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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로 가는 길
주 인 석
1
1990년 5월 18일. 이날은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10년 전 이날, 그러니까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어떤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으며, 그 사건은 그로부터 열흘 간 지속되었고, 또한 그 사건이 가히 비극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대목까지에 대한 동의는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이 대목만 넘어서고 나면 누구라도 동의할 수 있는 사실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 문제다.
물론 사람들은 다 각자의 판단과 주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판단과 주장은 확고부동하다. 그러나 그것이 또 문제가 된다. 확고부동한 판단과 주장은 그것과 다른 판단과 주장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으므로.
수많은 판단과 주장은 편의적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다. 가해자 측의 것과 피해자 측의 것으로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앞서도 말했거니와 그 둘이 모두 10년 전 광주에서의 사건을 비극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극이란 무엇인가. 도덕적으로 우월한 자가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에 의해 피해를 받거나 불행에 빠지는 연극을 일컫는 말이 아니던가.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명백하다. 가해자가 자신의 도덕적 열등을 시인해버렸으니 말이다. 가해자는 아무것도 잘한 것이 없고 피해자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니 이 재판은 이미 끝난 것이 아닌가. 법정에서 아무도 ‘이것은 희극이오’라고 증언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태는 상당히 심각하다. 사람들은 말장난이나 하려고 법정에 모인 것이 아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말장난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모두 10년 전 광주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비극이라고 하는데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비극의 제목은 제각기 다르게 부르고 있으니까. 어떤 사람은 그 비극을 광주사태라고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 비극을 광주민주항쟁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그 비극을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라고까지 부른다. 그리고 서로 다른 제목만큼이나 그 비극의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광주사태라는 비극은 광주에서 폭도 수십 명이 사살된 사건이고,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은 광주의 민주시민 수백 명이 무고하게 죽어간 사건이고,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라는 비극은 광주에서 봉기한 수천 명 적어도 천 명 이상의 혁명적 민중 혹은 노동자계급이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10년 전 광주에서는 적어도 3개 이상의 비극이 발생했단 말인가. 시간과 공간과 인물이 상당한 정도로 일치하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니면 광주사태라는 비극은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의 한 부분이고,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은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라는 비극의 한 부분이라는 것일까. 말하자면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라는 비극이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을 포함하고,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비극이 광주사태라는 비극을 포함하는 관계라고나 할까. 그 각각의 비극 제목들이 의미하고 있는 양적인 측면만을 고려한다면 분명히 그렇다. 하지만 이것도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이 말장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뭔가 대단히 진지하다는 것도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건 진지한 말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장난이란 말의 장난스러운 어감이 너무 거슬린다면 말싸움이라고나 할까. 지나치게 진지한 감이 없지 않지만.
지나치게 장난스러웠건 지나치게 진지했건 간에 충분히 그럴 만한 필요는 있었다. 제 길로 들어서기 전에 얼마 정도는 엉뚱한 길을 헤매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닐까. 그건 어쩌면 괜찮은 일 정도가 아니라 꽤 쓸모 있는, 아니 혹은 필연적인 일이 아닐는지.
우린 어쨌든 그 엉뚱한 길을 잠시 헤매면서 하나의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여러 가지 입장 그리고 그 말 자체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다. 이것을 앞에서 언급했던 비극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개념과 연결지어 말하자면, 그 말의 도덕적인 강도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도덕적인 우열 그리고 그 말의 정치적인 입장과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치적 위치 사이에는 어떤 규칙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광주사태라는 말을 쓰는 사람보다는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광주민주항쟁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보다는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라는 말을 쓰는 사람이 더 피해자 측의 입장을 강조하고 더 높은 도덕적 우위를 점하며 더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을 갖는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적 역량에 있어서는 그 반대의 순서가 된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규칙성 이다. 10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비극에 관한 한.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990년 5월 18일.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다. 이날은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왜 우리는 이렇게 시작했을까. 우리가 이미 10년 전의 그 사건을 비극으로 규정했고 각자의 판단과 주장에 따라 그 비극을 광주사태, 광주민중항쟁,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 등의 제목으로 명명하기 시작하면서 그 비극은 비극으로서 역사 속에 갇힌 셈이다. 1980년 5월 18일에서 5월 27일 사이에 있었던 비극으로. 그런데 왜 이제 다시 역사 속의 비극을 지금 시작하려는 이야기의 첫머리에 아주 중대한 의미로 떠올렸느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역사적 주기에 대한 인식 때문이다.
한국의 현대사에는 10년 주기라는 묘한 규칙성이 있어왔다. 건국 이래로 매 연대를 시작하는 해에는 10년을 주기로 그 연대를 대표적으로 규정하는 큰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1950년에는 6·25가 1960년에는 4·19가 1970년에는 전태일이라는 노동자의 분신이 그리고 1980년에는 광주에서의 비극이 있었다. 6·25, 4·19, 11·16, 5·18은 각각 그 연대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기호라는 의미를 갖는다.
1990. 5. 18이라는 기호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 사람들은 그것이 궁금한 것이다. 사람들은 역사의 주기율표를 만들려고 한다. 물론 1990 다음에는 다른 숫자가 붙을 것이다. 1990. 5. 18은 그때까지의 잠정적인 기호이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1950.6. 25, 1960.4. 19, 1970.11. 13, 1980. 5. 18에다 잠정적인 1990. 5. 18이라는 역사적 기호는 동일하게 만들어놓았는데 그 역사적 원자량은 또 사람마다 다르다. 1980. 5. 18을 광주사태, 광주민주항쟁, 광주민중봉기 혹은 광주무장봉기 따위로 다르게 부르는 것처럼 1950. 6. 25, 1960. 4. 19, 1970. 11. 13도 각기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사람들은 각기 다른 주기율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기율표에 1990. 5. 18이란 잠정적인 기호를 기록했다.
이제부터 시작할 이야기는 이러한 맥락 속에 있다. 1990. 5. 18이라는 원자기호의 원자량을 추량해보는 것.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1990년 5월 18일. 이날은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다.
2
그날 김민수 씨는 광주에 가게 되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서울에서 광주로 가게 된 것이다.
김민수 씨는 서울에 있는 모 사립대학교 연극영화학과 교수다. 그는 그날 오후 2시 서울역 호남·전라선 매표구 앞에서 준채라는 자기 학과 학생과 만나 광주로 함께 떠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약속은 바로 그 전날 이루어졌다.
그즈음 신문과 방송에서는 연일 이번 5·18 광주 주간에 다시금 10년 전과 같은 대규모의 소요사태가 광주에서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심상치 않은 보도를 해대고 있었다. 아주 무시무시한 표제를 붙여서는 말이다. 그 기사의 제목들은 마치 영화 선전문구처럼 구구절절이 선정적이어서 사람들은 개봉이 박두하고 있는 공포영화를 기다리듯 숨 가쁜 기대감에 사로잡혔다.
정말 10년 전과 같은 비극이 발생할는지도 몰랐다. 사람들의 머릿 속에는 거의 비슷한 양상을 띤 공포의 파노라마가 물결치기 시작했다. 비극도 구경하는 사람에게는 즐거운 체험이다. 기대와 그 기대에 대한 충족은 즐거움을 만든다. 간간이 그 기대를 약간씩 어긋나게 만든다면 더욱 즐거울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기대하는 그 끔찍한 비극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어쩌면 사람들은 치유받을 길 없는 심각한 허탈감에 빠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공포와 연민 그리고 카타르시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 비극의 구조가 아니던가.
사람들은 그들이 기대하고 있는 공포와 연민의 비극적 영화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 시나리오와 그로부터 창조되는 공포와 연민의 생생한 장면들을. 실제로 그들은 지난 10년간 꾸준히 그 영화를 학습해오지 않았던가. 80년대의 한국은 공포의 감정이 강조되는 비극의 강의실이었던 셈이다. 처음에는 숱한 소문과 유언비어를 통해서. 그다음은 문체가 거칠고 그 문체만큼이나 조야한* 활자의 비공식 인쇄물을 통해서. 그다음은 몇몇 폭로 책자와 화질이 나쁜 사진, 비디오테이프를 통해서. 그리고 두 번의 총선거와 한 번의 대통령 선거를 통해서. 또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다는 광주 청문회와 광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통해서. 몇 번에 걸친 반복과 그때마다 단계가 발전되는 효율적인 방식의 학습을 거쳐 사람들은 비극에 거의 통달해 버렸다.
그 비극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우습게도 그 비극의 주역들뿐이었다. 그것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의 미덕을 몸소 구현해 보이고자 하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사람들은 동양적인 철학에 의하자면 최고의 미덕인 이러한 겸손에도 별반 감동하지 않는 눈치였다. 주역에 씌어 있지 않던가. 노력하고 겸손한 군자에 대해서 말이다. 정말 시대가 변한 모양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비극의 강의실에서 있었던 마지막 수업 에 그 비극의 최고 주역이 등장했는데도 결코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 노력하고 겸손한 군자에 대해서 말이다.
어쨌든 바야흐로 비극이 임박하고 있는 듯했다. 거대한 비극에 출연할 수많은 배우들이 속속 무대가 있는 광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체로 두 부류였는데, 하나는 전민련,* 전대협,* 전노협 *과 같은 대규모의 엑스트라 집단을 거느린 프로타고니스트*들이고, 또 하나는 전투경찰대, 군부대, 각급 관공서 공무원과 같은 엑스트라 집단을 거느린 안타고니스트*들이었다. 안타깝게도 10년 전 비극의 영웅인 공수부대는 아직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 이 없었지만, 그러나 실망은 금물이다. 그들은 언제든지 혜성처럼 등장할 수 있는 뛰어난 기동력을 갖추고 있으니까.
