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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2
#성육신
그리스도의 인성이 피조물이라면, 그리스도를 통한,그리스도를 향한,그리스도에 의한 기독교신앙도 우상숭배일수밖에 없게 된다.
#숫자 #사람의수
성경에서 '6'은 사람의 수이고,'7'은 주님의 수이다.6은 인수 1 2 3을 더해도 곱해도 6이 되는데다가,꿀벌의 벌집에서도 보다시피 육각형은 자연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가장 아름다운 완전수로 인정되어왔다.그래서 6을 기반으로 한 체계는 규칙적이고 균형있으며 안정적이고 예측자능하며 자동적이다.그런 6이 사람 또는 사탄을 상징하는 수가 된것은,6의 원리에서는 주님을 바라볼 필요가 없게되기 때문일것이다.
반면에 7은 6과 같은 차원에 있으면 매우 불안정하고 예측불가하며 불균형적이고 자동적이지 않다.칠각형은 모양새도 볼품없다.게다가 1부터 10까지,또는 0부터 9까지의 숫자 중 유독 7만이 이렇다할 아무런 특징이나 매력이 없다.그래서 7은 외롭고 고독한 수이다.그런 7일 주님을 상징하게 된 이유는,아마도 6과 같은 차원에 놓인 7을 한차원 높게 들어올리면 그 7을 기준으로 다른 여섯개의 점들이 연결되어서 입체적으로 균형있고 안정적이며 견고해지기 때문일것이다.높은 차원의 7이 없을때에는 여섯개의 점들 중 어느하나만 삐걱대도 전체가 무너지지만,공중의 7과 연결되어있으면 땅의 여섯중 어느 하나 또는 전체가 어그러진다 해도 공중의 7이 붙잡고 있어서 다시 재배열 할수 있게된다.
때문에 이 땅의 교회와 성도들은 하늘의 7과의 연결을 통해서 서로간에 6을 유지하려 해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또한 하늘의 7을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 하면 되려 아무런 유익도 없이 불편함과 민폐만 가져다줄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20211122
#선행 #우상
기도에 열심인 신도는 기도하는 행위자체를 우상으로 삼기 쉽다.성경지식을 추구하는데 열심인 신도는 지식을 추구하는 행위자체를 우상으로 삼기 쉽다.봉사와 구제에 열심인 신도는 교회를 섬기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행위자체를 우상으로 삼기 쉽다.신도가 선을 행할때는 항상 그 선행의 근원과 목적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유념해야 한다.그러지 않으면 그 선행자체가 우상이 되어버린다.
#여호수아 #Joshua 6:1-14
여리고 성이 무너지다
1 이스라엘 자손들로 말미암아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
당시 이스라엘의 20세 이상의 남성의 수는 대략 60만 명이었다. 한편 여리고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지 나와있지는 않지만 사안의 중대성을 볼 때 여리고도 모압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의 다른 족속들과 연합군을 이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극히 인간적인 기준에서만 본다면 이스라엘 군사가 60만 명이나 된다 하더라도 가나안 족속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메뚜기 취급할만큼 네피림 같은 장대한 족속들이었으므로 설령 군사 수가 적다 하더라도 해볼만한 전투라고 생각할수도 있었다. 그러나 여리고인들은 창녀 라합이 증언한대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서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극심한 두려움에 휩싸여 감히 맞서 싸울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런 여리고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자기들의 높고 견고한 성벽을 의지해서 문을 굳게 닫고 수비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이치적으로만 생각해봐도 그것마저도 애굽을 벌하시고 홍해와 요단 강을 가르시고 아말렉과 모압을 진멸하신 여호와 앞에서는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를 알 수 있었을텐데 여리고인들은 어리석게도 바로 거기서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 것이었다. 여리고는 여호와께 버림받아 이스라엘에게 멸망당하기로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여호와께 통회하며 자복하고 이스라엘에게 항복하고자 하는 선한 심령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여리고는 자기들의 죄악되고 부패한 심령과 의지를 따라서 비록 여호와께서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인정했어도 정작 여호와께 굴복하고자 하지 않고 도리어 대적하고자 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마귀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머리로는 알아도 순종하지는 않는 것과도 같다. 선지자의 예언이 여호와의 명령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도 순종하지 않았던 패역한 백성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도 미워하여 잡아죽였던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교 지도자들, 일곱 천사 무리들의 재앙이 내릴 때 그것이 주님의 심판의 재앙임을 알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하늘을 향해 저주를 퍼부으며 산과 동굴로 피한 자들, 성경과 성령의 원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거부하는 교회와 교인들의 행위가 전부 여리고의 어리석음과도 같은 것이다.
