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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송원(茶松園) 원문보기 글쓴이: 長樂山人 이종인
아무르(Amour/ 사랑)와 죽음, 그 이야기
아무르(Amour/ 사랑) 1
노부부의 숭고한 사랑
요즘 주변에 이른바 ‘멘붕’(멘탈붕괴)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심각한 것은 그들의 ‘멘붕’ 기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위로와 격려가 되는 영화를 권해 달라고 농담처럼 청하는 지인들에게 필자는 그런 건 없다고 냉랭하게 말한다. 영화가 위로를 줄 수는 없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대신 필자는 위로 따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예술가의 영화를 찾는다. 미하엘 하네케의 <아무르>가 그랬다. 평생 음악교육 일로 살며 품위 있게 늙은 노부부의 말년을 담은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응축되지 않는 것들을 담고 있다. 아내가 치매와 마비로 고통받는 것을 지켜보는 남편 입장에 선 이 영화는 사랑이라는 것에 따르는 의무와 고통을 보여주고 있으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준엄한 죽음의 운명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올해 프랑스 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은 <아무르>는 하네케 감독의 전작들이 그렇듯이 인간의 내면을 따뜻하게 보여주는 것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 주인공들이 늙고 쇠약해져서 더는 품위라는 인격적 갑옷을 갖추지 못하게 될 때 맞게 되는 당혹과 고통을 보여준다. 주인공들에게 아름다운 순간 따위는 이제 남아 있지 않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아내는 곧잘 인생이 너무 길다고 말한다.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동이 불편한 상태에서 병이 더 악화되자 아내는 용변을 처리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그 수치를 들키는 곤욕은 남편 앞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남편은 그런 아내를 힘겹게 지켜보고 도와준다. 인생을 오래 살았다고 그런 고통을 아우를 수 있는 지혜가 넉넉하게 장착된 것도 아니다. 그보다 남편은 어린 시절 자신이 감당하지 못했던 이런저런 감정들, 삶이라는 무대에서 처음 경험하며 무너졌던 사소하지 않은 기억들을 아내에게 들려준다. 어른이 되고 늙고 난 뒤에도 삶에는 감당할 수 없는 감정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더는 자기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는 육체를 힘겹게 움직이는 두 노배우, 장루이 트랭티냥과 에마뉘엘 리바의 신체 연기가 가슴에 콕 박혔다. 그들의 젊은 시절 아름다웠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영화 팬의 처지에선 더 그랬다. 어떤 감정 연기보다 그들의 늙은 육신들이 표상하는 힘겨운 동작들이 전해주는 죽음 직전의 전조들은 인상적이었다. 영화 상영시간 내내 노부부의 아파트 내부를 벗어나지 않는 카메라가 전해주는 폐소공포증은 감옥 같은 삶의 비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을 당당하게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수식도 없이 영화 속 노부부는 고통을 고통 그대로 느끼면서 힘겹게 최후를 선택한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어떤 미화도 수식도 없는 연출에서 나는 오히려 감동과 위로를 받았다. 고통은 그냥 고통일 뿐이다. 거짓 희망이나 미화가 없는 시선에서 오히려 삶을 버틸 수 있는 심리적 기운을 얻게 되는 것이다. 올 연말 우울한 분들께 이 영화, <아무르>를 추천한다.
김영진 영화평론가·명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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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Amour/ 사랑) 2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콘서트장의 관객석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알렉상드르라는 이름의 피아니스트의 콘서트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죠. 우리의 주인공 안느와 조르주는 화면 왼쪽 중앙 부분에 앉아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저는 미하엘 하네케가 관객들의 사전 지식을 어느 정도 잡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내용에 대한 아무런 사전작업도 없이 케이블 채널 서핑을 하다가 <아무르>라는 영화가 걸려 처음부터 보게 된 관객들은 과연 여기서 주인공들을 찾을 수 있을까요?
물론 영화관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들 대부분은 이에 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대부분 기초적인 내용은 알고 왔을 거고, 모르는 사람도 포스터를 통해 이 영화가 노인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아마 미하엘 하네케의 신작을 보기 위해 예술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은 사전 정보가 없다고 해도 장 루이 트랭티냥과 엠마뉘엘 리바의 얼굴을 알아볼 것입니다.
