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히 사라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다가
바삐 갈 길을 서둘러 칠불사로 향한다.
모두 차량으로 이동하는 사람들 뿐 걸어가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약간 가파른 포장길을 열심히 오르니 저만치 하얀 런닝 차림으로 앞서가시는
아저씨 한 분이 계신다 열심히 쫓아 뒤를 따랐더니
칠불사 주차장쯤에서 돌아다보시며 말을 건네신다.
뒤따라오는걸 아셨나 보다 내 걸음걸이에 칭찬을 아끼지 않으시며
대단한 산행실력을 덧붙이신다.
예순 다섯, 산이 좋아 좋아하는 산자락만 골라 민박을 하시며
그 산을 다 아실 때까지 몇 개월을 묵으신다는 아저씨,
호리호리 하시고 빼빼하지만 건강하신 모습이다.
일찍 서둘러 목통으로 가려다 옷만 적시고 못가게 해 되돌아 왔다는 그 아저씬
산 얘기와, 사업실패얘기, 장성한 두 아들이야기, 그리고 젊었을 적
남미의 안데스를 배회했었던 얘기 등 많은 얘기를 해 주시며 안전산행도 강조하신다.
어디로 산행을 하실거냐고 여쭈었더니 오늘의 목적지는 뱀사골이라고,
군데군데 공단에서 나와 길목을 지키고 앉았는데
아저씨의 산행이 순조로울지 염려스러웠지만
서로 남은 여정의 안녕을 기원하며 각자의 갈 길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칠불사의 유명한 아자방과 경내를 둘러보고 아쉬운 토끼봉을 뒤로 한 채
마음은 뱀사골을 향하고 발걸음은 올라온 길을 다시 되돌아 쌍계사로
섬진강으로 향하고 있었다.
범왕에서 막차를 기다리기엔 너무나 먼 시간이었고 내 계획은
차창 밖으로 아쉬웁게 지나쳤던 기인 골짜기의 그리움을
혼자 가슴에 통째로 담아가고 싶어서였다.
뾰루퉁한 날씨는 오후가 되어도 비는커녕 오히려 반 햇살을 비추어 눅기를 더해 왔다
그렇지만 시원한 계곡의 물소리 벗삼아 혼자 걷는 여행길은 오히려 행복했다.
물길 기웃거리고 계곡가의 커다란 오동나뭇닢 따서 열기 가리우며
염소도 만나고, 비 맞은 개도 만나고, 닭장 속에 졸고 있는 촌닭들도 보고,
민박집 담장도 기웃거려보고, 12KM의 지겨운 포장길을 배고픔도 잊은 채
야금야금 먹어 가고 있었다.
신흥마을, 의신과 칠불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내려서니
지친 장마 속 더위를 피해 나선 꽤 많은 피서객들이 계곡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다.
나도 풍덩 뛰어들고 싶다. 멍하니 놀고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다가
나도 몸담글 곳을 찾아 적당한 장소를 기웃거리며 발길을 옮긴다
한참을 걸어 내려와 조용하고 한적한 큰 바위가 있다.
내 아이디 닮은 두지바구, 그 아래서 여정을 풀었다
옷을 입은 채로 뛰어들었다. 나무꾼이 나타날까 무서웠기에....
물은 그리 차갑지 않았다. 그렇지만 따뜻한 바위가 좋았다.
볕바른 커다란 두지바구 위에서 커피 한잔을 하노라니
부러움 없는 행복한 계곡의 멋진 까페였다.
하동주차장에서 주섬주섬 급히 주워온 빵 몇 조각으로 점심을 때우고
젖은 옷을 바위 뒤에 숨어 갈아입고 쾌적한 기분으로 남은 길을 걸었다.
시계는3시를 지나고 있었지만 쌍계사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조금 걸어 내려오니 저만치 우뚝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쉬어 가는 누각" 모텔과 카페가 함께 계곡 쪽으로 자리하고 있다.
2층의 찻집은 온통 유리로 창 밖의 전경이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오는
인적 드문 꽤 분위기틱 한집이다. 차 한 잔하며 조용히 분위기라도 즐기고 싶어
살짜기 찻집 마당으로 들어서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훔쳐보던 음침함에 약간의 놀라움도 있었지만 입안의 침맛이 씁쓰브리 하던차
반가운 전화다. 누굴까? "여보세요" 귀에 익은 여자목소리 여고동창생 이었다.
어제 가려 했었던 친구의 병 문안을 가지 못해 지금시간이 있으니
출발한다고 다짜고짜 병원으로 나오라는 일방적인 얘기다.
좀 멀리 나와 곤란하다고 했더니 언성을 높이며 혼자 어딜 싸돌아다니느냐고 야단이다
어디쯤이며 지금 내가 선자리의 카페를 얘기했더니
혼자서는 안된다며 괜한 오해를 살수 있으니 얼른 나오라고
다음에 자기랑 같이 가야 한다며 빨리 내려오라고 다그친다.
난 그럴 것도 같아 전화기를 든 채 슬며시
그 전망 좋은 까페의 마당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나는 꼭 이 계곡의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를 한 잔 해야만
집으로 돌아 올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를 타고 지나칠 땐
꽤 분위기 있는 찻집을 많이 본 것 같았는데 모두 식당과 민박을 겸하고
있어 정작 찾으려니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다시 조금 걸어 내려오다 보니 오른쪽 산자락으로 붙은 얕으막한 다원이 있다.
