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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묵상글 ( 사순 제 2주일. - 딴판이신 주님을 보며.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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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딴판이신 주님을 보며
딴판
사순 제2주일의 주님은 타볼산의 영광스러운 주님이십니다.
사순 제1주일 광야에서 유혹과 시련을 받으신 주님과는 딴판입니다.
유혹을 이겨내고 시련을 통과한 다음의 빛나는 얼굴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전례는 사순 시기가 아직 한참 남은 이때
어찌하여 영광스러운 주님 모습을 벌써 소개합니까?
아직 엄동설한인데 너무 성급히 싹을 내민 꽃과 같은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아시다시피 타볼산의 변모 사건은
당신의 수난에 대한 주님의 1차 예고와 2차 예고 사이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수난을 앞둔 제자들에게 예고편 중의 하나이고,
우리에게도 같은 예고편을 보여 주는 거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 예고편은 한편으로 각오하라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수난을 각오하고 부활을 희망하라는 예고편입니다.
부활을 맞이하려면 그 전에 반드시 죽음을 각오하라는 것이요.
죽음 뒤에는 반드시 부활이 있다는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까이 봄과 멀리 봄의 대비이자 직시와 내다봄의 조화로서
우리는 반드시 가까이도 보고 멀리도 봐야 인생을 실패치 않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마지막 승리입니다.
아무리 시작을 잘하고 중간에 화려해도 마지막이 실패이면 그 인생은
축구에서 정말로 멋지게 공을 몰고 갔어도 골을 넣지 못한 것과 같고,
전후반 90분 중 85분간 경기를 지배했어도 마지막에 골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의 인생에서 이 세상 삶은
미래 삶의 아주 짧은 예고편에 불과합니다.
축구로 치면 전반 5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은 이 세상 삶이 그의 인생 전부라고 생각하겠지만
신앙인은 이 세상 삶이 영원한 삶의 서막에 불과하다고 믿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믿는 사람이고 그렇게 믿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 삶은 영원한 삶을 여는 것에 불과하다고 믿고
이 세상을 살면서 멀리 영원까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까지 내다봅니다.
그래서 영원과 영광을 내다보며 지금 엄혹한 고통을 직면하고 직시하고,
각오하고, 감수하고, 감당하고, 이겨냅니다.
찬란한 봄을 내다보고 한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의 세 제자와 같은 사람이라면
주님께서 수난 너머 보여 주신 영광스러운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고통 한가운데서 주님의 사랑을 보고 절망 한가운데서 희망을 내다보며
그러지 못하는 사람에게 사랑과 희망을 증거 하는 사람이 돼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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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의 변모 사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변모 사건은 우리 또한 변모의 삶을 살라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변모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많지만 그 중에 으뜸은 침묵과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외딴 곳이나 산을 자주 찾은 이유는 침묵과 기도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이런 침묵과 기도의 결실이 변모를 하게 만듭니다.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에 있어서 변화되어야 할 것은 침묵하는 마음자세입니다. 즉 인간은 침묵 안에서 지금까지 잘못 끌어 모은 모든 지식을 내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침묵은 인간을 변모하는 데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입니다. 침묵의 두 가지 전제조건은 오직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마음과 사랑으로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침묵하는 것입니다. 침묵은 정의의 마음을 키우며 거기서부터 평화의 결실을 얻습니다. 침묵은 마음과 육신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대인관계가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는 신앙인일수록 더욱 침묵의 순간들을 가져야 합니다. 침묵을 지키는 동안 인간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생각하고 자신의 결점이 얼마나 큰지 그리고 자신의 진보는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침묵을 통한 내적 생활은 양심, 마음, 정신 등을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키워가는 삶입니다. 이런 내적인 침묵의 생활은 회개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켜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내적인 침묵은 기도를 하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기도는 곧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또한 모든 행동과 덕행의 원천이 되고 영원한 즐거움과 평화의 원천이 됩니다. 모든 덕을 닦기 위해서는 우선 기도하는 법부터 먼저 익혀야 합니다. 가령 단순히 ‘주님의 기도’의 말마디를 암송할 때에도 이 단어들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깊이 스며 듭니다. 그리고 그 말들은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갑니다. 단순히 주님의 이름만 반복해서 불러도 힘을 얻게 됩니다. 겉보기에는 단지 기계적으로 그분의 이름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기도를 통해서 그분의 이름이 우리의 혈관 속에 무의식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서서히 그러나 분명히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기도의 결실은 단순한 감정상태가 아니고 우리 인간성의 전체적인 깊은 변화입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자신의 뜻에서 당신의 뜻으로 변모되기를 바라는 바로 그것이 기도의 유일한 목표이며 또 올바른 기도의 기준입니다. 훌륭한 기도를 이루는 것은 우리가 가져야 하는 신비로운 느낌이 아니라 변모되는 삶입니다.