그런 상황이었다. 그런데 김민수 씨는 그 비극의 막이 오르는 5월 18일 광주로 향하게 된 것이다.
3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김민수 씨는 오전 강의를 마치고는 곧바로 학교를 나섰다. 오후 강의는 없었다. 그리고 토요일도 강의가 없었으므로 그는 학교에서의 이번 주 일정을 모두 마친 셈이었다. 만약 강의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그때쯤 학교를 나설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약속이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학교 안이 온통 광주 10주년이라는 역사적 주술에 걸려 술렁거렸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오전에 있었던 강의조차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반쯤의 학생은 아예 강의실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들어온 학생들도 수업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강의실에 앉아서도 바깥 눈치를 보고 있었다.
도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걸까.
김민수 씨는 강의시간 내내 그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꼬리를 물고 그 전날 준채라는 학생이 했던 말 한마디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하셨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겁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는 김민수 씨에게 광주행을 제의했다. 김민수 씨는 그 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학생이 선생보고 잘 모를 거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광주에 가보는 수밖에.
김민수 씨는 충격을 받았다. 학생이 대뜸 선생에게 선생님은 잘 모르실 겁니다, 라는 말을 하다니. 그렇다면 선생은 누구고 학생은 누구란 말인가. 물론 그는 준채의 말처럼 미국에서 공부했다. 그래서 쫙 모를 수도 있다. 아니 잘 모른다. 하지만 준채의 말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니었다. 김민수 씨는 그 말을 들으면서 막막한 단절감을 느꼈다. 그건 그가 7년간 떠나 있었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의 단절감이었다.
“학생들은 더 이상 배우려 하지 않아요. 그 애들에게는 선생이 없지요.”
김민수 씨는 올해 이 대학의 교수로 발령을 받았다. 학기 초에 그를 환영하기 위해 벌어진 술자리에서 같은 학과의 고참 교수들은 그에게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그때 어떤 노교수가 푸념처럼 그런 말을 했었다. 김민수 씨는 그 말을 믿고 싶지 않았었다. 그 자리에서 쏟아져 나왔던 다른 모든 말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조언이라고 해주는 말들이 이제부터 자기가 가르쳐야 할 학생들에 대한 악담들뿐이 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김민수 씨는 학교를 나서며 교정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학교가 광주를 알리는, 광주로 가자는 선전물로 범람하고 있었다. 플래카드, 포스터, 스티커, 거기다가 풍물을 울리며 행진하는 선전대들까지.
김민수 씨는 게시판을 지날 때마다 그 앞에 멈춰 서서 붙어 있는 대자보들을 읽어보았다. 그것들은 모두 광주 10주년을 맞이하여 가열차게 5월 투쟁의 대열에 나설 것을 호소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두 가지로 나뉘는 경향이 있었다. 하나는 5월 투쟁을 통일 투쟁으로 몰아나가자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해방 투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둘은 서로가 서로를 좌편향이니 우편향이니 하며 맹렬히 비판하고 있었다. 김민수 씨는 그중 하나가 이른바 주체사상파이고 다른 하나가 민중민주주의파라는 것 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도 그쯤은 안다. 준채는 잘 모른다고 했지만 말이다.
대자보를 읽기 위해 게시판 앞에 멈춰 설 때마다 김민수 씨는 그 대자보들 곁에 나란히 붙어 있는 포스터 한 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극예술연구회라는 서클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였다.
‘우리에게 광주는 무엇인가. 5월 26일 오후 4시. 대강당.’
이를테면 그 포스터 때문이었다. 김민수 씨가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인 ”90년 5월 18일 광주로 향하게 된 것은.
4
4월 초쯤이었던가. 김민수 씨가 이 학교에 발령을 받은 지 한 달쯤 되었을 때, 그의 연구실로 학생 하나가 찾아왔다. 그 학생이 바로 준채였다. 준채는 자기네들이 새로 극예술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들었는데 마땅한 지도교수가 없으니 김민수 씨보고 지도교수블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자네는 연극영화학과 학생인데 서클 활동까지 연극으로 할 필요가 있겠나?”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시지 않는 연극도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겠지. 하지만 지도교수라면 나보다 더 좋은 분들도 많을 텐데. 자네들과 오랫동안 지내오신 선생님들이 지도교수를 하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
“가깝게 지낸 선생님들이 없습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과 가까워지려 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러면 나는? 왜 하필 나지? 얼마 보지도 못했는데.”
“글쎄요. 막연한 기대지만 선생님은 그래도 편켠이 덜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미국에서 공부하시다 오신 지 얼마 안 됐으니까요.”
김민수 씨는 준채가 내민 서류의 지도교수 란에 서명하고 도장을 찍었다. 그 서류는 아마 서클 등록 신고서쯤이었을 것 이다. 그리하여 김민수 씨는 극예술연구회의 지도교수가 되었다. 그건 그리 내키지 않는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김민수 씨는 반가운 마음으로 결정을 내렸었다. 준채는 그가 그 학교의 교수가 되고 나서 처음으로 그의 연구실을 찾아온 학생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느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선생님들이 가르치지 않는 연극도 있다는 준채의 말 때문이었다. 교수들은 김민수 씨에게 학생들이 배우지 않으려 한다고 조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준채는 선생님들이 학생들과 가까워지려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의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준채의,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해서 편견이 없으실 것 같다’는 말은 불과 한 달 반 만에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해서 잘 모르실 겁니다’로 바뀌었다. 아니 바뀌지 않았다. 편견이 없다는 말의 본뜻이 잘 모른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김민수 씨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나서 열흘 후 준채가 다시 김민수 씨의 연구실을 찾아왔다. 이번에는 공연 허가를 요청하는 서류를 들고서였다. 5월 26일 대강당에서 첫 번째 정기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준채가 내민 공연 대본은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였는데 김민수 씨는 그 작품을 언젠가 언뜻 한번 읽어본 적이 있었으므로 서류에 서명을 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볼 필요는 없었다.
“이런 작품을 공연하는 거라면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것과 별 차이가 없지 않을까?”
김 민수 씨는 단지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 별생각 없이.
준채가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연극을 하기 위해 극예술연구회라는 서클을 만든다고 말했을 때, 김민수 씨는 그 선생님들이 가르쳐주지 않는 연극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준채가 그에게 잘 모를 거라고 말한 것도 당연하다. 아니 그는 정말 편견이 없는 것일 수 있다. 김민수 씨는 극예술연구회의 공연 작품인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가 그 작품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야기할 수 있는 편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제목 속의 ‘민중’ 그리고 ‘반란’이라는 말이 촉발시킬 불온한 느낌들을 말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작품을 알고 있었으므로 편견을 갖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른다는 말이 있다. 김민수 씨의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준채가 대본과 함께 공연 허가 신청서를 학생과에 제출하자마자 학생과장은 지도교수인 김민수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학생과장은 민중, 반란, 이런 말을 몇 번 정신없이 반복하더니 그런 작품을 지도 교수의 허락 하에 대강당에서 공연하게 해서야 되겠느냐는 거였다.
“염려 마십시오. 그 작품은 그런 작품이 아닙니다. 편견 때문에 그래요. 아마 생각하시는 것과는 영 반대의 작품일 겁니다. 대본을 한번 읽어보시죠.”
김민수 씨는 껄껄 웃으며 그렇게 말했었다. 그는 편견을 야기한 사람들이 편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가질 편견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그걸 잘 몰랐다. 편견을 가진다는 말이 곧잘 알고 있다라는 말과 동의어라는 편견을 잘 모른 것이다.
준채는 공연이 허가된 뒤로는 한 번도 김민수 씨의 연구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김민수 씨도 학교에 자리 잡은 첫 학기라 할 일도 많고 정신도 없어서 극예술연구회에 관한 일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그런데 3일 전부터 학교 안에 극예술연구회의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5월 26일 오후 4시. 대강당.’ 이렇게 쓰인 포스터가 말이다.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가 아니고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로 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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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그것은 표면상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나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준채를 비롯한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은 차라리 공연의 제목을 그들이 허락받은 대로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라고 하는 편이 나았다. 그리고 그 내용도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의 일부분을 개작하여 공연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그 작품 속의 브레히트가 의도했던 것처럼.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와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등장하는 코리올라누스라는 로마의 영웅이 있다. 셰익스피어는 플루타르크를 읽고 코리올라누스의 비극을 썼다. 역사가들이 써놓은 역사서나 전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속에서 영웅 코리올라누스는 그의 강직한 성격과 드높은 기개 때문에 파멸한다. 코리올라누스가 코리올라누스를 이긴 것이다.
독일의 극작가 브레히트.는 1952년에서 1953년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코리올라누스를 개작하려는 시도를 한다. 그의 의도는 민중들과 호민관들이 계급의식을 가지고 로마의 집정관 코리올라누스를 이기게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동베를린의 스탈린 가에서 노동자들이 곡가의 폭등에 항의하여 폭동을 일으킨다. 그게 1953년 6월 17일의 봉기다. 브레히트는 여기에 착안하역 올리브 값을 턱없이 올린 집정관 코리올라누스에 대한 호민관과 민중들의 반란을 생각해냈다: 올리브 값에 대한 이야기는 리비우스도, 플루타르크도, 셰익스피어도 한 적이 없었다.
여기까지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라는 작품은 그다음에 시작된다.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다 포함하면서.
귄터 그라스의 작품 속에서 무대는 1953년 6월 17일 동베를린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연극 연습장이다. 거기서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락누스를 개작한 작품을 시연하려 한다. 그는 셰익스피어가 비극 속에 그려놓은 코리올라누스 대 코리올라누스의 대결을 민중과 코리올라누스의 대결로 바꾼다. 그는 민중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그는 그의 의도가 관객들에게 명확히 전달될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고 있다. 그는 공연히 심심풀이나 하자고 이러한 역사를 투시하는 작품을 공연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의 목적은 변증법의 실증에 있다.
