 왕조 관원에게 송환을 아뢴다”는 결정으로
광둥성을 거쳐 베이징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유구국왕이 문순득 일행을 청나라 복건성에 보내
마침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주선하였던 것.
'유구국~ 청나라' 진공선 출발 때 문순득 일행도 동승.
| | |
▲ 문순득이 필리핀에서 최초로 상륙한 샤루마귀 항구 |
중국 복건성 향발 표류로 필립핀 기착
1802년 10월 7일, 문순득 일행 6명을 포함한
표류민 32명과 유구인 60명이 중국을 향해 출항.
‘류구국 중산왕 조공선’이란 큰 깃발을 세우고
호위선도 대동하여 중국 복건성으로 향발했다.
그 배는 규모가 매우 컸고,
청나라에서 유구로 표류해 온
중국 사람들도 함께 탑승하였다.
(그당시 조선인 표류민 송환선은 조공선으로 )
(길이 31m, 폭 8m, 중량 110톤으로 복원 및 보존.)
드디어 조선으로 돌아갈 희망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하늘은 문순득을 돕지 않았다.
또 다시 풍랑을 만나 14일간 서풍에 밀려다녔다.
망망대해에서 헤메다 상륙하고 보니
여송국(呂宋國)의 서남마 지방이었다.
여송국은 표류민에게 친절할 편이 아니었다.
문순득 일행은 도자기를 구워 서양으로 수출하는
청나라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에 의탁생활을 하였다.
여송국에서 문순득 일행은 '비간' 마을에 정착.
이곳은 스페인 사람들이 진출하여 만든 상업도시.
무역을 위해 필리핀에 이주한 청나라 상인들도 많았다.
비간 마을 중심에는 큰 성당이 하나 있었다.
성당 앞에는 종탑이 있었는데, 종이 울리면
사람들이 성당으로 모여 들어 예배를 드렸다.
문순득의 눈에 비간 마을의 성당은 너무나 새로운 풍경이었다.
성당사람들 도움으로 낯선 땅에서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다.
문순득은 끈을 꼬아 팔기도 하고, 나무를 해다가 시장에 내다 팔았다.
청나라로 가는 배값을 마련해야 했다.
문순득은 토속어를 익혀 현지인들과 소통.
여송국 사람들은 붓이 아닌 펜으로 글을 썼다.
인종이 다양하고 혼혈도 많아 보였다.
연 날리기를 즐기고 면포와 땔나무를 팔아서
술 담배 즐기고 물레, 북, 베틀 사용은 조선과 유사.
집은 땅바닥에 기둥을 세운 2층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나무집.
식수가 귀하여 빗물을 받아 마셨다.
남자들이 밥을 짓는 것이 신기했다.
가족이 밥그릇을 가운데에 두고 둘러앉아
손으로 먹는 식생활 여송국(필리핀)풍습이 특이.
문순덕은 이곳에서 서양식 성당을 처음 구경
닭싸움 풍습도 관람하고 물소들도 많이 보았다.
유구인이 여송국 당국자와 협상하여 배를 띄워 먼저 떠났다.
문순득의 작은 아버지 등 4명도 유구인 배편으로 뒤따라 갔다.
문순득은 유럽형 범선을 타고 항해하는 경험을 처음 하게 되었다.
이때 문순덕은 배 모양과 구조를 유심히 관찰.
훗날, 정약용의 제자 이강회가 우이도에 왔을 때
문순덕 구술을 바탕으로 '운곡선설'이라는 배를 제작.
마카오에서 경험한 여러 나라의 선박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광동 오문(마카오)
그당시 포르투갈 사람들이 개항장으로 개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선박들이 모여들었던 국제항.
이곳에는 필리핀 사람들과
서양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는데,
땅은 좁은데 반해 사람은 많아 집 위에다
집을 올려 지어 살고 있는 모습이 매우 특이.
그당시
여송국에는
조선인 2명과
복건성 사람 25명뿐.
문순덕 일행은 조선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선 중국의 수도인 북경으로 가야 했다.
중국 내에서도 주로 배를 타고 이동했고,
때로는 걷고, 관에서 호송하는 가마를 이용.
남웅부, 남안부, 강서부를 거쳐 남경에 도착.
또다시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이동하며.
