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욥기 20장 1절 – 29절) 20:1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 3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 4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5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 6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7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11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 12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13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 14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 15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16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 19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 20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23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 26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 27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29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과 친구들 간에 펼쳐진 2차 변론(15-21장)이 욥에 대한 감정적 분노로 표출된 엘리바스와 빌닷과 마찬가지로, 소발이 욥의 답변에 대하여 독설을 퍼붓는 책망과 저주의 내용입니다. 소발은 악한 자가 한시적으로 형통할 수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한 필연적인 파멸에 도달할 수밖에 없다는 도식적인 논쟁으로 일관합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자를 심판한다는 것은 맞지만, 오늘 소발은 사람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이 악을 행했기 때문이라는 편협한 시각만을 고집하며, 욥도 재앙을 당한 것은 악인이었기 때문이라고 정죄합니다. 그렇기에 욥이 자기 잘못을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을 주장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자신을 더욱 힘들게만 하는 친구들에게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19:21)라고 호소하며 질책하는 것에, 소발이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20:3)라고 흥분하여 욥에 대한 감정적인 저주를 쏟아 붓는 내용입니다. 악인의 필연적인 멸망에만 초점을 맞춘 소발의 시각은, 고통당하는 친구인 욥의 마음과 상황에는 안중에도 없는 아주 비정하고 매서운 무정한 신앙인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율법주의자나 근본주의자들이, 사람에 대한 애정보다 교리적 지식의 논쟁을 우선함으로써, 동일하게 벌어지는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인들에게서 발견되는 양태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목회서신에서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라. 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딤후2:14-18)고 경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 안에서의 사랑보다 교리적 지식의 분노만을 앞세우는 이들을 가리켜서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마24:12)고 일깨우며, 진정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요15:12-13)고 일깨우며 우리를 초청합니다. 1. 소발은 욥의 책망에 어떻게 분노합니까? 욥은 자신이 겪는 시련과 고통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친구들이 위로와 격려보다 죄인으로 몰아치며 저주와 정죄를 일삼는 행태에, 친구들에게 자신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면서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 나를 불쌍히 여겨다오!”(19:21)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렇게 호소하는 욥을 안타깝다거나 안쓰럽게 여기기보다, 놀랍게도 “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20:1) 오히려 분노하여, 엘리바스나 빌닷보다 더한 독설을 욥에게 쏟아 붓는 것이 오늘 성경 본문의 내용입니다. “소발”은 욥의 호소에 대해 자기 분노의 감정을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그러므로 내 초조한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나니, 이는 내 중심이 조급함이니라”(20:2) 곧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으나, 네 말을 듣고 있자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새번역)라며 욥에게 표출합니다. “소발”은 극도로 흥분된 모습을 보입니다. 욥이 겪는 아픔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들의 독단적이고 편협한 지식의 강요를 거부하는 것에 대한 분노가 더 앞섰기 때문입니다. 