그때 연습장 밖 시가지에서, 즉 동베를린 스탈린 가에서 노동자들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시연을 계속한다. 노동자들이 연습장으로 뛰어들어 와 바깥의 추이를 전달한다. 그들은 브레히트가 연극을 중지하고 자기들을 지원해줄 것을 요청한다. 그러나 브레히트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고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밖에서는 실제로 스탈린과 그 괴뢰에 대한 반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는 연습장 안에서 반란을 연습하자는 꼴이었다. 노동자들은 그가 작품을 통해 민중을 결합시키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문화의 유산이라는 슬로건과 허용할 수 있는 특권 운운하며 정권을 지지하고 용인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결국 노동자들의 봉기는 소련제 탱크에 깔려 좌절되고, 브레히트의 연극도 모순과 혼란 속에 빠져 실패하고 만다.
귄터 그라스는 스탈린과 그의 추종자인 동독의 통치자들을 비판하고, 그 속에서 정치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 브레히트를 조소하고 있는 것이다. 김민수 씨가 학생과장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쨌든 이 작품은 좌경 용공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준채와 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은 그 작품, 즉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 중에서 브레히트의 의도만을 따오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극예술연구회의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는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의 일부분이고,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은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의 일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는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을 포함하고, 브레히트의 「코리올란」은 극예술연구회의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포함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맨 처음 준채가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를 공연하겠다고 해놓고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공연하는 것은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 개를 하겠다고 하고 그중 하나밖에 못한 잘못은 있을지언정 새빨간 거짓말을 한 적은 없다.
6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공연 포스터가 나붙기 시작하자 당장 학생과장의 전화가 걸려왔다. 학생과장은 그것 보라는 식으로 김민수 씨를 다그쳤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아예 김민수 씨의 연구실로 들이닥쳤다. 학과장을 대동하고.
김민수 씨는 어떤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아주 묘한 입장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한 묘한 입장이란, 그가 이 학교에 부임하게 된 데는 이른바 운동권 학생들의 압력이 작용했었기 때문이란 것이다.
김민수 씨가 미국으로부터 돌아와서 2년간 시간강사 자리를 전전하다가 이 학교에 이력서를 제출했을 때, 그와 경합이 붙은 사람이 하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민수 씨가 부임한 자리는 김민수 씨와 경합이 붙은 그 사람으로 사실상 내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침 그 사람이 학교 재단 측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이었고, 이 사실을 알아낸 학생들은 흥분했다. 마침내 재단 측과 운동권 학생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어부지리를 얻은 김민수 씨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건 김민수 씨에게는 정말 행운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이를테면 운동권 학생들의 음모에 가담한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김민수 씨는 그렇지 않아도 못마땅하게 자기를 바라보던 보직 교수들의 시선을 생각하고는 불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잔뜩 오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너무 빨리 그럴듯한 오해의 소지를 제공해준 꼴이었다. 학생운동권과 긴밀하게 연락하는, 혹은 조종을 받고 있는 불온한 교수로 말이다.
학생과장과 학과장은 김민수 씨에게 당장 공연을 취소시키고 극예술연구회라는 서클을 해체시키라고 했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엄중한 문책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협박과 함께.
김민수 씨는 서둘러 준채를 찾았다. 공연 허가 신청서에 서명을 받아 간 뒤로 얼굴조차 내 보이지 않았던 준채는 꼬박 이틀을 수소문한 끝에야 찾아낼 수 있었다. 그즈음의 그는 아예 수업을 다 빼먹으면서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공연 준비에 골몰하고 있었다.
“자네 왜 나를 속였나?”
김민수 씨는 한 달여 만에 자기의 연구실에서 마주 대한 준채에게 그렇게 말했다. 극도로 자신을 억제해가며.
“어쩔 수 없었습니다.”
준채의 대답이었다. 김민수 씨는 그 대답을 하고 있는 준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조금의 죄책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니?”
“선생님을 속이고서라도 그 일은 해야만 했습니다.”
“왜?”
“제가 대학생활 4년 동안 배운 것이 바로 그거니까요.”
“그게 뭐지?”
“진실이오. 그리고 그 진실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거죠.”
“무슨 진실?”
“민중이 고통받는 현실을 변혁시켜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드는 거죠. 저는 그 일을 연극을 통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연극이니까요.”
“진실을 위해서 거짓말을 한 셈이로군.”
“전 그럴 필요가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거대한 진실을 위한 사소한 거짓말이군.”
“더 중요한 것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 말이에요.”
“그건 마치 대의를 위해 사소한 것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전체주의의 논리 같은데.”
“다릅니다.”
“어쨌든 자네는 잘못을 저질렀네. 자네를 믿었던 선생을 속이고 학교 당국을 속였어.”
“선생님께는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제가 속인 것이 아니라, 저로 하여금 속이도록 만든 거예요.”
“공연을 취소하게. 아니면 귄터 그라스의 작품을 공연하든지.”
“그럴 수 없습니다. 공연이 9일밖에 남지 않았어요. 선생님도 포스터를 보셨겠지요? 저는 학우들과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깰 수는 없습니다.”
“자네는 처벌받을 거야. 학교 당국을 속였으니까. 자네는 학교 당국에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를 공연하겠다고 약속했어. 난 그 약속의 보증인이고. 그 약속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자네를 믿었던 선생에게 피해가 생기는데도?”
여기서 잠깐 대화가 끊겼다. 그 둘의 대화는 더할 수 없이 차분하게 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김민수 씨는 자기에게 닥쳐올 피해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만 자신이 궁색해지는 느낌이었다. 이런 말이나 하려고 준채를 불렀던 건가, 하는 비참한 의문이 떠올랐던 것이다.
준채도 그 대목에서 동요했다. 그도 김민수 씨의 표정을 보았던 것이다. 그들의 대화는 갑자기 바뀌었다. 준채가 먼저 말을 꺼냈다.
“선생님은 내일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내일?”
“내일은 바로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하셨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겁니다.”
“뭘 말인가?”
“한 가지 제안을 하겠습니다. 선생님, 내일 저와 함께 광주에 가주십시오.”
“그래서?”
“내일 광주에 갔다 오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바뀌지 않으면?”
“공연을 포기하겠습니다.”
“나는 쉽게 생각이 바뀌지 않을 텐데.”
“저는 제가 하려는 일이 옳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만약 자네가 옳다는 것이 판명돼도 난 바뀌지 않을 수 있어.”
“저는 선생님을 믿습니다.”
7
약속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김민수 씨로서는 갈 수밖에 없었지만, 가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선생보고 잘 모른다고 하니 갈 수밖에 없었고, 갔다 와서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공연을 그만두겠다니 가지 않을 이유도 없지 않은가.
준채는 선생님을 믿는다고 했다. 그 말은 일종의 덫이다.
만약 김민수 씨가 광주에 다녀오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럴 수도 있지 않은가. 심지어 김민수 씨는 생각이 바뀌지 않기 위해 애를 쓸지도, 혹은 생각을 바꾸지 않기로 굳게 마음 먹을는지도 모르지 않는가. 아니 어쩌면 김민수 씨는 생각이 바뀌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단지 자기의 교수직을 좀 더 안전하게 유지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로도 그럴 소지는 충분하다.
그렇다면 준채는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김민수 씨가 광주에 다녀오고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한다면 준채는 공연을 정말 포기할까. 준채는 자기가 하려는 일이 옳다는 것을 확신한다고 했다. 그 확신이 바뀌기 전에야 그는 그 일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그의 생각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럴 가능성 이라고는 거의 없다. 그러나 어떻게 알겠는가. 그의 생각이 바뀔지. 그러나 그의 생각이 바뀌었다하더라도 그는 그의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할 수도 있다. 이럴 경우 김민수 씨도 준채에게 할 수 있는 말이란 나는 너를 믿는다는 말뿐이다.
그러고 보면 그들의 광주행은 일종의 신뢰 게임이다. 누가 생각이 바뀔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신뢰를 회복하고 생각을 일치시키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서로가 생각이 바뀌더라도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해버리면 그것이 거짓인지 거짓이 아닌지 어떻게 판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때는 여전히 편견을 갖는다는 것이 잘 안다라는 것과 동의어인 차원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김민수 씨가 광주에 다녀와서 생각이 바뀌었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고, 그래서 어쨌든지 간에 김민수 씨와 준채 간에 신뢰가 회복되고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는 경우 말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준채는 공연을 못할 수가 있다. 김민수 씨가 그들의 공연을 보장해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경우 그들의 광주행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의 광주행은 일종의 신뢰 게임에 불과하다. 김민수 씨와 준채는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광주에 갔다 오는 것이 그들에게 가져다줄 변화라는 것은 실제로 둘 사이의 신뢰에 관한 부분밖에는 없다. 김민수 씨는 자기를 속였던 학생에게, 준채는 자기가 속였지만 이제 자기가 믿는다고 말한 선생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민수 씨와 준채는 그 사실을 제대로 의식 하지 못했다.
8
김민수 씨는 학교 정문을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서울역으로 향했다. 별다른 준비도 필요 없었거니와 집에 들르거나 연락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아침 김민수 씨는 집을 나오면서 아내에게 수업이 끝나는 대로 광주에 가리라는 것을 말해두었다. 그때 아내는 마치 남편을 전쟁터로 떠나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불안한 표정을 지으며 만류했었다.
“그렇게 위험 한 데는 왜 가요. TV에서 보니까 굉장치도 않던데.”
