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랭전선 온난전선
정 규 준
그녀가 말하고 있다. 아까부터 쉬지 않고 입을 놀린다. 그녀의 입술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동그라미형, 네모형, 타원형, 마름모형, 쉴 새 없이 변화하는 그녀의 입은 영화 「아마데우스」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부르는 오페라 가수의 입 모양을 닮았다. 그녀의 입술은 가늘고 얄팍하여 쉼 없이 말하기에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였다.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햇살 사이로 그녀의 비말 입자가 무지개를 형성한다. 북극의 오로라가 눈앞에서 펼쳐진다. 적외선 카메라에 감지되는 인체의 움직임처럼 형형색색으로 변화한다. 단세포 생물인 아메바로부터, 진화된 고등 동물의 모습까지 망라한다. 그녀는 입으로 허공이란 캠퍼스에 그림을 그리는 구필화가다.
그녀의 눈이 움직이고 있다. 한 시도 쉬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빠른 행보를 계속한다. 그녀의 눈은 가자미눈처럼 가늘고 긴 타원형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흰자위와 윗 눈꺼풀 사이에 반쯤 걸려 있다. 마치 보름달이 구름 속에 들락날락 하는 것처럼 숨바꼭질을 한다. 민첩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는 세상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는 듯 한 시도 가만있지 않는다. 독수리의 눈처럼 구석구석 감시하고 체킹한다. 에볼라 바이러스도 그녀의 성역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이 방어망이 완벽하다. 그녀는 세상을 피해 자기라는 성에 숨어버린 공주이다. 아니, 세상이 그녀에 의해 마녀가 되었다고 해야 하나? 감시망을 뚫고 들어가 그녀를 구해내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
그녀의 팔이 춤을 추고 있다. 영화 속의 가위손처럼 재빠르게 움직이며 허공을 잘라내고 있다. 양손에는 음식을 먹기 위해 포크와 칼이 들려 있다. 허공이 그녀의 팔 앞에서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자세히 보면 떨어지는 퍼즐 조각 속에는 여러 가지 그림들이 있다. 그녀를 성폭행 했다는 의붓아비의 거시기, 학교에서 자기를 왕따 시키고 폭력을 휘두른 친구들의 입과 주먹, 직장에서 폭언을 하고 결재판을 내던진 상사의 씰룩거리는 안면 근육, 자신을 배신하고 새 여자 친구에게로 떠난 애인의 몸뚱어리, 이 땅에 자기를 있게 하고 고통을 방치했다는 조물주…. 그녀의 팔은 삼라만상의 모든 것을 조각 내어 자기 앞에 굴복시킨다. 그녀는 우주를 다시 재단하려는 재단사이다.
그녀의 목에서 울대뼈가 꿈틀댄다. 금단의 과일을 훔쳐 먹다 목에 걸려 생겼다는 울대뼈는 유난히도 크다. 여자에게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데 그녀는 남자처럼 돌출해 있다. 그녀는 죄의식을 견딜 수 없어 성전환한 트랜스젠더인 것일까? 엄청난 식욕을 따라 식도로 흘러내려가는 음식물이 울대뼈를 춤추게 한다. 아까부터 먹은 양이 벌써 세 그릇 째다. 식탁 위에 준비된 음식들을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더니 계속 추가로 주문하여 삼켜버린다. 그녀의 목구멍은 뻥 뚫린 싱크홀이다. 그녀의 울대뼈가 방앗간의 쌀 찧는 기계처럼 상하 운동을 반복한다. 저 동작이 빨라질수록 쌀은 더 정제되어 나온다. 쌀이 부대에 많이 쌓인다. 들여다보니 껍데기 채 그냥 나온 것도 있고 칠분미도 있고 구분미도 있다. 시간이 갈수록 구분미가 많아진다. 구분미 상표에는 ‘허탄’이란 괴물이 결박되어 있다.
그녀의 젖가슴이 출렁인다. 본래 여자는 가슴으로 숨을 쉬는지라 젖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가라앉았다 하지만은 그녀의 젖가슴은 유난히도 심하게 출렁인다. 그녀가 분을 감당하지 못할 때마다, 격정을 뿜어 낼 때마다 가슴이 활화산처럼 요동치고 융기되어 오른다. 그녀 안에 얌전히 잠자던 불씨가 삶이라는 질곡을 거치면서 발화되어 마음을 태우고 가슴을 헬륨풍선처럼 만들어 버린 것은 아닐는지? 자그마한 몸매에 어찌도 저리 가슴이 부풀어 오를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말씀 하나로 대폭발을 일으키고 천지를 창조였다는 태초의 그날처럼, 그녀의 가슴은 지금 천지창조를 하고 있나 보다. 저리도 심하게 융기와 침강이 계속되는 걸 보면 때가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빅뱅이 끝나면 다시 고도로 압축된 핵으로 환원된다는데, 그녀의 가슴은 폭발과 압축을 반복하는 신의 숨결 같다.
정오부터 시작된 그녀와의 만남은 해가 서녘으로 기울어진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녀의 침가루와 번뜩이는 눈동자와 난도질 하는 가위손과 요동치는 울대뼈와 가슴의 너울성 파도에 점령당한 레스토랑 한쪽 구석은 한랭전선이다. 피해망상으로 거리를 배회하며 허공과 대화하는 그녀의 이야기를 우연히 들은 인연으로 그녀와 나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유기견 같은 그녀가 측은하기만 한 것은 소외받은 상처가 있는 나의 내력 때문인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새 나의 마음도 그녀처럼 침강과 융기를 반복하곤 한다.
가슴속에 있는 말들을 다 풀어내면서 그녀 속에 온난전선이 형성된 것일까. 격앙된 모습이 서서히 잦아들기 시작한다. 이야기를 끝내고 배시시 웃는 그녀의 얼굴에 따뜻한 비가 내리고 있다. 외로움은 어쩌면 ‘사랑’이라는 기류를 체험하고픈 또 다른 이름의 욕망인지 모른다. 한랭전선 온난전선, 그래서 이 둘은 같이 움직이는 것이 아닐까?
그녀가 일어선다. 수줍은 웃음을 흘리며 내 앞을 떠난다. 뒷모습이 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