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 이후
함민복
늦게 일어나 수돗가에 나가 보니
고무대야에 피라미와 붕어가 떠 있다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인
잉어가 아가미를 움직인다
그늘 흔드는
지느러미
두려웠나 물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 잔 고기 몇 마리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고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다
----함민복,[낚시 이후](문학세계사, 2005년) 전문
어느 날 여우가 시냇가를 거닐다가 물 속을 들여다 보니까, 수많은 물고기들이 무척이나 허둥지둥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여우가 그 물고기들에게 이렇게 물어 보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허둥지둥대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가?” 그 물고기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무섭기 때문입니다. 물 속에는 수많은 포식자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지요.” 여우가 그 사악하고 교활한 마음을 숨기고 아주 따뜻하고 상냥한 말씨로 이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단 말인가? 물 밖으로 나오면 내가 그대들을 잘 보살펴 주겠네.” 그러자 물고기들은 별난 여우를 다 보았다는 듯이, “여우 나리님, 한평생 살아온 물 속도 이처럼 무서운 세상인데,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물 밖의 세상을 어떻게 알고, 또, 그리고 여우 나리님을 어떻게 믿고 물 밖으로 나가겠어요!”라고, 퉁명스럽게 쏘아부치고, 아주 재빠르게 물 속 깊은 곳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이 우화는 아주 오래 전에 {탈무드}에서 읽은 토막 이야기이며, 내가 그 기억을 토대로 해서 재구성해본 것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은 매우 다양하지만, 낚시란 바늘에 미끼를 꿰어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를 말한다. 그 낚시의 행위도 바다낚시와 민물낚시로 대별되고, 또한 그 잡는 방법에 따라서 대낚시와 릴낚시, 그리고 루어낚시 등으로 구분된다. 낚시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또한 그만큼 다양하게 변모와 진보를 거듭해왔다고 할 수가 있다. 하지만 자이나교도들이나 그밖의 생명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낚시꾼은 잔인한 사냥꾼이며, 감금자이고, 또, 그리고 사형집행의 주재자라고 할 수가 있다. 낚시꾼들은 물때의 흐름과 물 속의 깊이와 그리고 그 물고기들의 습성을 파악한 다음, 그 물고기들이 좋아하는 미끼를 달고, 또, 그리고 그 물고기들을 유인하기 위하여 밑밥을 던질 줄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땅의 낚시꾼들은 그들의 행위를 ‘도道’를 닦는 ‘무심無心’의 경지로 설명하고, 저마다 강태공처럼 입신출세의 욕망을 은폐하기에 바쁘다. 강태공은 태공太公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천하의 명장이며, 그 인물의 됨됨이가 어진 현자의 위치에까지 올라갔던 인물이라고 할 수가 있다. 낚시꾼들은 물고기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토록 무자비하고 교활했던 제국주의자들과도 같은 존재이며, 그들은 그들의 살생 행위를 道의 경지로 미화시키고, 우리 물고기들이 죽음의 문턱에서 그토록 살기 위하여 발버둥치는 행위를 “아, 그 놈, 정말 대물大物이로구나! 이 짜릿한 손맛 때문에, 우리가 이토록 고생을 하면서도 낚시의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라고, 자기 스스로가 낚시의 열광자임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열광자는 자기 도취의 황홀함에 빠져 있는 자이며, 그 황홀한 순간과 쾌락을 위해서 타인들의 존재를 기꺼이 부정하는 일방주의자들이다. 일방주의는 제국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길이며, 그 길에는 힘의 크기에 따라서 그 모든 것이 폭력적인 서열관계를 간직하게 되어 있다. 영국인들은 무자비한 해적들이 아니라, 멋진 신사들이며, 미국인들은 인디언들을 모조리 몰살시킨 도살자들이 아니라,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킨 천사들이다. 그 제국주의자들은 제3세계의 야만인들을 위해서, 기독교와 선진문명을 전파하고, 모든 후진국민들을 문명의 세계로 이끌어낸 백의의 천사들이다. 하지만 이 제국주의자들이 스쳐 지나간 곳이면 어김없이 천연자원들이 고갈되어버리고, 제 동족들의 피와 살을 뜯어먹고 살아가는 무시무시한 독재자들이 판을 치게 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갖 종파와 민족 갈등으로 이전투구식의 내란과 분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지나가게 된다. 낚시꾼은 잔인한 제국주의자(잔인한 여우)이며, 노예상인이고, 온갖 감옥과 사형집행을 담당하는 주재자이다. 