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 5편, 5월 22일 상황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채널A가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나 그들이 퍼뜨린 북한군 개입설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TV조선은 아직도 오불관언입니다. 따라서 1980년 5월 22일(북한군 특수부대 출신이 개입했다는 날)의 광주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즉 광주 외곽의 경계가 어땠는지, 과연 광주 외부에서 부대 단위 게릴라들이 광주로 잠입할 수 있었을 것인지를 유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의 왜곡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대한민국 검찰과 군검찰이 쓴 보고서라는 점을 참고하시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0. 1980. 5. 22 - [광주시 외곽 상황] 곳곳에서 총격·오인사격으로 피해 속...출 5월 22일 0시 40분경 시위대가 고속버스 2대·픽업 1대·1/4t 트럭 3대 등 차량 6대에 분승(分乘)하여 광주교도소에 접근, 3공수여단 병력과 교전이 벌어졌다. 09시경 시위대 6명이 2.5t 트럭에 탑승하여 기관총 사격을 하면서 광주교도소에 접근, 경계근무 중이던 3공수여단 11대대 11지역대 병력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시위대 3명이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하고 <서종남(남·17세), 이명진(남·36세), 이용충(남·35세)으로 추정>, 수 명이 총상을 입고 도주했다. 3공수여단은 고속버스 2대·트럭 1대·픽업 1대를 노획하고 LMG 1정· M1 소총 5정·카빈 4정과 실탄 약 400발을 회수했다. 05시경 광주에서 목포로 승용차를 타고 귀가하던 황남열 일행이 송암동 연탄공장 앞 바리케이드에서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의 검문을 받은 후 통과를 허가받아 진행했다. 그때 부근에 매복(埋伏) 중이던 61연대 수색중대 병력으로부터 시위대로 오인되어 사격을 받아 승용차 운전자가 사망하였고, 황남열 일가 3명은 총상을 입고 헬기로 후송되었다. 06시경 주남마를 일대로 철수한 7·11공수여단은 광주-화순간 국도(國道) 주변에 광주 쪽으로부터 11공수여단 61·62·63대대를 배치하고, 7공수여단 35대대 11지역대를 광주-화순간 국도에 있는 너릿재 터널에 배치하여 도로를 차단했다. 07시경 광주-목포간 도로상의 남평 간이 활주로에서 20사단 61연대 1대대 1중대와 광주 방향으로 진행하던 무장시위대가 탄 고속버스 3대가 대치했다. 계엄군의 저지와 설득으로 시위대가 목포방향으로 돌아가 충돌은 없었다. 09시경 효천역 부근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이동중이던 20사단 61연대 2대대 병력이, 그곳을 시위대 지역으로 오인하여 M1 소총을 흔들며 광주를 빠져 나가려던 승용차에 총격을 가하였다. 탑승자 중 왕태경(남·26세)이 부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나 사망하였고, 탑승자 2명은 총상을 입었다. 10시경 광주교도소 옆 고속도로 진입로 입구에서 3공수여단 12대대 8지역대 병력의 총격으로 트럭을 타고 그곳을 통과하던 김성수(남·51세)와 그의 딸 김내향(여·5세)이 총상을 입었다. 그의 처 김춘아(여·43세)는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3시 35분경 20사단 62연대 3대대가 봉쇄하고 있던 송정리 지역에서 시위대가 '무기반납 조건'으로 '광주시 진입을 요구'하여 15시경 M1 등 소총 57정과 실탄 100여 발을 반납하고 160여 명이 봉쇄지역을 통과했다. 18시 30분경 너릿재 터널에서 7공수여단 35대대 11지역대는 화순 방면에서 오던 2.5t 트럭 1대에 총격을 가하여 정지시킨 후 그 트럭으로 터널 입구를 봉쇄하였고, 운전자는 행방불명되었다. 