엘리 제사장 시대의 블레셋은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들고 나오자 처음에는 겁을 집어먹었으나 스스로 용기를 북돋아서 마침내 이스라엘을 무찌르고 언약궤까지 빼앗는 전과를 올리게 된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기고 언약궤를 탈취할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여호와 앞에 범죄하고 패역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승리의 표징으로 언약궤를 들고 나갔어도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지 않은 이가봇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무런 효과도 얻을 수 없었고 도리어 모든 면에서 극심한 수치와 비참함을 당하게 되었다. 여호와께 순종하는 왕이 다스리던 때에는 주변 나라들이 감히 이스라엘 유다 왕국을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던 반면에, 여호와께 패역하던 때에는 열국으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당해왔다.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에서 무시와 비웃음과 멸시를 당하고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교회와 교인들이 주님의 뜻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증거가 된다.
2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으니
3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4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5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여호와께서는 군대장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게 보내셔서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게 하신 후에 여리고를 반드시 넘겨 주시리라는 언약과 함께 실제로 행해야 할 것에 대한 명령을 내리신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주님 앞에 스스로를 겸비하는 성도들에게만 하나님 나라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반면에 아무리 외적으로 많은 선을 행하고 순종한다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스스로 겸비하지 않는 교인들은 비록 스스로 살았다 하나 실상은 죽은 자와도 같다. 성전에서 자기 신앙을 자랑하며 기도하던 바리새인은 구원을 얻지 못했으나 자기가 죄인임을 자각하고 차마 눈을 들지도 못하며 울부짖은 세리는 구원을 얻었다. 주님께 겸비하지 않은 신앙고백은 지식의 우상이 되어버리고, 주님께 겸비하지 않은 주기도문은 탐욕의 우상이 되어버리며, 주님께 겸비하지 않은 십계명은 공로의 우상이 되어버린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6일 동안 여리고성을 한바퀴씩 돌고 7일 째 일곱바퀴를 돌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사람의 지성으로는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만약에 모세가 그 명령을 받았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대체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지시냐며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굳게 닫힌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땅의 방법이 이스라엘에게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전적으로 하늘의 방법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고 여호와께서 주신 방법도 참으로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이런 기적적인 방법을 주셨다고 해서 오늘날 몰지각한 교회와 목사들은 자기들이 감당하지도 못할 대규모 사업을 벌여놓고 믿음으로 기적을 일으키자고 선동하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참된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신 신령한 방법은 그런 기적적인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대로 순종하며 행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좁고 협착한 십자가의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어리석고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과 성령께서 가르치시는대로 따라가며 순종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에게 있어서는 여리고를 무너뜨리는 여호와의 방법과도 같은 신령한 방식이다. 교회와 목사에게 복음 사역에만 집중하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을 돌라는 명령과도 같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다. 자기가 싫어하는 국가지도자나 정부를 욕해서는 안된다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을 돌라는 명령만큼 어려운 일이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나 장사를 해야 하는 사업주에게 주일 하루를 온전히 지키라고 하는 것은 여리고 성을 돌라는 명령만큼 순종하기 어렵다. 여자들에게는 교회에서 큰소리 내지 말고 나서지 말고 집에서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은 여리고 성을 도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
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가라 하고
7 또 백성에게 이르되 나아가서 그 성을 돌되 무장한 자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나아갈지니라 하니라