감독의 의도가 무엇이건, <아무르>는 두 배우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 가장 잘 먹히는 영화입니다. 그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젊은 시절 대표작들을 알고 있을 것이며, 그 옛 시절의 모습을 지금의 나이 든 모습과 연결하며 그 동안 흐른 세월을 더 확실하게 곱씹을 수 있겠지요.
심난하게 들리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영화가 시작될 무렵, 안느와 조르주는 정말 질투심 날 만큼 좋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 거의 이야기하지 않지만, 척 봐도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만나 평생을 별다른 갈등 없이 보내며 서로의 존재를 자신의 삶에 완전히 녹여낸 완벽한 결혼생활을 해왔습니다. 두 사람 모두 죽을 날이 머지않았고, 영국인 음악가와 결혼한 딸의 결혼 생활이 별로 행복해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지요.
파국이 찾아옵니다. 아내 안느가 갑자기 마비 증상을 일으키더니 순식간에 반신불수가 된 것이죠. 조르주는 그런 아내를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수십 년간 조용하게 지속된 아내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 동안에도 결코 꺼질 줄을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까지 이 상태를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일까요?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도록',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결혼 서약문의 이러한 문구는 거의 클리셰가 되어서 어느 누구도 여기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같이 살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요. 배우자의 죽음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고 멀쩡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은 제 주변에도 꽤 됩니다. 그러나 안느와 조르주와 같은 사람들은 이런 결말에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이러니컬하지만 이상적인 결혼일수록 결말의 고통은 끔찍합니다.
영화는 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보다 현실적인 사회적인 이슈, 그러니까 안락사나 존엄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건 중요한 이슈입니다. 하지만 영화는 사회적 이슈보다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 자체에 관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어떤 것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이들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강렬한 것인지, 그런 고통이 두 주인공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많이들 <아무르>가 미카엘 하네케의 영화들 중 가장 따뜻하고 인간적인 작품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이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았던 하네케의 영화들 중 <아무르>처럼 고통스러웠던 작품도 없었습니다. 그의 다른 영화에서와는 달리, 이 영화에는 관객들과 주인공들 사이를 가로막는 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에서 안느와 조르주가 체험하는 고통은 고스란히 관객들의 몫으로 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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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Amour/ 사랑) 3
영화 노트
음악가 출신의 80대 노부부의 사랑을 다룬 작품.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그들의 일상은 어느 날 아내가 갑자기 발작을 일으켜 반신불수가 되면서 하루아침에 달라진다. 변치 않는 사랑과 헌신으로 아내를 돌보는 남편을 연기한 배우는 <남과 여>로 잘 알려진 올해 82세의 장 루이 트랭티냥. 그리고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된 자신을 돌보는 남편을 지켜보며 괴로워하는 아내 역은 <히로시마 내 사랑>의 주연을 맡았던 올해 85세의 에마뉘엘 리바가 맡았다. 눈빛, 표정, 몸짓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감동을 느끼게 하는 명연기를 보여준 두 노배우와 함께,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홍상수 감독의 신작 <다른 나라에서>에 출연한 프랑스 최고의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노부부의 딸로 출연하며, <사랑을 카피하다>의 윌리엄 쉬멜과 프랑스 출신의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르 타로도 출연한다. 또한 촬영은 우디 앨런, 데이빗 핀처, 왕가위, 로만 폴란스키, 대니 보일 등과 작업해온 최고의 촬영감독 다리우스 콘지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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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Amour/ 사랑) 4
세계인구의 고령화가 시작되면서, 노인의 질병이나 죽음등,
누구나 거쳐야는 과정에 대한 영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서양보다는 죽음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한 동양에서는
심심치 않게 노인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강풀>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추창민>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나,
얼마 전 암으로 죽음을 담담히 준비하는 아버지의 여정을 그린
일본 다큐멘터리 <마미 스나다>의 <엔딩노트>에서도
비슷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흥미로운 것은,
단지, 이런 노인 문제를
일상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는 동양사상과 달리,
쉽게 받아 들이지 못하는 서양 특유의 혼란과 갈등을
<미카엘 하네케>는 섬세하게 잡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많은 경험이 있는 거장답게
곳곳에 숨어있는 의미있는 복선들을 찾아내는 것도
하나의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화 감독들은 복선에대해
아무 메시지가 없다고 얘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지만,
이는 마치 같은 그림을 보고도,
다른 해석을 유도하는
유명한 화가의 놀이 같은 것이다.
