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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4주일설교 마가복음
본문: 마가복음1:21-28
제목: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칙
오늘은 마가복음1:21-28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의 참 좋은 규칙과 기준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의 기준과 규칙”
한국표준연구소이란 곳이 있습니다.
그 연구소는 이 시간을 딱 몇시다
정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얼마만큼의 무게를 1Kg
얼마만큼의 양을 1L라고 정하는 곳이 표준연구소입니다.
그런 표준이 없는 나라가 있습니다.
우리도 없었습니다.
1975년도에 생겼습니다.
태극기에 빨강색이 어떤 빨강색입니까?
빨강색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런데 표준이 있다고 합니다.
기준을 정하는 연구소가 한국 표준연구소입니다.
그곳은 카이스트가 있는 대전 대덕구에 있는데
대덕 연구단지의 중심이라고 합니다.
표준 기준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태극기의 빨강색 하나도 각자 다르게 칠하게 됩니다.
진홍 연홍 분홍도 있을 것인데
딱 정해주어서 우리가 아는 태극기의 모습을
어디에서나 똑같은 태극기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페인트를 사러 가도
빨강색 주세요 하지 않고 몇 번이라고 해야 합니다.
전 세계가 어느 색깔 표준을 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임의로 색을 만들지 못합니다.
정확한 숫자를 대주어야 하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표준이 없을 때는
사람들이 임의로 그렇다고 여기는 색을 만들어 썼습니다.
그 기준을 최초로 정한 삶이 진시황제였습니다.
그렇게 정하기 위해서 자기가 정한 것 이외의
모든 책을 없애라고 한 것이 분서갱유라고 합니다.
진시황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책을 많이 읽었고 아는 것이 너무 많았다고 합니다.
신하들이 걱정하는 것이 공부를 너무 많이 해서
몸이 쇠약해지므로
공부를 그만하라고 말리는 것이 일이었다고 합니다.
진시황이 처음 무엇을 만들었습니까?
땅을 재려면 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가 지역마다 달랐습니다.
그래서 자를 만들고 단위를 정했습니다.
컴퍼스 만들어 측정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컴퍼스라는 규, 자를 칙이라고 합니다.
최초로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그 진나라가 서양에 전해지면서
진이 차이나가 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학교에 가면 줄을 서라고 합니다.
그냥 줄을 서라고 하면 어떻게 설지 모릅니다.
그래서 처음에 무엇을 정합니까?
기준을 정합니다.
한 사람을 기준을 정해놓고 그 사람을 중심으로 해서
1열 종대 횡대 또는 2열 종대 횡대로 모이라고 합니다.
누가 있어야 모일 수 있습니까?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나의 삶의 기준은 있는지
나의 삶의 규칙은 있는지
우리는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는 규칙은 있습니까?
몇 시에 일어나야 할지 기준과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일어나서 무엇을 하는지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화를 어떻게 낼 것인지 기준과 규칙을 정해야 합니다.
화를 내도 요만큼 까지
잔소리해도 요만큼까지 낼지에 대한 기준이 있습니까?
기준이 없으면 그때 그냥 다르게 넘어가게 됩니다.
성경도 무엇을 성경으로 정하자는 규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종교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규칙에 통과된 책이라고 정해 놓았습니다.
그 기준이 캐논입니다. 정경이라고 합니다.
그 캐논의 뜻은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복음서만 해도 여러 책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해서 기록을 했습니다.
많은 책 중에 교회에서 정경으로
기준에 다다른 책으로 정해진 것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구약 39권
신약27권 곧 66권입니다.
여러 복음서가 있지만
마태 마가 누가 요한만 복음서를 정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기준 아름다운 규칙
아름다운 삶의 의식이 나옵니다.
마가복음1:21에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습니다.
인류가 발견한 가장 아름다운 규칙, 아름다운 기준은
안식일이고 회당입니다.
이 사람들은 기준을 정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규칙을 정했습니다.
이것이 창세기의 천지창조의 원리라고 여기었습니다.
이 규칙을 발견한 사람들은 놀라운 사람들입니다.
그 규칙을 따르고 지키었습니다.
그 규칙을 통해서 삶의 질을 향상하였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신성
이렇게 살고 싶어, 이렇게 되고 싶다는
그 욕망을, 그 생명력을 살아내는
그런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주일에 하루는 하던 일을 멈추었습니다.
길게 잡으면 예수님 나시기 전 오륙 백 년 전
짧게 잡으면 삼사 백 년 전에
안식일은 규칙으로 정해지게 됩니다.
그렇게 정하고 동네 전체가 쉬었습니다.
당시 동네는 씨족사회였습니다.