도중에 여러 유적과 성곽들을 구경한 후
산동계를 거쳐 드디어 북경 황성에 도착.
문순덕 일행은 고려관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가가 나자,
수레를 타고 책문 지나, 의주 거쳐 한양에 도착.
고향에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문순덕은 무안 다경포 나루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고향 우이도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려야 했다.
참으로 긴 여정 끝에
문순덕은 기적같이 살아서
고향 우이도에 도착하게 되었다.
문순덕은 1801년 우이도를 떠나서
1805년 1월 8일에 고향에 돌아왔다.
햇수로는 5년이나 되는 긴 시간을 표류.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를 거쳐
중국 대륙을 통하는 색다른 체험.
체류기간은 오키나와에서 8개월,
필리핀에서 8개월, 마카오에서 3개월,
중국에서 10개월을 체류하였던 표류 생활.
문순덕이 살아서
고향인 우이도에 돌아오자,
우이도 주민들은 무사귀환을 환영.
문순덕의 작은 아버지는
1804년 3월 먼저 귀국하였다.
3년2개월만에 귀가, 가선대부 벼슬
그해 11월 4일, 조선 조공사를 만나
12월에 귀가하여 계산하니 홍어 사러
나갔다가 3년 2개월만에 돌아온 표류였다.
집에 돌아온 문순덕은 가까운 집안에 거처를 정한
정약전 선생이 묻는 말에 답변하여 ‘표해시말’을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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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장에서 '표해시말'을 꺼내는 문순득의 후손 문채옥 옹 |
이무렵 전라감사 이면응이 부임길에 친구 정약용을 만나
그의 형님 정약전에게서 들은 문순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감사는 마침 제주도에 여송국 표류객이
6년째 머물고 있다면서 문순득이 통역해 주면
본국으로 송환할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전해왔다.
문순덕이 제주도로 가보니
여송국 표류객이 목장에 거주.
‘막가외’(莫可外)'라는 말 뿐이고
전혀 소통이 되지않아 울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제주목사가
그들을 청나라로 보냈지만
다시 제주도로 되돌려 보냈기에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는 사연.
당초 표류 여송국인은 5명
청나라로 갔다가 한명이 죽고
제주도로 되돌아와 한명이 죽고
그들은 3명만 제주도에 살아 있었다.
문순덕이 여송국 말로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니
표류 9년만에 말문이 열린 감격에 엉엉 울어댔다.
제주목사가 조정에 고하고 중국을 거쳐 본국으로 송환
문순득이 ‘조선을 깨웠다’라는 역사의 평가를 받게 된 것.
문순득(文淳得, 1777-1847).
당시 조정에서 문순덕에게 내린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 공명첩은
직계 후손인 문채옥씨가 소장하고 있다.
문순덕 묘는 해남군 화산면 봉리리에 위치하며
음력 10월 15일에 후손들이 시제를 받들고 있다.
...............표해시말((漂海始末)..............
1816년 조선 순조 때 정약전이 대필(代筆)한
문순득(文淳得) 표해기행록(漂海紀行錄)이 있다.
당시 우이도(소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정약전.
'1805(순조 5)~1816' 사이에 정약전이 대필(代筆)한 기록.
이본으로 1818년 그 섬으로 유배된 유암(柳菴)이
문순득의 글을 참조하여 쓴 「표해시말(漂海始末)」
『유암총서(柳菴叢書)』에 전하는데 「표해시말」은
정약전 작 「표해록」에 누락된 내용을 보완하고 있다.
.........................................................................
.
줄거리
1801년 12월 우이도에서 문순득과
그의 작은아버지 문호겸(文好謙)과
마을사람들인 이백근·박무청· 이중원,
나무꾼 아이 김옥문(金玉紋) 등 6명이
흑산도 남쪽 수백리 태사도(太砂島)로
홍어를 사러 갔다가 1802년 1월 18일에
돌아오는 뱃길 우이도 서남 수백리에서
표풍(飄風)을 만나 표류하다가 2월 2일에야
유구국(琉球國) 큰섬 양관촌(羊寬村)에 닿았다.
10월 7일 3척의 배로 중국을 향하여 출발
10월 7일 또 다시 서풍을 만나 표류하였다.