제국주의는 낚시꾼들의 이상적인 천국이며, 이 제국주의는 수많은 생명들의 피비린내 위에서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함민복 시인은 1962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났으며, 1988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는 {우울씨의 일일}, {자본주의의 약속},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와 그리고 {말랑말랑한 힘} 등이 있다. 그의 시세계는 문명비판의 토대 위에서,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게 풍자와 해학의 기법을 선보이고 있으며, 다른 한편, 그 문명의 그늘에서 외롭고 고독하며 처절하게 살아가고 있는 실존적 개인들의 모습을 매우 진지하지만, 또한 그만큼 그로테스크하고 음산하게 그려낸 바가 있다. 그러나 함민복 시인은 제2회 ‘애지문학상’을 수상하고 {말랑말랑한 힘}을 펴내면서부터, 아니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출간한 이후부터, 그의 시세계는 새로운 변모를 시작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시문명 속에서 낙오자가 되어서 떠돌아 다니던 그가, 서해바다 속의 강화도에다가 그 정처를 마련하고부터, 그 문명비판의 토대 위에서, 새로운 대안처럼 생명주의를 접목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생명주의는 영원히 역사 철학적인 사상으로 자리를 잡을 수가 없는 데, 왜냐하면 생명주의는 너무나도 두루뭉수리한 용어이며, 어느 것 하나 그 용어의 범주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주의가 하나의 철학 사상으로 자리를 잡는다면,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등이 모조리 종적을 감추게 될는지도 모른다. 요컨대 생명주의가 아닌 사상이 없는 것이다. 어쨌든 함민복의 {말랑말랑한 힘}은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발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흙이 말랑말랑 가는 길을 잡아준다// 말랑말랑한 힘/ 말랑말랑한 힘”이라는 [뻘]에서처럼, 그 부드러움을 통해서, 만물의 삶의 터전인 ‘뻘’과 그 ‘생명’들을 예찬하게 된다. 도시는 인간을 잔인하고 냉소적으로 만들지만, 자연은 인간을 너그럽고 인자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함민복은 시인이지, 낚시꾼이 아니다. 또한 그는 생명주의자이지, 제국주의자와도 같은 반생명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그가 [낚시 이후]라는 시를 썼고, 어떻게 생각해보면 물고기들의 지옥을 연출해놨다고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의 낚시 행위에 의해서 ‘고무대야’는 감옥이 되었고, ‘피라미와 붕어’는 허옇게 배를 드러낸 채 죽어가게 되었다. 그 죽음들을 머리에 인 ‘잉어’만이 겨우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있고, 또한 그 감옥 밖에는 사생결단의 탈출을 시도하다가 비명횡사해간 ‘잔 고기들’이 널려 있게 되었다. 도대체 시인으로서, 생명주의자로서, 왜, 그는 이처럼 반생명적인 감옥과 죽음을 연출해내고, 또한 그 무엇 때문에 이 살벌한 풍경들을 시로 썼단 말인가? 제국주의자들도 사냥을 하고 생명주의자들도 사냥을 한다. 제국주의자들도 낚시를 하고 생명주의자들도 낚시를 한다. 그들은 다같이 밥을 먹고 똥을 싸며, 그리고 또한 다같이 그들의 삶을 즐기고 그들의 죽음을 죽어간다. 그러나 제국주의자들과 반제국주의자들(생명주의자들)의 차이는 제국주의자들이 타자의 주체성을 짓밟으며 그들의 탐욕만을 추구해 나가는데 반하여, 반제국주의자들은 타자의 주체성을 옹호하고 최소한도의 욕망만을 가동시켜 나간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모든 생명주의자들은 생명이 생명을 먹고 살아간다는 사실에 대하여 너무나도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자들이고, 그 죄의식과 감사함의 표현으로 최소한도의 욕망만을 충족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제국주의자들은 반성할 줄을 모르는 자들이고, 생명주의자들은 반성할 줄을 아는 자들이다. 함민복의 낚시 행위는 생명주의자의 그것에 불과하고, 따라서, 그 물고기들의 지옥(삶)을 통해서 우리 인간들의 삶을 성찰해보고 있는 것이다. 물고기의 삶이 시인의 삶이고, 시인의 삶이 물고기의 삶이다. ‘낚시 이후’, “늦게 일어나 수돗가에 나가 보니/ 고무대야에 피라미와 붕어가 떠 있다”라는 시구도 우리 인간들의 비극적인 삶을 시사해주고 있고,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인/ 잉어가 아가미를 움직인다”라는 시구도 우리 인간들의 비극적인 삶을 시사해주고 있다. “두려웠나 물 밖으로 뛰쳐나와/ 죽음 속으로 헤엄쳐 간 잔 고기 몇 마리”라는 시구도 우리 인간들의 비극적인 삶을 시사해주고 있고,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고/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다”라는 시구도 우리 인간들의 비극적인 삶을 시사해주고 있다. 시인과 물고기는 다같이 ‘운명의 낚시바늘’에 꿰여져서, ‘지옥’이라는 감옥에 갇힌 자들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감옥을 탈출해 보았자 더욱 더 비극적인 죽음만을 맞이하게 되는 하루살이들에 지나지 않는다.