김민수 씨는 아내를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아. 나한테야 무슨 일이 생기겠어? 멀찌감치서 지켜보기만 할 텐데.”
김민수 씨는 준채와의 약속 때문에 광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내에게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아내는 미국에서 함께 귀국해서 2년이 넘도록 고생한 끝에 얻은 남편의 교수 자리가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내는 임신 2개월째였다. 생활이 안정되기 전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임신을 피해오다가, 올해 김민수 씨가 교수 자리를 얻자 비로소 첫아이를 밴 것이다.
택시는 약속시간인 오후 2시가 10분 정도 지나서야 서울역에 도착했다. 김민수 씨가 학교를 나오며 게시판의 대자보들을 읽느라 꾸물거렸기 때문이었다. 김민수 씨는 택시를 내려 매표소가 있는 건물로 바삐 걸어가면서 문득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 예감이란 어쩌면 준채가 약속장소에 나와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준채는 단지 자기의 거짓말을 추궁당하는 것이 귀찮아서, 그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김민수 씨와 그런 약속을 하지는 않았을까.
김민수 씨는 공포를 느꼈다. 실제로 그의 등줄기로는 순식간에 식은땀이 돋았다. 그러나 그는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준채는 말하지 않았는가. 선생님을 믿는다고. 그때 김민수 씨가 느꼈던 공포는 이중적이었다. 그것은 준채에 대한 것이기도 했고 자신에 대해서이기도 했다. 불신은 항상 이중적이다. 김민수 씨는 준채를 불신하는 순간 자신의 모습이 추악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을 불신했던 것이다.
김민수 씨의 그 불길한 예감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금방 판명되었다. 그 예감이 떠오르고 불과 이삼 분이 지나기도 전에 김민수 씨는 준채를 만난 것이다. 호남·전라선 열차 매표구 앞에서. 준채는 미리 와서 아예 표를 끊어놓고 김민수 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준채가 끊어놓은 열차표가 호남·전라선 열차표가 아니라 경부선 열차표였다는 것이다.
준채는 김민수 씨를 만나자, 인사를 나눌 틈도 없이 김민수 씨의 옷소매를 잡아끌고 경부선 열차 개찰구 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주위를 민첩하게 살피며 긴박한 어조로 김 민수 씨에게 말했다.
“선생님, 호남·전라선 개찰구 앞에는 전경들이 깔려 있어요. 학생들이 광주로 몰려가는 것을 아예 서울에서부터 차단하려나 봐요. 선생님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저는 통과되지 않을 것 같아서 경부선 표를 끊어 놨어요.”
“아니 경부선을 타고 어떻게 광주에 가나?”
“대전까지만요.”
그러면서 준채는 대전행 경부선 열차표 두 장을 김민수 씨에게 꺼내 보였다. 출발시간이 10여 분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 김민수 씨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준채와 함께 경부선 개찰구를 통과했다.
열차에 올라가서 자리에 앉자 김민수 씨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전에 가서는 어떻게 할 건가?”
“대전에서 광주로 가는 고속버스나 열차를 타야겠지요.”
“거기도 막고 있지 않을까?”
“어쨌든 가보는 수밖에요.”
김민수 씨는 자기가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대전까지라도 가보는 수밖에 더 있겠는가. 김민수 씨는 이상한 도취감에 빠져들었다. 경찰들의 눈을 속이고 광주로 잠입해 들어가는 일이, 더군다나 누구도 감히 생각해내기 힘든 비밀통로를 통해 경찰의 포위망을 돌파해내는 일이, 마치 첩보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경부선을 타고 광주에 가다니. 생각만 해도 통쾌한 일이 아닌가.
9
서울에서 영남이나 호남으로 가려면 대체로 대전까지는 같은 길을 거치게 된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보자면 영남이나 호남이나 거의 비슷한 방향에 있다. 그리고 서울에서 영남이나, 서울에서 호남보다는, 영남에서 호남이 더 가깝다. 지도를 펼쳐보면 이것은 명확하다.
그런데 김민수 씨는 영남과 호남이, 자기가 살고 있는 서울을 사이에 두고 정반대의 방향에 있는 아득히 먼 두 지방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랬을까를 따져보기 전에, 어느 것이 더 정확한 것일까. 지도 위에 표시된 영남과 호남 그리고 서울의 거리가 정확한 것일까, 아니면 김민수 씨의 머릿속에 착각으로 그려진 영남과 호남 그리고 서울의 거리가 정확한 것일까. 그리고 과연 그런 착각은 김민수 씨만 하고 있는 것일까.
김민수 씨는 1987년 겨울에 7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다. 그때 한국은 거의 20년 만에 직접선거로 치러지는 대통령선거의 와중에 있었다. 그가 도착했을 때는 투표일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던 터라 선거의 열기는 거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는 거처를 정하기도 전에, 7년간이나 떠나 있었던 모국의 실정을 재빨리 몸에 익히고 싶어서 아내를 데리고 선거 유세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그가 받은 느낌은 이건 뭔지 모르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이라는 것이었다. 그와 아내는 공연히 이 땅에 다시 발을 들여놓은 것은 아닌지, 하는 불안함에 사로잡혀 버렸다. 김민수 씨는 그때마다 80년 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그의 아버지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말이 생각났다. 이 땅은 사람 살 곳이 못 돼. 다시는 이 땅 위에 발을 딛지 않겠다. 뭐 그런 투의 말들이었다. 그리고 이민 간 지 5년도 채 못 되어서 그의 아버지는 머나먼 이국땅에 몸을 묻었다. 두고 온 고향 땅이 그립다느니, 그 땅속에 묻히고 싶다느니 하는 신파조의 말 한마디 남기지 않은 채.
김민수 씨의 아버지는 이민을 떠나기 전, 국내의 주요한 일간신문사에 근무했었다. 그러던 그가 이 땅을 펴나기로 마음먹은 것은 아마 1975년이었으리라 짐작된다. 그때 김 민수 씨는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버지를 둘러싸고 어떤 심각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버지가 근무하고 있는 신문사를 비롯한 몇몇 신문사에서 기자들이 대량 해직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그의 아버지가 해직 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의 아버지가 서명을 한다든지 농성을 한다든지 하
는 집단행동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즈음부터 그의 아버지는 줄곧 암울한 표정이었다. 그러고는 미국으로의 이민 수속을 밟기 시작했다.
한번은 어린 김민수 씨가 아버지에게 물었었다. 왜 아버지는 미국으로 가려 하느냐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자리를 다져온 신문사라는 좋은 직장도 있는데, 왜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먼 나라로 떠나려 하느냐고.
실제로 김민수 씨의 아버지는 미국에서의 이민 생활 5년간 온갖 힘든 일을 다 해보았다. 노년의 유색인종 이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뻔하지 않았겠는가. 재산을 많이 챙겨서 떠난 이민도 아니었으므로. 김민수 씨의 아버지는 5년간 막노동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사망 진단을 내리러 왔던 의사가 돌아가면서 김민수 씨에게 아버지의 사인은 과로인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아무튼 김민수 씨가 물었을 때 아버지는 대답했다. 이 나라는 너무 극단적이라고. 이것 아니면 저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기를 줄곧 강요당해왔노라고. 아니 사실은 둘도 아니고 하나만을 선택할 것을 강요당해왔노라고. 그런 삶이 싫다고. 그런 삶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싫다고 말이다.
1980년 봄, 드디어 이민 허가가 떨어졌다. 김민수 씨는 이미 대학교 4년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지난해 늦가을 독재자가 죽어버려서 사람들은 그해 봄을 ‘서울의 봄’ 이라고 불렀었다. 세상은 새로운 희망에 차 있었다. 그런데도 김민수 씨의 아버지는 미국 이민을 고집했다. 그건 5년간이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이민 허가가 마침내 떨어졌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뭔지 지독한 절망감 때문에 새로운 희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있었다. 김민수 씨는 최소한 자기가 대학을 졸업하는 1년 후까지만이라도 기다려줄 수 없겠느냐고 사정했지만 아버지는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이 그의 가족은 80년 봄, 미국으로 떠났다. 그리고 불과 한 달여 후, 조국에서 들려오는 끔찍한 소문들을 들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있었던.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가 무려 7년 만에 돌아온 이 나라가 보여주고 있는 이 극단적 인 모습은 말이다.
대통령 선거는 다섯 명의 후보의 경합이었는데 그중 네 명은 뚜렷한 지역색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막판에 이르러 지역적 기반을 가지지 않은 한 후보가 사퇴를 하자 곧 선거는 지역적 대결 양상임이 명백해졌다. 재미있는 것은 그중 세 명 이 80년 김민수 씨가 미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 서울의 봄 시절 대통령 물망에 올랐던 이른바 세 김 씨라는 점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나머지 한 명이 마치 80년과 같이 세 김 씨를 제치고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세 김 씨는 마치 고정 배역처럼 대통령 후보로 떠오르면서도 항상 영원한 대권 후보로만 남고 마는 일관된 성격을 공통적으로 구현한 셈이다.
각설하고, 아무튼 그 대통령 선거전의 주요한 쟁점은 바로 7년 전 광주에서 있었던 비극의 해결 방식과 그 해결 주체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그 진상의 규명을 포함해서.