11월 1일 여송( 필리핀)에 닿아 머무르다가
1803년 3월 16일 다른 사람들은 먼저 출발하고,
문순득과 김옥문은 남은 복건인(福建人) 25명과
같이 광둥(廣東)·아오먼[澳門]·북경(北京)·의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고, 1805년 1월 8일 귀가하였다.
의의 평가
이 작품에는 중국·안남·유구·여송 등의
언어·풍속 등을 소개한 해양문학 자료로서
표류인 한 사람의 경험을 듣고 자기 체험처럼
사실화(寫實化)한 실기(實記)란 점이 가치가 높다.
부록에 112개 유구어와 여송어는
귀한 언어학 연구자료로 평가된다.
...............
자산어보.
...............
자(玆)’는 흑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으므로
흑산과 같은 말이나, 흑산은 음침하고 어두워
가족에게 편지 보낼 때마다 자산이라고 일컬었다.
'흑산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밤이면 저승사자처럼 보이는 黑山(흑산)
죽음의 그림자 같아 늘 두려웠다.'던.,정약전.
언제 사약을 받고
죽게 될지도 모르는
유배지에서 하루 하루.
정약전은 꾸준히 연구하고
집필하면서 두려움을 떨친듯.
자산어보는 1801년(순조 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전라도 흑산도에 유배되어 1814년(순조 14년)까지 생활하면서
이 지역의 해상 생물에 대해서 분석하여 편찬한 해양생물학 서적
.......................................
“흑산도는 어족이 극히 많으나
이름이 알려져 있는 것은 적어
박물자(博物者)가 살펴야 할 바
내가 자산어보를 만들기 위해서
흑산도 주민들을 널리 심방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각기
다른 말을 하기 때문에
이를 좇을 수가 없었다.
섬 안에 장덕순(張德順 : 일명 昌大)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고서를 탐독하나 집안이 가난하여
서적이 많지 않아 식견이 넓지 못하나 그의 말은 믿을 만하다.
그리하여 나는 그를 맞아들여 연구하고
서차(序次)를 강구하여 완성한.,자산어보.
"해금(海禽)과 해채(海菜)도 다루어
후인의 고험(考驗)에 도움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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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3권으로 구성된 ≪자산어보≫는 제1권 인류(鱗類),
제2권 무인류(無鱗類) 및 개류(介類), 제3권 잡류(雜類).
① 인류:석수어(石首魚)·치어(鯔魚)·노어(鱸魚)·강항어(强項魚)·
시어(鰣魚)·벽문어(碧紋魚)·청어(靑魚)·사어(鯊魚)·검어(黔魚)·접어(鰈魚)·
소구어(小口魚)·도어(魛魚)·망어(0xF43C魚)·청익어(靑翼魚)·비어(飛魚)·
이어(耳魚)·전어(箭魚)·편어(扁魚)·추어(錘魚)·대두어(大頭魚).
② 무인류:분어(鲼魚)·해만려(海鰻鱺)·해점어(海鮎魚)·돈어(魨魚)·
오적어(烏賊魚)·장어(章魚)·해돈어(海豚魚)·인어(人魚)·사방어(四方魚)·
우어(牛魚)·회잔어(繪殘魚)·침어(鱵魚)·천족섬(千足蟾)·해타(海鮀)·
경어(鯨魚)·해하(海蝦)·해삼(海參)·굴명충(屈明蟲)·음충(淫蟲).
③ 개류:해구(海龜)·해(蟹)·복(鰒)·합(蛤)·감(蚶)·정(蟶)·담채(淡菜)·
호(蠔)·나(螺)·율구합(栗毬蛤)·구배충(龜背蟲)·풍엽어(楓葉魚).
④ 잡류:해충(海蟲)·해금(海禽)·해수(海獸)·해초(海草).
우리 나라와 중국의 문헌을 많이 참고하고 이를 인용하고
실제로 본 것을 토대로 내용의 충실을 기하려고 노력한 흔적.
홍어 숫놈.
'홍어 큰놈은 6~7자 안팍으로 암놈은 숫놈보다 크다.
암놈이 낚시 바늘을 물고 엎드릴 때 숫놈이 붙어서 교합.
이때 암놈은 먹이 때문에 죽고, 숫놈은 간음 때문에 죽는다.
동지 후에 잡히나 입춘 후에 살이 찌고 맛이 난다.
홍어는 4월 이후에는 몸이 쇠약해져 맛이 떨어진다.'
