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는 뜻을 가진 Jaffa(욥바)는 행정구역상 텔아비브에 속한 도시이다. 텔아비브에 흡수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항구도시 중의 하나이다.
Jaffa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양대 문명을 연결하는 해안길(Via Maris)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다.
해안길(Via Maris)은 고대근동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로,
이집트의 고센지방에서 시작하여 시나이 반도의 해안지역을 따라 가자로 이어지고
필리스티나 평야를 지나 시리아의 다마스커스로 연결될 뿐만 아니라,
북쪽의 샤론평야, 동쪽의 유다 산악지역과 평원 그리고 에프라임 산악지역들까지 연결되어 있어
야포(욥바)는 팔레스타인 내에서도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성경에는 욥바로 나온다. 성전을 짓는데 필요한 목재 중 특히 백향목을 수송하는 항구였다.
솔로몬과 스룹바벨때 모두 욥바를 통하여 레바논의 백향목이 운송되었다.
요나는 욥바에서 니느웨로 가는 대신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페니키아가 금속이 생산되어 제련하는 스페인에 민들어 놓은 식민 도시)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도망친다.
페트로가 욥바에서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기적을 행했다(행9:36~42),
페트로가 이방인 고넬료(카이샤라의 백인대장)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을 때
그가 머무르던 장소가 욥바에 있는 가죽제품 기술자 시몬의 집 다락방이었다.
그 후 사도들을 통해 팔레스티나의 셈족을 넘어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이를 기억하기 위해 야포 항구 인근에 페트로 사도를 기념하는 성당을 세웠다.
제대 뒷쪽에 페트로가 천사를 만나는 환시 장면의 그림이 있다.
일반적으로 성당의 제대는 '해뜨는 동쪽을 바라봄으로써 주님께 향한다'는 의미로 동쪽을 향해 놓여져 있는데 이 성당의 제대는 지중해와 바다건너 로마가 있는 서쪽을 향해 놓여져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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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도로
요르단 강 동쪽 고원지대를 따라 남북쪽으로 뻗어 있던 고대의 도로 |
중동 |
요약 지금은 요르단 지역을 경유하며, 아카바 만과 시리아를 연결하는 고대의 도로.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 길은 지금까지 이용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로 가운데 하나이다.
왕의 대로는 고대부터 남북 교역로로서 매우 중요한 길이었다.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AD 98~117 통치)는 점령지역의 수도인 보스트라와 알아카바 사이의 운송과 통신을 개선하기 위해 도로를 정비했다.
정비된 이 도로는 특별히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비아 노바 트라야나'(Via Nova Traiana)
ⓒ Briangotts/wikipedia
이것은 트라야누스 황제가 이탈리아에 건설했던 비아 트라야나라는 다른 도로와 구별하기 위함이었다.
왕의 대로는 또한 십자군 전쟁 시기에 중요한 통행로였고,
요새화된 수많은 성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길을 따라 남아 있다.
성지순례 길, 헤자즈 철도, 사막 고속도로를 비롯한 유사한 길이 발달하면서
점차 왕의 대로는 중요성이 약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은 관광객들의 명소로 알려졌고
요르단 시골의 여러 지역을 여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행 코스가 되었다.
이 길은 마다바, 알카라크, 알타필라, 알샤우바크, 페트라에 있는 역사적 명소들을 포함해서
요르단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장소들을 연결한다.
그리고 또한 320㎢에 이르는 다나 생물권 보호지역이 있는 와디 알마우지브를 포함한 자연명소를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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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에돔과 모압의 국경이 되는 세렛 시내를 건넘으로써 실질적으로 광야 40년의 방랑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가나안 입주를 위해 요르단 고원지대로 난 소위 '왕의 대로'(The King's Highway)를 따라 북진해갔다.
이 '왕의 대로'는 '바닷길'(Via Maris)과 함께 민수기 20장 17절에도 언급되는
성경시대의 가장 중요한 2 개의 고속도로 중 하나이다.
이 '왕의 대로'변에는 고원지대에 있는 중요한 성읍들이 자리잡았다.
이스라엘이 카나안으로 가기 위해 지나간 '왕의 대로'변의 성읍들을 찾아가기 위해
먼저 동쪽으로 난 쉬운 사막길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왕의 대로'를 따라 올라오기로 했다.