한 명은 결자해지*라는 입장에서 그 사태를 야기했던 주체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고, 다른 한 명은 그 비극의 피해자들이 화해와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해결하겠다고 말했으며, 나머지 두 명은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그 일을 맡기는 것은 위험스럽기 짝이 없으니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자기들이 적당하지 않겠느냐는 식이었다. 모두가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지만, 염려스러운 것은 그 주장들을 둘러싸고 있는 분위기가 너무 극단적이라는 데 있었다. 그래서 이건 너무 극단적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도 어느 한편을 극단적으로 편드는 것으로 간주되어버리기 십상이었다. 비극의 해결이 뜨 하나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 형국이라고나 할까. 마침내 그 선거전은 막판에 개표 시비를 불러일으켰고, 컴퓨터 조작설을 위시한 온갖 유언비어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구로구청 에서의 참극을 빚고 말았다. 7년 전 비극에서 광주의 도청이 진압되는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구로구청 진압으로 대통령 선거는 막을 내렸던 것이다.
김민수 씨는 귀국하자마자 지켜본 대통령 선거의 모습을 통해 그가 이 땅을 떠나 있었던 7년 동안의 역사를 짐작해보았다. 그건 형체를 파악할 수 없는 공포였다. 아버지의 말처럼 이건 너무 극단적이다.
10
대전으로 향하는 경부선 열차 안에서 김민수 씨와 준채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경찰들의 눈을 피해 호남선이 아니라 경부선 열차를 타고, 대전을 통해 광주로 잠입해 들어간다는 기발한 모험이 자아냈던 첩보영화적인 도취감이 수그러들기 시작하자, 둘은 다소 따분해지기 시작했고, 그 따분함을 매워줄 만한 일거리로는 이야기밖에 별다른 대안이 없어서였으리라. 대전에 도착하기까지 거의 두 시간에 육박하는 긴 시간 동안의 대화는 김민수 씨의 아주 짧은 한마디의 질문으로 비롯되었다.
“도대체 10년 전 광주에서 일어났던 그 비극이 지금 무슨 의미를 갖는다는 건지 난 잘 모르겠네.”
김민수 씨는 준채와 나란히 앉아,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철로변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문득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 말은 질문인지 아닌지조차 분명하지 않을 정도로 애매한 모습을 띠고 둘 사이에 놓였다. 그러고 보면 김민수 씨는 그 말을 무심코 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했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미묘한 뉘앙스들을 머금은 한 문장이니까. 그 말은 어떻게 보면 순전히 무지한 사람의 정직한 질문인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대단히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의 전면적 인 부정문인 듯도 하고, 어떻게 보면 상대의 인식을 교활하게 허물어가려는 전략적인 선전포고의 의문문인 듯도 하고, 가장 최악의 경우 일종의 패러디일 수도 있지 않은가. 김민수 씨의 그 무심한 말을 짧게 요약하면 그건 바로, 우리에게 광주는 무엇인가가 아닌가. 이건 준채가 하려는 연극의 제목이다.
준채는 짐짓 당황하며 김민수 씨에게 그 말의 진의를 묻는 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래서 김민수 씨는 한마디를 더 보태야 했다.
“내 얘기는 어쨌건 광주가 87년의 대통령 선거와 88년의 총선, 그리고 그 이후의 광주 청문회를 통해서 일단 시들해져버린 이슈가 아닐까 하는 말이네.”
김민수 씨는 말끝에 ‘자네 편에 서서 생각하더라도 말이야’ 라는 말을 덧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얘기하려 해도 결국 모든 말의 배후에는 ‘당신은 어느 쪽이야’ 라는 추궁이 도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시 보태어진 그 두 번째 문장을 준채는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준채는 이내 경계하던 표정을 풀며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김민수 씨는 그 미소를 보며 잠시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금방 김민수 씨는 준채의 그 미소가 그 전날 자기의 연구실에서 준채가 자기에게 했던 말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미국에서 공부하셨기 때문에 잘 모르실 겁니다. 준채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전에는 그 말이 편견이 없다는 말과 동의어였던 적도 있었다. 김민수 씨는 순간 섬뜩한 공포를
느꼈다.
“선생님은 올해가 90년이니까 80년대는 끝났다고 생각하십니까? 올바른 해결 없이 한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올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준채가 김민수 씨에 게 물었다. 확실한 의문문으로.
“물론 나는 달력 한 장이 넘어갔다고 시대가 변화하리라는 신앙을 갖는 사람은 아니네만. 혹시 자네야말로 그 달력의 미신을 신봉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고 싶네.”
“달력의 미신이라니요?”
“자네는 어제 나에게 힘주어 말하지 않았나. 오늘이 광주에서의 그 끔찍했던 비극이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날이라고.”
“제 말씀은 아직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습니다.”
“그럼 올바른 해결이란 뭔가. 나는 자네의 그 ‘올바른’이란 말 자체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네. 도대체 무엇이 올바른가. 무엇이 올바를 수 있는가 말일세. 자네의 그 올바르다는 말은 자네의 주관적 의지 혹은 태도를 강변하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느낌이야.”
김민수 씨는 이 대목에서 자기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길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되토록 말을 적게 하고 많은 말을 들어야 한다고 작정하고 있었는데, 자꾸 자신의 전략을 배반하고 있는 셈이었다.
“글쎄요, 저도 선생님의 그 말씀은 전혀 납득할 수 없군요. 왜 올바르다는 말이 객관적인 인식과 실천에 대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건지 말예요.”
“그럼 한번 말해보게. 그 객관적으로 올바른 인식과 실천에 대해서.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 인가.”
11
준채는 곧바로 김 민수 씨에게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무척이나 장황했다. 그 설명을 준채가 한 그대로 여기에 옮겨 적는 일은 상당히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불가능하기도 하다. 왜냐하면 나는 준채의 말을 어느 정도, 아니 거의 이해하며 들어줄 수 있는 정도의 의식은 가지고 있지만, 그와 동일하거나 혹은 유사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의 부족한 기록자적 자질이나 다소 불성실한 태도에 대해 너무 심한 질타는 하지 마시기를. 부디. 생각건대 기록자의 소임이란 있었던 일을 곧이곧대로, 한 치의 보탬이나 빠뜨림 없이, 모두 남겨놓는 일은 아니지 않을는지. 더군다나 어느 기록자이든 간에 그 나름의 한계는 갖게 마련이며, 그 한계 속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 대목을 이런 방식으로 지나쳐보려 하기도 했다. 준채는 김민수 씨에게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설명은 무척 장황했다. 그러나 그 자세한 내용은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자. 왜냐하면 앞서도 말했거니와 우리 모두는 지난 연대 10년간에 걸쳐 그 비극을 수도 없이 반복 학습해왔으므로.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이건 또 지나친 회피인 것 같다. 하여 나는 절충하기로 했다. 준채의 말을 간추려보기로. 하지만 또다시 나를 곤혹수럽게 하는 것은 내가 그의 말을 일목요연하게 간추릴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거니와 나는 그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랴. 두서없이나마 간추려보는 수밖에 .
준채는 그 장황한 설명의 서두를 마르크스의 인용구로 장식했다. 인간만이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역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조건 안에서이다. 뭐 그런 투의 말이었을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하지만 정말 장식적이었다. 그 말을 인용할 때 준채의 표정에 떠올랐던 그 오만함이란.
설명은 계속되었다.
10년 전 광주에서의 비극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민주화의 열망이 군사파쇼에 의해 짓밟혀버린 것으로만 알았다. 그건 그것으로 완결된 비극이었다. 무고한 희생이었고, 그래서 억울하고 비탄스러울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차츰 사람들은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광주는 끝나 버린 것이 아니라 비로소 시작된 것이라는 걸, 사람들은 그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붓기 시작했다.
비극이란 애당초 이른바 민중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아니다. 그것은 지배자들의 세계관이다. 어떤 강력한 슬픔이 몰려왔을 때, 지배자들은 그들이 관리하고 있는 민중들을 펑펑 울게 만든다. 공포와 연민, 그리고 카타르시스. 그 구조 안에서 민중들은 울다 지쳐 잠들고, 날이 밝으면 다시 노동한다. 그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빨리 낙관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희극이다.
희극이 시작되었다. 일단의 혁명적 로맨티스트들에 의해서. 그들은 그 희극의 개막을 부산에 있는 미문화원에서 시도했다. 방화와 함께 시작된 첫 공연이 비록 무자비한 탄압에 의해 몇 분 만에 끝이 나고 말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이랬다. 광주는 민중들의 자발적인, 새로운 세계에 대한 열망에서 비롯된 혁명적 투쟁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이 땅의 민중을 억압하고 있던 적들의 정체가 여실히 폭로되었다는 것이다. 그 적은 다름 아니라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남한을 대소(對蘇) 방파제화하기 위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예속시킨 미제국주의자들과, 그들의 괴뢰인 군사독재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광주의 희생이 가져다준 교훈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갈 주체이자 그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바로 민중들이라는 사실과 그 투쟁 역량을 깨닫게 해준 것이고, 이제 그 민중의 자발적이고 분산적인 혁명적 에네르기를 지도해낼 과학적인 혁명조직만 있으면 역사적 필연에 의해 타락한 세계는 붕괴하고, 아무도 착취하지 않고 억압하지 않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세상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먼저 지식인과 학생들로 구성된 혁명적 로맨티스트들이 전위에 서서 적들과 싸우기 시작했고, 혁명의 시작이 항용 그렇듯이 그들은 다소 무모해 보였다. 그들이 무척 보잘것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런지 막강한 그들의 적들은 그들에 대해 민감하게 대응했다. 사정을 두지 않고 때려잡은 것이다. 그러자 민심이 차츰 돌아서기 시작했다. 인간은 잔인한 강자보다 얻어맞는 약자의 편을 들게 마련이므로.
전세는 역전되어갔다. 탄압의 정도가 심화되어갈수록 혁명의 에네르기도 고조되어갔다. 작용이 크면 반작용도 그만큼 커진다는 게 뉴턴에 의해 발견된 운동의 법칙이 아니던가. 그건 정말 과학적이다.
