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안경 너머 모노의 눈
난 아직도 빨간책에 관해서 모노에게 물어보지를 못했다. 드레곤도 알고 있는 그 빨간책. 내게는 아무도 얘기해주지 않는 그 빨간책. 나의 개인검색창 역할을 해주고 있는 범이에게도 차마 빨간책에 관해서는 물어보지를 못했다. 모노에게 해가 될지 득이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TV룸에서의 전화라 주위에 아이들이 있는지 확인하고 걸어야 했다.
이모는 걱정을 늘어놓다가 모노의 얘기에 한숨을 쉬다가 했다. 그리곤 나머지 스토리를 다 듣고는 이렇게 말했다.
“근데 모래 너 은근히 거기 생활을 즐기는 거 같다?”
"내가?"
“하긴 나도 타임머신이 있으면 다시 이팔청춘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야. 그래, 모노랑도 친해지고 다시 찾은 학창시절도 즐기도록 해. 네 학교생활이 즐거워야 모노의 학교생활도 즐거운 거니까.”
도무지 고3의 학교가 즐거울 리가 있냐 말이다. 아침부터 국어, 국사, 영어, 수학, 수학2, 물리 등등 결국에 난 2교시부터 꿈나라로 빠져들고 말았다. 아무도 날 깨우지 않았고 난 수업시간에 유일하게 잠이 든 크라운남고 최초의 학생으로 기록이 되었다. 역시 이 아이들, 전 세계 명문대로 진학할 아이들답게 집중력과 공부에 대한 경쟁심이 장난이 아니었다.
나의 낮잠(?) 사건으로 인해 야간 자율학습시간에 난 F반으로 가야했다. 이 학교는 성적대로 반 편성을 했는데 수업 분위기를 헤친 난 성적 최하위 그룹인 F반에서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공부를 하는 척하며 난 연극 대본을 썼다.
지친 몸으로 방으로 돌아왔다. 모노에게 카페에서 가져 온 치킨과 콜라를 내밀었다.
“먹어. 현준이한테는 절대 먹이고 싶지 않을 만큼 맛있어. 여기 콜라도 마셔. 치킨엔 역시 콜라지.”
모노가 흠칫하는 게 보였다.
‘누나한테 감동했지? 모노야.’
모노가 입을 열었다.
“싸이보그랑 복싱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아니.”
“그런데 왜 짐을 싸서 기숙사를 나가지 않는 거야?”
“너랑 같은 이유야.”
“...?”
“생각해 봤어. 네가 왕따를 당하면서도 이 곳을 떠나지 않는 이유.”
“...”
“도망가기 창피했던 거 아냐?”
“...”
“너는 지금 너 나름대로 싸우고 있는 거야. 맞지?”
“...”
처음에 나도 모노에게 말해 줄 작정이었다. 집에다 미국이든 어디든 다른 데로 보내달라고 말하라고. 하지만 난 알고 있다. 그게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난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세상 어느 구석에도 골칫거리들은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그때마다 도망칠 수도 없고. 너도 너만의 방법을 찾고 있다고 생각해. 네가 보기보다 강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한테 왜 이래?”
그렇게 말하며 모노가 안경을 벗었다.
처음이었다. 안경을 벗은 모노의 눈을 본 것은. 내 동생의 눈. 잔잔하고 반짝이고 세상의 이치를 다 알고 있지만 두꺼운 안경으로 가리고 모른 척 아닌 척 살아가고 있었던 모노의 눈. 그의 눈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지금까지 내가 널 그렇게 괴롭혔는데도 넌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날 무시해버리면 그만일 텐데. 나한테 왜 이러냐고?”
“너 나 별로 안 괴롭혔는데? 그리고 난...널 이해해.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란 게 그냥 느껴져. 그냥 너한테서 내가 보여.”
그때 현준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 이런 내가 데이트 방해 한 거야?”
현준이 치킨을 집어 들었다.
“치킨! 나 몰래 둘이서 먹으려고 했다 그거지?”
현준이 앉아서 치킨 다리를 들었다. 내가 물었다.
“너 왜 우리 방에서만 이래?”
“뭘?”
“밖에서는 온갖 똥폼 다 잡고 우리 방에서 넌 마치...”
“..?”
“마치 우리랑 친한 것처럼 행동하잖아.”
