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ung-whun Chung
정명훈은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를때인 1953년 1월 22일 부산에서 태어난다.
7남매의 여섯째로 태어난 그는 서울 덕수초등학교를 입학하기 전 4세때 부터 피아노를
시작하고 7세때인 1960년 서울 시향과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가 된다.
서울 명동에서 한식당을 경영하던 부모님이 가족과 함께 미국 시애틀로 이주를 하고
그곳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부모님을 위해 부엌일도 돕고 신문 배달과 잔디 깎는 일을
하는등 당시 한국인 이민집안이 겪는 미국생활에 똑같은 경험을 쌓는다.
어머니의 자녀에 대한 음악적 교육에 자녀들은 7남매가 서로 다른악기를 전공하게된다.
첼로를 전공한 누이 정 명화,바이올린을 전공한 정 경화가 일찌감치 전문 연주가의
길에 들어섬에 자연히 피아노를 전공한 그가 음악적으로 많은 도움을 얻는다.
14세때 첫 개인 리사이틀을 열었고 15세인 1968년 뉴욕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하여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운다.
냉전 시절인 1974년 소련에서 열린 차이콥스키 국제콩쿨에서 2위로 입상하여
미국과 한국에서 카 퍼레이드를 벌려 줄만큼 대단한 화제를 몰고왔다.
1975년에 줄리어드로 입학하여 재학 중이던 1976년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를 하고 1978년에 학교를 마친다.
1980년 로스엔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 임명되어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고, 1983년 가족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이듬해 1984년 독일의 지휘자겸
작곡가 한스 젠더 후임으로 자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
되었고 재임 기간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 3번을 세계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세계인들에게 지휘자로써 주목받는다.
1986년 파리국립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를 지휘하고 뉴욕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로도 영역을 넓혀간다.
1987년 르네상스의 중심도시 피렌체에서 무소롭스키와 베르디,모짜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상을 수상한다.
프랑스가 좌파 대통령인 미테랑 정부에서 공을 들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바스티유 오페라극장의 상주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 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다니엘 바렌보임을 제치고 1989년 임명된다.
신축기념 개관 공연으로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을
공연하여 프랑스인들에 대 환영을 받는다.
1990년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을 시작하고 비제의 관현악 작품을
시작으로 생상,메시앙,베를리오즈,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한다.
작곡가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로 그의 새로운 작품을 연주와 녹음을 하여
그 음원들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바뀐 우파 프랑스 정권의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인 이유에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어 프랑스와 한국에서
큰 파장의 사회적 이슈로 부각된다. 결국 재판까지 가는 등 파장이 이어져 정명훈은
음악인으로써 많은 상처를 입는다.
- 2002년 부터 베를린 필, 빈 필, 암스텔담 콘서트게보,바이리쉬 룬트풍크 오케스트라,뉴욕 필,클리브랜드
오케스트라,슈타트카펠레 드레스덴 등 세계 최상의 메이져급 오케스트라는 후임 지휘자 선정에
골머리들를 앓는다. 좋은 지휘자의 기근에서 오는 현상이었다. 분명한 사실은 지휘자 정명훈을 모든 메이져
오케스트라에서 탐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메이져 오케스트라의 메니져들이 바스티우를 사임하면서 재판까지
몰아 부친 사건때문에 많은 우려를 하고 다른 지휘자로 선정을 선회한다. 만일 그시기에 그가
메이져 오케스트라로 갔다면 2005년 서울 시향을 맡을 틈이 없었을 것이다.-
1998년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단원들과 갈등,계약조건의 미비로 수 개월 후 사임하고 1997년 이태리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2000년 라디오 프랑스 필의
음악감독에 임명되어 올해인 2015년까지 재임하고 이 오케스트라를 프랑스 최상의
교향악단으로 바꾸어 놓는다. 2001년 새로이 단원들을 재구성한 도쿄 필하모닉에 특별
예술 고문이란 명칭으로 지휘를 하고, 2005년 서울시와 계약조건이 일치하여 서울시립
교향악단에 상임지휘자로 임명된다.
지휘자로써의 그의 이력은 세계에서 존중 받고있는 지휘자들의 길과 똑같은 길을 걸었다.
우선 20세전에 전공인 피아노에서 세계적인 수준의 피아니스트로 인정을 받는다.
