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력 한 장이 찢겨나간다. 또 한 달이 시작되었다.
어제도, 오늘도, 똑같은 하루하루… 지긋지긋한 교대 근무.
자리 지키는
게 일이라는 것 빼곤 좋아할 구석이 없는 지루한 일상이다.
내 인생은 마치 이 8평짜리 당직실 안에만 존재하는 듯,
그 많던 친구도,
재밌었던 나날도 내 허상인 듯, 지나온 모든 게 부질없다.
하지만 이 일상을 벗어날 순 없다. 이건 내 사명이다.
전업주부인 아내와
초등학생 두 아들.
나까지 포함 네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감이 나를 이 좁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당직실로 밀어
넣었다.
오로지 가족을 위해서야, 가족을 위해서.
그래서 참는 거라고.
나는 근무기록카드에 모든 점검 결과 이상이 없다는
상투적인 일지를 써넣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익숙하게 집 번호를 눌렀다.
- … ♪♬♬
" 여보세요.
"
몹시 지치고 짜증에 찬 말투로 전화를 받는 아내.
듣는 나도 힘이 빠진다. 지금 밖에서 고생하며 돈 버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호해진다.
" 내다. 뭐하고 있노? "
" 애들 아침 먹였지. 오늘 일요일이라 좀 늦게 먹였다. "
"
식사 매일 똑같은 시간에 해야지. 그것도 습관 중요하다고 뉴스에서 나오더라. 알겠나.
애들 칫솔질 시켰나? "
" 어.
"
이 여자가 무덤덤하게. 좀 다정하게 말해주면 남편 힘 나고 좋잖아.
그냥 그저 그런 듯 건성건성, 하여간…
"
아래위로 꼭꼭 잘했나? 이빨 뒷면에도 잘 닦이고, 이 사이사이도 중요하다.
위에서 아래로 해가지고, 자기가 옆에서 습관 잘 길러줘야 된다.
"
" 아… 여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왜 그라는데 자꾸. 전화로 꼭 해야 되나? "
뭐라고? 전화로 꼭 해야
되냐고?
알아서 한다고? 지금 내가 간섭한다는 얘기인가?
" 아니, 자기. 방금 그 말은 내가 기분이 좀 언짢다. 꼭 내가
간섭한다는 소리로 들리고,
나는 집에 애들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이렇게 신경 쓰는 건데 당신이 협조를 못 해주면 안
되잖아.
애들은 당신만 키우는 게 아니고 아빠인 나도 이렇게 신경을 같이 써야 균형 있게 자라는 거지. "
" 관심 가지지
말라는 게 아니고 꼭 전화로 이렇게 아침부터 해야 하느냔 얘기지.
꼭 명령조로 멀리서 시키듯이 말하면 듣는 나도 답답하다.
"
답답하다고? 명령조로 시키듯이 말한다고?
대체 뭐가 어떻다고, 아니 그럼 칫솔질 잘 시키는 것도 못 하겠단
거야?
" 자기 내 말을 잘못 알아들었는갑네. 내는 잘 해보려고, 우리 아이들이니까
우리 둘이 관심과 행동을 하나로 해보려고
노력 중 인거고. 물론 충분히 감시받는다고 여길 수도 있지.
있는데, 자기 진짜 관리 감독이 뭔지 아나? 이곳 근무할 때 한 달에도 몇
번씩 윗사람들이 잘하는지 와가지고
이거는 했냐, 저거는 했냐, 왜 이거는 이렇냐, 그게 진짜 관리 감독이다.
내는 그냥 자기하고 우리
가족하고 앞으로 맘 맞춰 잘 살아보려고 다독이는 그거란 말이다. "
그 와중에 '하…'하는 작은 한숨을 쉬는 게 몹시 거슬렸지만,
꾹 참고 아내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 알았다. 칫솔질 잘 시켰다. 나도 당신 일하니까 귀찮을까봐 전화 안 하지만 나도 신경 많이
쓰고 있다.