'청어 때는 산란기인 정월이 되면
동해에서 한류를 따라 서해로 이동.'
청어의 실태 기록은
학계에서도.,유일무이.
국립중앙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영남대학교 도서관,
서울대학교 상백문고(相佰文庫) 소장.
............정약전(丁若銓 1758 ~ 1816)...................
조선 시대 학자, 카톨릭 교 전도가. 정약용의 형으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흑산도로 귀양.
우이도 9년, 대흑산도 이배 후 181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정약현, 정약종, 정약용 4형제 중 둘째
일찍이 권철신(權哲身)에게 사사(師事)하였고
1779년 주어사(走魚寺) 강학회 천주교 연구 회원.
1785년 역관이었고 '영조~순조' 연간 성리학자·생물학자
본관 나주, 자 천전(天全), 호 자산(玆山), 손암(巽庵), 연경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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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전은 성격이 활달
행동에 거리낌이 없었고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동생 정약용(1762∼1837)은 꼬장꼬장하여
무엇이든 꼼꼼히 따져 옳고 그름을 밝혔다.
1801년 형제는 나란히 남도 귀양길에 올랐다.
음력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율정점
삼거리 주막에서 묵었을때
다산 서른아홉, 약전 마흔셋.
그날밤, 정약전은 심정 토로.
‘문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었네.
본래가 한 뿌리에서 태어났지만
흩날려 떨어져 간 꽃잎과 같다오.’
다음 날 형제는 헤어졌다.
그것이 생전에 마지막이었다.
그 날 이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약용은 나주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 강진.
약전은 무안 다경진을 거쳐 목포에서 서남쪽 51.3km.,우이도.
약전과 인간적으로 정든 압송 장교들이 눈물을 흘리며 떠나갔다.
우이도는 오늘날 도초면이지만
당시흑산(도초도와 4km 거리).
약전은 술을 많이 마시고 즐겼다.
사귐에 양반 천민이 따로 없었다.
어부, 천민들과도 술잔을 나눴다.
'서너 나그네가 가을빛 따라와
시 지으며 흥을 돋우니 재주는 따지지 않네.
서늘한 바람 나무에 있건만 매미는 아직 울고
맑은 달빛 모래밭에 가득하자 기러기 돌아오려네
푸른 산 오막집에 추위가 스며들자
사방 이웃들이 막걸리 잔을 건네네
나무꾼에 고기잡이까지 기쁘게 친구가 되니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었구나.' - 정약전 -
양반이라고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글쓸게 있으면 주저않고 대신 써줬다.
섬사람들에게 단연 최고 인기스타였다.
너도나도 자기 집에 모시려고 할 정도.
1801년 약전은 우이도에서 문순득을 처음 만났다.
24세 문순득은 약전에게 도움을 줬을 뿐만 아니라,
외로운 약전의 말벗이 되어주었고 깎듯히 대하였다.
하지만, 약전이 유배온지 한 달여 만에
1802년 1월 18일 풍랑을 만나 사라졌다가
1805년 1월 문순득이 3년만에 다시 나타났다.
‘오키나와→필리핀→마카오→난징→베이징→의주’
문순득은 세상 밖의 온갖 체험담을 가득 안고 왔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약전에게 그 이야기를 전하였다.
약전은 부러웠다.
그도 훨훨 섬 밖으로
날아가 다니고 싶었다.
그는 순득에게 ‘하늘아래 첫 세계여행자’
‘천초(天初)’라는 뜻말 이름을 지어 주었고
그의 이야기를 ‘표해시말(漂海始末)’로 엮었다.
1807년 약전은 거처를 흑산도 모래미 마을로 옮겼다.
당시 흑산도 인구는 1000명(현 4600여 명)이 채 안 됐다.
모래미는 읍동(진리) 다음 큰 곳으로, 부자 어부 동네였다.
약전은 마을 위쪽 모래언덕에 복성재를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복성재(復性齋)는 ‘사람 됨됨이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 담긴 서당.
약전은 흑산도 서당 제자 장창대 소년의 도움을 받아 자산어보를 썼다.
1813년 약전은 ‘동생이 곧 유배가 풀릴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약전은 육지에서 좀 더 가까운 우이도로 다시 나가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소식을 들은 모래미 사람들이 한사코 그 앞을 가로 막았다.
