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봉이씨는 봉산면 봉림리 성지동聖智洞에 살고 있는 정현룡鄭見龍과 결혼하였다. 결혼 한지 3개월 지나서 우봉이씨 남편은 함경도 경계판관 벼슬길에 올랐다. 남편은 함경도 북방 국경지대 호족과 여진족과 임진왜란 일어나 왜구와 싸우는 동안 12년이 지나도 부부는 만나지 못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정현룡이 함경도에 나가 있는 동안 우봉이씨 사이에 자녀가 없었다. 그의 시가媤家 집안어른들은 대를 이을 걱정을 했다.
우봉이씨牛峰李氏는 정현룡 북병사의 아내로서 용기를 내여 임금에게 남편을 찾아가고자 원한다는 상소문을 아래와 같이 올렸다.
"무변武弁 정현룡鄭見龍의 처妻입니다. 남편이 외직外職으로 나간 지 십개 성상 수년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나이가 50을 바라보니 아내로서 삼종지의三從之義를 쫓아야 합니다. 그러자면 남편이 있는 곳에 다녀와야 하겠사오니 이러한 정상을 살피시어 봉승奉承할 수 있게 허許하여 주시기를 엎드려 상소하옵니다."
선조宣祖는‘우봉이씨가 남편을 만나겠다.’라는 의지가 담긴 상소문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윤허했다. 그녀는 시비侍婢와 함께 남편을 찾아 낮선 함경도 향해 북으로 걸어갔다. 어렵게 관문인 마천령에 당도하여 남편을 만났으나“전쟁터에 찾아왔느냐고 호통을 치며 감히 어디라고 되돌아가라!”라고 하였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예산으로 돌아오면서 마천령에서 아래와 같은 한시를 남편에게 전하고는 발길을 돌려 뒤돌아 갔다. 남편 정현룡은 아내가 떠 난 후 애절한 한시를 읽고는 10여리 뒤 돌아 가고 있는 부인을 다시 오라고 하여 재회를 했다.
가고 가고해서 쉬지 않고 당도한 것이 마천령이구나.
끝없이 바라보이는 동해바다 수면은 거울과 같은데
부인의 몸으로 이 천리 길을 그 무엇 때문에 왔던 말인가
중한 것은 삼종지의 이고 이 한 몸은 가벼워서인가 하노라
行行旦至磨天嶺 행행단지마천령
東海無邊鏡面平 동해무변경면평
千里婦人何事到 천리부인하사도
三從義重一身輕 삼종의중일신경
위에 게재 칠언절구 한시는 예산 아녀자인 우봉이씨가 원산原山 앞바다를 바라보고서 속치마속에 쓴 한시로 알려져 있다. 함경도 북병사北兵使 정현룡이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남편이 그리던 예산 고향에 오지 않자 임금에게 상소문을 올려 윤허 받은 후 함경도 마천령 천리 길을 시비와 같이 찾아가면서 자기 심정을 애절하게 칠언절구 한시로 표현을 했다.
앞에 소개한 조선시대 우봉이씨 한시와 비슷한 칠언절구 한시를 소개한다. 필자는 지금 400년 넘어서 조선시대 여성의 한시 표절을 밝히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정현룡 부인 우봉이씨는 충남 예산에서 함경북도 두만강강가까지 천리길(千里婦人家事到)을 찾아 갔다.
아래 소개하는 조선시대 미암 유희춘 부인 송덕봉은 전남 담양에서 남편을 만나려 함경도 종성鐘城까지 만리 길(萬里婦人家事到)을 찾아간 내용이 흡사하다.
마천령을 찾아간 두 여인의 나이를 따져보면 송씨 남편 유희춘은 1513출생하여 1577년 사망을 했다.
우봉이씨 남편 정현룡은 31세에 1577년 알성시謁聖試 무과에 급제하여 출사出仕하였다. 유희춘의 사망한 해이다.
마천령위에서 읆다/摩天嶺上吟
송씨부인(송덕봉)
걷고 또 가 마침내 마천령에 오르니
동해는 가이없어 거울마냥 평평하도다.
만리 길 아녀자의 몸으로 무슨 일로 왔는가?
삼종의 의은 중하고 일신은 가벼울 뿐이네.
行行遂至摩天領 행행수지마천령
東海無邊鏡面平 동해무변경면평
萬里婦人何事到 만리부인하사도
三從意重一身輕 삼종의중일신경
미암 유희춘(1513~1577)이 乙巳士禍을사사화로 윤원형에 의해 무고되어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어 부인 송덕봉宋德奉은 19년이란 긴 세월을 보냈다. 그녀는 해남과 담양을 오가며 살림을 도맡았다. 시어머니를 21년간 모시다가 돌아가시자 3년 상을 치렀다. 그러고는 전남 담양에서 함경도 종성 유배지로 남편을 찾아 나설 때 마천령 고개 마루에 올라 쓴 칠언절구의 한시 전해오고 있다. 1571년 송덕봉은 시 38수 『덕봉집』 한 시집을 발간할 정도로 솜씨가 뛰어났다. 조선시대 4대 여류시인이다.
우봉이씨의 남편 정현룡은 뛰어난 무신으로 임진왜란 때 수차례 공을 세운 장군이다. 선조 33년(1600) 남편 우봉이씨 정현룡은 북병사가 호적胡賊 토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전사戰死했다. 남편의 애마가 남편의 두부頭部만을 몰고 돌아왔다. 얼마나 처절했던 싸움터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우봉이씨는 남편과의 2남 1녀 데리고 남편 정현룡 머리를 안고 애마와 함께 봉산면 봉림리로 돌아왔다. 봉산면 옥전리玉田里에 남편의 장례를 치렀다. 그 후 소복하고는 문밖을 나가지 않았다. 우봉이씨는 남편을 따라 죽었다.
정려현판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 기록하고 판각되어 있다.
"열녀선무일등공신 증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 행정헌대부 함경북도병마절도사 겸 경성도호부사 정현룡처 정경부인 이씨지문 상지즉위 2년 임술11월 일 중수"
烈 女宣武一等功臣 贈崇政大夫 議政府左贊成 兼 判義禁府事 行正憲大夫 咸鏡北道兵馬節度使 兼 卿城都護府使 鄭見龍妻 貞敬夫人 李氏之文 上之卽位 二年 壬戌十一月 日 重修
정대영 고택의 건물은 충청남도에서 1987년에 제385호 문화재자료로 지정하였다. 우봉이씨牛峰李氏의 절행과 열행을 표하고 있는 열녀정려각이 고택 앞에 세워져 있다.
삼종지도는 재가종부在家從父, 적인종부嫡人從夫, 부사종자父死從子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여인에게 지워진 묵중한 도덕률이었다. 조선시대이든 현대사회이든 여자에게 여필종부女必從夫요구했던 일은 좋은 도리는 아니다.
조선시대 그 당시 여자의 몸으로 그 험하고 먼 예산에서 마천령摩天領까지 천리 길, 만 리 길을 남편이 있는 함경도 북방 북병사와 함경도 종성鐘城 유배지를 찾아간 두 여인의 조선사회에서 유교문화의 슬픈 단면을 보고는 마음이 아프다.
※참고 문헌(자료)
1. 봉산면지
2. 북병사 정현룡
3. 디지털예산문화대전
4. 한국민족문화추진위원회 국역연 수원교양강좌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