바다도 감옥이고, 땅도 감옥이다. 물 속도 감옥이고, 물 밖도 감옥이다. 그 감옥을 연출해낸 자는 제국주의자와도 같은 하나님일는지도 모른다. ‘운명의 낚시바늘에 걸려든 물고기들’, 기껏해야 ‘고무대야’가 삶의 바다이고, 피라미와 붕어는 이미, 배를 허옇게 드러낸 채 죽어 있다. 또, 고무대야 밖에는 그 감옥이 두려워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비명횡사해간 잔 고기들이 널려 있고, 그 고무대야 안에는 ‘죽음을 머리 위에 허옇게 인/ 잉어가“ 겨우 그 아가미와 지느러미를 움직이고 있다. 그렇다. 감옥은 자유를 박탈한 장소이기 때문에 탈출의 욕망을 가중시키고, 그 사생결단의 탈출마저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장소가 된다. 억압과 자유, 탈출과 죽음, 부패와 호흡이 한 물 속이고,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게 된다. 요컨대 이 세상의 삶은 어떠한 희망도 없고, 따라서 ”심장들은 제자리뜀으로 경계를 넘는다“는 시구는 오직 죽음만이 진정한 ’삶의 해방‘이라는 역설에 맞닿아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함민복 시인이 낚은 것은 물고기들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란 말인가? 아니,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함민복 시인이 낚은 것은 첫 번째는 물고기이고, 두 번째는 우리 인간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 번째는 모든 생명들이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삶의 지옥’을 연출해낸 [낚시 이후]라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감옥 안도 두렵고, 감옥 밖도 두려운 생명들, ‘운명의 낚시바늘’에 걸려 들어서 죽음의 급행열차를 탄 모든 생명들----. 함민복 시인의 [낚시 이후]는 비극적인 삶의 핵심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는 시이며, 너와 나의 삶과 모든 인간들의 삶을 전면적으로 되돌아보고 반성하게 만든다. [낚시 이후]는 억압과 자유, 탈출과 죽음, 부패와 호흡을 명상하고 이 세상을 거대한 지옥으로 묘사했으면서도, 너무나도 아름답고 뛰어난 시로 승화되고 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첫 번째는 언어의 절제이며, 두 번째는 어떤 사건의 핵심을 파고드는 인식의 힘이다. 언어의 절제는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으면서 그 모든 것을 시사해주는 잠언적이고 경구적인 문체로 이어지고, 어떤 사건의 핵심을 파고드는 인식의 힘은 그의 앎의 깊이를 설명해준다. 물고기를 낚은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을 낚은 함민복, 우리 인간들을 낚은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을 낚은 함민복, 아니, 모든 생명체들이 아니라 [낚시 이후]라는 제일급의 시를 낚은 함민복----. 함민복 시인은 [낚시 이후]라는 시를 통해서, 마치 제국주의자들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삶의 지옥’을 연출해내고, 이 세상의 삶이 과연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가를 역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질문은 매우 쓰디 쓰고 통렬한 질문이며, 오히려, 거꾸로, 그토록 아름답고 행복한 삶을 희원하는 함민복 시인의 천성만을 드러내주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함민복 시인은 참으로 천성이 고운 시인다.
나는 이러한 함민복 시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반경환 명시감상 제1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