이러한 침묵과 기도로 이루어진 가장 두드러진 변모는 온유와 자비한 사람으로 드러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금욕을 잘하고 금식을 잘 지키는 외적인 변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스스로 온유하고 자비로우셨기에 그분의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닮아 영적으로 변모된 삶이 그리스도인의 참된 삶이기 때문입니다.
온유와 자비로운 마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하느님께 마음을 열게 하는 길입니다. 온유와 자비는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원천입니다. 성서를 많이 읽고 여러가지 신심행사를 열심히 잘 할지라도 온유와 자비가 없다면 결코 그리스도를 닮은 변모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은 많은 사람을 끌어 당깁니다. 구태여 달리 믿는 사람들을 자기의 올바른 믿음으로 설득하거나 선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의 온유함과 자비로움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데 충분합니다. 이런 온유하고 자비로운 마음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고 그 안에서 그 분을 알아 뵙게 됩니다. 그래서 온유와 자비는 참 신앙을 알아보게 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이에게 온유하고 자비로운 모습으로 드러날 때 주님처럼 참된 변모의 삶을 살게 됩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방과 성찬용 잔
또한 사도들은 전도여 행을 마친 후 돌아올 때도 이 곳에서 다시 서로 만났다. 여기서 또는 이 부근에서 성모 마리아께서는 첫번째 그리스도교 박해 때 사도 요한이 터어키의 에페소로 안전하게 모실 때까지 살으셨다.
역사가 흐르면서 성찬식이 열렸던 이 방은 유감스럽게도 종종 중오의 표적이 되곤했다. 침략자들마다 그 성찬식이 열렸던 방을 소유하고 있는 그리스도교 신자들로부터 이 방을 무자비하게 빼앗았다. 70년에 티투스(Titus) 왕이 예루살렘을 거의 전부 파괴했을 때에도 그 집은 시온 산 위에 훌륭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성찬식이 열렸던 방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피해를 입지 않고 보호되었다. 황제는 그 산 위에 튼튼한 성당을 짓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 사마리아인들과 이슬람교도, 그리고 페르시아인들은 이 그리스도 교회를 파괴했다. 그래서 십자군의 기사들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오른쪽 옆 제단 뒤에다가 성찬식이 열렸던 방으로 통하는 입구를 만들었다. 이슬람 교도들이 이 십자군의 성당마저 파괴했을 때에도 성찬식이 열린 방이 있던 삼층건물은 다행히 보존되었다. 계속해서 터어키의 광신적인 무리들이 이 성스러운 건물을 모독했다.
16세기에 이르러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사들을 쫓아내고 성찬식이 열렸던 집이 회교사원으로 바뀔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신자들은 파괴된 건물을 새로이 복구했다. 당시에는 어떠한 크리스찬도 그 곳에 들어가지 못했다. 16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슬람 교도들은 크리스찬들에게 성찬식이 열렸던 방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그 곳에 들어 갈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곳에서 무릎을 꿇고 소리내어 기도하는 것과 성호를 긋거나 다른 신호를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얄리는 일들은 금지시켰다. 이미 앙쥬(Anjou)의 로버트(Robert) 왕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사들의 요청으로 수사들이 파수꾼으로서 이 지성소를 돌본다는 조건 하에 매우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터어키 황제로부터 예루살렘에 있는 지성소, 특히 성찬식이 열렸던 방을 관리할 수 있는 독자적 권리를 사들여서 거룩한 로마 가톨릭교회에 헌납했다.(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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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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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오늘은 ‘사순 제2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가 사순시기에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이며, 어디로 가는 ‘길’인지를 밝혀줍니다.