다 쉬었는데
그냥 쉬지 않고 회당에 갔습니다.
시간과 공간 그곳에 함께하는
인간의 기준을 마련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쉰다.’ ‘그날은 하던 일을 멈춘다.’
그리고 회당에 갔습니다.
당시는 학교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학교에 간 것입니다.
그 학교에 예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학교는 생긴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지금과 같은 학교는 10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
전에는 서당이 있었습니다.
서당은 아무나 다니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모든 국민이 다 다녔습니다.
애부터 어른까지 안식일에 쉬고 회당에 다녔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책을 보고 같은 언어를 썼습니다.
이 얼마나 좋은 규칙을 만들었습니까?
여러분은 삶에 좋은 규칙이 있으십니까?
그 규칙이 얼마나 삶의 질 향상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우리 한번 물어보아야 합니다.
이것을 물어보고 싶어서 안식일과 회당에
그곳에서 예수님이 가르쳤고
그곳에서 배운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안식일 회당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규칙이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2500년 이어와서 얼마 안되는 유대인이
미국의 좋은 대학의 교수 30%이고
과학과 경제의 중요한 위치에
그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기준과 규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몇 시에 일어나겠다고 정하고
일어나서 기도하고 운동하는 것은 좋은 규칙입니다.
우리 신자들이 주일날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고
설교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고
여러 층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좋은 규칙입니다.
그것도 평생을 그렇게 한다고 하는 것은
정말 좋은 규칙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규칙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떤 이는 일어나는데 규칙이 없습니다.
기준이 없습니다.
한 달에 얼마를 저축하고
누구를 만나고
무슨 모임에 나간다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이렇게 키우겠다는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없으니 되는 대로 합니다.
하나님이 묻는 질문 중에
“아담아 너는 어디 있느냐”라는 말에는
시제가 없다고 합니다.
지금 어디 있느냐는 말도 되지만
10년 전은 30년 전은 어디 있었니
태어나기 전은 어디 있었느냐는 말입니다.
다시 물을 수 있습니다.
너 일주일 후에는 어디 무엇을 할거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기도입니다.
생각을 생각하는 것
지금 나를 보는 것이다.
생각 밖으로 빠져나가서
하나님 앞에서 나를 봅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10년 후에 너는 어디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이런 물음 앞에 섰을 때
되고 싶은 내가 있게 됩니다.
살고 싶은 내가 있고
1년 후에 되고 싶은 내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고
어떤 남편이 되고 어떤 사람이 되고
어떤 회사원이 되고 어떤 사람 어떤 내가 되고 싶습니다.
되고 싶은 나를 만나는 시간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선 것이고
그것이 기도이고
그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되고 싶은 나를 곧 하나님이 원하는 나를 만나는
그렇게 되기를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되고 싶은 나를 찬미하는 것이고
되고 싶은 나의 목소리를 만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되고 싶었던 사람들이
아주 상징적으로 기록해 놓은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되고 싶은 나를 발견하여 살아간 모습이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입니다.
되어 가고 되어 가는 것이 인생이고 삶입니다.
그런 규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규칙이 무엇인가?
안식일이다.
시간적으로 구별했습니다.
장소적으로 구별했습니다.
회당입니다.
나를 혼자서는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내가 나를 볼 수 없습니다.
내 안에 되고 싶은 나를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을 만나야 합니다.
의를, 성경 말씀을 만나야 합니다.
그 안에 무엇을 읽어야 합니까?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저 사람처럼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우리 안에서 접촉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은 저렇게 하고 형제 우애를 저렇게 하고
옷을 저렇게 입고 부부애는 저렇게 나누고
회사경영은 저렇게 하는구나 나라 경영은
저렇게 하는 구나를 만나야 합니다.
그것이 배움입니다.
그것이 회당입니다.
안식일에 장소는 회당,
배우고 가르치는 규칙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규칙을 가진 사람은
살고 싶고 되고 싶은 나를 만나는 곳
그런 사람들과 서로 교제하는 곳이
우리 교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되어 보지 못한 나
못된 나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한
부정적인 나를 훨씬 더 듣게 됩니다.
우리가 듣는 것은 안 된 것
안 된다는 말만 많이 듣게 됩니다.
그래서 화가 나고 불평이 많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된 소리를 된 말을 듣고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나는 아버지 되면 저런 아버지가 되어야지
나는 할아버지가 되면 저런 할아버지가
되어야지 하게 됩니다.
내가 부장되면 저런 부장 될 거야
내가 사장되면 저런 사장 될 거야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아 내가 저만큼 못 되었구나를 생각하게 됩니다.
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알게 됩니다.