칫솔질 당신이 시키라는 대로 잘 시킨다. 당신만 매일 매일 이렇게 칫솔질 시켰냐 안 시켰냐 확인 전화하니까
그렇지, 나
빼먹은 적 없이 잘 시켰다. 난 이렇게 꼭 아침에 전화가 와서 뭐했나 뭐했나, 꼭 가르치듯이 이러면
엄마인 나를 못 믿는가 싶고 그런
기분이 든다. "
" 자기야 그런 건 아니다. "
" 응. "
" 잘 해보려는 거다, 내도
근무하면 피곤하고 집에 가면 그냥 누워 자고 싶고 하지만 우리 가족 잘 해보려고
하루라도 쉬면 그 날에도 애들하고 나가서 놀아주고, 어디든
데려가서 좀 가르치려고 하고, 이렇게 나와서도
집에 관심 가지고 애들 습관도 어릴 적부터 잘 길러보려고 하는 거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
" 응. 알겠다. "
" 그래… 알아줘서 고맙다. 당신도 좀 쉬어라… 주말인데 애들 조용히 놀라 하고…
당신도
집안일 하면 피곤한데 오전에 좀 자야지… "
" 응. "
" 그래… 끊을게, 사랑해.
"
ㅡ
현장에 가서 기계들을 점검하고 당직실로 돌아오니 이마에 땀이 맺혀 흐른다.
시계를 쳐다보니 1시간 정도
지나있다. 곧 오전 일과도 끝나는구나. 하루 참 부질없다…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읽고 있으려니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든다.
통화 내역을
누른 다음 집으로 전화를 건다.
- … ♪♬♬♬♬
" 여보세요. "
아까 그렇게 가장으로서의 어려움을
피력했는데도 또 이렇게 상냥하게 안 받아주고,
아… 말을 말자. 나만 이상한 놈 되고.
" 어. 자기. 애들 혹시 주말이라고
지금 스마트폰 게임 하고 있는 거 아니가? "
" 어. 쿠키런 하고 있다. "
뿅뿅거리는 전자음 소리와 익숙한 음악.
또 그 카카오톡 게임인가.
" 지금 하고 있으면 언제부터 했노? 오래된 거 아이가? "
" 한 사십 분 오십 분
했겠지. "
" 어? 안 된다, 딱 십 분만 더 하고 끄라고 해라. "
전화기 너머로 아내가 '아빠가 게임 십 분만 더
하고 끄란다'고 하자 아이들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아 왜에' '아빠가 끄래' '좀만 더' '꺼라 아빠한테 혼나기 전에'
'아~…'
다시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 끄라고 했다. "
" 지금 애들 놀러 와있나? 와 이래 집이 시끄러운데?
"
" 어. 동석이하고 현섭이. "
" 현섭이? 현섭이 엄마 그거 인간 아니더라이가. 애들도 부모
따라간다.
현섭이는 잘못이 없지만 우리 애랑 놀면 우리 애들도 현섭이한테서 배운단 말이다.
동석이는 가끔은 와도 되는데 현섭이는 안
된다. 오늘 둘이 같이 왔다니까 좀 있다가 둘 다 보내라. "
" 놀러 온 걸 쫓아내나? "
" 우리 집이 뭐
놀이동산이가? 애들 지금 스마트폰도 삼십 분만 시키는 거 주말이라고 십 분 더 하게 해준 거다.
평일 같았으면 바로 혼냈다. 스마트폰 그거
때문에 요즘 문제란 말이다. 애들이고 어른이고 그거에 매달려가지고.
애들 영어단어는 외웠나? 매일 외우게 해야 한다. "
"
친구들이랑 노는데 지금 점심도 먹기 전에 영어 단어 외우겠나. 안 외웠다. "
" 동석이 현섭이 둘 다 집에 보내고 애들 영어
단어책 외우라고 해라.