<제1독서>에서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습니다.”(창세 12,4). 그 길은 비록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길이지만,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주님께서 보여줄 땅’으로 가는 ‘길’입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 ‘길’에 우리의 동참을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2티모 1,8)
그런데, 사실 이 ‘길’은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길’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2티모 9-10)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에게서 환히 드러난 영광된 변모를 보여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당신 본래의 신적 초월성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이는 지금 우리가 가는 이 ‘사순의 길’이 어디로 향하여 가는 ‘길’인지를 보여줍니다.
사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마태 16,21-28)를 하신 다음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가올 수난으로 닥쳐올 절망과 위기를 견디어 낼 수 있도록 예수님의 영광된 모습을 미리 보여주시면서 준비시키십니다. 그러니 이 ‘수난의 길’은 동시에 생명과 부활의 빛나는 ‘길’임을 밝혀줍니다. 그러기에 내적 기쁨으로 차오르는 ‘은총의 길’이 됩니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는 박노해 님의 시가 떠오릅니다.
나는 기다리는 사람/ 그리움을 좋아한다.//
나는 그리움에 지치지 않는 사람/ 너에게 사무치는 걸 좋아한다.//
기다림이 지켜간다./ 그리움이 걸어간다.//
이 소란하고 쓸쓸한 지구에/
그대가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눈물 나는 내 사랑은/
그리움이 가득하여/ 나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기다림이 걸어간다./ 그리움이 길이 된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으로 ‘변모의 길’을 걸어갑니다. ‘길’이 되는 그리움으로 ‘부활의 길’, ‘영광의 길’을 갑니다.
그리고 오늘 말씀은 이 ‘길을 가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름 속에서 들려주신 가르침입니다. 곧 신약의 ‘쉐마’입니다. ‘들어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이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하느님께서는 직접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시켜주시면서, 그를 ‘따르는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곧 그를 따라 ‘변모의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곧 “그의 말을 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분과 함께 변모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아래 머물러 있는가?
그리고 들은 말씀으로 인하여 변모되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말씀 아래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씀이 내 안에서 성취되도록 말씀께 승복하는 일입니다. 변화의 힘이신 말씀께서 나를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말씀께 자신을 건네 드리는 일입니다. 곧 나 자신을 하느님께서 머무시는 초막집으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말씀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요 장소로 내어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사도 바오로가 말한 것처럼, ‘이 건물(초막)은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게 됩니다.’(에페 21-22 참조). 그러면, 우리는 변모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갈 것입니다.”(2코린 3,18 참조)
오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진정 변모되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내 아들의 말을 들어라!’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린 채 몹시 두려워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손을 대시며”(마태 17,7)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7,7) 그리고 ‘의연히 변모의 길을 가라!’ 하십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태 17,5)
주님!
말씀 아래에 머물게 하소서.
말씀께 제 자신을 건네 드리게 하소서.
맘껏 쪼물딱거릴 수 있도록 제 자신을 허용하게 하소서.
말씀이 제 안에서 성취도록 승복하게 하소서.