믿는다고 하는 이들 가운데, 자신의 편협한 신앙에 갇혀서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 있는 이들이 보여주는 특징입니다. 특히 자기들만이 구원받은 자로 자처하는 이단적 성향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그렇습니다. 신앙이 왜곡되어있기 때문이며, 심지어 만물의 창조자와 통치자가 되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마저 자신들의 시각에 가두어버립니다. “소발”은 욥에게 자신이 왜 분노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습니까?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 나의 슬기로운 마음이 나로 하여금 대답하게 하는구나”(20:3) 곧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모두 나를 모욕하는 말이다. 그러나 깨닫게 하는 영이 내게 대답할 말을 일러주었다.”(새번역). 왜 욥이 그런 말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그가 당하는 있는 시련과 고통에 대한 관심보다, 자신들이 아는 편협한 교리적 주장에 대한 반박을 오직 자신들을 “부끄럽게 하는 책망”과 “모욕”으로만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말에 욥이 느꼈을 상처와 고통보다, 반박을 당한 자신들 자존심의 상처가 더 중요했습니다. 극도로 감정이 상한 “소발”은 욥에게 “네가 알지 못하느냐? 예로부터, 사람이 이 세상에 생긴 때로부터 악인이 이긴다는 자랑도 잠시요, 경건하지 못한 자의 즐거움도 잠깐이니라”(20:4)며, 훈계를 시작합니다. “소발”의 이 말 자체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이면서도, 욥을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자”로 정죄하기 위한 말이라는 점에서 문제가 있습니다. “소발”과 친구들은 욥이 당한 고난을 죄악의 결과라고 단정하며, 이제는 심지어 욥을 그렇게 정죄하기에만 몰두하며, 고통당하는 친구를 더 깊은 고통에 몰아넣는 모습을 보이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계했고, 야고보 선생 역시도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1:19)고 일깨웠습니다. 지금 욥이 겪는 고통을 가리켜서 “소발”은 “그 존귀함이 하늘에 닿고, 그 머리가 구름에 미칠지라도,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20:6-7)며, 모든 것이 욥의 교만한 죄악의 결과라고 단정했습니다. 욥이 과거에 누렸던 부귀영화를 가리켜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탐욕의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악인”의 번영을 형통케 하시지 않기에 패망하게 하셨다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자기의 똥”은,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가 된 것에 대한 비유로서, 사도 바울이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라고 할 때, “배설물”이 같은 의미입니다. “소발”은 욥이 자신들의 책망과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자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20:7)고 저주하며, 이 땅에 살았던 욥의 영광과 삶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을 “그를 본 자가 이르기를 그가 어디 있느냐 하리라. 그는 꿈 같이 지나가니 다시 찾을 수 없을 것이요, 밤에 보이는 환상처럼 사라지리라. 그를 본 눈이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요, 그의 처소도 다시 그를 보지 못할 것이며”(20:7-9)라고 하는 독설을 퍼부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욥의 자손들 곧 가문이 철저히 망할 것을 “그의 아들들은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구하겠고, 그도 얻은 재물을 자기 손으로 도로 줄 것이며”(20:10)라고 저주하며, 또한 심지어 건강하던 욥 역시도 질병으로 고통 받는 가운데 결국 죽음에 이를 것을 “그의 기골이 청년 같이 강장하나, 그 기세가 그와 함께 흙에 누우리라”(20:11)고 저주합니다. 2. 욥의 재앙을 어떤 악인의 파멸로 봅니까? “소발”은 욥에게서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20:3)라는 것 때문에 분노하여, 욥을 가리켜서 천하의 의인처럼 행동했지만 실상은 하나님 앞에 “경건하지 못한 자”로서 위선적인 “악인”이었다며(20:4), “그는 비록 악을 달게 여겨 혀 밑에 감추며, 아껴서 버리지 아니하고 입천장에 물고 있을지라도”(20:12-13) 곧 “그가 혀로 악을 맛보니, 맛이 좋았다. 그래서 그는 악을 혀 밑에 넣고, 그 달콤한 맛을 즐겼다.”(새번역)는 비유로 비난했습니다. “소발”은 악인을, 맛있는 음식을 가능한 한 입안에 머금고 오래 음미하려는 식도락가로 비유하며, 욥을 가리켜서 은밀히 행악을 즐긴 위선자로 반박합니다. 참으로 “소발”에게서 고통을 받는 친구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정은 찾아볼 수가 없는 무서운 모습을 발견합니다. 근본주의 교리적 신앙을 가진 그는 나름대로는 원칙주의자로 자부할지 모르지만, 참으로 공허한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의외로 교회 안에 이런 신앙의 사람들이 많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벧전3:10-11)고 당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1:8)고 인정했던 신앙의 사람이었지만, 그가 시련을 당하자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들에 의해서 철저하게 악한 자로 내몰려야 했습니다. 마치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1:9)라고 의문을 제기했던 것처럼, 친구들은 단지 욥이 시련을 당했다는 것만으로 욥을 악한 자로 몰아갔습니다. 