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冬天) / 서정주
내 마음 속 우리 님의 고운 눈섭을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어서
하늘에다 옴기어 심어 놨더니
동지 섣달 나르는 매서운 새가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네
'눈썹'을 '눈섭'으로 표기하고, '옴기어'도 맞춤법이 틀려 있다.
현행 한글 맞춤법대로라면 '즈문'도 '저문'이라야 옳다.
<동천>에는 희한하게도 그의 다른 시들과는 달리 쉼표. 마침표. 말줄임표 같은
부호가 일체 없다.
물론 우리말의 가락을 살리려는 미당의 숨은 섬세성 때문에 그랬을테고,
맞춤법을 무시한 배려도 예사로 읽을 수 없는 대목이다.
감상하기 나름이겠으나 〈동천〉은 연년세세 한반도 위에 까무룩하니 드리운
우리 한민족의 정한이랄까 정서 같은 것이 서리서리 똬리를 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시름 많은 마음과 우리의 소리글이 이처럼 혼연일체를 이룬
하모니는 미당만이 빚어낼 수 있는 수일한 경지 그 자체이다.
물론 짧은 시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어떤 추상적인 집합체로서의 텍스트 자체가
다소 공허하게 비칠 수도 있겠으나, '눈섭·꿈·하늘·새' 같은 순수한 우리말의
투명성이 뜻밖에도 구체적인 허무감을 한껏 양각시키고 있다.
첫댓글 즈문을 천으로 알았으니... 그래서 천밤의 꿈으로 맑게 씻었다는 것에서 소름이 돋았어요. 백밤의 꿈으로 맑게 씻은 그리움이 내게 있다면...
? 아무래도 즈믄은 천으로 풀이해야 맞는것 아닐까요? 하룻저녁의 꿈이라면 너무나 가볍고 무게도 없어서...즈믄 밤의 꿈이 깊이 깊이 새겨지고 새겨져서 고운 님의 눈섭모양이 초생달화한 그리움의 형상화라고 감상하고싶은 욕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