8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기를 마치매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 앞에서 나아가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언약궤는 그 뒤를 따르며
9 그 무장한 자들은 나팔 부는 제사장들 앞에서 행진하며 후군은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더라
10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외치지 말며 너희 음성을 들리게 하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지니라 하고
11 여호와의 궤가 그 성을 한 번 돌게 하고 그들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진영에서 자니라
12 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궤를 메고
13 제사장 일곱은 양각 나팔 일곱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계속 행진하며 나팔을 불고 무장한 자들은 그 앞에 행진하며 후군은 여호와의 궤 뒤를 따르고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며 행진하니라
14 그 둘째 날에도 그 성을 한 번 돌고 진영으로 돌아오니라 엿새 동안을 이같이 행하니라
이스라엘은 6일 동안에는 하루에 단 한 번만 여리고 성을 돌고 복귀해야 했다. 그들은 어느 때보다도 신령한 사기가 충천해 있었으나 더 돌고 싶다고 해서 여러 번을 돈다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6일 동안 하루에 단 한 번만 돎으로써 여호와의 명령에 자기들의 혈기를 억제해야만 했다. 또한 그들은 여리고 성을 도는 중에는 입도 뻥끗하지 말아야 했는데, 이는 행여나 자기들의 혈기로 인해 교만한 함성을 지름으로써 허락되지 않은 싸움을 돋우려 한다거나 또는 이렇게 도는 것만으로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불평이 나올 여지를 원천봉쇄 하고 잠잠히 여호와의 행사를 지켜보라는 목적으로 보인다. 교회 사역이 성경과 성령으로 검증되었다 하더라도 자기 분수를 넘어서 일시적인 열정과 혈기를 억제하지 않으면 스스로 나가 떨어지게 되거나 사역 전체를 무너뜨리게 된다. 느릿느릿 걸어도 확실하고 우직한 황소 걸음처럼, 정당한 교회 사역은 조바심을 내지 말고 천천히 조금씩 우직하게 해나가야 한다.
#20201122
#민수기 #Numbers 11:4-9
모세가 장로 칠십 인을 뽑다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모세의 인도를 따라 애굽을 빠져나올 때에는 그들 뿐만이 아니라 당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억압받던 수많은 이방 족속들도 같이 그들을 따라 나왔다. 여호와께서는 비록 이스라엘만을 선택하셨더라도 선택받지 못한 이방 족속들이 백성들의 공동체에 외형적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시고 심지어 백성들에게 내러주시는 만나 등의 은혜도 똑같이 베풀어 주신다. 이는 혹여 이방 족속들 중에도 마치 추수 때 떨어진 낱알을 줍는 것처럼 여호와를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부어주시기도 하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방 족속들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인 지혜나 지식이나 기술 등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쓰도록 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따라 나온 애굽의 이방 족속들은 여호와께로부터 신령한 은혜와 은사들을 백성들과 똑같이 받고 누렸으므로 당연히 여호와를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여러모로 봉사하며 섬기는 것이 마땅하였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도 이방 족속들이 섞인 이스라엘 무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리스도께 구원받은 주님의 백성된 참된 성도들이 있는 반면에, 신앙과는 상관없이 교회의 외형적인 유익만을 위해서 교인이 된 자들도 있게 마련이다. 우리 생각에는 잘 믿는 사람들만 교회에 있으면 얼마나 교회가 순수하고 좋을까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 아이러니하게도 순수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일수록 이 땅의 것들을 하찮게 여기기 쉬워서 몸으로 행하는 것보다 신령한 것을 추구하는 경향을 띠게 마련인데 이는 여전히 그런 신자들에게도 죄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수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 교회에 있으면 교회가 실질적으로 잘 돌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교회의 연약함을 채우시려고 신앙과는 무관한 외부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 되도록 허용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이 땅의 가치있는 것들을 교회를 위해 사용하고자 하심이다. 아더핑크 목사는 이를 두고 교회라는 나무에 성도라는 열매만 있으면 빈약해 보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교인들이 잎사귀가 되어 풍성하게 보이게 하는 것이라 비유하였다. 그런 형식적인 교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신앙이 없어도 적당히 교회 사역에 동참하게 되면 참된 성도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머, 어떤 때는 종종 큰 영향력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방 족속들은 처음부터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여호와에 대한 신앙으로 모세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당시의 애굽의 몰락을 보고서는 노예에서 해방될 기회는 그 때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백성들이 나올 때에는 애굽인들에게서 여러가지 귀한 물품들을 노략하다시피 하였는데, 이방 족속들도 그 틈을 타서 한 몫 단단히 챙겼을 것임은 분명하였다. 