아빠 집에 오면 쪽지시험 본다고 하고. 점심은 뭐 먹을 건데? "
" 주말인데 간단하게 짜파게티 끓여
먹으려고. "
" 짜파게티? 간단하게 먹더라도 밥을 먹어야지. 영양이 중요한데 짜고 칼로리만 높은 그런 거 먹이면
한창 키
크는 성장기에 별로다. 후라이를 하나 해가지고 비벼 먹거나 해라. "
" … "
" 어. 와 말이 없노.
"
" … "
" 듣고 있나? "
" …어. "
" 대답을 해줘야지. 말하는 사람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것처럼 하면 사람 이상해지잖아. "
" …응. "
" 그래. 아무튼 그렇다. 그렇고. 게임 하지마라하고,
짜파게티는 먹더라도 다른 거 간식으로 먹여서
영양 보충하고, 애들은 점심 먹이기 전에 어디 가봐야 한다 하고 집에 보내라, 딴 집 애들도
같은 입이라고 오면
우리 애들 먹일 간식도 자기들 똑같이 나눠줘야 하는데 하루 이틀이지, 과일 과자 우리 애들 하나 먹이려고
해도
입이 더 붙으면 우리 애들 얼마 먹지도 못한다. 알겠나. "
" 알았다. "
" 그래… 끊는다. 점심 먹고
나면 이제 영어단어 좀 외우라고 해라. "
짜파게티가 뭐야, 짜파게티가.
일주일에 라면은 한 번이면 되지, 언제는 신라면,
언제는 불닭볶음면,
두 세 번을 라면 먹이다니 엄마로서 요리를 해야지, 고작 라면 끓여 먹이면서
힘든 척은 혼자 다하고. 내 도시락
하나 싸주는 게 그렇게 불만인가.
난 뭐 맛있는 거 먹을 줄 몰라서 이렇게 도시락에 나물 몇 개 싸와서 전자레인지 하나 없이
식은 거
저녁에 그대로 또 먹나. 어련히 내 일이다 생각하는 거지,
누구는 여기 와가지고 이 좁은 방 안에서 혼자 근무하면서 차가운 도시락 먹고
일하는데,
난 일하러 가도 남은 세 가족이서 오순도순 따뜻한 밥 하나 차려 먹는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일요일 다 쉬면서 밥도
그런 걸로 쉽게 쉽게 때우려고.
핑계 좋네. 일요일? 어디 급식 아줌마야? 일요일이라고 쉬운 메뉴 하게?
시간 제일 많아서 실력 발휘
잘하는 이런 날에 맛깔나게 좀 해봐.
아, 참자.
나 혼자 열 내봤자 부부싸움밖에 더 되겠나…
서로 참아주고
맞춰가야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게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ㅡ
- …
♪♬♬♬♬♬♬
스-흡!
침을 닦았다, 반쯤 먹은 도시락을 닫은 채 의자에 기대어 막 잠이 들려던 찰나에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아내의 전화…
" 어. 내다. 여보. "
" … 바쁘나? "
" 아니, 지금 이제 오후 일과
시작하기 전에 잠시 눈 좀 붙이려고 기대있었다. 전화가 오길래 일어났다.
딴 집 애들은 갔나? "
" … 응. 애들 보내고.
밥 해먹이고. 애들은 지금 공부시켜놨다. "
" 잘했다. 당신이 수고가 많네 정말로… "
" 난 당신 하는 말 알아주고
맘 알아주려고 노력하는데 갑자기 내 좀 서럽다. "
이건 무슨 뜬금포야.
" 왜? 무슨 일 있나? "
"
자기야말로 내 맘을 몰라준다. "
" 무슨 소리고, 천천히 말을 해봐라. "
눈 좀 붙여야 오후에 버티는데, 이 짧게
쉬는 시간에 사람을 붙잡고… 아…
"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다 좋단 말야. 애들 잘 키우려고 하는 거 맞지. 내도
안다,
그런데, 하라는 대로 하고, 그렇게 하루하루 애들하고 투닥거리고 돌아서면,
당신 교대 근무한다고 옆에 없지, 애들 학교
보내지,
나 혼자 아침부터 당신 회사 보내고 애들 학교 보내는 전쟁 치르고,
맨날 이렇게 내 생활은 없고, 잠시 있다가 또 청소하고,
빨래하고,
점심 저녁할 거 장 보고, 애들 돌아오면 또 밥 먹이고,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또 애들 일에 치이다가 애들 재우고 나면,
그냥 바보처럼 드라마 하나 멍청히 보다가.
