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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TH THEORY
Final Edition
구름의 그림자
죽음의 나선 • 맹그로브 • 은화
퀘이사 • 코리올리 힘 • 태양물고기
「로켓방정식의 저주 • 포인트 니모 • 케이프 혼」
라이프리뷰 • 구름의 그림자 • 새녘바람 • 기특해
#7. 로켓방정식의 저주
이윽고 날이 밝았을 때. 소녀는 바다의 별이 건넨 말이 정말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침은 약속한 듯이 오고, 풍경이 멈춰 있는 듯 아주 느리지만 결국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이제 어디로 가?"
나른한 햇빛 아래 개복치가 물었다. 퀘이사도 목적지가 막 궁금하던 참이었다. 소녀는 지극히 고요했던 무풍지대처럼 지루하고 언제 거꾸로 떠내려갈지 모르는 곳이나 파도가 너무 험해서 내가 뒤집힐지도 모르는 곳에는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서 계속 앞으로 나아가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강풍과 자비 없는 파도가 있다는 혼곶에 닿게 된다.
"이대로 동쪽으로 갈 거야. 앞으로 나아가야지."
아무리 거칠다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고요한 바다로 다시 돌아가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준비를 잘하면 그만이었다. 파도에 쓰러지지 않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소녀는 퀘이사 호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파도를 견디다 갈라진 금이 난 벽이 눈에 들어왔다. 작은 손으로 금을 꾹꾹 메웠다. 그다음은 오래돼 내려앉은 바닥, 삭아버린 줄, 비틀어져 툼이 생긴 창문. 소녀는 하나씩 차근차근 수리를 해냈다. 또 다른 건 없을까. 그런데 이 정도로 정말 케이프 혼을 지날 수 있을까? 혹시 더 큰 배가 필요한 건 아닐까. 불안함은 밤낮 가리지 않고 파동처럼 번져 꽃잎처럼 물들어 퍼졌다.
'수고롭지 않으면서 순조로우면 얼마나 좋을까.'
줄곧 맴돌기만 하던 소녀의 생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퀘이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몇 날 며칠 뚝딱이며 배를 수리하던 소녀의 손길에 생각이 묻어 나왔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언젠가 소녀와 케이프 혼 건널 날을 그리며 거친 파도를 견딜 준비를 했다.
"어떤 어려움도 차근차근하면 해결할 수 있어." 퀘이사는 말을 고르고 골랐다.
"사실은 알아 말도 안 되는 일인 걸." 소녀는 마음을 또 다른 마음으로 덮었다.
안도와 막막함의 경계가 선명해질 때쯤, 머리 위로 그림을 그리며 로켓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로켓 방정식이라고 아나?" 엉성하게 뭉쳐진 구름을 깨며 바다의 별이 말했다.
"글쎄··· 수학은 잘 몰라서··· " 소녀의 대답 사이로 퀘이사가 끼어들었다.
"로켓을 쏘아 올릴 때 얼마의 연료가 필요할지 계산하는 수식 아니야?"
"맞아. 저 로켓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지."
"어떻게 그런 걸 알아?" 반쯤 궁금하고 반쯤 반응하듯 소녀가 물었다.
"바다 깊은 곳에 오랜 여정을 마친 위성들이 사는 곳이 있어. 심해에서 이야기꽃을 발견한다면 다 거기서 시작된 거거든."
동그란 눈이 반짝였다. 언젠가 뜻하지 않게 해류를 타고 심해 깊은 곳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 바다에서는 처음 보는 존재가 있었고, 개복치는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별 바다를 좋아하는 소녀라면 마음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8. 포인트 니모
포인트 니모, 바람과 파도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가자 어느새 그곳까지 도달해 있었다.
지구상의 어떤 땅에서도 가장 멀어 아무것도 없다고 알려진 곳, 땅보다 하늘과 더 가까운 곳, 어떤 생명체도 터전으로 삼지 않는 곳,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곳. 분명 거기가 맞았지만 소문과는 달랐다.
"정말 여기로 내려가면 노력의 방향을 알 수 있다고?"
"네가 알아낼 수만 있다면?"
소녀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윽고 퀘이사를 톡톡 두드리고는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개복치는 소녀를 안내하며 깊은 바다로 향했다.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만큼 커다랗고 웅장한 선체. 분명 많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 중요한 일을 했을 터였다. 언뜻 보이는 겉모습은 낡고 쓸모를 다 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고철 덩어리 같았지만, 가까이 다가갈수록 활기차게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태양풍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다 익어버릴 지경이었다니까. 선체에 막 겨란후라이를 튀겼다 아니야." 웅장한 위성이 말했다.
"홍염이 아주 장관이긴 했죠, 근데 형님, 나는 달걀을 배달한 적이 없다니까는!"
여기저기 상흔이 많은 위성이 말했다.
"통신 기록도 없어요. 염지가 많이 되신 듯한데···"
한참 듣고만 있던 작고 똑 부러져 보이는 위성이 말했다.