삶의 아름다운 규칙 기준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먼저 길을 가신 예수님이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런 예수님을 보며
내가 따라 살기 위해 수련하며 사는 자란 사실입니다.
다른 말로 바꾸면 기준을 만들었다.
표준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라는
표준이 있게 됩니다.
그냥 빨강색이 아니라
이런 빨강을 빨강이라고 표준을 정해야 한다.
그냥 잘 사는 삶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는 삶을 살겠다는
예수를 믿는 자로서 자기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규칙과 기준이 있다고 하는 것
주일에 교회에 가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
성경을 읽고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은
참 아름다운 기준이다.
그 규칙이 그 기준이 그 사람을 만들게 됩니다.
기준이 없는 사회
기준이 없는 가정
기준이 없는 나를 생각해 보라
얼마나 혼란스러울까?
규칙을 정한 것입니다.
그 규칙 안에서 살게 됩니다.
그래서 표준어라고 합니다.
표준이 있어야 한다.
이 만큼을 1그람, 이런 정도를 한 시간이라고 하자
이것을 무슨 빨강이라고 하자라는 표준이 있어야 합니다.
더 좋은 규칙 표준을 만들어가면서
우리의 삶이 정리되고 정돈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 저 삶은 향기롭고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다고 말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아침에는 일어나고 저녁에는 자는 것
자연스러운 것에는 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사람들은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기준이 없어서 그렇고
혼란스러운 것은 규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밥 먹는 것도 규칙이 없이 마음대로 먹습니다.
일어나고 자는 것도 마음대로 합니다.
그래서 복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나만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고 남도 혼란스럽게 됩니다.
모임에 늦게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에 늦게 오는 성도가 있습니다.
왜 늦을까요?
좋은 규칙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좋은 규칙 좋은 기준 만들어서
삶이 정돈되고 단순해지고 명료해지고
투명한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일이면 예배당에 와서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그래서 어디 가야 할지 배워야 합니다.
하루를 구별해서 주일에 예배당에 가고
새벽의 시간을 구별하여
성경을 읽고 찬송을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어디서 왔는지
어디쯤 가고 있는지 무엇이 되고 싶은지를 알아
내 안에 되고 싶은 나를 만나 가는 시간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 드리는
좋은 규칙을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지난 한 주간 양산과 밀양과
포항과 부산에 다녀왔습니다.
11명의 목사님과 한 분의 안수집사님과 한 분의 권사님과
두 분의 사모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은 책 15권을 읽은 마음이었습니다.
그런 만남을 통해 나를 보게 되었고
또한 내가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덧붙여서 여러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헌금에 대한 기준과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준과 규칙이 있습니다.
돈은 우리 삶의 모습입니다.
주머니가 회개해야 진정한 회개라고도 합니다.
헌금은 우리의 신앙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준을 가지고 헌금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담임목사로서 성도들을 보면
그런 기준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기준이 있다고 해도 문제가 있어 보이기도 합니다.
헌금의 기준은 주일헌금과 십일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감사헌금이나 선교헌금은
본인이 정해서 할 수 있습니다.
신자라고 하면 이런 것들을 기준으로 삼고
규칙을 정해서 해야 한다고 봅니다.
제 눈이 잘못되었는지 모르지만
주일 헌금을 안하시는 분들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주일헌금은 기본으로 해야 하는
기준이고 규칙입니다.
십일조는 신앙이라고 봅니다.
신앙 고백이 있어야 십일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기에
십일조를 하겠다고 기준을 정하고 행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한 식구입니다.
식구라는 말은 같이 밥을 먹는 자란 말입니다.
우리 율리교회 성도들은 한솥밥에서
함께 식사하는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주일마다 같은 설교를 듣고
새벽마다 같은 말씀을 나누고
수요일에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그것이 기본입니다.
물론 그 말씀이 부족하여 다른 말씀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본적인 말씀에 먼저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가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참 잘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주일 날 들은 말씀을 나누고
새벽 영상이나 말씀 묵상 자료집을 통해서
말씀을 나누는 것을 기본으로 삼고 행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곳에서 전해지는 말씀이나
다른 자료를 통해서만 말씀을 듣고 나눈다면
어떻게 한 가족이 될 수 있을까요?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기준과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예배는 삶에서 일 순위로 참석해야 합니다.
그 어떤 일보다 먼저 주일날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와서 나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무엇인지 알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합당한 헌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주일헌금과 십일조를 정하고 해야 하며
더 나가 감사헌금과 선교헌금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주일 설교와 새벽 영상이나
말씀 자료집을 통해서 말씀을 묵상하여
생활해야 합니다.
이런 신앙의 기준과 규칙을 통해서
성숙한 삶
거룩한 삶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