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2월 제20회의 당대회에서 스탈린을 비판하는 흐루시초프의 비밀연설이 있기도 전에, 마오와 그 동료들은 새 중국을 건설하는 데 지식인들을 자발적으로 참여시키기 위한 사기 진작책을 검토했다. 1956년 4월말 마오는 '백화제방정책'(百花齊放政策:여러 가지 다양한 사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정책)을 발표해 중국에 스탈린 치하의 소련과 비슷한 탄압적인 정치 분위기가 생겨나지 않도록 했다.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탈(脫)스탈린화가 빚은 혼란을 목도하면서도 이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과감하게 밀고 나갔다. 고위급 동료들이 이 정책을 실시하지 말라고 조언했으나, 마오는 중국사회에 그때까지 존재하는 갈등사항들은 대체로 적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결과 벌어진 '백화제방과 백가쟁명(百家爭鳴)'이 겉잡을 수 없는 상태로 되어가자 당노선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마오는 지식계급에 의해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받으면서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때 이후 마오는 근대화의 주역은 대중서민과 그들의 창조성이라고 믿게 되었다. 전문가들도 당성(黨性)이 충분하지 못하면 농촌으로 보내 노동을 시킴(下放)으로써 그들의 당성을 개조시켰다. 이러한 배경 아래 마오는 1957~58년 겨울에 대약진운동이라는 정책을 입안해 1958년 5월 공식적으로 시행했다. 마오의 경제정책은 1960년대와 1970년대의 통설처럼, 일방적이고 단세포적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마오는 공업화와 '기술혁명'이 여전히 자신의 목표라고 공언했으나 기술발전의 결과가 가져온 부정부패적 측면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대약진 운동의 일환으로 '인민공사'의 설립을 지지하고 촉진시킨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결과 1955~56년 협동농장 단위로, 이어 1956~57년 사회주의 집단농장 단위로 구성되었던 농민들은 1958년에 다시 한번 자신들의 세계가 뒤죽박죽 되어버린 것을 경험했다. 결국 이러한 변화의 결과는 혼란과 경제적 파탄만을 가져왔다. 1958~59년 겨울 마오는 전략의 일부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 인민공사의 구성원에게로 소유권을 분산시키고 공업과 농업에서의 비현실적인 과도한 생산목표를 하향조정시켰다. 그러나 인민공사를 비롯한 새로운 중국식 사회주의 노선이 크게 볼 때는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9년 7~8월 루산 산[廬山]에서 개최된 제8회 전국대표대회(전대회) 제8차 중앙위원회전체회의(중전회)에서 당시 국방장관이던 펑더화이[彭德懷]는 대약진 운동의 부조리와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을 비난하여 곧바로 모든 관직을 박탈당하고 감금생활을 하다가 문화대혁명 때 죽었다.마오쩌둥식 사회주의의 실현 브리태니커
1925년 4월 서울에서 처음 결성되었다가 1928년 12월 해체, 8·15해방 후 재건된 공산주의 정당.
한인들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이동휘 등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8년경 조직한 한인사회당, 한명길 등이 역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4월 결성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리고 이와 별도로 이동휘 등이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한 고려공산당(상해파공산당)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한국에서의 공산당 결성의 기원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본다.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다음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했으며,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호, 선전부장 김참, 인사부장 김약수, 노농부장 정해운, 조사부장 주종건 등을 선임하고,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타도 일본제국주의·봉건세력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여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新幹會)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의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小)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1926년 3월에 승인했던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이 테제에 따라 여러 차례 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그동안 잠적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표면에 등장, 8월 15일 종로에 있는 장안 빌딩에서 이영·정백 등의 서울청년회계와 ML(마르크스·레닌)계, 그리고 화요회계 일부가 모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논의, 조직선언을 발표하고 16일 공산당 결성을 마쳤는데, 이것이 세칭 '장안파공산당'이다. 한편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가 장안파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담은 '8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동시에 1928년 해체된 바 있던 조선공산당의 정통 계승을 자임했다. 재건파공산당은 9월 8일 장안파를 흡수하고, 12일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이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남조선노동당 , 조선노동당
1900 충남 예산~ 1955. 12 평양.
공산주의 운동가.
지주의 서자로 태어나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 입당, 같은 해 고려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2년4월 국내공산당 조직을 위해 국내침투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어 1년 6개월간 복역했고, 1924년 출옥 후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25년 4월 17일 김약수·김재봉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창당대회를 열어 공산당을 조직했고, 18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해 책임비서를 맡아 조직활동을 전개하다가 구속되었다. 1927년 병보석으로 출감한 후 1928년 소련으로 탈출했다. 1929년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東方勞力者共産大學)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32년 12월 상하이로 돌아와 공산주의 운동에 전념하다 1933년 일본경찰에 검거되어 국내로 압송,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했다. 1939년 출옥하여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의 한 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책임자로 추대되었다. 1940~41년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당 재건에 실패하자 전라남도 광주시 백운동에 있는 벽돌공장의 인부로 위장해 은신하던 중 8·15해방을 맞이했다.
8·15해방직후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여 장안파와 재건파를 통합하여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 당 책임비서가 되었고, 여운형이 이끄는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연합하여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미국에서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하자 10월 23일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참여했으나 친일세력의 처리문제로 탈퇴했다. 1946년 2월 남한 좌익세력의 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 등과 함께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1946년 5월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조선공산당 간부들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지자 1946년 9월 남한을 탈출, 입북하여 1946년 11월 결성된 남조선노동당의 부위원장을 맡아 당을 지도하면서 금강정치학원에서 남파간첩을양성했다.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했다. 그러나 1950년 남조선노동당의 핵심인물인 김삼룡과 이주하가 체포되어 활동이 현저히 약화되자 운동의 주도권을 북조선노동당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결국 1953년 김일성에 의해 이승엽 등이 체포·기소되고, 이후 주도권을 완전히상실한 채 1955년 '미제의스파이'라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사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