그러다가 자려고 하면, 가끔 내 꿈이 뭐였더라, 이런 생각도 한다.
내도 꿈이 있는
여자였다. "
옛날엔 먹을 게 없어서 그 보릿고개를 넘기면서까지 육 남매 칠 남매가 보통이었는데
내가 번 돈으로 밥 잘 먹고,
애들 딱 둘 있는 거 학교 하나 보내는 게 그게 그렇게 어렵다고?
짜파게티 끓여 먹는 게 뭐 중노동인 모양이지?
" 자기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배부른 소리다.
딴 집은 맞벌이가 보통이다. 자기가 나가서 한 달에 백만 원이라도 벌어오면
우리가 좀
숨통이 트이는데, 아직 습관도 덜 든 초등학생 둘이 키우니까 나도 당신 굳이
나가서 일해보란 소리 안 하는 거다. 내 월급 받아봤자 입이
네 개면 저축은 꿈도 못 꾼다.
그래도 애들 학원 두 개씩 보내고 가족들 밥 세 끼에 간식도 먹고 한다. 청소? 빨래?
당신은
낮잠이라도 좀 자는데 나는 이 기계들 한 번 고장이라도 나면 알람 꺼야지,
직접 가서 기계 사이로 기어들어가서 뜯어고쳐야지, 그 난리를
하고도 낮잠 쉬라는 말 한마디 못 듣는다.
난 그래도 당신 청소 빨래 끝나면 늘 낮잠 좀 쉬라고 이렇게 말 한마디 해주는데, 당신은 당신이
당연히 해야 할
청소 빨래를 가지고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니 난 그 말이 더 서운하다. "
" 왜 자꾸 당신은 당신 생각만
하는데. 당신 편한 거 아닌 거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이가.
그냥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면 안 돼? 당신 나가서 일하는 거, 아빠로서
일하는 거에 대해서
나 편해 보이고, 그렇게 생각 안 한다. 그냥 내 생각 좀 해주라고. 당신 보내고 나면 애들 챙기고
애들 챙기다가
또 당신 챙기고, 나 아가씨 때 꾸미고 하던 반의반도 나한테 신경 못 쓰고,
양치질, 애들 학교 준비물,밥은 뭐 하지, 장은 뭘 보지,
청소에, 빨래, 다림질, 세금 내러 가야지,
집안일 할 때는 힘들고, 안 하더라도 낮에 멍하니 있으면 내가 뭐 할 수 있는 게
없다.
텔레비전도 그 시간대에 뭐 볼 게 있는데? 예능프로 재방송 보고 하하 웃어도 돌아서면 서글프다.
여보, 나도 여자고, 나도
사람이거든. 나도 꿈이 있었으면 좋겠다. "
" 여보 나 좀 있다가 점검 돌러 가야 된다. 짧게 말하자.
애들 좀만 더 크면
그때 당신 일하러 가면 되지. 그래 준다면 나 반대 안 한다.
하지만 지금은 애들이 습관이 안 돼 있다. 애들 스마트폰 한 시간 하는 거
봤다이가.
지금 애들 습관만 좀 잡아놓고 중학교 때 학원 개수 늘리고나면, 애들 알아서 저녁에 왔다 갔다 하면
그때 돈 더 들고
하니까 여보가 같이 맞벌이해주면 나는 너무 좋지. 좋고, 대신에 지금은
당신이 좀 신경 써줘야 된다. 우리 가족 행복해지자고 하는 거다.