그리하여 1986년 겨울, 건국대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이 헬리콥터까지 동원된 진압작전에 의해 무더기로 구속되었을 때 혁명은 이미 무르익었다. 톡 하고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런데 결국 톡 건드리고 만 것이다. 박종철이란 바늘로. 눈치도 없이.
1987년 민중들은 승리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를 굳혀줄 지도역량이 아직 없었다. 준채의 말인즉슨 그랬다. 도대체 그 지도역량은 언제나 제대로 만들어 질는지.
아무튼 그래서 그 승리는 불과 몇 달 만에 도둑맞고 말았다는 것이다. 다시 적들의 치하다. 그러나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아니 잠시 늦어졌을 뿐 적들은 점차 쫓겨가고 있고 민중은 성장하고 있다. 나아지고 있지 나빠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 그러면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가. 그건 영원한 출발점인가. 준채의 설명에 따르자면, 광주의 학살 원흉들이 통치하고 있는 한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2
기차가 대전에 도착했다. 김민수 씨와 준채는 이제 호남선이나 전라선으로 기차를 갈아타야 했다. 경부선 열차가 결코 광주까지 갈 리는 없었으니까. 김민수 씨는 대전역을 빠져나오다 말고 준채에게 또 물었다.
“자네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는 읽어봤나?”
“예, 읽어봤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면 그 정도 공은 들여야지요.”
준채가 대답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그러니까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킨 곳은, 서베를린이 아니고 동베를린이야.”
“그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고, 있었던 일일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내 말은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민중들의 반란은 일어날 수 있다는 거야. 뭐 굳이 그 옛날의 일을 들출 것도 없지. 작년 북경에서의 대학살이 있었고, 그 이후로 동구에서 일어난 민중봉기를 봐도 그건 너무 당연한 사실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지요.”
“북경의 대학살과 광주에서의 학살은 무엇이 다른가?”
“학살이란 말이 같을 뿐이죠. 그 배경과 주체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럼 좋은 학살도 있나?”
“단편적으로 드러난 사건만 가지고 비교하려는 건 옳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총체적으로 봐야지요. 요즘 일어나고 있는 사회주의권의 변화를 틈타서 한반도의 변혁운동을 시대착오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반동들의 술책입니다. 한반도의 변혁운동은 한반도라는 구체적 공간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고, 거기에는 그 나름의 역사와 법칙이 있으니까요.”
“내 이야기는 미국만 학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련도 학살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야. 1953년 동베를린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걸 부정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말했단 말이야. 미제국주의자나 파시스트 들만이 학살을 저지르는 것처럼 말이야.”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광주라는 구체적 사건이 그들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말을 했을 뿐이죠.”
“자네는 그 나쁜 역사를 바로잡는 길이 사회주의혁명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자네는 그 관점으로 소위 광주를 바라보고 있단 말일세.”
“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말을 썼던가요?”
“안 썼나? 그러면 민중혁명인가?”
둘 사이의 대화는 잠시 끊어졌다. 그들은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서 대전역으로 가야 했으므로. 호남·전라선 열차는 서대전역을 통과한다. 그들은 택시를 잡아탔다.
“자네는 브레히트의 연극이 왜 실패했다고 생각하나?”
택시를 타자, 김민수 씨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브레히트의 연극이 실패한 것은 아니지요. 서독 작가 귄터 그라스가 그렇게 작품을 썼을 뿐이지요.”
준채는 그렇게 대답했다.
“아무튼 귄터 그라스의 「민중들 반란을 연습하다」 속에서 브레히트는 왜 실패한 걸까?”
“그 작품 속에서의 브레히트는 용기 있게 노동자·농민의 편에 서지 못했기 때문이지요. 그는 비겁하게도 봉기를 일으킨 노동자들의 성명서도 써주지 않았어요. 아니 장난으로 써주기는 했지요. 그러고는 노동자들의 앞에 서서 적들에게 투쟁하는 대신, 적들이 지어준 극장 안에서 쓸데없는 연극이나 만들고 있었지요.”
브레히트가 기껏 노동자들에게 써준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당 서기장 동무. 발포해선 안 됩니다. 금번의 이 국민 축제는 피를 흘려야 할 것은 못 됩니다. 시민들은 다만 위급한 경우에 일어날 반란에 대비하여 우리들의 시가가 충분히 넓은지 어떤지를 시험 해보고자 할 따름입니다. 그런 다음 이들은 다시 얌전하게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서 열두 조각의 감자 케이크를 먹어버릴 것입니다. 동무, 한데 이번에 어떤 반란에 대비하여서도 거리와 광장은 충분히 넓다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만약 이 백성들이 당신의 마음에 들지 않거든 더 마음에 드는 국민을 선택하십시오.
이건 장난이다. 브레히트는 죽어가며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에게 이 따위 빈정대는 성명서를 써준 것이다. 노동자들은 분노했다.
“그러면 누가 노동자·농민의 편에 섰나. 소비에트가? 동독공산당이? 그들이야말로 노동자·농민의 적이 아닌가, 자네의 표현대로 ‘적’ 말일세. 그들이 전차를 몰고 와서 민중을 학살했어.”
김민수 씨가 말했다.
“선생님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요? 다 좋습니다. 그래요. 사회주의가 아니면 어떻습니까. 10년 전 광주에서의 학살은 있었고, 그 악랄한 학살의 원흉들이 이 나라를 통치하고 있어요. 그걸 내버려두자는 말씀은 아니 겠지요?”
준채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약간 흥분되어 있었다. 김민수 씨는 잠시 드드끔했다. 그는 정말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던 건지 잘 모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신뢰 회복이 아니던가. 김민수 씨는 자기가 이야기를 위태로운 지경으로 끌고 갔다는 걸 깨달았다. 왜 그랬을까? 여하튼 그런 위험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런 건 아니지. 그래서 이렇게 광주로 가고 있지 않나. 자네 말대로 난 잘 모르니까.”
13
그 작품 속에서 브레히트는 그의 연극이 파국을 맞자 이렇게 탄식한다. 우리가 자신을 고칠 수 없는 한, 셰익스피어를 고칠 순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단 말일세.
브레히트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코리올라누스를 민중들의 코리올라누스에 대한 승리, 즉 희극으로 개작하려 했었는데 실패했다. 왜? 그의 말대로라면, 자신을 고칠 수 없었으므로.
김민수 씨와 준채는 서대전역에 도착해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대전역도 서울역과 마찬가지로 삼엄한 경비망이 쳐져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낼 수 있는 꾀에 비해 자신들을 가로막고 있는 자들의 장벽이 얼마나 거대한 것인가를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고속버스 터미널로 발길을 돌렸다.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고속버스라고 가만 놔두었을 리가 없었다. 둘은 낙담했다. 아니 김민수 씨야 뭐 별반 낙담할 것도 없었다. 광주에 가지 못하면 둘 사이의 게임도 무산되어버리니까. 차라리 홀가분하달 수도 있겠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김민수 씨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암울해졌다. 자기가 이런 나라에 왜 다시 찾아들었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처럼 그도 다시 이 땅을 뜨고만 싶었다.
“자네 그 공연을 끝내 강행할 텐가?”
김민수 씨가 마치 한숨을 쉬듯 준채에게 물었다.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준채가 대답했다.˙
“포기할 리가 없겠지. 나도 내가 한심스러워. 나도 그 공연을 굳이 말리고 싶지 않네.”
“선생님은 광주에 가시기도 전에 생각이 바뀌셨군요.”
준채가 반색을 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난 단지 그 공연을 허락하고 안 하고 할 권한이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면 말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하는 걸세. 물론 그렇다면 자네도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내가 광주에 가건 말건, 그래서 생각이 바뀌건 말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생각이 바뀐다고 해도 나는 자네의 공연을 보장해줄 능력이 없네.”
“저도 그걸 기대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선생님께 제 거짓말이 상당히 이유있는 거짓말임을 보여드리고 싶은 거니까요.”
준채가 말했다. 둘은 마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아무튼 오늘 광주로 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군. 어쨌든 나는 광주에 가지는 않았지만 자네의 거짓말이 상당히 이유 있는 것이라는 것 쯤은 알아챘네. 우리를 막고 있던 전경들이 그걸 깨우쳐주었어. 하지만 생각이 결정적으로 바뀐 것은 아니네.”
“그럼 어떻게든 광주로 가야겠군요. 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말이에요.”
“광주에 가면 뭐가 달라지나?”
“선생님과 저 사이는 달라지죠. 그리고, 혹시 모르죠. 모든 게 달라질지.”
그때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그들 사이로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왔다.
그가 물었다.
“광주에 가시는 겁니까?”
김민수 씨와 준채는 당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는 택시 운전사였으니까.
“광주에서 온 택신데, 급하시면 타고 가시지요.”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 5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택시 운전사가 그렇게 말하자 준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셨다.
“저는 학생인데, 검문 때문에 버스를 못 타고 있거든요. 택시는 괜찮을까요?”
운전사는 물론이라고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광주까지 갈 수 있게 해주겠노라고. 준채는 머뭇거리고 있는 김민수 씨를 잡아끌고는 운전사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광주행은 성사되는가 보았다.
14
김민수 씨와 준채는 광주행 택시를 타고 대전 시내를 빠져나가면서 서울을 떠나고부터 내내 긴장되어 있던 몸을 오랜만에 편안히 이완시켜보았다. 그들로서는 아마 태어나고 나서 가장 긴 택시 여행이 될 것이었다. 대전에서 광주까지 무려 2백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택시로 간다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가격은 그리 많이 먹히는 편이 아니었다. 광주 출신인 택시 운전사의 배려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은 광주까지 가는 고속버스 요금만 내기로 하고 그 택시를 탄 것이다.