제 자신이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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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신앙의 삶이 행복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 덕분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손을 잡아주시고, 이끌어 주시며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잘못을 범하고 죄를 짓더라도 “인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토마스 아퀴나스).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주님을 생각하면서 삶의 쇄신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신명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성지순례를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얀 모습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 모습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초월적 존재로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하는데 모세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한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을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을 참된 하느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게 한 예언자입니다. 두 예언자의 공통점은 하느님의 백성을 올바른 길로, 참된 행복의 길로 인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고초를 겪은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예수님도 바로 그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결국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줍니다. 다시 말해 영광스런 모습을 보여준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순명하느라 무기력해질 모습, 십자가형 앞에 우리 인간과 똑같이 두려워할 모습 앞에서도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기를 바라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나는 모습으로 변한 것처럼 나의 얼굴도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의 명함은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면 얼굴이 환해집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놀라서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마태17,8).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초막의 재료는 말씀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천국 같은 그곳에서 천년만년 살고 싶어 했습니다.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내려옵니다. 현실로 돌아와서 거기서 희망을 갖고 살아가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는 미사 안에서 기도하고 영성체하며 기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그 정신을 살아가라는 명령이기도 합니다. 행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순절을 맞아 말씀 익히기 자료를 나눠 드렸는데 풀어보신 분도 있고, 그렇지 않으신 분도 있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성체조배를 하며 아침저녁기도를 빠뜨리지 않고 하시는 분이 있는가 하면, 일주일이 되도록 성경 한 줄도 안 읽고 기도를 소홀히 하신 분도 계십니다. 누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알면서도 행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평일 미사참례를 더 자주 하시고, 성경도 더 자주 읽으며 그 안에서 위로와 희망을 얻고 문제의 해답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얼굴이 해처럼 빛났듯이 이제 우리의 모습이 빛나기를 기도합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주님, 제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저의 희망은 오직 당신께 있습니다.”(시편39,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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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포사목으로 오시는 신부님들은 한국어는 물론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좋습니다. 언어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는 마음으로 오는 것입니다. 교포사목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언어의 문제가 본질은 아닙니다. 복음적인 삶을 살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사제를 모시기 위해서 한국까지 갔었던 신부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몇 개 교구를 다니면서 사제들의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겸손한 사제를 찾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결국 한국에서 사제를 모시는 것은 포기하였고, 미국에서 사제를 양성하는 방법을 찾았다고 합니다. 잠시 머물다 왔기 때문에, 겉모습만 보았기 때문에 섬기는 사제, 겸손한 사제를 못 만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저 자신을 돌아보면 저 역시도 섬김을 받는 삶에 더욱 익숙했습니다. 복음적인 삶, 겸손한 삶 보다는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소금처럼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녹이면서 맛을 내는 사제들이 많았다면 사제를 모시러 갔던 신부님은 기뻐하며 돌아왔을 것 같습니다.
부르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의 본당 사목방문을 보았습니다. 본당에는 영어미사, 스페인어 미사, 한국어 미사가 있었습니다. 주교님은 3개 공동체의 미사를 모두 집전하였습니다. 미사는 오전 9시, 10시 30분, 12시에 있었습니다. 영어와 스페인어는 주교님께서 잘 하시기 때문에 주례를 하였지만 한국어 미사는 제가 주례를 하였습니다. 사목방문 하시는 주교님의 열정에 놀랐습니다. 한국에서는 보통 교중미사만 주례를 하시는데 주교님은 모든 주일미사를 함께 하였습니다. 주교님의 소탈함과 겸손함에 놀랐습니다. 미사가방도 직접 들고 왔습니다. 제의도 본인이 직접 입었습니다. 한국어는 못 하시니 제게 주례를 부탁하였습니다. 영어로 미사경본을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한국 공동체의 미사니 한국어로 하라고 배려해 주었습니다. 알아듣지 못하는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셨지만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처럼 주교님은 한국어 미사에 함께 하면서 소통하려고 하였습니다. 미사 후에 교우들과 사진도 같이 찍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 안수를 해 주었습니다. 격식과 절차를 넘어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떠나라고 하십니다. 사제들에게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은 주로 ‘본당’입니다. 봉사자들이 있고, 사제관도 있고,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큰 어려움 없이 사제로 지낼 수 있습니다. 둥지를 벗어나야 새는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본당 사목에서 보람을 느낄 수도 있지만 새로운 사목의 현장으로 떠나는 신부님들을 보았습니다.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마존에서 사목하는 신부님, 아이티에서 사목하는 신부님을 보았습니다. 음식과 문화와 풍토가 다른 곳입니다. 열병 때문에 고생하기도 하고, 납치의 위험을 겪기도 하고, 외로움에 눈물 흘리기도 합니다. 비록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하지는 않지만 신부님들은 그곳에서 가난한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아픈 이들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일지라도 섬기는 삶을 산다면, 겸손한 삶을 산다면 그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평과 불만의 삶을 산다면 그 어떤 곳도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은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섬김과 겸손의 문제입니다.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늘 새 하늘과 새 땅이 주어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요한과 함께 타볼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거룩하게 변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그곳에서 천막을 3개 만들어서 모세와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께 드리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먼저 사람의 아들이 고난을 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거룩한 변모는 십자가의 희생과 죽음이 있어야 빛이 나는 것입니다. 강을 버리는 물만이 바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꽃을 버리는 나무만이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섬김과 겸손의 삶을 산다면 지금 이곳이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땅입니다.