31. 1980. 5. 22 - [시위대 상황] 시민수습 출범 5월 22일 06시 30분경 낡이 밝으면서 광주공원에는 무장시위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차량에 일련 번호를 부여하고, 차량별로 의료, 연락, 보급, 수송, 지휘·통제, 순찰, 전투 등의 임무를 부여했다. 금남로, 화정동, 산수동, 학동, 백운동, 서방 삼거리, 신역 등에는 각각 무장시위대와 차량을 배치하여 경계를 했다. 금남로와 전남도청 주변에는 많은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도청을 점령한 무장시위대는 도청을 본부로, 서무과 사무실을 상황실로 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09시경 지역 유지와 학생들이 주축이 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정시채(丁時采) 부지사 등 전남도청 간부들도 출근하여 사태의 추이와 수습 방안을 논의했다. 12시경 전남도청 부지사실에서 이종기(변호사), 최한영(독립투사), 박윤종(前 광주시장), 조비오(신부), 윤영규(YMCA 이사), 김상형(전남대 강사), 이석연(전남대 교수), 장휴동, 신영순 등 각계 인사 15명이 모여 5.18 시민수습대책위원회(위원장 이종기)를 열었다. 이들은 사태 수습 전 '군(軍) 투입 금지', '군(軍)의 과잉 진압 인정', '연행자 전원 석방', '사후 보복(報復) 금지', '책임 불문(不問)', '사망자에 대한 보상', '이상의 요구 관철 시 무장 해제' 등 7개항의 요구사항을 마련하여 13시 30분경 전남북 계엄분소를 방문, 김기석 전교사 부사령관을 만났다. 계엄분소측은 '무기를 반납하면 선별 석방하겠다'는 내용과 '사후 보복 금지'에만 동의하고 나머지는 상부에 건의하겠다고 약속하고, 동일 연행자 848명을 석방했다. 도청 시민수습위와는 별도로 홍남순(변호사), 조아라(장로), 이애신(YWCA 장로), 김성용, 조비오(각 신부), 명노근, 송기숙(각 교수), 이기홍(변호사), 윤영규 등 15~16명은 남동성당에 모여 시민수습위의 7개 요구 사항이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 수습위의 조치를 일단 관망(觀望)하기로 했다. 32. 1980. 5. 22 - 강경파와 온건파의 갈등 15시경 도청 분수대 앞에서 시민궐기대회가 열렸고, 15시 18분경 관 위에 태극기를 덮은 18구의 사체(死體)가 분수대에 안장되었다. 17시경 계엄분소로부터 "요구사항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듣고 온 수습위 대표들이 시민궐기대회에 나가 협상 결과를 보고하면서 "총기는 무조건 반납할 수 밖에 없다"고 연설하자, '협상결과가 미온적이고 굴욕적'이라는 이유로 시민들의 반발과 야유를 받았다. 18시경 전남대 명노근·송기숙 교수가 도청 주변 학생 200여 명을 모아 수습 방안을 논의한 결과 별도로 학생수습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하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안에 있던 일부 청년들이 학생수습위원회의 구성에 반대하여 다시 논의한 끝에 20시경 임시학생수습위원회(위원장 김창길, 부위원장 김종배)가 결성되었다. 시민수습대책위는 주로 계엄 당국과의 협상을, 학생수습위는 대민업무(對民業務)를 맡았다. 그러나 수습위원들 간에 전교사와의 협상, 무기반납 문제를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진통이 계속되었다. 한편 광주 외곽 지역은 이날도 여러 경찰관서가 피습되었다. 0시 05분 완도경찰서가, 06시 04분 강진경찰서가, 12시 12분 함평경찰서가, 14시 58분 목포 연동지서가, 15시 20분 목포경찰서가, 17시 35분 해남경찰서가, 18시 40분 화순 예비군 중대가 각각 점령되고 다량의 총기와 실탄이 시위대에 탈취되었다. 22시 30분경 숭의실고, 수정아파트 옥상, 삼익맨션 옥상, 신우아파트, 서부경찰서 옥상에 LMG가 설치되었다. 33. 1980. 5. 22 - [계엄군 상황] 헬기 위협사격 지시, 항공단 관계자들 반대 5월 22일 09시경 광주 일원에 계엄사령관의 경고문이 공중 살포되었고, 10시 소준열 전교사령관이 정식 취임했다. 