그만큼 약전은 그들에게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이미 약전은 섬 처자 사이에 두 아들(학소, 학매).
아우 다산이 강진 여인과 딸 하나를 둔 것과 비슷.
1814년 약전은 가족과 한밤중 우이도로 가기 위해
배를 탔다가 마을 사람들에게 붙잡혀 다시 돌아왔다.
결국, 1년 가까이 설득한 끝에, 우이도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동생을 보지 못하고
1816년 6월 6일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약전은 유배지 우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정약용은 그로부터 2년뒤
1818년 9월 유배가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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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3대 정치범 중죄인 유배지였던.,흑산도
정약전이 이곳에 유배된 표면적인 이유는 천주교도.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은 정약용의 깐깐한 성격 때문.
정조가 재위때 가장 신뢰하고
중용하였던 권신이 남인 정약용.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이 곧 정조.
사도세자가 죽게 한 배후 세력이.,정순왕후 외척.
영조가 66세때 15세 신부로 맞이한.,계비 정순왕후.
정조는 재위때 탕평책을 썼지만,
남인세력이 정순왕후 오빠를 탄핵.
그리하여, 1776년 9월 흑산도로 유배.
................정순왕후 오빠의 흑산도 위리안치................
정순왕후.(1745~1805)의 오빠는 1776년 9월 흑산도로 유배.
가시울타리 높이가 3길이며 4겹의 가시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가시울타리 높이 5~6m, 둘레가 12~13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가시가 처마까지 닿아서 햇빛이 들지 않아 대낮이라도
황혼 같았고 하늘을 쳐다보면 우물 속에 있는 것 같았다.”
가시울타리 남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바깥에는 사령들이 거처하는 경비소가 사방에 설치돼
토착 원주민들이 이곳을 산무덤이라 부를 정도였다는 기록.
집 동북쪽 모퉁이에 '곡식 저장소' 목두(木豆)와 변소를 설치.
위리안치 적거지에서 남쪽 문은 출입구이고 서쪽 문은 배식구.
.
그당시 흑산도 유배지는 바닷가와 가깝고 지형이 낮아서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 기운이 극심한 곳.
몸이 썩어 피와 살이 문드러지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던 자연환경.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리고 사나운 바람과 안개 등
습기가 많아 옷, 재물, 곡식이 여름철만 지나면 썩어.,무용지물.
집이 낮아 바로 서기 어렵고 방도 좁아 무릎 추스르기 버거운 곳.
온돌 연기와 그을음으로
의관이 쉽게 더렵혀져
기거하기 힘든 적거지.
.............................
.
정조가 53세에 갑자기 사망하고 나자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게 된 정순왕후
정순왕후 외척 서인이 정적인 남인을 제거.
남인을 제거한 명분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그리하여, 천주교도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된 것.
그리고, 1816년 6월 6일 그곳에서 병들어 생을 마감. .
영조..............1694년 ~ 1776년.
사도세자...... 1735년 ~ 1762년
정조.............. 1752년 ~1800년......사도세자 아들
순조 ..............1790년 ~1834년.
정순왕후 ........1745년 ~ 1805년
정순왕후는 '영조 아들' 사도세자보다 11년 어렸다.
그녀는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하여 정조와 사이가 소원.
1800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5년 동안 수렴청정.
당시 순조는 어린 나이에 즉위
정순왕후가 왕실 최고 어른이며
법적으로는 순조의 증조모 되므로
그녀는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던 것.
정조 사후 대신들은 정순왕후에게 수렴청정을 간청.
정순왕후는 여섯 차례 고사한 후, 일곱번 만에야.,수락.
형식 상, 사양의 미덕를 갖췄지만, 내심 무척 고대했던 자리.
1759년(영조35년) 그녀는 15세 어린 나이에
66세 영조의 계비가 되었지만 후사없는 정순왕후.
안동김씨 '가문의 영광'을 위해 간택에 참여했던 규수.
'15살 어린 나이의 규수이기에
자신의 의지 만은 아니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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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1801년부터
1818년 9월까지
'40~58세'귀양살이.
전라남도 강진.,백련산
숲속에 위치한.,다산초당.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인하여 39세 정약용의 고난이 시작.
정권을 잡은 노론은 남인을 조정에서 몰아내기 위해 천주교 탄압.