“하느님의 힘에 의지하여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행실이 아니라 당신의 목적과 은총에 따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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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매주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주로 신간을 먼저 보면서 관심 많은 분야의 책을 선택하곤 합니다. 그런데 ‘치매의 모든 것’이라는 책을 볼 수 있습니다. 휘프 바이선이라는 네덜란드 최고의 임상 심리학자가 자그마치 30년 동안 연구한 끝에 내놓은 치매 안내서와 같은 책은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눈에 띄었던 이유는 2021년에 주님 곁으로 가신 제 아버지가 말년에 치매 환자였기 때문입니다. 평생 공부하셨던 아버지였지만 몇 차례의 큰 수술로 처음에는 섬망 증세가 오더니 결국 저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치매에 걸리셨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알던 아버지의 다른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매우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당시 저의 말과 행동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큰 혼란을 주었겠구나 싶었습니다.
치매 환자를 대할 때 중요한 소통 규칙, 치매 환자에게 편안한 환경 만들어 주기, 치매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되는 말과 할 수 있는 말 등등…. 저 자신이 얼마나 이 부분에 무지했었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저와 다름에 원망했고, 치매가 정말로 못된 병이라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치매 걸린 아버지가 저를 힘들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책을 읽어보니 저의 모름이 아버지를 더 힘들게 했었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똑똑한 척하는 우리이지만 몰라도 너무 모르는 우리입니다. 상대에 대해서 잘 모르면서도 자기 기준에 맞춰서만 판단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 판단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생각하고 또 곰곰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이 제일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 모습이 큰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이 믿고 따랐던 예수님이 정말로 하느님이셨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고, 하느님 나라에 머물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을 것입니다. 이 순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체험이 있었습니다. 피정하면서 계속 이 피정의 집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나 행복했고, 그 행복 속에 계속 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들은 생각은 주님께서도 그것을 원하실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이렇게 한곳에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마지막 말씀이 세상 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을 볼 때, 머무는 삶이 아닌 계속 움직이며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베드로도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들 말이 틀렸던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지요.
주님의 뜻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머무는 삶이 아닌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떠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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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디쓴 시련으로 보이는 것들이 때로 변장한 축복일 수 있다(오스카 와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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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 미사전례
-꿈과 현실, 그리고 변모-
오늘 복음의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모습 장면이 흡사 꿈처럼 생각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주신 하느님의 참 좋은 선물, 꿈처럼 생각됩니다. 그대로 미사 전례를 상징한다 싶습니다.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이 바로 우리 가톨릭 교회의 미사전례입니다. 매일 미사전례를 통해 꿈의 일상화가 이루어줍니다.
꿈과 현실입니다. 꿈의 현실화입니다. 참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꿈꿉니다. 요즘은 꿈도 사라져가는 삭막한 현실입니다. 사람은 꿈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꿈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입니다.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기 위해 수도원 피정 오는 많은 분들입니다.
그대로 오늘 예수님의 변모를 체험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애제자들은 그대로 산상 공동피정중에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꿈을 일상화해주는 매일 미사전례입니다. 저도 밤새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꿈꾸다가 일어나 오늘 강론을 씁니다.
새벽에 잠깨니 옛 교대 동창들 홈페이지에 남도 여행중인 동창이 올린 남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그대로 꿈꾸듯 아름다웠습니다. 스테파노 동창인데 교대 2학년때인 1970년에 보고 한번도 못봤으니 무려 53년전입니다. 당시는 20대 초반이었는데 지금은 초등학교 교장 은퇴후 국내외 여행을 즐기는 70대 중반의 동창입니다.
한달에 한 번은 동기 모임으로 계획에 따라 여행하는 모습이 흡사 월피정 꿈꾸는 하루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남도 여행도 8명이 동료들이 함께 꿈꾸는듯한 단체피정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참 아름답고 신비로운 많은 남도 사진들을 보며 저도 잠시 꿈꾸는 기분이었고 꿈을 주제로 오늘 강론을 쓰게 되었습니다. 사진과 함께 올린 메시지를 소개합니다. 3월1일-3월4일이니 3박4일의 꿈의 단체피정여행처럼 보였습니다.