"인사해. 좀 이상하지만 괜찮은 고철들이라고." 개복치는 일면식이 있는 듯했다.
깊은 바다는 어둡고 공허했으며 무엇도 없는 공간이었다. 만약 세상이 시작되는 찰나를 볼 수 있다면 시작의 셋을 세기도 전의 모습은 이와 같을 것이다. 세 위성은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높은 억양부터 낮은 억양까지 사용했지만, 대화의 패턴은 거진 비슷했다. 분명 집단 독백 같은데도 이전의 내용을 용케 기억하는 모습에서 소녀는 알 수 없는 차원을 느꼈다.
"인간이다."
"너는 말을 해도 좀, 좀!"
작고 똑 부러져 보이는 위성이 말하자 여기저기 상흔이 많은 위성이 다그쳤다.
"누추한 곳에 이것 참 귀한 분이 오셨구만, 어서 오시게."
웅장한 위성은 인자하게 맞이했다.
어떤 경위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듯 이유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세 위성은 쓸모를 다한 오래된 것들만 모이던 곳에 익숙한 물고기와 소녀의 빛이 드리운 것이 아주 반가웠지만, 동시에 영영 머무르지 않기를 바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기에 물어보려고 데려왔는데." 개복치가 말했다.
"그걸 알았으면 우리가 여기 있겠어? 오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닌데."
똑 부러져 보이는 위성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여기저기 상흔이 많은 위성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가야 한다고 여기는 곳으로 가야 하겠지."
"가야 한다고 여기는 곳으로 가다 보면,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를 알 수 있나요?"
여기저기 상흔일 많은 위성은 소녀의 질문에 다시금 곰곰이 생각을 하다 말했다.
"글쎄··· 그건 여정만으로는 알 수 없을 텐데."
"명쾌하게 좀 말해줘 봐. 다들 아는 게 많으면서."
개복치가 세 위성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소녀는 잠시 침묵했다. 모든 것은 사고처럼 일어났고,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수많은 과정 중 누구도 직접적으로 소녀가 가야 할길이나 존재의 이유를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저.
"사라지는 모든 것, 그것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거야.
·
·
자, 이제 그만 가거라!"
"아니 왜 쫓아내셔, 형님. 이제 막 왔는데."
"할 말 다 했으면 보내야지! 우리도 쉬자꾸나."
"잘 가, 인간."
사라지는 모든 것.
지금부터 사라질 모든 것.
사라지는 모든 것들과 사랑.
바람처럼 순식간에 스쳤다. 혜성의 마지막 인사, 맹그로브의 배웅, 은빛 설렘, 하늘 담은 별바다, 제대로 살피며 걸어왔을까. 아마 그랬다면 이런 아쉬운 기분은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소녀는 마음이 조금 무거워져서는, 개복치를 끌어안으며 서둘러 퀘이사로 향하고 싶어졌다.
#9. 케이프 혼
혼 곶의 악명은 괴담으로 퍼졌다. 거친 파도가 쉴 틈 없이 휘몰아치는데 그 크기가 커다란 산의 높이만큼이라든지, 케이프 혼을 지나는 배들은 모조리 침몰한다든지, 소중한 것을 제물로 하나 내어주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든지 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이었다.
소녀는 걱정에 사로잡혀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이제야 알게 된 모든 것이다. 사라지는 모든 것들은 소중하고, 이 순간도 끊임없이 사라지는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된 지금 즈음에. 높은 너울을 타면 수평선 뒤를 볼 수만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퀘이사는 버틸 수 있을까. 잘 해내고 싶다. 다시는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뭐가 걱정되는데."
"해내지 못할까 봐."
"또,"
"희생하게 할까 봐."
"···포기하면 미련이 남을까 봐."
"퀘이사는?"
소녀는 가끔 개복치가 지나치게 눈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물어볼 것이었으면 달콤한 꿈 여행이나 하며 지냈을 텐데···"
"여기를 지나야 다음으로 갈 수 있잖아. 난 널 태워주기 위해 왔잖아."
소녀는 마음이 무거운 것인지 저맀한 것인지 알 수 없게 조금의 화도 났다. 하지만 누굴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는 너의 존재의 이유를 찾기 위해 여정을 하면서, 내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는 왜 존중해 주지 않는 거야?"
쿵 하고 화가 바닥에 떨어지며 터지더니 곧 눈물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여야 하는 이유를 찾았고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도 최선을 다해."
"자 그럼 됐네. 뭐해? 퀘이사가 괜찮다는데! 닻부터 올려야지, 선장." 어디까지가 바닷물이고 눈물인지 모호했다. 소녀는 가쁜 호 흡 으로 배 위에 섰다. 나아갈 길은 오로지 하나,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 무사히 혼 곶을 넘어 나로 태어난 이유를 끝내 찾아내 는 것.
Attention! 닻을 올려라 여기서 떠나갈 채비를 하자
Back off! 돛을 올려라 바람을 등지고 앞으로 가자
Attention! 닻을 올려라 심장을 달려서 내일로 가자
Back off! 돛을 올려라 멈추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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