신유박해로 정약용, 정약전 형제는 경상도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
몇달뒤 조카사위 황사영의 백서가 발견되면서
정약용 형제는 다시 한 번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
풍비박산 집안과 가족을 두고 떠나야 했던.,유배길.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4곳을 옮겨 다니면서., 거처.
1. 사의재 : 1801년 겨울부터 약4년
2. 고성사 보은산방 : 1805년 겨울부터 1년 가까이
3. 제자 이청(학래)의 집 : 1806년 가을부터 약 1년 반
4. 다산초당(윤단의 산정): 1808년 봄부터 약 10년
그가 강진에 처음 도착한 때는 40세때, 1801 겨울.
정약용은 사학죄인이라는 이유로 마을 사람들이 외면.
하여, 겨우 주막집 쪽방을 얻어 유배생활을 시작하였다.
강진 마을 사람들은 대역 죄인이라 모두 접촉을 피했는데,
이때 그를 불쌍히 여겨 챙겨준 사람이 동문 '매반가'의 주모.
다산은 자신이 거처하는 누추한 방에 ‘사의재’(思宜齋)라고 명명.
사의재(思宜齋)란,
네가지 마땅함을 의미.
“생각은 맑아야 하고,
용모는 장엄해야 하고,
말은 과묵해야 하며,
행동은 중후해야 한다.”
정약용은 강진 유배지에서
18년간 약 500여 서적을 집필.
세상과 격리된 유배지에서 정약용이 저술한 500권 서적.
그가 관료로 일할 때 느꼈던 것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것.
경세학 3부작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대표작.
지방관리 횡포와 백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목격하면서
정립된 개혁의식이 고스란히 담긴 수령업무 지침 ‘목민심서.
중풍까지 앓고 있던 그는 어떻게 500권 방대한 저술을 한걸까?
약 18년 유배기간 동안 한번도 좌절하지 않았고
오직 백성을 위하여 나라의 미래 청사진을 그렸던
다산 정약용의 샘솟는듯한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그곳에서 다산을 도와준 22세 청상과부.
15살에 나이 많은 남자에게 시집 갔다가
남편이 돌림병으로 죽자 친정에 와 있었다.
그러다가, 표씨 여인은 다산의 첩실이 되었고
'그와 그녀 사이에 딸 하나 낳았다.'고 전해온다.
1818년 봄에 57세 다산은 목민심서 집필을 완성.
1818년 9월에 유배가 풀린 후에는 강진을 떠나
고향 남양주 본가로 돌아와 75세 회혼일에 운명.
자손, 친척들이 모여 살면서 행복한 말년을 보냈다.
1795년 정조가 한강을 건넌 '배다리'는 정약용이 설계.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를 연.,수원 화성.
당시, 배다리는 효의 상징이고 모든 백성에게 큰 구경거리.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한강에 놓았던.,배다리.
수원성 건설 책임자였던., 정약용.
거중기를 발명해 공사기간을 단축하였다.
당초 10년 건설 계획이었으나 3년 만에 완공.
조선시대
서구문명의
창구였던.,섬.
천주교 초기 전래과정에서
다산 정약용의 모든 형제와
가족들은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들은 신유박해
가장 큰 피해자들.
조선시대 당시 사리마을에는
36세대 109명의 신도가 있었다.
죽어도 관을 짜지 못했던 주민들
당시, 그들을 보듬어 안았던.,정약전.
다산의 둘째형인 그는
우이도에서 59세에 운명.
16년간 흑산도 유배시절
'한글성가' 가사도 지었다.
다산은 둘째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길을
나주까지 같이 와서 율정주막에서 마지막 밤.
각자 동쪽 강진과 서쪽 흑산도로 각각 헤어졌다.
이때, 다산은.,<율정별>
눈물의 이별시를 남겼다.
정약전이 살았던
흑산도 남쪽 끝자락
사리마을에 복원된 '복성재'
1958년 12월에 완성된
30평 성당 근대 건축물
.
외형이 흑산도 본당 건물과 흡사한 형태.
흑산도에 세워진 천주교 건물들은 철골을
사용하지 않고, '돌쌓기' 독특한 건축양식.
흑산도 성당.,본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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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자료실
Re: 조선시대 - 우이도.,'흑산도 홍어장사' 표류기
선경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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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0.29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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