스토리는 아주 단순하고 신파적이다.
30년 넘게 같이 산 노부부에게 다가온
노인성 질병과 죽음을 대하는 배우자와 주변 사람들 얘기다.
사실 스토리는 그다지 새로울 것은 없어 보인다.
심지어, <조르주>가 병든 <안느>를 베개로 눌러 죽이는 것까지
우리에겐 그리 충격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미카엘 하네케>의 수수께끼 같은 복선들은
영화적 흥미를 일으키기엔 충분하다.
영화는 문을 부수고 들어가는 소방관의 등뒤 시선으로 시작된다.
불안하고 흔들리는 핸드헬드 기법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유려한 카메라 워킹으로
<미드나잇 인 파리>의 촬영 감독 <다리우스 콘지>의 능력을 볼 수 있다.
<안느>의 단아한 시신을 발견하기까지
철저히 봉쇄되어있던 문과 창문은 모두 강압적으로 열려 진다.
이는 침입자라기 보다는,
거부해도 소용없는 죽음 같은 강제적인 의미로 보인다.
이어, 콘서트에 간 두 노 부부의 씬에서도,
보통 무대의 주인공을 잡는 컷보다는,
관객을 롱숏으로 잡고,
불현듯 켜지는 환하게 펴지는 조명에서,
죽음과 질병의 문제가 무대 위에 남의 문제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맞부딪혀야 하는
거대한 숙제임을 암시한다.
갑자기 물을 틀어놓고, 깜박하는 <안느>,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 <조르주>를 놀래키며,
곧 자신의 운명에 저항할 수 없는 초라한 인간을 표현한다.
여기서 물의 역할 역시 감독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조르주>의 환상 씬에서도 등장했던,
복도의 흥건히 고였던 공포스런 물은
아무리 봉쇄해고 거부해도 스며드는 죽음의 의미를 두고 있는 듯 하다. 또, <조르주>의 죽음을 암시하는 부분에서도
여지없이 부엌의 물소리는 흐르고 있다.
또, 픽스로 걸려있던 풍경화 속에도
죽음을 뜻하는 물은 흐르고 있는 듯이 보인다.
또, 다른 한가지 영화의 중요한 의미는 방문객이다.
어떤 평론가는 문을 걸어 잠그고
<안느>의 환자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조르주>의 행동에서,
딸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의 방문을
그 들의 평온한 생활에 침입자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 <조르주>와 <안느>는 방문객을 죽음처럼 거부한다.
그토록 아꼈던 슈베르트 전문 피아니스트 제자에게
베토벤 곡을 부탁하는 그들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상황으로
방문객을 끊임없이 내쫓고 있는 것이다.
특히, 느닷없이 집으로 들어온 비둘기에서,
침입자들은 우리 모두가 거부할 수 없는
늙음과 죽음이란 생각을 더 굳히게 된다.
내쫓고, 거부했다가,
나중에는 <조르주>가 비둘기룰 잡아 자유롭게 놓아주기도 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거부했던 강압적인 죽음을,
초연하게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
죽음을 관리하는 주체가 자신에게 돌아옴을 뜻하는 것이다.
즉, 죽음조차 살아가는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조르주> 역시 맨 처음엔 비둘기를 잡기 힘들었지만,
한 번 잡아보니 쉽다 라는 말을 한다.
그러면서도, <미카엘 하네케>의 전용물 사디즘은
사랑을 가장하여 곳곳에 보인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물을 먹지 않는, <안느>의 뺨을 때리고,
갑자기 <안느>를 죽이는 것은,
통속적으로 <너무 사랑해>서라기엔 석연치 않다.