이방 족속들은 모세를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무사히 애굽을 탈출한 후에는 하루빨리 어디든지 정착해서 탈취한 보화를 가지고 인생 2막을 살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의 바람과는 반대로 광야라는 험지를 전전하면서 고생스럽게 하다보니 불만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모세에게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기회를 엿보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니 어쨌건 여호와의 백성이랍시고 꾸역꾸역 모세를 따르긴 하더라도 자기들처럼 변변찮은 음식들과 험한 광야 노정에 지치고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서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모세에게서 벗어나고자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 무리에서 벗어났다가는 광야에서 무슨 위협을 당할지 모르는데다가 다른 나라로 가더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방 족속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구인 식욕으로 백성들의 가려운 곳을 긁은 것이다. 즉,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밋밋한 만나보다는 애굽에 있었을 때에 먹었던 고기를 비롯한 여러 음식들이 먹고 싶다는 원망을 하게 한 것이다. 만약 백성들이 만나 말고 다른 음식이 먹고 싶어서 모세에게 정중히 요청했다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연약함을 보시고 기꺼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셨을 것이다. 그러나 이방 족속들의 충동으로 선동된 백성들은 다른 것도 아닌 애굽의 음식들을 떠올리면서 불평했는데, 이것의 진짜 속뜻은 애굽으로부터 벗어난 지금의 광야생활보다 애굽에서의 노예 생활 할 때가 더 좋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백성들은 한낱 입의 즐거움을 만족시키는 음식 때문에 중노동의 학대와 갓 태어난 수많은 남자 아기들이 나일강에 던져져 죽은 것을 감수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자녀가 부모로부터 받는 모든 먹을 것 입을 것 등등이 하찮게 보인다고 해서 이렇게 키울거면 도대체 자기를 왜 낳았냐고 부모에게 따지며 대드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백성들의 극악한 불평은 에서가 음식 한 그릇에 야곱에게 장자권을 넘긴 것이나 가룟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님을 팔아버린 것과도 같다.
백성 내 이방 족속들의 그러한 사악한 꼬드김은 사도 바울이 경고한 교회 내 거짓 교사들의 거짓된 가르침과도 같고 예수님께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경고하신 발람과 이세벨과 니골라당의 가르침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자들의 가르침이 교회 밖에서 있었다면 아무 상관도 영향도 없었겠지만 저들이 교회 내의 구성원으로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것이다. 그렇게 교회에서 불법을 가르치고 선동하는 자들은 마귀가 뿌린 가라지와도 같아서 그 잘못된 것들을 보더라도 쉽사리 교회에서 뽑아내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저들이 뽑힐 때 연약한 신자들도 뽑히는 화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교리는 어느 정도는 어지간하면 분별할 수 있기 때문에 마귀의 가라지들은 복음에 대한 것보다는 주로 목회자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아무리 선한 목회자라 하더라도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실수와 흠결이 생길 수 밖에 없는데, 마귀의 가라지들은 목회자의 연약한 부분들만 발견해서 지속적으로 다른 교인들에게 침소봉대 하며 참소한다. 따라서 이렇게 목회자를 참소하는 말을 들은 교인은 처음 한두번은 아닐거라고 하면서도 세번네번 듣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면 교회 분열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의 악한 원망이 나오는 때에 갑자기 만나에 대한 묘사와 설명이 나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나가 어떠함을 설명함으로써 백성들이 먹고자 했던 애굽의 여러 음식들과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해서 여호와께서 내려주신 만나는 군인들의 전투식량, 그중에서도 밥처럼 먹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바처럼 먹어야 되는 전투식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전시가 아니라면 사람은 한가지 음식만으로는 안되고 여러 음식들을 골고루 섭취함으로써 필요한 영양분을 얻어 생활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입의 즐거움도 추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전시에는 그렇게 여러 음식을 마련할 수도 요리를 할 수도 없으므로 가능한 한가지 음식에 필요한 영양소들이 들어있어야 한다. 생존이 최우선 목적이므로 맛은 고려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는 광야의 백성들을 종종 군사나 군대로 칭하셨기 때문에 그들에게 만나를 전투식량과 같이 내려주신 것이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만나만 가지고서도 충분한 영양소를 얻을 수 있었고 여호와께서 내려주시므로 끼니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아직 자기들이 마하나임이라는 자각이 없었기 때문에 만나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이방 족속에게 선동되어 입의 즐거움이 없다는 불평을 홍수처럼 쏟아내었던 것이다.