그러니 욥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겠습니까? “소발”은 욥의 번영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온갖 악행의 결과로 보았기에, 욥이 즐긴 죄악의 결과로 인하여 “그의 음식이 창자 속에서 변하며, 뱃속에서 독사의 쓸개가 되느니라”(20:14) 곧 “뱃속에서 그 음식은 썩어 뱀의 독으로 변한다네.”(공동번역)라고 욥의 파멸을 비웃었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약1:15)라고 경고했지만, 욥은 “소발”이 말한 그러한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소발”은 욥의 재난이 결코 우연적인 사건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습관적인 죄악의 결과로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그가 재물을 삼켰을지라도 토할 것은 하나님이 그의 배에서 도로 나오게 하심이니, 그는 독사의 독을 빨며 뱀의 혀에 죽을 것이라”(20:15-16)고 밝히며, 악인을 반드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더 철저하게 망해야하며 고통 가운데 죽어가야 할 것을 선언합니다. 사도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라고 선언한 것처럼, 악을 즐기는 악인은 필연코 멸망하리라는 그 말 자체는 맞습니다. 그렇지만,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25:11)라는 말씀처럼, 저들과는 다른 “경우”로 인해 고통 가운데 있는 욥에게는 너무나 잔인하고도 잔혹한 독설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욥을 가리켜서 “자기의 똥처럼 영원히 망할 것이라”(20:7)며 비참하게 파멸할 것을 선언했던 “소발”은, “그는 강 곧 꿀과 엉긴 젖이 흐르는 강을 보지 못할 것이요” 곧 “올리브 기름이 강물처럼 흐르는 것을 그는 못 볼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것도 못 볼 것이다.”(새번역)라며, 다시는 욥에게 하나님께서 그 어떠한 회복의 은혜도 주시지 않을 것을 선언하며 저주합니다. 욥의 철저한 파멸을 다시금 “수고하여 얻은 것을 삼키지 못하고 돌려주며, 매매하여 얻은 재물로 즐거움을 삼지 못하리니”(20:18)라고 선언합니다. 남의 것을 탈취한 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그 모든 것을 도로 돌려주어야 한다는 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악한 자는 수고할지라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소발”이 이러한 악담을 욥에게 계속하여 퍼부은 이유를,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20:19) 곧 “이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을 억압하고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며, 자기가 세우지도 않은 남의 집을 강제로 빼앗았기 때문이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저들은 누구보다 욥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잘 아는 이들이,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저들에게서 발견하는 놀라운 편협한 신앙은, 단지 욥이 재난을 당했다는 것 자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만 해석할 때, 자신들이 보지도 않은 욥의 악행을 분명히 그러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단정하며 정죄하는 신앙인들로 돌변했습니다.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일 아닌가요? 3. 악인의 필연적 멸망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소발”은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20:3)라고 할 정도로, 욥에게서 들은 반박에 굉장한 자존심의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욥을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자”(20:4)로 정죄한 이유를, “이는 그가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20:19)고 밝혔던 “소발”은, 그 필연적인 멸망을 어떻게 선언합니까? 욥의 갑작스러운 철저한 몰락과 악창으로 몸이 썩어서 죽어가며 고통스럽게 부르짖는 상황을 안쓰럽게 여기기보다, “그는 마음에 평안을 알지 못하니, 그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겠고, 남기는 것이 없이 모두 먹으니, 그런즉 그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20:20-21)고 빈정거립니다. 욥의 “존귀함”(20:6)과 “기골이 청년 같”(20:11)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라는 조롱이었습니다. 욥이 한때는 번영했고 “존귀함”이 극에 달했지만, “풍족할 때에도 괴로움이 이르리니,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가 배를 불리려 할 때에 하나님이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리니,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리라”(20:22-23)며, 욥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순식간에 모든 것이 다 날아가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것 아니냐고 비웃습니다. “모든 재난을 주는 자의 손”은 압제자로 인하여 고통에 빠진 자들을 가리키며, 불의하고 패역한 사람은 자기들이 괴롭힌 사람들에 의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고보 선생은 이러한 상황을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방종하여, 살륙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약5:4-5)라고 경고합니다. “소발”은 욥의 죄악 역시도 “가난한 자를 학대하고 버렸음이요. 