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패밀리가 무사히 인 서울(9.17.22:00)을 했고 길고도 긴 추석 연휴가 끝이 났어요. 명절은 졸업했고 가족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 없습니다. 2024년 추석 징글징글합니다. 오전까지 괜찮았는데 존재감에 균열이 생겼는지 심기가 불편해졌어요. 에스더 '출 강남'이 연기되었고 허리 통증과 별도로 혹 수술을 해야 해서 긴장을 늦출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다시 '데프콘'을 발휘하고 맨탈과 상황을 함께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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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더니즘의 사각지대인 '다양성'과 '상대성'을 '보편적 개별성'으로 해결하려는 알랭 바디우 리스펙트. 바디우에 의하면 진리는 '사건'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고 그것(사건)을 충실하게 따르고 지속되는 주체들을 계속 포섭함으로써 유지되고 나타납니다. 다만 진리는 진리 그 자체로 인식되지 못하며 그것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나중에, 후 역사적으로 증명될 뿐입니다. 결국 진리는 그 자체로 상황 속에서 평가되지 못하니까 미래적으로 밝혀질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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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들은 도래하는 주체, 출현하는 주체가 아닌가 싶네요. 근대 철학에 대한 비판은 진리와 주체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일자의 형이상학에 대한 거부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니체는 근대를 겨눈 최초의 저격수였고, 하이데거는 대상성을 비판한 시인들을 사유의 전면에 다시 등장시킨 장본인이었습니다. 합리주의 전통에 대한 이런 날카로운 비판들은 전후 프랑스에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의 비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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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근대 철학이 주체로 삼은 ‘인간’이 그저 특정한 에피스테메의 맥락에서 구성된 지적인 생산물일 뿐이라고 주장하였고, 라캉은 사유하는 합리적 인간과는 거리가 먼 무의식의 주체를 그의 분야인 정신분석학을 통해 잘 드러내었어요. 또한 리오타르는 보편이라는 관념을 그저 타자를 배제하고 억압하는 폭력적인 관념으로 간주하였지요. 보편적 진리는 자신을 보편으로 삼는 동시에 보편의 타자를 비-진리로 억압하고 배제하였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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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진리는 폭력으로 점철된 자기 전개 과정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더 나아가 데리다는 진리 개념을 비판하면서 철학사 전체를 곤경에 빠뜨립니다. 철학은 진리를 기준으로 삼아 텍스트의 의미를 고정시킴으로써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사전에 봉쇄하였고, 결국 진리의 전제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는 대단히 폭력적인 과정이었고, 그 와중에 텍스트의 풍요로움은 진리의 폭력을 통해 축소되고 말았다는 것이 데리다의 탁월한 입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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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사도바울'이란 책에서 언급된 바디우의 통찰이 흥미롭습니다. 그에 의하면 바울은 '우연(사건)'에 의해 부름 받은 자(다메섹 사건)로 유대주의(전통)나 헬라 주의(이성)에 얽매이지 않았고, 심지어 예루살렘(중심주의)까지 배격했다고 해요. 아들(예수) 담론으로 역사를 찢고 들어온 부활(진리는 명명되지 않아야) 이야 말로 '우연'과 '보편적 개별적' 진리를 충족했다는 것 아닙니까?
2024.9.18.wed.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