최규하 대통령은 신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와 국무위원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직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에게 "광주로 내려가서 상황을 직접 파악할 것"을 지시했다. 10시 20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는 급거 전교사를 방문하여 아래와 같은 지시를 하였다. 대화의 길을 모색하고 공수부대의 성격 및 훈련 상태 등을 광주 시민에게 이해시키며, 선무활동(宣撫活動)을 강화하라 그리고 특별담화문을 녹화한 후 상경(上京)하여 광주 현지상황을 최규하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0시 30분경 2군사령부로부터 자위권 발동 지시가 정식 不達(?)되었다. 10시 45분경 31항공단 103항공대대로부터 AH-1J(코브라) 헬기 2대와 500MD 헬기 5대가 도착하여 전교사의 작전 통제에 들어갔다. 황영시 육군참모차장·김재명 육본 작전참모부장·이상훈 육본 작전처장은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에게 아래와 같이 명령했다. "AH-1J 헬기로 조선대학 뒷산에 위협 사격을 하여 겁을 주어 시위대를 해산시키라" 그러나 항공단 관계자들의 반대 의견으로 실시하지 않았다. 10시 55분 2군사령부는 전교사에 송정리 비행장 및 송정리의 확보를, 11시 무장시위대의 광주시 외곽 탈출방지를, 11시 03분 고속도로 봉쇄와 확보를 각 지시했다. 11시 22분경 무장 헬기가 장흥 교도소를 정찰하였으며, 11시 30분경 전교사는 500MD 헬기 3대의 무장화를 건의했다. 12시 계엄사령관은 자위권 발동 대상, 시기, 방법, 결과보고 등에 관한 계엄훈령 제11호를 하달했다. 14시경 정호용 특전사령관은 최웅 11공수여단장 등을 격려한 다음 상경했다. 14시 30분경 구용상 광주시장이 헬기에서 호소전단을 살포했다. 15시 2군사령부는 육군본부에 5월 23일 02시를 기한 충정작전 계획을 건의하였으나, 육군본부는 '무력 평정은 지역감정 해소 곤란, 민간인 인질시 대처 곤란' 등을 이유로 "5월 24일까지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16시 30분경 20사단 60연대 2·3대대가 송정리 일대에 진입, 도로망을 봉쇄한 후 송정리역 부근에서 무력 행진을 했다. 16시경 20사단 62연대 2대대는 같은 날 "17시까지 광주통합병원을 확보하라"는 지시에 따라 장갑차 3대를 선두로 하여 통합병원 쪽으로 이동하던 중 저지하는 무장시위대와 민가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졌다. 그 와중에서 인근 화정동, 쌍촌동, 내방동 등에 거주하는 이매실(여·68세), 김영선(남·20세·카빈총상), 양회남(남·30세·카빈총상), 임정식(남·18세·카빈총상), 조규영(남·38세·총기불상), 함광수(남·17세), 김재평(남·29세), 손광식(남·20세·방위병·경비대 출근)과 계엄군 1명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17시 50분경 계엄군이 광주통합병원을 장악했다. 19시 20분 박충훈 국무총리서리의 아래와 같은 특별담화문이 발표되었다. "현재 광주시내는 병력도 경찰도 없는 치안부재 상태이며 일부 불순불자들이 관공서를 습격, 방화하고 무기를 탈취해서 군인들에게 발포했다" 22시 30분 전교사는 UH-1H 헬기 10대, 고성능 스피커 2대, 가스살포용 500MD 헬기 1대 등 충정장비 추가 지원을 건의했다. <자료 출처> 서울지방검찰청·국방부 군검찰부 발표 5.18수사보고서 전문(1995년 7월 18일 발표) * 1980년 5월 광주 1편, 5월 18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2편, 5월 19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3편, 5월 20일 상황 ☜ * 1980년 5월 광주 4편, 5월 21일 상황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