아무리 사랑해도,
어쩔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과 자신의 사랑에 따르지 않는 분노로,
나약한 인간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자신의 사랑의 방식에 따르지 않는
<안느>에 대한 이기심 아니었을까?
이는 새로 온 간병사가 <안느>의 머리를 빗기면서,
<예쁘지 않냐>며 나름대로 사랑을 쏟지만,
<안느>는 이를 힘들어하고, 심지어 폭력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결국,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하며,
사랑의 이기심은 마치 죽음과 같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완전한 사랑을 가장한 이기적인 자기애가
사랑이라고 착각하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는 팁을 얻기 위해 간병하는 <조르주>를 칭찬하는 방문인이나,
딸 <에바>가 병문안을 와서도
자신의 <경제적 문제>나 <부부 문제> 넋두리를 늘어 놓는 것에도
사랑이라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아무르>, 불어로 <사랑해>라는 아주 단순한 의미지만,
<미카엘 하네케>에게
2009년 <하얀 리본>에 이어
2012년 제 65회 칸 영화제에서 두 번째 <황금 종려상>을 안겨준 것은,
<미카엘 하네케> 영화적 성향의 반전으로,
관객을 깜짝 놀라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이미 관객이 잘 아는 거장만이 지닌 특권이기도 한데,
그의 전작,
<퍼니게임(1997)><피아니스트(2001)>등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일상에 만연하게 내재되어있던
인간의 폭력성과 잔혹성을 표현함으로써
영화계의 사디스트로 불려왔던 감독이다.
이런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과거 불란서 문화원에서 불편한 의자에서 봄직한
잔잔한 정통 프랑스 예술 영화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유럽 영화계에서는 반갑고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아직도 프랑스 영화의 최대 로맨스라는 일컫는
<남과여(1966)>의 남자 주인공 <장 루이 트래티냥>을
주인공으로 앞세움으로써,
이 영화의 따뜻한 성격을 배우와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영악한 기지마저 발휘했다.
또, 어떠한 애드립이나 즉흥연기를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작품을 독단적으로 이끄는 그의 연출 성향이,
세월의 두께를 더한 82세의 <장 루이 트랭티냥>과
85세의 <에마뉘엘 리바>의 담담하고 초연한 연기와 맞물려.
배역 <조르주>와 <안느>를,
격한 감정의 기복 없이 거의 리얼리티에 가깝게 표현해냈다.
이런 앙상블은 조연에까지 영향을 미쳐
<홍상수>감독의 <다른 나라에서>의 출연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딸 에바역의 <이자벨 위페르>는 물론,
연기 경험이 전혀 없을 것 같은 제자 역의
실제 피아니스트 <알렉상드로 타로>까지,
거장다운 연출로 과장되지 않은
진정성 있는 연기로 영화의 질을 높였다,
특히 <에마뉘엘 리바>는
<영국 아카데미> <전미 비평가협회>등
유명 영화제의 여우 주연상을 수상하며,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도 여우 주연상 후보로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칸느 영회제 특성상,
<황금 종려상>을 탄 작품에서
연기상을 탈 수 없었던 것에 어느 정도 보상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의 부모의 집을
그대로 재현한 아파트에서만 이뤄지는 이 영화는
어떻게 보면, 제대로 된 음악 하나 없어,
팝콘도 소리 날까 두려워 먹지 못할 만큼
숨죽이며 봐야 하는, 지루하고 답답한 영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나라 독립 영화 정도의 제작비일 것 같은,
이 작은 영화에 이토록 매료되는 것은, 바로 진정성이다.
모든 배우들의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은 연기와,
아무렇지도 않듯, 참으로 얌전한 카메라 워킹,
화려하지 않은 연출력이
마치 논픽션의 감동으로 다가와
다시 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구나 죽는 것도 알고 있지만,
죽음을 준비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사랑하는 이에 대한 사랑으로,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그 해답을 던져주지는 못하지만,
잊고 있었던 숙제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것이다.
이혁준의 음악, 문화 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