이 만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함을 은근히 알려준다. 만나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영양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완전식품이고 사람이 구할 수 없으며 오직 여호와께서만 풍성히 내려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나를 어떻게 해먹을지는 백성들 각자의 몫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먹건간에 훼손하지 않는 이상 만나의 효력은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만나는 백성들이 보기에 평범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볼품이 없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만나를 처음 보고서는 경멸조로 이게 대체 무엇이냐고 했고 그것이 그대로 만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의 속성을 그대로 내비쳐준다.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구원의 모든 지혜와 지식을 주기에 완전하고 사람에게서는 구할 수 없으며 오로지 삼위 하나님과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그 완전하신 말씀을 해석하는 권세를 신자들에게 여러 방면으로 맡기셨다. 그래서 말씀을 받은 신자들은 암송을 하건 묵상을 하건 설교를 듣건 성경을 쓰건 반복해서 읽건 간에 각자의 영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가르치심을 따라 복음을 해석하여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죄성 때문에 말씀의 많은 부분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나마 간신히 하나 건진 그 말씀을 가지고서도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살리시듯이 조심스럽게 싹을 틔우셔서 우리로 열매 맺게 하신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만나가 볼품없듯이 심지어 교회에서도 종종 평가절하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 사역은 무엇보다도 순전한 복음 선포와 가르침이 우선되어야 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설교가 복음에 순수할수록 교인들은 뻔한 설교로 치부하고 제대로 듣지 않는다.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은 가장 인기가 없어서 언제나 다른 이벤트나 행사에 밀리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저 입맛만 만족시키는 죄악된 애굽의 여러 음식들처럼 교회에서도 마땅히 배제시켜야 할 세속적 방식을 도입하고는 한다. 교회 내 이러한 경향이 바로 애굽의 음식을 그리워하며 악하게 원망한 백성들의 죄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군사로 임명하셨으므로 인간의 육적인 감각을 만족시키는 것들은 개나 줘버리고 말씀으로 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20191122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4장.
19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가인의 후손 중에는 가축을 치는 자, 악기를 다루는 자, 금속 기구를 잘 만드는 자의 조상들이 나왔다. 가인 자신이 악인이므로 그의 후손 중에는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가인의 후예는 하나님 없이 오로지 자기들만의 삶을 위해서 나름대로 문명을 이루었을 것이고 그 문명을 가축으로 더욱 풍요롭게 하고 음악으로 더욱 자기들의 흥을 둗우며 금속 기구들로 더욱 강하고 편리한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가인의 후예들에게는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믿음도 관심도 없었으므로 오로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누릴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누리고자 하여 그런 기술과 문명들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인류 역사 이래로 지금까지도 인류의 모든 문명과 기술 등은 하나님을 아는 아벨의 후예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는 가인의 후예들에 의해서 발전되어 왔다. 어떤 것은 쟈기들의 편의를 위해서, 어떤 것은 자기들의 교만함에 의해서 발전 되어 왔다. 또한 특정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있고 연금술이나 페니실린처럼 본래 목적에서 어긋난 부수 현상에 의해 발전 된 것이 있다. 반면에 아벨의 후예들은 영원한 삶을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 땅의 삶에 크게 연연해 하지 않는다. 