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의 글은 몇 년 전부터 반재경 전도사님이 작성한 글이며 매년 교정 및 첨삭하여 올리고 있습니다.]
(눅 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오늘 이 글의 제목을 '책임감을 사랑으로 바꾸라'고 정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감이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책임감이 없는 사람보다는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 훨씬 더 바람직하고 그런 사람들이 형통할 가능성이 큽니다. 책임감이 있다고 다 탁월하진 않지만 탁월함은 재능에 책임감이 더해질 때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은 탁월해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책임감에서 하는 것을 사랑해서 하는 것으로 바꾸는 것'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참 놀랍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하나는 사도 바울인데, 그는 우릴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많이 품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형제인 유대인들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주님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즉 지옥 가도 좋다고 말한 사람인데(롬 9:3)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래와 같습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예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적, 육체적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피뿐 아니라 물도 쏟으셨는데(요 19:34) 의사였던 어느 목사님 말씀에 따르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한 말로 기억하는데, 그분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육신의 고통을 초과하면 심장이 스스로 터져 물과 피가 따로 쏟아진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몸이 아프거나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참 힘들다는 생각이 들고 그럴 때는 다른 사람은켜녕, 저의 일도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데 예수님은 어떻게 저렇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니까 그렇다고 한다면 바울은 어떻게 복음을 전하느라 매까지 맞고, 감옥에도 수시로 들락날락하고(당시 감옥은 끔찍했을 겁니다) 그 모진 고난을 이겨냈을까, 싶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바울 안에서 바울을 움직였던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책임감이 아니었다는 말이지요.
다시 책임감과 사랑에 관해 얘기해 봅시다. 책임감이 강하신 분들께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책임감이 강하면 어쨌든 자신이 맡은 일을 마무리 하긴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겐 일을 믿고 맡길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원함이나 사랑이 없이 오직 책임감만으로 일을 한다면 일을 하는 사람이나, 일을 시키는 사람이나, 그 일의 유익을 누리는 사람이나, 모두가 다 불편합니다.
아버지가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돈은 벌어왔지만, 자식들을 벌여 먹여야 할 부담으로 생각하고 사랑하지 않을 때, 그 자녀들이 겪을 감정적인 어려움을 생각해 보시면 쉽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대부분 무언가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임감이 있으니 그것을 반드시 이뤄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동역자, 배우자, 등등 주변에 주요 인물들을 사랑할 대상으로 보지 못하고 내가 풀어야 할 문제나 내 성공에 기여를 해야 할 사람, 또는 나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는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즉 처음부터 '성공'이 목표였기 때문에 인간관계도 전부 거기에 맞춰지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삶에는 긴장과 부담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꼭 성공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성공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성공은 우리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긍정적인 과정의 자연스런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공이 자연스런 결과가 아닌 목표 그 자체가 된다면 그 이유는 어떤 책임감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책임감은 그 동기가 사랑받는 '아들의 영'이 아닌 '종의 영'이나 '고아의 영'에서 나오는 책임감을 말합니다. (저는 여기서 '영spirit'을 어떤 사고방식이나 사고체계의 의미로 씁니다) 또는 인정받아 본 적이 없어서 나를 증명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원인에서 나온 책임감으로 일을 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을 느끼게 되는데 우리는 그러한 부담을 짊어지고 살도록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태가 지속될 때, 반드시 번아웃되어 쓰러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여러 가지 복잡한 마음과 생각의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나는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아들임을 깨달아야 하고 그 결과 나를 증명하기 위한 책임감에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받는 아들이기에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동기에서 일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길고 복잡할 수 있으니, 결과만 말씀을 드리자면 책임감에서 일하던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일하는 것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나이 든 노부부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가정만은 지키겠다는 책임감으로 같이 사는 것처럼 비참한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서로를 너무 사랑하는 노부부를 여럿 만났기 때문에 '늙으면 다 그런 거지...사랑이 어딨어?'라는 말은 저의 생각을 바꾸지 못합니다. 상대를 진짜 사랑하면 '가정을 지킨다'는 표현은 쓸 일도 없습니다. 가정을 지킬 책임감으로 같이 사는 부부와 상대를 사랑해서 같이 사는 부부의 차이, 이 얼마나 큰 차이입니까?
이 원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 책임감만으로 하는 것은 말씀드렸다시피 그 과정에 인간관계의 문제 등, 여러 문제를 낳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책임감으로만 일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도 오직 책임감에 십자가를 지셨다면 아마도 끝까지 완수하지는 못하셨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땀이 피가 될 때까지 감정적인 고통을 참으셔야 했고, 심장이 터지기까지 육신의 고통을 참으셔야 했고, 또 죄 없으신 그분이 세상 모든 죄를 지기까지 영적인 고통도 참으셔야 했는데, 그게 다만 책임감만 가지고 될 일입니까? 우리 주님은 사랑 그 자체셨고 그랬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습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확실하게 증거해 주신 것은 우리에 대한 책임감이 아니라 우리에 대한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자, 그럼 '사랑보단 책임감으로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냐? 책임감을 사랑으로 바꿀 능력은 내게 있느냐?'라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런 능력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요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방법은 오직 하나, 주님께 구하는 것뿐입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그리고 우리가 책임감이 아닌 사랑으로 살기 원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 구하면 주십니다. 그때, 바울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여기서 '강권'은 영어 성경인 확대성경에서 'control'로 번역되었습니다. 즉, 주님은 여전히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겠지만 주님의 사랑이 나를 컨트롤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너무 놀라운 진리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그것을 구할 수 있고,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기에 주님은 그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며, 그때 우리도 바울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이러한 제안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같이 기도하시면 좋겠습니다.
사랑의 하늘 아버지,
고아의 영에서 나오는 책임감을 아들의 영에서 나오는 사랑으로 바꿔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