-“봄내음 찾아서 남도로 오늘은 보길도 가는 길에 달마산 미황사에서 매화를 만나고...”
“물맑은 봄바다에 배를 타고 청산도로 갑니다. 봄길에는 유쾌한 웃음이 있고 정다운 이야기가 걸음마다 넘쳐납니다.”
“장보고 대사의 청해진 그리고 완도 수목원의 여러 가지 동백꽃을 보면서 봄맞이 남도 여행을 끝냅니다.”-
봄맞이 남도 공동 순례 피정 여행이라 해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대로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을 상징하는 순례 여행 피정처럼 생각됩니다. 참으로 꿈꾸는 꿈의 사람들은 일상에서의 거룩한 탈출과도 같은 여행을 좋아합니다. 이런 꿈같은 여행이 활력넘치는 참삶을 살게 합니다. 정주의 삶에 평생 내적여정의 삶을 사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은 매일의 공동전례미사를 통한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의 체험이 이를 대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가의 길 여정에서 지친 제자들에게 산상피정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꿈을 체험토록 하십니다. 공동으로 꿈꾸는 중에 변모하신 주님이시고, 모세, 엘리야를 만나는 놀라운 체험을 한 베드로는 엉겁결에 집착을 드러냅니다. 순간 현실감각을 잃었음이 분명합니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느님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수도원 피정이 좋아도 내내 수도원 피정집에 살 수는 없듯이 산상신비체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룩하고 아름다운 신비로운 피정은 다음 일상에서의 광야여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공동피정의 꿈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앞당겨 체험시킴으로 힘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이어 하느님께서도 즉시 개입하시면서 적절한 충고를 주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당신 아드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십자가의 길, 광야여정에 오르라는 것이며 이제 꿈이 현실화된 일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제자들에게는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마라.”
바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파스카 주님과 함께 일어나 일체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새롭게 내적 여정에 오르라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합니다. 아, 이제 영원한 도반이신 주님과 함께 파스카의 여정에 오르게 된 세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님의 변모를, 앞당겨 주님의 부활 영광을 체험한 제자들은 예전의 제자들이 아닙니다. 창세기에서 주님의 축복 말씀을 듣고 힘차게 길을 떠나는 아브라함과 흡사합니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바로 파스카의 여정중에 있는 세제자들은 물론 우리 하나하나가 또 하나의 복된 존재 아브라함입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제자들보다 우리는 얼마나 유리한 위치에 있는지요! 이미 파스카 예수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을 꿈꾸며 앞당겨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영적 갈망의 기쁨으로, 성령의 기쁨으로 부활축제를 기다리는 우리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지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불멸을 환히 보여주셨습니다.”
바오로가 고백하는 이처럼 죽으시고 부활하신 참 좋으신 파스카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이미 매일이 부활축일입니다. 참으로 광야인생여정중에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이 거룩하고 아름다운 꿈이 미사전례입니다.
꿈을 잃은 현대인들에게 하느님 주신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미사전례의 꿈입니다. 이보다 도 좋은 꿈은 없습니다. 그러니 미사전례는 거룩해야 하고 신비로워야 하고 아름다워야 합나다. 우리가 굳이 밖으로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매일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사전례의 꿈은 현실화되어 내적 광야 여정중인 우리를 당신을 닮은 생명과 빛이 넘치는 기쁨의 삶으로 변모시켜 줍니다. 또 거룩하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사전례 은총의 꿈은 현실화되어 삭막한 광야 여정중에도 우리 모두 날마다 아름답고 신비롭고 아름다운 일상을 살게 해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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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던 모습입니다. 우리의 그리스도로 오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우리의 구원자로 오시는 모습 말입니다.
