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앙과 신학의 공방전을 지켜보면서
말씀묵상의 쾌도난마를 시전하려고 합니다.
신학과 관련된 글은 되도록 언급하지 않을려고 했는데
개혁주의 신학의 예정론은 믿음의 본질적인 문제이기 떄문에 회피할 수 없습니다.
지난 날 예정론은 강도사 고시의 논문 제출 항목이어서
누구보다도 예정론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하였습니다.
최근 개혁주의 신학을 비판하는 자들이 출몰한 가운데
개혁주의 신학은 물론 그 내용의 정수를 담고 있는 칼뱅의 5대 강령을 비롯하여
특히 예정론에 대한 신학뿐만 아니라 그 말씀의 이해가 전혀 없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총신을 다니며 신학을 공부할 때 개혁주의 신학 뿐만 아니라
김이곤의 고난신학과 장일선의 구약신학의 주제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 때 신학의 넓은 바다 가운데 개혁주의 신학은
작은 돗단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개혁주의신학은 공부하면 할수록
성경의 중심 골격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유일주의자들은
개혁주의 신학이 성경의 중심 골격인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칼뺑이 뿌린 신학의 독초라는 사실만 알 뿐...
개혁주의 신학과 칼뱅의 5대 강령과 예장론에 대한 불가지론자들이었습니다.
성경의 정수인 개혁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가
기독교를 박멸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히는 안티들보다 더 못하니
개혁주의를 비판하는 목사들의 수준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그들은 개역한글과 개역개정을 쓰는 가짜 교회와 신앙이라는 전제로
지난 날 사탄의 성경, 가짜 성경, 천주교 성경이라는 막말로 성경의 푸닥거리를 하였습니다.
칼뱅의 5대 강령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은
성경에 대한 불신자보다 더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특히 성경의 글자에 대한 이데올로기는 성경의 글, 곧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아리석음에 머물렀습니다.
특정 사본에 대한 토템 신앙은 범신론적 우상화에 매몰되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얻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금.은.동.목.석의 우상과 다를 바 없습니다.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던 이스라엘의 전철을 되밟는 킹제임스 성경의 유일자들은
글자의 이데올로기, 그 올무와 함정과 덫에 걸렸습니다.
성경의 예정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저들은
예루살렘의 거치는 반석과 돌이 되어 믿지 않는 자들의 부끄러움, 그 실상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예정론은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가운데
또한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 그 긍휼하심으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이해로 충만한 예정론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는 불가지론은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인본주의자들입니다.
예정론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 말씀의 충만입니다.
☞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8:29-30)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고전2:7)
☞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고전2:9-10)
☞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갈3:8-9)
☞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1:3-14)
제 마음에 각인된 이 말씀은
구원의 기쁨과 그 충만한 말씀입니다.
바울의 예정에 대한 이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깊은 이애요, 그 놀라운 탄성입니다.
이처럼 개혁주의 신학의 예정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의 구원을 베푸시는 그 충만한 말씀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요, 그 사랑의 깊이입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본질을 담은 신학이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그 충만한 말씀에 대한 신본적 믿음입니다.
믿음의 구원, 그 충만한 말씀에 대한 신학이 개혁주의요,
개혁주의 신학은 글자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진리의 복음과 구원의 말씀으로 충만한
성경의 정수요, 그 정론입니다.
바로 성경의 캐논이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킹 제임스 성경의 유일자들이 개거품 흘리며 비판하는 개혁주의와 구원의 본질인 예정론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 안 있는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성경의 말씀입니다.
글자의 이데올로기로 그 글자가 품고 있는 말씀을 비판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짓이요, 공의를 거짓으로 바꾸는 이랑의 독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