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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45> 함허 득통선사
‘억불숭유(抑佛崇儒) ’ 부당성 항거…현실적인 반야사상가
2019-02-01 정운스님 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장
배불ㆍ정도전 불씨잡변에 항거
‘현정론’ ‘유석질의론’ 등 저술
“성리학자들이 비판하는 내용
불교본질 몰이해…궤변 불과”
그 부당성 논리 정연하게 반박
“불교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
유교 못지않게 실천적 긍정적
불교서 유교 바라보는 틀 제시
유교와 관계 본격적 논의 시작”
갈등 극복…평화와 공존 노력
함허득통 선사의 사리는 가평 현등사와 문경 봉암사, 강화 정수사, 연봉사 등지에 부도탑과 함께 모셨다. 회암사 조사전의 진영,
함허득통 선사의 사리는 가평 현등사와 문경 봉암사, 강화 정수사, 연봉사 등지에 부도탑과 함께 모셨다. 회암사 조사전의 진영,
고려 말기 선사들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무인 세력과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1392년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할 때, 고려 사회의 폐단 원인을 불교로 보고,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삼았다. 곧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내세움으로써 불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다. 태조 즉위식 3일 후, 사헌부에 올린 건의서 내용이 ‘불교 행사를 모두 없애야 하며,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승려를 도태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도전의 <불씨잡변>에서는 불교의 폐단을 조목조목 드러내 비판했다. 세월호가 서서히 침몰하듯 불교는 점점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런 배불(排佛)에 맞서는 이가 없었으며, 항거할 기반조차 없었다. 그나마 유학자들의 배불에 항거한 선사가 함허 득통(涵虛得通, 1376〜1433년)이다.
‘배불’에 항거…금강경 선양
득통은 <현정론(顯正論)>이라는 저술을 통해 배불의 이론적 모순을 타파하고 유교와 근접한 사상을 배대하였다. 조계종 총무원장 원행스님은 박사학위 논문에서 “득통의 <현정론>이 마음의 깨달음을 근본으로 하는 불교의 진리를 밝히기 보다는 불교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이 유교 못지않게 실천적이며 긍정적인 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함허스님의 입장은 불교와 유교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의 시작이었다”고 하면서 “동시에 불교적인 입장에서 유교를 바라보는 하나의 틀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사상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조선 초기 득통이 배불론에 맞서 그 부당성을 논리 정연하게 반박하며 갈등과 고난을 극복하고 평화로운 공존을 모색하고자 노력하였다”고 했다.
득통의 행적 중에서 주목할 만한 사항은 배불에 항거한 선사요, <금강경>을 선양한 점이다. 득통은 무학자초(1327˜1405년)의 제자로 법명은 기화(己和), 법호는 득통(得通), 당호는 함허, 처음 법명은 수이(守伊)이다. 득통은 속성이 유(劉) 씨,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관음기도를 통해 낳은 아들이다. 어려서 성균관에서 유학을 공부했으며, 승려 해월에게 <논어>를 가르칠 정도의 재원이었다. 선사는 벗의 죽음을 목격하고, 무상을 느껴 21세 때인 1397년 관악산 의상암으로 출가했다. 다음 해 양주 회암사를 찾아가 무학대사의 제자가 됐다. 이후 여러 곳을 행각하다 1404년 다시 회암사로 돌아온 뒤 깨달음을 얻고 무학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이때 나이가 28세. 그 후 공덕산 대승사, 연봉사 등지에서 <반야경> <금강경오가해> 등을 설하였으며, 천마산 관음굴에서 선풍(禪風)을 진작했다. 1420년 44세에 득통은 오대산에 들어가 성인들과 나옹혜근의 진영에 제사를 지냈는데, 꿈에 신승이 나타나 ‘기화(己和)와 득통(得通)’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득통은 월정사에 머물며 오롯한 수행으로 지내고자 했으나 세상은 선사를 밖으로 나오도록 재촉했다.
1421년, 45세의 득통은 세종의 청으로 개성 대자사(大慈寺)에 머물렀고, 그 후 길상산 공덕산 운악산 등지에 주석했다. 1431년 희양산 봉암사로 들어가 퇴락한 절을 크게 중수한 뒤에 이곳에서 57세로 입적했다. 선사의 사리는 네 곳에 나누어 가평 현등사와 봉암사, 강화도 정수사, 연봉사 등지에 부도탑을 모셨다. 중국의 큰스님들이 열반하면 부도탑을 주석했던 사찰에 나누어 모시는데, 득통의 경우 우리나라 불교사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다.
<금강경오가해>는 송나라 때 편찬됐는데, 다섯 명의 해석을 통합해놓은 것이다. 득통은 대조(對照)하고 교정(校訂)하여 서문을 붙이고 설의(說誼)했다. 이를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는데, <금강경>이 점차 대중화됐다. 득통의 이 설의가 판본으로 출간된 이래 끊임없이 간행됐다. 현재도 우리나라에서는 전통 강원인 승가대학에서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 즉 그가 설의에 주(註)를 붙이고 있는 곳은 야보(冶父)와 종경(宗鏡) 뿐이다. 특히 야보송에 대해서는 착어(着語)와 연송(聯頌)에 일일이 설의를 붙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규봉 종밀, 혜능, 부대사에 대해서는 각각 한 곳에서만 평을 달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득통은 일상성에 바탕을 둔 현실적인 반야사상가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 보조 지눌과 득통의 금강경 선양으로 인해 우리나라에서 금강경이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자리를 굳히는데 일조했다.