요르단은 렌터카 이용도 가능하지만 택시도 하루에 100달러 정도면
기사와 함께 다닐 수 있기 때문에 나는 택시를 빌려 기사와 함께 이곳을 찾았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을 아침 일찍 출발한 나는 가장 남쪽에 있는
길하레셋((Kir-Hareseth)으로 쉬지 않고 달렸다. 길하레셋은 암만에서 118㎞ 떨어져 있다. 사막으로 난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자
눈에 띌 만큼 험한 지형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험한 계곡 사이로 멀리 길하레셋이 시야에 들어왔다.
길하레셋은 아르논 남쪽 28.4㎞,사해 동쪽 17.6㎞ 지점에 자리한
고대 모압의 수도로 현재의 케라크(Kerak)이다.
해발 933m 고원에 위치한 이곳은
주변의 언덕과 깊은 계곡들로 인해 천혜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곳은 이사야의 신탁에서 두번 언급되며(사 16:7·11)
예레미야서에서도 두번 나온다(렘 48:31·36).
이사야 15장 1절에 나오는 길(Kir)도 길하레셋으로 본다.
북이스라엘의 여호람 왕은 공물을 거절하고 배반한 이곳을 치기 위해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과 연합하여 길하레셋을 공격하여 함락 직전까지 갔다.
이때 모압 왕은 성벽 위에서 자신의 맏아들을 자신들의 신에게 번제물로 드리며
전세를 만회하려 했다.
그것이 효험이 있었는지 이스라엘 본국에 큰 사건이 생겨 포위를 풀고 귀국했다(왕하 3장).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성채는 중세 십자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이중삼중으로 쌓여진 성채는 이곳에서 일어난 전쟁의 역사를 증언해 주기에 충분했다.
특히 성안에는 막사와 감옥이 아직까지도 잘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고지에 위치한 이 성의 가장 큰 문제는 식수였는데 우물은 예부터 성 밖에 있었다. 그래서 성읍 바로 밑에 수로로 추정되는 180m 정도의 터널이 있다.
1924년 발굴을 통해 모압인과 로마시대부터 중세 아랍시대의 도기들이 발견되었다.
1230m 고지에 있는 천혜의 성채인 길하레셋를 떠나
'왕의 대로'를 따라 계속 북쪽으로 달려 아르(Ar·민 21:28)를 답사한 후
계속해서 북진,아르논 골짜기에 이를수록 더욱 험한 지형을 달려야 했다.
마침내 아르논 골짜기에 이르자 이곳이 예부터 암몬과 모압의 경계가 되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계곡의 S자 길을 따라 올라가 다시 골짜기 북쪽에 있는 아로엘에 도착했다.
아로엘에 이르자 가장 먼저 양을 지키는 개가
이방인의 방문을 달갑지 않게 여겼는지 짖으며 달려들었다.
양치기 노인의 저지로 개를 피해 무사히 무너진 옛 성채에 오를 수 있었다.
아로엘은 요단 동편의 옛 모압과 암몬의 경계선이 되었던 아르논 강둑 바로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오늘날 키르벳 아라이르(Khirbet Arair)에 위치하였다.
이 지역은 와디 무지브(성경의 아르논) 북쪽 경사면의
메데바와 케라크 사이의 교통로 동쪽으로 4㎞쯤 떨어져 있다.
이곳은 아르논 골짜기를 관통한(렘 48:19) '왕의 대로'를 보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세운 요새였음을 성채 위에서 아르논 골짜기를 바라보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로엘은 '가난한,내쫓긴'이란 뜻이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여호수아 12장 2절,신명기 2장:36절,열왕기하 10장 33절,
예레미야 48장 19절 등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정복한 후 르우벤 지파가 거주했던(대상 5:8) 이곳은
사사시대와 왕조시대에도 이스라엘이 통치하였다.
그러나 모압 메사의 성공적인 군사원정의 결과(BC 850년경)로 이곳은 모압 왕국에 병합되었다. 메사 비문에 따르면 메사 왕은 아르논에 대로를 만들고 아로엘을 건설하였다.
그후 이곳은 아시리아의 확장기 동안 다메섹이 몰락할 때까지
시리아의 소유지로 남아 있었다(BC 732년).
이곳에 대한 발굴작업은 1964∼66년 에밀리오 올라바리가 이끄는 예루살렘과 스페인센터 회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6개의 고고학층이 발굴되었다.
그리고 헬라 도자기들이 많다는 것은 BC 3∼2세기에 새로운 거주지가 있었음이 증명됐다.
지금은 무너진 성채와 까마득한 아르논 골짜기만이
그 옛날 암몬을 지키는 요새였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로엘과 천혜의 요새였던 길하레셋의 무너진 성에서
하나님만이 우리의 요새임을 깨닫게 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