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5일 연휴 전 날에 이석증 씨가 찾아왔다. 구토가 났지만 시험 삼아 밥을 먹었더니 완전히 반품을 했다. 하는 수 없이 병원응급실로 가서 일단 구토를 멈추는 처치를 받고 돌아와서 연휴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다.
흔히 건강을 잃었을 때나 삶이 너무 힘이 들 때 자연스럽게 ”이렇게 살아서 무엇하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디. 그럴 때 나는 “이렇게 죽어서 무엇하나?”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당장 죽을 만큼 고통스럽지가 않다면 “이렇게 죽어서 무엇하나?”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통을 이기며 살아야 할 일이다. 왜냐하면 죽음이나 삶이나 어차피 한 번 밖에 없는 것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연휴 후에 신경과에 가서 진치료를 받고 2 주일 약을 처방 받았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균형감각이 부족해져서 지팡이를 의지하는 것이 안전하다. 그런데 평지를 걸을 때는 지팡이 하나에 의자하면 되지만 경사가 진 뒤산을 산책할 때는 양 손에 등산용 지팡이를 짚어야 편안했다. 평소에 에베레스트산이 아닌 동네 뒤산을 쌍지팡이를 들고 오르는 사람들을 보면 조금 우수꽝스럽게 보였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무척 편했다.
그래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다.”를 말이 생각나서 이 참에 뜻을 찾아 보았더니 “어떤 일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간섭하여 나서다.”로 나와 있었다. 두 다리를 못 쓰는 장애인은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 없어서 두 개의 지팡이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이있거나 꼭 관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두 다리가 없는 사람이 쌍지팡이라도 짚고 볼 일을 보러 나가듯, 어떤 일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거나 반대하기 위해 나서야 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었다.
이석증 덕분에 균형을 잡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한번 절감했다. 사람이 이상하게 되는 것은 균형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신이 아닌 이상 균형이 완전하게 잡힌 사람은 없다. 씨소우는 불균형을 즐기는 놀이다. 불균형 상태에서 발을 구르는 반동으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정처럼 좌우가 균형이 딱 맞아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재미가 있을 리가 없다. 씨소우는 불균형 상태여야만 작동할 수 있다. 한 쪽이 무겁고 한 쪽이 가벼운 상태의 불균형이 고정되어 버리면 씨소우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이 한 쪽으로 완전히 치우쳐버리면 작동하지 못하는 씨소우처럼 되어 버려서 씨소우처럼 불균형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어렵다.
나는 예수가 가르친 것이 삶에서 균형을 잡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영원과 순간의 균형, 영혼과 육체의 균형, 이상과 현실의 균형,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균형, 어느 것 하나 똑같은 무게가 될 수도 없지만 한 쪽이 없으면 완전히 기울어져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 씨소우처럼 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작동하게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