“그래, 광주 사람들은 다 알아.”
운전사는 준채의 사정 이야기를 듣더니 그렇게 말했었다. 다 알기는 뭘 다 안다는 걸까. 김민수 씨는 대충 짐작하지 못하겠다는 바는 아니지만, 준채와 운전사가 암호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으로 약간 불쾌해졌다. 암호는 불온해 보이지 않는가. 남은 소외시키고 자기네들끼리만 대화하는 거니까. 그래서 어디 제대로 된 의사 전달이 될까. 암호를 쓰는 집단치고 민주적인 집단을 본 적이 없다.
“광주는 지금 어때요, 아저씨?”
준채가 운전사에게 물었다.
“난리야. 난리. 서울에서 내려오던 학생 하나가 기차에서 검문을 받다가 떨어져서 중태라는구먼.”
운전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그렇게 대답하자, 김민수 씨와 준채는 깜짝 놀랐다. 결국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준채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되긴 어떻게 돼. 죽겠지. 또 터져야 돼.”
“뭐가요?”
이번에는 김민수 씨가 물었다.
“뭐긴 뭐야, 10년 전처럼 들고일어나야 한다는 거지.”
“그런 일이 또 일어나서야 되겠어요? 사람들이 또 얼마나 희생되라고 말예요.”
김민수 씨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대꾸하며, 운전사를 더 이상 흥분시켜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벌써부터 차가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운전사가 흥분할 때마다.
“청문회고 뭐고 다 필요 없어. 돈 몇 푼으로 보상이 될 일인가, 그게? 이놈의 5월만 오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져, 억장이.”
“아저씨도 가족 중에 누가……”
준채가 말끝을 맺지 못하며 운전사에게 물었다.
“광주 사람치고 가족이나 친척 중에 하나라도 죽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15
택시는 대전에서 호남고속도로로 진입하는 톨게이트에 당도했다. 그리고 결국 거기서 검문에 걸리고 말았다. 톨게이트에까지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김민수 씨와 준채, 그리고 운전사는 자신들의 방심을 뉘우쳤지만 이미 늦었다. 경찰들이 준채에게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길은 여기서 끝이 나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안 가면 될 거 아냐. 사람은 왜 끌어 내려, 우리 다시 대전으로 돌아갈 테니까 상관 말아.”
운전사가 그렇게 빽 소리를 질러대더니, 차를 거칠게 대전 쪽으로 되돌려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버리는 것이었다. 경찰들도 기가 막혔는지 멍하니 지켜보며 서 있을 뿐이었다.
“아저씨, 어떻게 하실 작정이세요? 정말 대전으로 돌아가실 거예요?”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준채가 묻자, 운전사가 대답했다.
“대전에는 왜 가? 광주로 가야지.”
“어떻게요?”
“국도를 타고 가지, 뭐.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택시는 논산으로 가는 국도로 접어들었다.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그들이 탄 차가 서쪽으로 달리고 있는지, 차 앞쪽 창으로 가느다란 황혼녘 햇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국도를 타고 가면 너무 늦지 않을까요? 논산쯤에서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논산은 경계가 좀 느슨하기도 할 테니까.”
김민수 씨의 제안이었다. 그는 너무 늦으면 좀 곤란했다. 빨리 광주에 도착해서 생각이 바뀌든 안 바뀌든 광주를 한번 둘러보고 내일 오후쯤엔 서울에 도착하고 싶었다. 걱정하고 있을 아내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럴까요?”
운전사가 대답했다. 그들 셋은 그때부터 논산에 도달할 때까지 고속도로 진입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작전은 이렇다. 우선 김민수 씨와 준채가 옷을 바꿔 입는다. 문제가 되는 건 준채니까 준채에게 나이 들어 보이는 옷을 입히면 아무래도 낫지 않을까 해서였다. 날도 어두워졌으니 경찰들이 잘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를 터였다. 그들은 중간에 내려서 소주 두어 병과 안주거리를 샀다. 입에서 술 냄새를 풍기면 행락객으로 가장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논산 톨게이트에서 광주행 표가 아니라 이리행 표를 끊기로 했다. 어차피 고속도로로 들어서면 광주로 가든 이리로 가든 상관할 자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광주 톨게이트에 도착하면 준채는 미리 차에서 내려 걸어서 톨게이트를 통과하면 된다. 그사이 택시는 약간의 벌금을 물고 톨게이트를 통과해서 기다리고 있고, 다시 합류해서 광주 시내로 들어가기로. 최악의 경우, 그러니까 논산 톨게이트에서도 검문에 걸릴 경우, 대전 톨게이트에서처럼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광주에 가면 되니까.
논산 톨게이트에서 그들은 무사히 호남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들이 염려하고, 치밀하게 작전을 세웠던 보람도 없이 그곳은 아무도 경계하고 있지를 않았다. 운전사는 눈치 빠르게도 아예 광주행 표를 끊어버렸다. 그들은 택시가 호남고속도로에 들어서서 빠른 속도를 내자 무의식중에 보두 환호성을 질렀다.
16
이제 광주에 도착하는 일만 남았다. 날은 햇빛 한 점 없이 어두워져버렸다. 그들이 탄 택시는 한 점의 헤드라이트에 의지해서 암흑 속의 호남고속도로를 무섭게 질주해나갔다. 운전사는 그 일에 전념하느라 일체 말을 하지 않았다.
“자네 구로자와가 만든 「나생문」이란 영화를 본 적이 있나?”
김민수 씨가 준채에게 물었다. 그는 그 어둠 속에서 엉뚱하게도 그 영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오. 그런데 그건 왜요?’'
준채가 의아스럽다는 듯 되물었다. 김민수 씨는 준채에게 자기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본 적이 있는 영화 이야기를 장황하게 해주기 시작했다.
나무꾼과 승려가 나생문 밑에서 억수같이 내리는 비를 피하고 있다. 그들은 며칠 전 숲 속에서 벌어진 끔찍한 사건의 증인으로 출두했다가 돌아가는 길이다. 며칠 전 숲 속에서는 타조마루라는 산적이 숲 속을 지나가던 부부를 습격해서는 여자를 남편 앞에서 범하고 그 남편을 살해한 사건이 벌어졌었다. 승려는 그 부부가 숲 속을 지나가는 걸 목격했었고, 나무꾼은 나무하러 가는 길에 남자가 칼에 찔려 죽어 있는 걸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했었다. 둘은 공포에 질려 있다. 승려는 ‘너무 무서운 일이야’라는 말만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그때 행인 하나가 비를 피하기 위해 그리로 뛰어들어온다. 행인이 공포에 떨고 있는 승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묻는다. 승려가 그 끔찍한 사건에 대한 재판을 행인에게 전해준다.
체포된 범인, 타조마루의 진술은 다음과 같았다.
“내가 이제 와서 무슨 거짓말을 하겠는가. 어차피 처형당할 덴데. 그날 내가 그 남자를 죽이고 그 여자를 범한 건 바람 때문이었다. 나는 그날 숲 속에서 잠을 자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 앞을 지나갔다. 그때 바람이 불어서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베일이 흩날렸다. 나는 천사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자, 그녀의 남편을 죽이고서라도 그녀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욕정에 사로잡혔다. 나는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보물이 묻힌 무덤이 있다는 거짓말로 그녀의 남편을 유인하여 밧줄로 묶어놓고, 그 앞에서 그녀를 범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단검을 뽑아 들고 반항했으나 이내 내 품에 안겨왔다. 그녀를 범하고 나서 내가 떠나려 하는데, 그녀가 나를 붙들고 말했다. ‘둘 중의 하나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다. 남편과 당신이 싸워서, 이긴 자가 나를 차지하라.’ 나는 남편을 풀어주고 결투를 시작했다. 격렬하게. 무려 23합이나. 나와 싸워서 일찍이 20합을 넘긴 자가 없었는데, 그는 아주 용맹했다. 그사이 여자는 도망갔고, 나는 그 남자의 검을 팔아서 술을 마셨다. 여자의 단검은 모른다. 귀중한 물건처럼 보였다.”
산적에게 욕을 당하고. 남편을 잃은 여자가 진술하기를,
“내가 이 마당에 무슨 거짓말을 하겠느나 산적은 나를 범하고 난 후 남편을 비웃었다. 나는 남편의 괴로움을 참을 수 없었다. 산적이 떠나고 나서, 나는 남편 앞에 엎어져 울음을 터뜨렸다. 남편에게 매달렸다. 그런데 그때 남편의 시선이…… 나는 그의 눈을 기억한다. 슬픔도 아니고 분노도 아닌, 차가운 증오의 눈을. 나는 남편에게 그렇게 나를 바라보지 말고, 죽여달라고 말했다. 내가 산적에게 반항할 때 빼 들었다가 떨어뜨린 단검을 가져다주며. 그러나 남편의 시선은 여전했다. 나는 견딜 수 없었다. 도망갔다. 자살하려 했지만 실패했
다.”
무당의 입을 통해, 죽은 남편이 억울함을 토로한다.
“그 일이 끝나자 산적이 아내에게 말했다.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범한 거요. 남편과 불행하게 사느니 나랑 떠납시다. 이 불쌍한 남편 앞에서 아내는 말했다. ‘데려가주세요. 그리고 날 데리고 가기 전에 내 남편을 죽여주세요.’ 그러자 산적은 아내를 땅바닥에 내쳐 쓰러뜨리고는, 짓밟고 서서 내게 물었다. ‘이 여자를 죽여줄까? 당신이 죽이라면 죽이겠다.’ 그 순간 나는 산적을 용서할 수 있었다. 그사이 아내가 도망쳤고, 산적이 그녀를 쫓아갔다. 얼마 후 돌아온 산적이 나를 묶었던 밧줄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산적도 떠났다. 모든 것이 고요했다. 어디서 누군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아내가 떨어뜨리고 간 단검으로 자살했다. 죽어가는 순간 누군가 다가왔다. 조용히. 그 사람이 내 몸에서 단검을 뽑아가는 것을 느꼈다.”