"
" 내 마음 좀 알아주라고. 맞벌이도 좋고 이거저거 다 좋은데,
나 이렇게 살려고, 밥 해주고 청소해주는 아줌마로 살려고
지난 인생 살아온 건 아니잖아. "
" 자기야. 나는 가족 먹여 살리려고 8평 당직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서,
알람 울리면
가서 정신없이 기계 기어들어가서 뜯어고치고, 이렇게 산다.
그건 다른 집도 다 똑같단 말이다. 나도 힘들고, 당신도 힘들듯이, 모든 집이
다 이렇다.
자꾸 일부 특권층에 자신을 비추니까 힘들게 여겨지는 거다. "
"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말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내 마음을!!
남이 그렇다, 모두가 그렇다, 아니 남이 아니고 나! 나! 내가 힘들다고,
내가 힘들다고, 남이 힘든 게 뭐
어쨌는데? 남이 우리랑 똑같이 힘들다고?
그런 건 남 얘기고, 여보 아내인 내가 힘들다고, 날 가르치려고 들지 말고,
마음 좀
만져달라고! 당신 이해한다 이해한다 말만 하지, 나 이해하려는 마음 전혀 없으면서,
누가 뭐 사모님처럼 모셔 달래나? 다들 도시락 아줌마로
사는데 왜 너만 유난떠냐는 식으로
얘기하지 마라, 당신 도시락 아줌마 아니라고, 당신도 꿈이 있을 수 있고, 아직 꿈을 가져도
되는
한 명의 여자라고, 그 말 해달라고! 당신은 하나부터 열까지 챙긴다고 하면서
정작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는 하나도 안
챙기잖아.
하지 마라, 하지 마라, 그놈의 좋아하는 건 하나도 하지 마라,
싫어하는 건 시켜라, 시켜라, 시켜라!
내가 좋아하는
건 하지 마라, 하지 마라, 싫어하는 건 해라, 해라!
하고 싶은 대로 못 하는 거 이해할게, 당신하고 살려고 결혼한 거니까.
근데
이건 진짜 아니다. "
왜 소리를 질러,
집에 관심 가지고 조금이라도 애들 교육에 도움되려고 도움말하고,
집에 자주 못
들어가는 대신에 이렇게라도 집에 관심 가지려고 하는 가장의 노력을 몰라주는 게,
진짜 몰라주는 쪽이 어딘지도 모르는 게,
난 8평
당직실 의자에서 쪼그려 새우잠 잘 때,
청소 빨래만 마쳐놓으면, 아니 잠시 미뤄놓더라도 피곤하면 침대에서 편안하게 자고
일어나면서,
애들 학교만 보내놓으면 남들 일하는 시간에 자기는 그 시간에 빨래랑 청소 좀 하는 게,
교대 근무하고 겨우 쉬는 날에도
가족들하고 시간 보내려고 짧은 시간 이용해서 산에도 가고 놀이공원도 가려는데
무슨 특별한 바람이 불어서 매일 여행 가고 싶다, 여행 가고
싶다 노래를 부르는 게.
결국 그 소리네?
나랑 살아서 이렇게 구질구질하다.
애 기르기도 싫고, 이렇게 만든 나도 싫다, 그
소리네?
" 아 그럼 당신 하고 싶은 대로 하던가! 진짜 당신 내가 참으려고 했는데 너무하네,
당신 맘 몰라줘서 미안하다, 뭐
도무지 알겠어야 말이지, 당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해봐라,
내가 못 알아주는 대신에 그건 내가 안 말릴게. 나 점검 가야된다. 끊는다!
"
" 여보, 내 말은… "
ㅡ
근무를 마치고 집에 들어갔을 때 뜻밖에 반겨주는 아내 때문에
당황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 대신에 영어 단어장을 펼치고 있었다.