물론 참된 신앙을 가질수록 영생을 바라보면서도 이 땅에서의 삶도 성실해야 하지만서도 우리의 죄성으로 말미암아 그 둘을 전부 만족시키는 고차원의 신앙인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아벨의 후예는 대체로 그런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지는 못했으며 오로지 복음을 지키는 것에서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발전을 이루어 왔다. 우리가 바라기는 인류 문명조차도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해서 했으면 좋겠지만서도 이 또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하심에 있다. 가인의 후예들에게는 영생의 복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대신에 잠시나마 이 땅에서의 복락이라도 누리게 하시려고 이 땅의 지혜를 주셨고, 우리 아벨의 후예들에게는 이미 복된 영생이 약속되어 있으니 이 땅에서 조금 부족하게, 가인의 후예들의 문명의 혜택을 보며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 아닐까.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인 야발은 오늘날 자본주의로 이어져 내려 왔다. 야발의 모든 기준은 오로지 가축의 수였던만큼, 오늘날 자본주의자들의 모든 가치 기준은 오로지 자본이다. 이 자본, 즉 돈의 힘은 너무나 강력하여 성경에서는 종종 하나님을 가장 크게 대적하는 자로 묘사되어 나온다. 두로와 시돈은 해상무역도시로서 막대한 자본이 넘치는 도시였다. 이로 인해 두로 왕은 스스로를 신이라 여기고 감히 하나님과 대등하려는 교만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두로에 보내셔서 두로를 철저히 멸망시키셔서 그 교만함을 꺾으시고 자칭 신이라 하는 두로 왕이 열방의 비웃음거리가 되게 하셨다.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붉은 용의 지령을 받은 두 짐승이 각각 땅과 바다에서 솟아오르는 것을 본다.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국가 정부이고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자본을 무기로 하는 상업과 기업을 의미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과 자본은 서로 유착하여 불의를 행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를 통해서 옛 뱀 사탄의 계략을 충실히 이행하는 것이다. 불의한 독재자는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자기 권력을 이용하여 어려운 시절의 파독 광부와 간호사와 월남전 참전군인들의 피땀 어린 돈을 착취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웠다. 어려운 경제를 살려달라고 세운 어느 경제 대통령은 터무니 없는 국토 개발 사업을 벌여 무려 4조원이라는 막대한 국세를 거리낌 없이 쏟아붓고 거기서 발생하는 온갖 부당한 이익을 챙겼다. 오늘날에도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나 할 것 없이 돈의 논리와 그 시스템에 휘둘리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나 이런 자본논리는 교회에서조차도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처음부터 악의적으로 재물에 대한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감히 그리스도의 교회와 교인들을 신앙을 빌미로 악용하기도 한다. 또는 처음에는 분명 순수한 마음으로 목회 사역을 시작하였을지라도 교회 규모와 재정이 겉잡을 수 없이 불어나서 자본의 물살애 휘말려 변질되어버리기도 한다. 처음부터 돈의 마귀였든 서서히 돈의 마귀가 되어갔든 모두 그리스도의 교회를 욕보인 것이므로 마지막 날에 주님 앞에서 쫓겨나 울며 불며 이를 갈게 될 거짓 선지자들인 것이다. 그런 불법은 비단 대형교회들만 저지르는 것이 아니다. 중소 규모의 교회들은 재정의 빈약함을 이유로 동역하는 부교역자들의 쓸 것을 제대로 공급해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재정을 담임목사를 위해서만 배정하고 정작 부교역자들에게는 푼돈만 쥐어준다. 이는 교회가 마땅히 부교역자들도 교회의 한 가족과 지체로 여겨야 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사회의 기업들보다도 못하게 취급하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하는 많은 사람들도 정작 신령한 지혜와 지식과 의를 추구하기보다는 지금 당장 더 많고 풍요로운 재산 축적에 더 관심이 많다. 하나님 나라에 자기 재물을 저축하기보다는 먼지와 같이 흩어지고 좀과 동록이 상하게 할 것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후예들에게는 탐심을 버리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쓰며 일용할 것 이외에는 바라지 말고 부하든지 빈하든지간에 있는 것으로 감사하며 만족하라 하신다. 믿음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그리스도인은 자기에게 맡겨진 식솔들의 일용할 쓸 것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공급하고 양육하고 자기가 책임져야 할 직원들의 정당한 임금을 제대로 채워주며 교회의 쓸 것과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준다.