자기가 세우지 않은 집을 빼앗음이니라”(20:19)며, 이에 “맹렬한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음식을 먹을 때에 그의 위에 비 같이 쏟으”시는 재앙을 당해야만 했던 것이라고 정죄합니다. 한편에는 이러한 친구들의 정죄가, 욥이 자신의 무죄를 하나님 앞에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을 것입니다. 친구들은 욥이 위선적인 신앙인으로서 자기 탐욕만을 추구했던 “악인”과 “경건하지 못한 자”(20:4)였기에 욥에게 재앙이 닥쳤음을 강조하며, 욥이 하나님의 철저한 공의의 심판에서 빠져나갈 길이 전혀 없을 것을 “그가 철 병기를 피할 때에는 놋 화살을 쏘아 꿰뚫을 것이요. 몸에서 그의 화살을 빼낸즉 번쩍번쩍하는 촉이 그의 쓸개에서 나오고, 큰 두려움이 그에게 닥치느니라”(20:24-25) 곧 “철 무기를 피하면 놋 화살에 맞아, 화살은 등을 뚫고 시퍼런 창끝은 쓸개를 터뜨릴 터인데, 어찌 두렵지 않겠는가?”(공동번역)라는 독설로 질타합니다. 까닭 없는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욥을 더욱 참기 어려운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소발”은 계속하여 욥에 대한 하나님의 철저한 멸망의 심판을 “큰 어둠이 그를 위하여 예비되어 있고,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이 그를 멸하며, 그 장막에 남은 것을 해치리라”(20:26)고 선언합니다. “사람이 피우지 않은 불”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욥의 재앙 중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1:16)라는 상황들을 가리킵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잠21:6)고 경고했지만, 욥이 받은 재앙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것인데도 친구들은 이렇게까지 정죄해야 했습니까? 어떻게 친구인 욥을 이렇게까지 몰랐다는 것입니까? 그럼에도 “소발”은 “하늘이 그의 죄악을 드러낼 것이요, 땅이 그를 대항하여 일어날 것인즉, 그의 가산이 떠나가며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끌려가리라”(20:27-28)며, 욥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증인으로 채택한 “땅”(16:18)과 “하늘”(16:19)이 오히려 욥의 죄를 낱낱이 밝힐 것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하여 욥이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으로 필연적인 파멸을 당하게 될 것을 저주하며, 욥에게 임한 재앙이 그가 행한 죄악의 결과임을 다시금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소발”은 “이는 악인이 하나님께 받을 분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 정하신 기업이니라”(20:29)는 아주 단정적이면서도 잔인한 결론으로 욥에 대한 반박을 마무리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소발”은 욥이 왜 그렇게 탄식하는가에 대한 것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이, 그가 한 말은 단지 “내가 나를 부끄럽게 하는 책망을 들었으므로”(20:3)라는 분노로 욥에게 악인이 받을 필연적인 멸망으로서의 독설과 악담을 퍼부은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시 저와 여러분은 나의 편협한 신앙 지식만을 고집하며, 겉에 보이는 어떤 모습 하나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가며 정죄하기에 열심을 다하는 모습은 혹시 아닙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진정으로 깨닫고 진리를 보수하기를 원한다면, 우리 생각의 개혁과 확장, 진리에 대한 갈급함과 분별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줄 아는 가난한 심령으로 낮아져야 합니다. 진정한 신앙인은 인간의 어떤 외면적인 모습과 상황만을 가지고 교리적 신앙으로 판단하여 비난하고 정죄하기보다, 먼저 측은지심으로 위로하고 공감하는 자세로 나아갈 줄 압니다. 교리적 신앙 지식만을 앞세울 때 그 교리 자체가 혹시 옳다 해도, 사람들을 정죄하는 지옥 같은 세상으로 만들어가는 사탄적인 흉악한 인간으로 전락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욥의 친구들의 모습에서 따뜻함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섬뜩한 모습만을 발견하지 않습니까? 전도자이며 지혜자인 솔로몬은 우리에게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전5:2)며,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분명하게 기억할 것을 당부합니다. 혹시 우리가 말로 누군가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상대방은 만신창이가 되어 나의 영원한 적대자가 되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왜 지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했는지, 우리 기독교의 십자가 정신이 과연 무엇인지를 안다면, 결코 자존심 싸움을 벌이지 않습니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롬12:10-17)고 했던 사도 바울의 당부를 기억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