그후 바로 피아노에서 지휘로 전공을 바꾸어 지휘에 전념한다. 20대 말 줄리니 밑에서
LA필을 경험할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의 지휘자로써의 길에
아주 큰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후 30대 시작인 1984년 준메이져 오케스트라
독일의 자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을 맡아 경력을 쌓아 암스텔담 콘서트게보, 빈 필,
베를린 필, 슈타트 카펠레 드레스덴,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상의 메이져급
오케스트라들을 객원지휘하고, 2000년 라디오 프랑스필을 맡아 항상 앙상블의 결속력과
독일 작곡가 작품에 취약했던 프랑스 교향악단을 그의 반듯한 음악언어를 기초로
프랑스 음악뿐만 아니라 독일계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훌륭하게 소화하고 흐트러져 있던
앙상블도 밀도있고 균형을 이룬 앙상블로 바꾸어 놓는다.
2012년 세계에서 가장 오랜역사를 가진 드레스덴 카펠레에서 최초로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해마다 두번 이상의 정기공연을 한다.
그의 음악은 반듯한 음악적 사고와 따뜻한 감성을 통해 정통성이 있는 음악적 언어로
넓고 깊은 내면의 소리를 만들어 낸다. 결코 과장하거나 덧부침이 없다.
세계적 지휘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아주 날카로운 귀를 가지고있다. 지휘자에 있어서
잘들을 수 있는 귀는 절대적인 필요 요소이다. 그것을 토대로 100명이 넘는 연주자들의
소리들 가운데 잘못된 소리나 발란스들을 어김없이 잡아내 이상적인 조화와 균형의
오케스트라 앙상블을 이끌어낸다. 그의 연습과정을 지켜보면 결코 화내는 법이없다.
물흐릇이 흐르는 음악을 놓아 두었다가 자신의 색채를 보일 부분은 엄청난 에너지로
자신의 음악적 언어를 울림 깊게 각인시킨다. 마리스 얀손처럼 오케스트라의 구석
구석을 통제해 곡 전체를 숨쉴 틈을 주지않고 자신의 짜여진 틀에 묶어내어, 그가 만든
음악이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다 듣고난 후 울림에 밀도가 반감되는 경우와 비교되어
앙상블의 밀집도가 떨어지는듯 싶게까지 과감한 잔가지에 연연하지 않고 큰 그림의
음악을 만들어 나가고 흐르듯 이어지는 음악을 통해 풍성한 여백의 미를 전달해 주고
정명훈이 꼭 이야기를 하고 싶은 곳에서 에너지를 함축하여 쏟아 내여
연주가 끝난 후 많은 시간이 흐른 뒤까지 울림의 폭이 넓게 남아있게 해준다.
구스타포 두다멜의 젊음과 라틴 아메리카인들이 가진 폭팔적인 에너지로 오케스트라를
몰아부쳐 감각적이고 과장된 표현으로 관객을 사로잡지는 못할지라도 청중들이
끈임없이 갈망 할 정도의 엄격한 절제로 긴 호흡의 음악을 만드는 그의 음악은
기다림과 끈기를 요구한다.
이세상에 완벽이 있을수 없듯이 지휘자의 세계에도 완벽한 지휘자는 존재할 수없다.
필자가 이상적인 지휘자로 꼽는다면 위의 세 지휘자의 장점을 합친 지휘자이다.
그는 아시아의 음악인들로 구성된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감독을 맡아 아시아의 음악발전에도 이바지하고 있으며, 2011년 9월에 북한으로 가
북한 국립 교향악단과 은하수 관현악단을 지휘하고 2012년 3월 라디오 프랑스의
초청으로 파리에서 북한의 은하수 관현악단과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합동 연주회를 실현시켜 음악을 통해 남북 화해의 길에 이바지한다.
그는 UN아동기금 - 유니세프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어 활동을 하고있다.
그는 이제 60대 초반에 들어서 지휘자로써 폭넓은 연륜으로 마지막 음악적 업적을
이루기위해 힘 쓰고있다. 하루의 반나절을 비행기에서 소비하여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음악인으로 음악만을 위해 평생을 쏟아부어 이룩해 놓은 많은 업적들이
좋은 결실을 맺어 참 음악인으로 세계인들의 존중 받기를 기원하며 글을 마친다.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