쪽지시험 점수를 보니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밥
먹자마자 칫솔질도 서둘러 스스로 잘하는 아이들 모습을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다툼은 있어도 봐, 우리 가족 화목하고, 애들 바르게
자라고,
내가 싫게 하더라도 그게 다 우리 가족을 위한 거고, 이렇게 돌아오잖아…
" 너희 왜 반팔 안 입고 긴팔 입었노,
날도 더운데. 반팔 입어라. "
" 아빠… 그냥 긴팔 입고 있을래요. 이게 옷 더 멋있어요. "
" 여름에 이러고
나가면 사람들이 옷도 없나 보다 하고 욕한다. 갈아입어라. "
" 전 이게 좋아요… "
" 이 자슥이요. 갈아입으라고.
니 동생도 니 따라한다이가. "
두 형제가 나란히 여름에 두툼한 긴팔옷을 입고, 이거 봐,
엄마란 사람이 이런 것부터 바로 안
잡고 멋대로 기르니까.
아빠인 내가 이렇게 안 잡아주면 안 되잖아, 아직 애들은 옆에서 사소한 것도 신경 써줘야 한다니까.
내 말이
맞다니까.
" 니 딱 집에서만 입고 밖에 나갈 때 딴 거 입어. "
" 네… "
내 말이 맞아.
내가
잘 하고 있는 거야.
ㅡ
굉장한 알람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스위치를 끄고 현장으로 달려가 기계 계통을
점검했다.
큰 일은 아니었기에 사람을 더 부를 필요는 없었다.
당직실로 돌아와 헬멧을 벗으니 부재중 전화가 왔다는 알림음이
들렸다.
세 통씩이나… 전부 아내의 전화다.
그동안 아무 말 없이 고분고분 잘 따라와 주어 걱정 없었는데.
일부러 전화도 전보다
적게 했는데, 웬 전화지. 설마 애들이 다쳤나.
- … ♪♬♬♬♬♬♬♬♬
" 어, 여보. 전화했었나. 알람이 울려서
직접 가본다고 못 받았다. "
" 응… 지금은 다 끝났고? "
" 별거 아니더라. 왜? "
" 아니… 그
내가 생각을 해봤거든. 당신은 일하느라 바쁜데 자꾸 집에서 당신한테
신세 한탄 비슷하게 해봤자 당신한테 한풀이하는 거 같고, 그래서 내가
당신 힘든 줄 알면서
내 힘든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고 반성도 많이 했거든. 그래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느냐면… "
" 뭔데.
말해봐, 말을 흐리노. "
" 나… 대학교 다시 다니고 싶다. "
…
" 어, 어디? 학원? 자격증?
취업하게? "
" 아니, 대학교. 학생들 다니는 대학교. "
" 대학교는 무슨 대학. 당신 대학 나왔잖아.
"
" 맞벌이를 앞으로 할 수도 있으니까 나도 나름대로 알아봤지.
근데 나 대학교 때 배운 미용기술은 어디 쓸데가 없더라,
이제 난 내 화장도 잘 안 하는데
남 꾸며주기엔 손도 많이 굳었고 그런 거 이제 와서 하기도 그렇고…
우리 계 모임에 맞벌이하는
사람들은 다 사무실에서 컴퓨터로 문서 작업 같은 거 한다는데,
나도 그런 쪽으로 가서 액셀이나 워드프로세서 같은 거 따서 그쪽으로 갈 수도
있는 거고. "
몹시 확신에 차서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아내.
" 자기야, 그건 자격증 학원 다니면 초등학생도 일주일이면
딴다.
한 달에 상시시험 몇 번 있으니까 한 달이면 두 개 다 충분히 딴다.
그런 다음에 바로 취업하면 되지, 간단히 문서작업
보조하는 자리 가는데
뭐 대단한 건 요구 안 하거든, 그냥 성실하게 다니면 그만인데…
전문대를 그냥 다닌다고 해도 이거저거 합치면
돈이 오, 륙백은 그냥 들어간다.
일이 백만원 들여서 자격증 딴 다음에 바로 취업하는 것도 아니고,
나 버는 돈밖에 없는데 이 년
동안 학비 대고 생활비 대고 못 한다. "
" 그럼 그 돈은 내가 대출 내고, 내가 취업해서 벌어서 천천히 갚을게.