유불도 회통…‘배불론’ 논리적 반박
현등사 부토탑.
현등사 부토탑.
우리나라에 불교가 유입된 이래 고려 말까지는 선(禪)과 교(敎)의 일치가 강조됐다. 곧 고려 말까지는 문화와 사회가 불교와 공존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들어와서는 불교가 설 자리를 잃었다. 물론 조선시대에 민중적인 불교로 굳건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문화, 사회, 교육 등 전반적으로 유교에 자리를 내줬다고 볼 수 있다.
득통은 정도전의 <불씨잡변> 등에 항거해 <현정론> 1권, <유석질의론(儒釋質疑論)> 2권 등을 저술하여 억불의 부당성과 함께 유불도 삼교의 회통을 천명했다. 득통은 불교를 탄압하려는 분위기가 점점 커질 때, 의연한 목소리로 불교를 알렸다. 더구나 정도전의 배불론에 대하여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현정론>이 저술되었기 때문에 그의 저술적 가치는 매우 높다.
<현정론>은 전체 서설과 14항목에 달하는 문답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배불에 대한 반론으로 구성되어 있고, 이후는 유불도 삼교의 상통성에 대해 논하고 있다. 득통은 저술에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유불도를 상호 비교하였으며, 당시 배불론자들이 지적하던 사항들에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득통은 성리학자들이 비판하고 있는 내용이 불교 본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온 궤변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보여주었다. 정도전의 배불서적이 뚜렷한 정치적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작성되었다면, 득통의 저술은 학문적, 논리적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교적 가치가 매우 높다.
평등·만물일체·불교우위성 설파
정수사 부토탑.
정수사 부토탑.
첫째는 평등사상이다. <금강오가해설의> 가운데 “부처님께서도 눈은 옆으로 째지고 코는 밑으로 처졌으며 사람마다 또한 눈은 옆으로 찢어지고 코는 밑으로 흘렀다”고 했다. 또한 득통은 “중생과 부처가 똑같이 동일한 열반이다”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열반’이란 번뇌가 소멸된 깨달음 그 자체를 의미하는데, 부처와 중생이 똑같이 구족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점은 불교 전반에 걸친 사상이요, 인류 공통의 인권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득통은 종교를 초월해 모든 중생이 존중받을 존재임을 천명했다고 볼 수 있다.
둘째는 만물 일체사상이다. 이 사상은 불교의 모든 존재가 소중하다는 인도의 자비평등 사상이 중국에 유입된 이래 만물과 더불어 일체라는 사상으로 변모됐다고 본다. 득통은 <현정론>에서 불교는 ‘만물일체사상’이라 하고, 유교에서도 ‘천지만물사일기(天地萬物寫一己)’라고 하면서 양교는 동일한 성품을 갖고 있다고 피력했다.
셋째는 득통은 불교를 유교와 비견하면서도 불교의 우위성을 강조했다. 불교와 유교의 근본적인 성정론(性情論) 측면에서 불교의 오계(五戒)는 인도(人道), 십선(十善)은 천도(天道)라고 하면서 3장 12부경전이 다 사람들로 하여금 정(情)을 버리고 본성을 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불교의 5계를 유교와 비유해서 ‘살생하지 않는 것은 인(仁)’, ‘훔치지 않는 것은 의(義)’, ‘사음하지 않는 것은 예(禮)’, ‘술 마시지 않는 것은 지(智)’, ‘거짓말 하지 않는 것은 신(信)’에 비견하였다.
이와 같이 득통은 오계와 오상(五常)을 배대하여 양교의 근본이 같다고 했다. 이에 불교의 자비와 유교의 인애(仁愛)는 사상적인 뿌리는 같지만 그 깊이와 행동은 다르다고 지적했다. 유교가 살생을 하면서 인을 주장하는 것은 불교가 살생을 하지 않고 자비를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피력했다.
500여 년 전, 득통의 종교 비교가 구태의연한 사상인 것 같지만, 매우 합당하다. 오늘날에도 불교가 이교도들에게 적잖은 곤혹을 치르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달라이라마는 “모든 종교와 제도는 인간을 존중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으로 전도 돼서는 안 된다. 종교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인간의 삶도 그만큼 풍요로워진다”(<마음을 비우면 세상이 보인다>, 공경희 역, 문이당)고 했다. 달라이라마의 말처럼 남의 종교를 다양성으로 여기고, 존중해주는 성숙한 종교인이 참종교인이다. <현정론>이 그 시대에 획기적인 사상이었던 것처럼, 현 시대에 적합한 불교 사상을 개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불교신문3461호/2019년2월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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