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 빅3’ ③ 야구계
편
글· 김병우(49회) 객원편집위원
‘서울고가 배출한 빅3’연재를 시작했습니다. 분야별로, 편집위원회가 머리를 맞대고 심사숙고해 고릅니다. 동호회가 있는 분야는 동호회 의견도 듣겠습니다.
-----------------------------------------------------------------------------------------------------
“그때 그 시절, 서울고 야구의 스타 플레이어들”
지난 3년간 고교야구의 최대 키워드라 불릴만한 선수라면 단연 강백호일 것이다. 강 선수는 고척 스카이돔 개장 첫 홈런의 주인공으로 시작하여 올해 마침 내 꿈에 그리던 전국무대까지 제패하며 명실상부한 최고의 고교 선수 타이틀과 함께 서울고등학교의 이름을 한층 더 빛내주었다. 이렇듯 서울고등학교야구는 최고의 선수들과 함께 빛나는 역사를 써가고 있다.
1.서울고등학교야구의 첫 스타플레이어–선우대영
서울고 야구의 실질적인 시작을 알리던 시기는 1974년이었다. 당시 선수수급을 위해 기존선수 및 전학생들을 통해 재창단 형식으로 서울고 야구부가 새롭게 부활되었다. 이때 눈길을 끌었던 선수가 대광고에서 전학 온 좌완 투수 선우대영이었다.
1976년 봉황대기 대구상고와의 2회전 경기는 선우대영의 진가가 드러났던 최고의 경기였다. 이 경기는 연장17회까지 가서야 승부가 난 그야말로 혈전이었다.그 혈전 속에서 선우대영은 17회를 홀로 완투하여 3대2의 승리를 이끌어내며 서울고를 16강으로 이끌어냈다. 상대 대구상고가 봉황대기 3연속 우승을 이어가고 있었고 투수가 당시 최고의 투수였던 김시진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가히 ‘다윗’선우대영이 ‘골리앗’김시진을 누른 형국이라 할 수 있다. 선우대영은 이 경기를 통해 본인의 이름을 전국에 알리며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서울고가 8강 진출에 실패하고도 봉황대기 우수투수상을 받았다.
선우대영은 중앙대를 졸업하고 프로원년인 1982년 OB베어스에 입단하면서 그해 7승을 올리며 팀내 좌완 에이스로 거듭났으나 이듬해 부상으로 인해 조기 은퇴하고 현재 미국에서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 선우대영의 활약과 함께 그가 졸업한 이후 서울고도 점점 강한 전력을 키워가 마침내 1977년 봉황대기 준우승의 기염을 토했고, 1978년 황금사자기 준우승에 이어 마침내 봉황대기를 제패하며 첫 전국대회 우승의 영광을 얻게 된다. 비록
선우대영은 재학시절 우승경험을 얻지 못했지만 서울고 야구의 희망을 알렸던 선수였다.
2. 1980년대전성기주역–김동수, 박형열
전국무대에서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던 서울고는 1978년 봉황대기우승 이후 1980년대가 시작하면서 다시 침체의 시기를 겪는다. 그후 지금의 서초동으로 교사를 옮기면서 인근 중학교의 우수선수들을
영입해가며 조금씩 전력을 키워오다가 1984년 2학년인 이 두 명의 선수를 주축으로 대통령배와 봉황대기우승, 청룡기 4강이라는 화려한 성적표를 받게 된다. 이듬해인 1985년에도 전년도의 활약이 단순한 운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대통령배 2연패 및 청룡기 우승을 거머쥐며 명실상부한 ‘서울고 천하’를 이룩하게 되었다.
이렇게 1980년 대전성시대를 만든 주역이 있었으니 바로 김동수와 박형열이었다. 지난 1984, 85년 2년동안 서울고 야구의 전성시대를 지휘한 황금의 배터리들이다.
2년동안 4번의 전국대회우승에서
이 2명의 선수들은 모두 MVP(김동수), 우수투수상(박형열)을 거머쥐며 초고교급 스타로 전국에 그 이름을 알렸다. 당시 좌완 투수 박형열 및 우완 투수 이용호 2명의 에이스가 있던 서울고 마운드는 최강의 원투펀치를 자랑했지만 이를 리드하는 안방마님 김동수가 없었다면 우승이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평이었다.
이때의 활약이 두 선수의 진로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박형열(21번), 김동수(왼쪽22번, 오른쪽 상패)
박형열은 1986년 OB베어스에 지명되어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프로무대로 들어섰다. 부상 등으로 인해 프로경력을 조기에 마무리하였지만, 당시 초고교급 투수로 주목을 받으며 고졸 신인 진출 교두보를 마련한 것에 큰 의미를 남겼다. 김동수는 한양대로 진학하고 나서 1988년 서울올림픽 대표를 거쳐 LG트윈스를 통해 프로무대에 데뷔한 1990년, 맹활약 속에 신인왕 수상 후 20년간 국내프로야구 최고의 포수로 자리잡으며 영예롭게 선수생활을 장식하고 현재 후진양성에 힘쓰고 있다.
3. 30년만에 돌아온 황금세대 – 최원태, 남경호
1980년대 2번의 전국대회 우승 이후 서울고는 틈틈이 16강~8강권 이상의 성적을 올리면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다시 우승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런 가운데 마운드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 계속 해서 나타났다. 1980년대 후반 이상훈, 이용호를 비롯해 1990년대에는 박준수, 구자운,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배힘찬, 이보근, 이형종, 임정우, 배재환, 장현식 등이 그 명성을 이어갔다. 타자들 중에도 안치홍, 박건우 등의 우수한 선수들이 모습을 보였다.
2014년최원태(좌), 남경호(우)
2007년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통한의 끝내기 역전패를 하고 마운드에서 눈물을 흘렸던 이형종의 모습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
2014년 또다시 서울고 야구의 전성시대를 알리는 순간을 맞는데, 첫 전국대회인 황금사자기에서 서울고는 전국의 강팀들을 제압해가며 마침내 29년만에 전국대회 우승의 쾌거를 이루었다. 우승의 중심에는 2명의 에이스가 버티고 있었으니, 최원태와 남경호였다. 최원태는 2학년부터 팀 내에서 확고한 선발투수로 자리잡으며 빠른 볼을 앞세운 전국구 에이스로 거듭나고 있었고, 남경호는 황금사자기에서
혼자 3승을 책임져 MVP까지 수상하며 시선을 끌었다. 이 둘을 앞세워 서울고는 대통령배까지
거머쥐는 등 30년만에 최강팀으로 부활했다. 최원태와 남경호는 이 활약을 계기로 각각 서울연고 구단인 넥센 히어로즈와 두산베어스에 1차 지명선수로 프로에 진출했다. 서울고 출신이 서울연고 2개구단에서 1차 지명선수를 배출한 것은 지난 1993년 이상훈(LG트윈스), 추성건(OB베어스) 이후 22년만이었다. 프로 입단 후 최원태는 2년간 준비과정을 거쳐 마침내 올해 10승 투수로 성장하면서(시즌11승7패) 팀내 에이스로 발돋움하게 되었고, 남경호는 개인기록은 미미하지만 프로 첫해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도움이 되었고, 현재 퓨처스 리그에서 열심히 실력을 가다듬는 중이다. 과거의 모교선수들이 프로에서도 명성을 알린 것처럼, 새로운 전성시대를 맞이하며 기상을 높이고 있는 어린 모교선수들도 현재의 팀만이 아닌 한국야구의 미래를 밝게 빛내주는 선수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