"
" 말이 되나? 지금 우리 저축도 못 하는데 빚까지 만들 필요가 없잖아. "
" 내가 알아서 할게. 나도 의미 없이
누워지내는 것보다 이렇게 다시 공부하고,
일해서 그 돈 갚고 하면, 당신 말대로 백만 원이라도 벌어오면 숨통 트이잖아. "
"
당신 지금 제사보다 제삿밥에 관심이 더 많아 보인다.
우리 생활 여유로운 게 문제가 아니라 그냥 집에 있는 게 싫어서,
핑곗거리 찾는
걸로 보인다. "
" 나도 꿈을 좀 가지고 살잔 거지. 내가 다 계산하고 인터넷으로 홈페이지 들어가서
다 알아봤다.
만학도전형이란 게 있거든, 멀리 안 가고 전문대 몇 개 중에 골라봤는데
시내 가기 전에 전문대 하나 있더라이가, 거기 등록해가지고 2년
배우고,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탈 수 있다는데 일단 해보고, 안 되면 내가 대출 내서 일하면서 갚으면
일이 년이면 되잖아, 내가
전공을 좀 하고 그러면 잘하면 정규직도 될 수 있잖아. "
" 정규직? 애 둘 딸린 서른 넘은 컴퓨터 만학도 주부가 자잘한 업무 몇
개 했다고 정규직 시켜주는 줄 아나?
그리고 뭐 서울대 나온 것도 아니고 전문대 나와서 컴퓨터 자격증 몇 개 있다고 그렇게 쉽게 올려주는
게 아니다.
당신 모를만한 것도 아닌데 지금 완전히 허깨비에 홀린 것처럼 현실 감각이 없네. 왜 그라노 대체. "
" …
"
" 생각해봤다고 당신은 말하지만, 그거야말로 짧은 생각이다.
현실적으로 생각하자. 내가 당신 공부하고 싶은 걸 말릴 권리는
없지,
근데 간단히 학원에서, 그것도 아니면 집에서라도 컴퓨터 자격증은 충분히 딸 수 있고,
어차피 그 자격증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빚까지 내고 싶어 하고,
대학에서 2년간 배워야겠다고 하고, 당신 솔직히 빚내서 대학 다닌다는 게,
어디 스무
살짜리들이 배워서 먹고 살려고 배우는 그런 수준이 아니잖아,
그냥 집에 멍하니 있는 거 말고, 대학 다닌다고, 대학 나와서
취업했다고,
예전에 못한 거 미련 남아서, 갑자기 지금 그 생각이 나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지.
그것도 다 한때다.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자. 자기 취업하는 거야 나 지금도 반대 안 한다니까. "
" … "
" 왜 또 말을 안 해.
"
" … "
" 여보세요. "
…
" 여보세요! "
…
"
여보세요!! "
- … ♪♬♬♬♬♬♬♬♬♬♬
- … ♪♬♬♬♬♬♬♬♬♬♬♬♬
- … ♪♬♬♬♬♬♬♬♬♬♬♬♬♬♬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오며…
- … 전화기가 꺼져있어…
" 진짜 이 사람이… "
에라, 이젠
나도 모르겠다.
ㅡ
- … ♪♬♬
" 어, 여보! 왜 전화를 안 받았노. 애들 집에 왔나?
"
" … 애들 꽃밭에 데려다 놨다. "
" 꽃밭이라니. "
" 당신 애들한테 관심 없다고 한 거
기억나나. 아니라고 했제. 당신 관심 없더라. 그래서 매일 매일 꽃밭에 데려갔었는데… "
" 아니 이해가 안 되는데 무슨 말이지?
공원? 저번에 우리 같이 간 거? "
" 이젠 아예 꽃밭에 데려다 놨다. "
" 아니면 작년에 나비생태공원? 자기 무슨
소리하노? "
" 애들은 내가 데려다 놨고, 나는 나 알아서 할게. 당신 맨날 나 알아서 하라고 잘하잖아. 알아주는 거 없이.