승려가 사건의 당사자인 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하는 동안, 나생문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던 세 사람, 승려, 나무꾼, 행인도 그 이야기 사이마다 이야기를 나눈다. 승려는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한다”고 말했고, 행인은 “거짓말이어도 상관없다.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인간은 잊기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했고, 나무꾼은 “다 거짓말이다. 죽은 자의 말도 거짓말이다. 단검은 없었다. 그는 긴 칼에 찔려 죽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행인이 나무꾼에게 말했다. “재미있어지는걸. 자네는 모든 것을 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는가.”
나무꾼이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연루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 일이 끝난 후 여자는 울고 있었고, 산적은 그녀를 달래며 ‘잘살게 해줄 테니 같이 가자. 그러지 않으면 죽이겠다. 당신이 산적질을 그만두라면 그만두겠다. 대답하라’고 했다. 그러자 여자가 울음을 그치며 대답하기를, ‘어떻게 여자가 그런 질문에 대답할 수 있겠어요?’ 산적이 여자에게 ‘당신 뜻을 알겠소’라고 말하고는 단검을 가지고 가서 남편을 풀어주었다. 남편이 여자에게 말했다. ‘부끄러움도 없는 것. 왜 자살하지 않느냐.’ 그리고 다시 산적에게 말하기를, ‘여자를 데리고 가고 싶으면 데리고 가라. 나는 이런 여자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싸우고 싶지 않다.’ 산적이 그냥 떠나려 하자, 여자는 산적을 붙들고 울었다. 여자는 자기를 버리려는 두 남자에게 발작적으로, 싸울 것을 충동질했다. 그러자 둘은 싸우기 시작했다. 산적의 말과는 달리 그 둘은 전혀 싸움을 할 줄 몰랐다. 치졸한 싸움이었다. 겁에 절려 칼을 허공에다 마구 휘두르다가, 산적의 칼이 땅에 꽂히자, 남편이 일방적으로 칼을 휘둘렀고, 그러다가 남편의 칼이 나무 밑동에 꽂히자, 산적은 땅에 꽂힌 자기 칼을 집으려 필사적으로 ˙기어갔고, 남편은 산적의 다리를 잡고 매달렸다. 결국 산적은 칼을 집어 살려달라구 애원하는 남편을 죽였다. 그 사이 여자는 도망갔다. 산적이 칼을 뽑아 들고 떠났다.”
이야기를 듣고 행인이 말했다. “거짓말!” 나무꾼이 대꾸했다. “내 눈으로 본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김민수 씨는 영화 이야기를 중단했다. 그다음부터는 이야기가 자기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말 것이라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김민수 씨는 당황했다. 그리고 자기가 마치 연극에 실패해버린 브레히트 꼴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요? 선생님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죠?”
준채가 물었다.
“응, 그 뒤는 별로 필요 없는 얘기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자기의 의도와 맞지 않는 이야기는 필요 없는 이야기다. 사람은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기 위해 이야기하지, 불리해지려고 이야기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자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기에게 지극히 불리한 이야기를 떠벌리는 바보들이 있기는 하지만서도.
“선생님은 왜 그 영화 이야기를 하신 거죠?”
“객관적인 사실이란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누구에겐가 해석된 사실이 있을 뿐이지.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네. 그들이 그걸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말일세.”
“저에게 빗대어 말씀하시는 겁니까?”
“광주도 마치 그 영화 속에서 벌어진 사건과 같지 않을까. 진상은 밝혀질 수 없고, 사람들은 각기 나름의 해석된 광주를 갖고 있을 뿐이지. 그 해석된 광주란 바로 자기들의 이해와 의도에 따라 해석된 광주일 테고 말이야.”
“그럴지도 모르죠. 어차피 인간에게 세계란 해석된 세계니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변혁하는 것입니다.”
준채는 또 턱 없이 마르크스를 인용했다.
“변혁하기 위해 해석하는 거겠지. 그러나 그 해석 속에 지나치게 변혁의 의도가 들어가 있는 걸 테고. 나는 잘 모르겠네.”
김민수 씨는 왠지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왜 자꾸 자기가 이런 식의 말들을 계속하고 있는 것인지, 그 말들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그도 잘 모르겠다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가장 올바른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있습니다. 해석하기 이전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물론 변증법적으로 드러나지요.”
준채가 말했지만 김민수 씨는 대꾸하지 않았다. 김민수 씨는 갑자기 멀미를 느꼈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부터는 해본 적이 없는 멀미였다. 그는 그 혼미한 머릿속에서 어떤 문장이 자꾸 새겨지는 걸 보았다. 그 문장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나는 나무꾼이 아닐까. 그는 얼른 닫혀 있는 차창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을 쐬자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17
그들이 탄 차는 이윽고 광주에 이르렀다. 참으로 긴 여행이었다. 운전사는 톨게이트 2백여 미터 전방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그가 말했다.
“여기서 내리지, 학생.”
준채가 문을 열고 내렸다. 그때 김민수 씨는 불쑥 준채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
“선생님은 그냥 타고 가세요. 제가 금방 뛰어서 쫓아갈 테니까요. 톨게이트 지나서 기다리고 계세요.”
준채가 말했다.
“아냐, 나도 좀 바람을 쐬어야겠어. 멀미가 나서 말이야.”
김민수 씨가 차문을 쾅 하고 닫으며 대답했다.
“기다리고 있을 데니 빨리들 오시요, 잉.”
운전사가 광주에 다 왔다는 신호라도 하듯 전라도 사투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차를 몰아 톨게이트 쪽으로 달려갔다.
김민수 씨와 준채는 미리 앞서가는, 자기들이 타고 온 택시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쪽으로 환하게 불 켜진 광주 톨게이트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양옆으로는 야트막한 야산이 어둠에 덮인 채 느슨한 자세로 누워 있는 것처럼 보였다. 거기를 넘어가면 광주다.
김민수 씨는 준채를 따라서 고속도로 옆으로 난 논둑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밤공기를 마시자 멀미가 가시는 듯했다.
“공연을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할래?”
김민수 씨가 달려가면서 준채에게 물었다.
“글쎄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준채가 대답했다. 김민수 씨는 껄껄 웃고 말았다.
야트막해 보이던 야산도 한밤중에 넘으려니까 보통 힘든 것이 아니었다. 김민수 씨는 오랜만에 이마와 등줄기로 물 흐르듯 흐르는 땀을 느꼈다. 그건 그가 7년간이나 떠나 있던 이 땅의 역사 속으로 다시 들어오기 위한 수고였다. 그는 비로소 7년간의 부재를 메우기 위한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귀국한 것이라고.
18
그들은 그렇게 광주에 갔다. 광주에 가서 그들이 무슨 일을 보고 겪었는지, 그래서 김민수 씨는 어떻게 생각이 바뀌었는지, 그리고 준채가 과연 그 공연을 할 수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내가 알 바 아니다. 그 뒤는 별로 필요 없는 얘기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나는 김민수 씨가 준채에게 해주다가 중단한 영화 이야기를 마저 적는 것으로. 이 이야기를 마치기로 하겠다.
행인과 나무꾼이 서로 거짓말이다 아니다를 가지고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갑자기 어디선가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행인은 말다툼을 멈추고 재빨리 그리로 뛰어갔다. 나무꾼과 승려가 그 뒤를 쫓아갔을 때, 행인은 누군가 버리고 간 아기에게서 강보를 벗겨내고 값나갈 만한 물건들을 주워 담고 있었다. 나무꾼이 행인에게 달겨들어 멱살을 움켜잡으며 말했다. “이 짐승만도 못한 놈.” 행인이 대꾸하기를, “짐승만도 못한 건 아이를 버린 부모들이야.” 나무꾼이 “이 악마 같은 이기주의자” 라고 하자, 행인은 “인간은 누구나 다 이기적 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네. 자네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살아 있다는 건 자네가 이기적이라는 증거야. 자네도 죽은 그 남자의 몸에서 단검을 훔치지 않았나. 값나가는 단검을 말이야. 그랬기 때문에 자네도 거짓말을 한 거야”라고 말하더니, 자기 멱살을 잡고 있던 나무꾼의 손을 가볍게 뿌리치고는 길을 떠난다. 비는 그새 그쳐 있었다.
아기를 안은 나무꾼과 승려는 비가 그쳤는데도 떠날 줄을 모르고 나생문 밑에 한참 동안을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다가 나무꾼이 말했다. “나도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 중의 하납니다.” 그러자 승려가 그에게 말했다. “고맙소. 나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게 해주어서.” 그러고 나서야 그들은 길을 떠났다. 승려는 나생문 저쪽으로, 아기를 안은 나무꾼은 나생문 이쪽으로.
『문학정신』 51호(1990. 12); 『검은 상처의 블루스』 (문학과지성사 1995)
주인석(朱仁錫)
1963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석사학위 (극작과)를 받았다.
199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에 중편소설 「그날 그는」 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이후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 연작을 묶은 연작소설집 『검은 상처의 블루스』 와 장편소설 『희극적인, 너무나 희극적인』 을 퍼냈다.
1986년 황지우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를 희곡화하여 극단 연우무대에 올리는 등 희곡 창작과 연극연출 활동도 해왔으며, 희곡집 『통일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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