“하하하! 나 너네랑 안 친한데? 그치 모노야.”
“닭이나 먹어!”
라고 모노가 말했고 현준은 껄껄 거리며 닭을 먹었다.
현준을 좋은 편에 놓은 것이 아직도 유효한가? 현준 때문에 난 싸이보그와 복싱대결을 펼쳐야 하는데도? 티오피 애들이 모노를 무시해도 모른 척하는데? 그런데 난 왜 그런 현준을 미워할 수가 없는 거지? 그런데 왜 모노는 현준을 불편해 하지 않는 거지?
그 이유를 알게 된 건 내가 모노의 뒷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혈육의 당당한 권리로 난 아무도 없을 때 모노의 옷장과 책상서랍들을 뒤졌다.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모노의 앨범이었다. 사진 속의 모노는 항상 친구들과 둘러싸여 있었다. 대부분 음악실이거나 악기를 들고 있거나 밴드연습을 하는 것 같은 사진들이었고 그 속에서 난 모노와 현준을 발견했다. 사진배경에서 크라운 중학교 졸업공연 이라는 쓰인 플랭카드가 보였다. 모노는 건반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고 현준은 기타를 치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 둘은 매우 친해 보였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발견했다. 언제나 궁금했다. 모노가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는지..
모노와 헤어지기 전 날 내가 동물원에서 사준 기린 인형. 때가 묻고 낡은 기린 인형이 이름표도 그대로 붙인 체 모노의 책상 맨 아래 서랍 구석에서 발견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뚝 떨어졌다.
‘모노에게 모래누나가 2000년 6월 5일’
“뭐하는 거야?”
소스라치게 놀라 인형을 넣고 서랍을 닫았다. 현준이었다.
“남의 서랍 뒤지는 게 취미였어?”
그렇게 말하며 현준은 자기 서랍들을 열어 보았다. 그 사이 난 눈물의 흔적을 닦았다.
“내 건 그대로네.”
“…?”
“난 물건을 놓아두는 위치를 기억해 두거든.”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건 너야. 모노 물건도 뒤지고 아무래도 너 수상해.”
“...?”
“너 진짜 모노 좋아하지?”
“뭐라구?”
“좀 심각한데? 정신과 상담이라도 받아봐. 성정체성에 대해서 많이 혼란스러워 보여.”
휴...현준이 그렇게 오해하는 게 차라리 낫다. 응? 차라리 낫다고?
“너 모노 앞에서 나랑 모노에 대해서 그딴 식으로 말하면 내가 가만있지 않을 거야.”
“아주 끔찍하게 챙기네.”
그 때, 모노가 방으로 들어와서 바닥에 쓰러지며 한마디 했다.
“죽고 싶어.”
가슴이 철렁했다.
“왜? 모노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4일째 똥이 안 나와. 정말 죽고 싶다.”
정말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서 모노의 뒤통수를 때리고 말았다.
“죽고 싶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니?”
모노와 현준이 모두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너 김모노, 전에 페이스 북에다 끝내고 싶다느니 죽고 싶다느니 쓴 것도 다 변비 때문에 그런 거였냐? 어?”
현준이 날 멍하니 보며 말했다.
“너 모노 페이스 북도 찾아봤냐? 야, 너 진짜...”
모노는 변비 때문에 쓴 것은 아니라며 중얼거렸다. 고 2생활 자체가 지옥 같고, 크라운 학교생활이 지옥 같고 그래서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적이 참으로 많았다고 했다. 현준이 거들었다.
“어휴, 모노는 배가 고파도 죽고 싶은 앤데 뭐.”
모노가 항변했다.
“그게 아냐! 전엔 분명 그랬어. 근데 지금은 ..희망이 있어.”
내가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한테 고맙다. 모진아.”
‘아...드디어 모노가 내 존재의 고마움을 깨달은 거다. 그래, 모노야. 난 너의 친구가 됐어. 이제 넌 너의 이복누나가 널 버렸다는 오해를 씻어버리고 화해를 할’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 모노가 입을 열었다.
“너 덕분에 찾을 수 있었어.”
현준이 물었다.
“뭘? 뭐 잃어버린 거 있었어?”
“넌 몰라도 돼.”
내가 모노에게 손가락으로 7을 만들어 보이자 모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책이 그렇게 모노에게 중요한 책이었다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길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