"
" 자기야, 지금 일방적으로 말하면 상호소통이 안 된다. 혹시 아까 내가 당신 다그친 거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내가
미안하다.
나도 사람이라 감정 조절이 잘 안 된 거고, 이해해줄래… 지금 나 집에 들어가고 있다. 나 월차 썼다.
놀러도 가고 하자,
당신 옷도 사줄게, 지금 애들 어딨노, 같이 있나? "
" … 왠지 자기란 말이 서글프네. 솔직히 진짜 당신 사랑해서 결혼했다.
"
" 자기야 나 월차 냈다니까, 나 휴가 간다니까 웬일로 보너스도 주더라, 나 선물 들고간다. 안 궁금하나? "
"
우리 사귈 때 선물 많이 줬었는데… 기억나네… 그땐 당신이 내 맘 너무 잘 알아줘서 꼭 마음 읽히는 줄 알았다. "
" 왜 발음이
몽롱하노, 자다 깨서 그런 거야, 아니면 졸려서 그런 거야, 자기야. 나 지금 집 다 와 간다니깐? "
" 올 필요 없다. 오빠…
애들 꽃밭에 있고… 나도… "
전화가 이어졌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다.
주차장에 차를 대자마자 차 문을 열어젖히고 집으로
달려갔다.
급하게 여느라 차에서 쏟아져나온 전문대학 입시 팜플랫과 학용품 세트가 주차장에 굴렀지만
그런 걸 주워담을
시간은 없었다.
차 키가 꽂혀있는 내 차도 누가 털어가든 말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ㅡ
여보!
여보!
문을 두드려도, 초인종을 눌러도 반응이 없어 바로 잠금장치 번호 네 자리를 누른 뒤 집에 들어섰다.
" 헉,
헉, 헉… "
…
꽃밭,
알록달록하게… 핀… 꽃…
아하하하하…
정말
꽃밭이구나,
알록달록하게, 보라색 꽃… 노란색 꽃…
빨간 꽃… 파란… 꽃… 초록…
꽃…
밭…
" 으흐흐흐흐흐… "
언제부터였던 걸까,
가늠할 수 없이 온몸을 뒤덮은 형형색색의 피멍 자국…
정말
꽃밭처럼 온몸을 뒤덮은 피멍과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거실에 나란히 누운 내 아들들의 몸이
거실을 알록달록하게 수놓고
있다…
" 흐흐흐흑 흐흐 "
실성해버릴 것 같은 정신, 울음과 헛웃음이 반반 섞인 광기 어린 내 시선이 반쯤 열린 방문
사이로 천천히 향했다.
" 흐흐흐… "
반쯤 열린 방문께로 힘없이 늘어진 얇고 하얀 손목.
마침내 나는 주저앉고야
말았다.
나도… 꽃밭에 가야지…
월차를 냈으니 가족 여행을 가야겠다…
[ 자료 출처 : http://todayhumor.com/?panic_864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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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유튜브에 왓썹공포라디오에서 읽어준거 들었는데 난 핵소름이였어 남편은 노답에다가 아내는 산후우울증과 함께 아동학대등.....전체적으로 답답하고 이게 현실적으로 다가오니까 ㅜㅜ 워드로 읽기좀 그런 사람들은 왓썹님꺼로 뭐 하면서들어도 좋을듯행
보니까 진짜 우울해진다,, 잘읽었어!!!!
ㅋㅋㅋㅋㅋ 하이퍼리얼리즘 쌍도남 한남충인데 이거 계속 끝까지 어케 보지 ㅅㅂ 벌써 빡쳐서 무섭고 나발이고
북마크해놨다가 결혼하고싶다는 생각들때마다 와서 봐야겠다. 한남이 하는 행동 현실적이네ㅋㅋㅋㅋㅋㅋ
남편새끼 죽이고싶네
남편새끼 개답답해 재기해 그냥 존나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