우리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좋아서 펄쩍 뛰지 않았을까요? 이제 확실한 믿음을 얻었으니, 다시는 흔들리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제자들도 모르긴 몰라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 모습을 잊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지상에 살다가 죽어서 영혼이 하느님을 만날 때 통해야 하는 문이 있다고 옛 성인들은 말하는데 흔히들 그 문을 빛의 문이라 합니다. 그 빛의 문을 통하는 순간 모든 인간은 자세를 낮추고 겸손해진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모든 허물을 스스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의 제자들도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빛이 비치자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하늘에 들어갈, 하느님을 만날 준비가 그들에게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 초막 셋을 지어 지내시면 어떨까요?'라고 겁먹은 말로 이야기했는지도 모르지요.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빛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그 빛이 비치는 순간 우리의 모든 것은 드러나고 동시에 우리는 그 빛과 하나가 되어 빛과 같은 옷을 입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일찍이 성경에서 '어둠의 행실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순 2주일입니다. 이제 빛으로 부활하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합시다. 그 준비는 예수님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어두움을 벗고 빛을 입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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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보다 소유를 추구하지 마십시오.
소득이 늘어나도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거나 행복감이 줄어드는 이유는 늘어난 소득을 어떻게 ‘소비’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는 소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를 위한 소비이고 하나는 경험을 위한 소비라고 합니다. 소유를 위한 소비 즉 눈에 보이는 무엇인가를 가지려는 소비는 점점 더 좋은 것을 원하는 우리 마음 때문에 그 행복감을 줄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경험을 위한 소비는 우리의 행복감을 늘어나게 도와줍니다. 경험은 사라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소유하고 있는 내 경험이기에 비교되거나 그 값이 낮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소비를 하고 계십니까? 점점 더 행복해지고 계신가요? 점점 더 소중한 경험을 간직하고 계신가요?
사랑하는 가족들과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해 보세요. 그 경험이 추억과 행복이 되어줄 것입니다.
우리 주님과도 경험을 위한 소비를 해 보세요. 주님과의 추억과 기도 안에서의 기쁨이 우리를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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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5. 사순 제 2주일. 키엣 대주교님.
믿음의 눈
사람들은 사랑과 우정 등 마음으로 보는 것은 보고 있어도 잘 알지 못합니다. 물질적인 선물을 받고, 말로 표현할 때만이 사랑을 느낍니다. 사람의 마음, 내면의 사랑을 느끼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마음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의 얼굴과 외형적인 모습을 봅니다. 그 사람은 내면은 노력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구나 나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마음을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영혼 또한 볼 수 없습니다. 맑고 신성한 영혼은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와 비슷한 가난하고 평범한 사람의 육체 속에 하느님 영광을 간직하고 계셨지만 예수님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신성을 본 제자들은 희망에 넘쳤습니다. 우리는 눈으로 봐야만이 믿는 제자들의 모습, 그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인 아우구스티노의 고백처럼 그분께서는 우리 인간의 모든 관계에, 모든 순간의 기쁨과 모든 사람의 우정과 사랑 속에 함께하고 계십니다. 모든 행복의 근원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님은 나와 같이 계시건만 나는 님과 같이 아니 있었나이다.”
- 성아우구스티노, '고백록'10권 27장 중에서 -
하느님의 신성은 저절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죄의 허물이 벗겨지면 벗겨져야만 하느님의 빛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내면의 침묵 속으로 가라앉을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형제의 마음 속에도 하느님 영광의 씨앗이 계십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역시 성령의 씨앗을 기르는 고귀한 밭이기에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금식은 바로 마음의 때를 벗기고 내 안에 계신 하느님께 다가가는 것입니다.
금식은 바로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의 신성한 씨앗이 싹틀 수 있도록 보호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빛이 우리 내면을 밝게 비추어주신다면 내 안에 계신 하느님도 다시 살아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다시 어둠에 헤매이는 사람의 앞길을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주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것이며 부활하신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것입니다.
주님, 저희 형제 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소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현실도 볼 수 있는 섬세한 마음을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님의 변모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2. 주님의 변모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하는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고 부활의 영광을 누릴 수 있는 믿음이 되었습니까?
3. 내 몸 안에 계신 하느님 영광의 빛을 비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4. 하느님 영광의 빛을 가리고 있는 불쌍한 형제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말씀의 나눔
1. 이번 사순절에는 금식과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마음 깊이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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