악기를 다루는 자의 조상인 유발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음악을 만들었을 것이며 이는 오늘날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고 지성의 끈을 놓게 만드는 모든 현란한 기교의 음악으로 이어져 내려온다. 또한 이방 종교에서는 종교적 황홀경에 이르기 위해 음악적 기교를 활용하기도 하는데 이 또한 유발의 후예임을 증거하는 것이다. 음악이 인간의 귀를 즐겁게 할 수록 사람들은 그것들에 열광하여 자기의 시간과 재물들을 아끼지 않고 소비한다. 그리고 그 음악가를 신성시 하여 아이돌이라는 우상으로 삼는다. 교회를 다니건 다니지 않건 간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음악가는 자기들의 신이고 그들의 음악은 자기들의 경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는 소위 교회 음악에서도 만연하고 있다. 가사 자체는 성경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따와서 그 맥락에 맞지 않는 자의적으로 왜곡된 것이 적지 않고, 음률 자체도 가사의 성격, 즉 성경 본문의 분위기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 다분히 감성을 건드리는 것에 치중된 것들이 많다. 또한 절제되고 격식있는 멜로디로 가사의 내용을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소위 장르의 자유라는 미명 하에 마치 예배 중에 여기저기서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것처럼 시끄러운 멜로디로 사람의 정신을 산만하게 하고 이방 종교 음악처럼 어떤 신령한 황홀경에 취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강조하며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기 보다는 음악에 취해 흥을 돋우게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하다. 그리고 교회 소속 성가대를 포함한 많은 교회 음악가들은 유명세를 타게 되면 초심을 잃고 자기가 마치 연예인이라도 된 듯이 인기인처럼 행동하고 예배 음악이 아니라 세속 음악 무대처럼 만들어 버림으로써 하나님께 드려야 할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채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교회 예배 음악에서도 유발의 후예가 되지 않으려면 가사는 오로지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해야 하고 음률은 성경 본문의 분위기에 맞게 절제되고 평이하여 가사를 음미할 수 있어야 하며 음악가들은 자기가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금속 기구를 제작하는 두발가인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온갖 기구들을 만들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인류 문명을 위한 과학과 공학과 의학 기술들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두발가인의 후예들은 자기들의 필요에 의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기들을 더욱더 드러내고 과시하기 위해서 또는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지나친 발전을 추구했다. 그래서 권력과 재력이 있는 자들은 백성들을 혹사시켜 피라미드와 타지마할과 같은 자기 무덤을 사치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안락을 위해 아방궁 같은 호사스런 궁전을 짓기도 하며 오늘날에는 하늘 높은줄 모르고 끝없이 높은 건물들을 짓기도 한다. 국가적으로는 군사 무기를 만드는데 두발가인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어 이제는 온 인류를 전멸시키고도 남을 대량살상무기가 개발 되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시대는 점점 눈에 보이고 논리적으로 확연히 증명되는 것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상이 점점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신앙 까지도 눈에 보이거나 체험 가능한 것이어야만 받아들이려 한다. 그러다보니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믿음의 정의는 점점 교회에서도 퇴색되어 간다. 오늘날 교회에도 이런 두발가인의 사상을 받아들여 46년 동안 지은 성전과 같이 호사스러운 교회 건물과 음향 장비와 방송 장비를 갖추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정작 당신의 교회에 필요한 것은 그렇게 호화로운 것을 요구하시지 않으셨다. 광야 40년과 솔로몬 성전이 지어지기 전까지는 수수한 천막에 법궤를 두시게 하셨고, 바벨론 포로 70년 이후에 지어진 둘째 성전은 솔로몬 성전보다 초라했으나 그 영광은 더 크게 두시겠다고 하셨다. 물론 신자들도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두발가인의 후예가 이룩해 놓은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며 혜택을 누릴 수는 있다. 그러나 교회에도 그런 최첨단의 장비들이 없으면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한다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은 전혀 성경적이지도 않으며 오로지 자기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들이다. 교회 건물과 여러 장비들은 교인들이 정기적으로나 수시로나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적당히 부족하지만 않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