고즈녘한 분위기 너무 좋아 집만 바라보아도 차 향이 절로 우려 나는 듯 하다
운치 있는 초가를 타고 오른 지붕 위엔 벌써 가을의 관상용
주황색 호박이 오두마니 집을 지키고 있다. 상호도 모르겠고
그냥 분위기 쫓아 울타리 돌아 자갈마당 밟고서 들어선
다원엔 도심의 낯선 에어컨 바람과 함께 잔잔한 명상음악만이 흐르고 있을 뿐
텅 비어 있었다. 문고리를 잡고 두리번거리며 한참 주인을 찾으니
마당 오른쪽 높은 누에서 발을 밀치시며 수염을 정리하지 않은 아저씨 한 분이 내려오신다.
손님을 그리 반가워하시는 눈치도 아니시고
왠지 좋은 분위기를 망쳤나하는 마음에 되려 불청객이 된 듯한 미안한 심정이다
표정도 별 없으시다 그리고 무심히 뱉으시는 한마디 "차 마실라꼬요"?
난 미안한 듯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네".하고 대답을 했고
아저씨가 조심스레이 다기를 데우며 차를 준비하는 사이
나는 네 댓 평 남짓의 작은 다원을 둘러보았다.
차와 다기, 다구들이 차분이 정열된 벽으로 줄줄이 나부끼는 글귀의 흔적들은
이 다원을 다녀 간 사람들의 느낌들이었다.
나는 차를 우려내시는 아저씨 앞에 앉아 조심스레이 여쭈어보았다.
그냥 분위기에 끌려 무심코 들어 왔노라며 이 다원의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끽다거"
마실 "끽", 차"다", 갈 "지". 차나 마시고 가라는 뜻이랜다.
참 정겨운 이름이다.
아저씨는 다기에 차 한잔을 그득이 우려 놓으시고는 살짜기 밖으로 나가신다.
주인 없는 다원에 객이 주인 되어 홀로 차를 마신다.
조용한 명상 음악과 함께 너무나 행복하고 꿈같은 시간이다.
나 같은 나그네의 흔적 아름답고 벽에 걸린 싯 귀 맘에 와 닿고.
그냥 찻잔을 감싸안고 꿈 같은 시간 아쉬워 두 손으로 다기를 데운다
아마도 주인장은 시를 쓰는 사람인 것 같다.
나그네들의 흔적으로 추측컨대, 그 마나님도 인심이 꽤 후하신가보다.
식은 찻잔만 뎅그라니 남겨두고 판매하는 찻잔 받침 두개를 들고
다원 문을 나서는데 주인장 아자씬 벌써 분위기에 취하셨나보다.
몇 번을 불러도 못 들으시더니 늦게야 부랴부랴 내려오신다.
손에 든 물건을 내 보이며 찻값과 함께 계산을 하고
처마끝을 내려서는데 쇠주 한잔만 하고 가라고 권하신다.
쇠주 보다는 다른 궁금함이 있어 잠깐 올라갔더니
멀리서 오셨다는 친구 두 분과 사모님께서 백숙을 해 놓으시고 술잔을 기우리신다
그냥 자리하기 미안스러워 배낭 속에 넣어 온 과일을 꺼내놓고
소주 한잔을 받아들면서 궁금함을 여쭈었더니 역시 생각대로 글을 쓰시는 분이다.
그리고 멀리 여수에서 오셨다는 친구분들도 함께 문학활동을 하시는 분들이라 하신다
난 이런 곳에 계시면 절로 시인이 되겠노라며 부러워했었더니
그분들도 주말이면 꼭 이 곳을 찾는다고 했다.
이런 느낌에 차도 좋겠지만 직접 쓰신 시집도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아쉬움을 얘기했더니
사모님께서 뛰어 내려 가셔서 계관지 서 너권을 들고 와 내게 건네신다.
고마운 마음으로 비운 술잔을 세분께 돌리고
나도 연거푸 두어 잔을 빈속에 들고나니
눅눅한 열기와 함께 알콜기가 온 몸을 뒤엎어 얼굴이 화끈거린다
얼른 일어나 좋은 시간 되십사 인사를 드리고 쌍계사로 향하는데
머뭇거리는 장마가 힘겹다 사양하지 않고 겁없이 들이킨 자신을 원망하며
쌍계사 주차장에 도착하니 6시20분 진주 차가 있다.
기다리기엔 꽤 지루한 시간 다시 화개로 발길을 옮기려다
되돌아 와 하동행 5시35분 버스를 기다린다.
읍내로 나가면 진주행 차가 있을 것 같아
알콜기와 느직이 눅히는 무더움이 몸을 끈적이게 한다.
갈아 입 은 옷에서 또 땀 냄새가 난다.
혼자 고개를 숙여 킁킁이다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한다.
영 호남의 호우주의보는 다 어디로 갔을까?
한 방울의 비도 만나지 못한 여행길
그러나 가슴에 남겨진 아름다운 추억과 끽다거에 새겨둔 흔적과
그리고 지금 내 손안에서 머뭇거리는 한더미의 그리움
사모님이 챙겨주신 조그만 책자 속에
남겨진 끽다거 주인장의 겨울 시 한편을 읽으며 더위를 식히고 막차를 기다린다.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면
당신을 건너고 싶소
숲 깊은 오두막집 호롱불 밝히고
싸락눈 소리를 엮어
침묵의 바윗돌이 하얗게 눈을 뜨고
넘고싶은 생각들이
고드름에 매달리면,
설익은 가슴을 도려
밤하늘에 던지고 싶소. <끝>
나이는 중년을 치닫는데
아직도 설익은 부끄런 사랑하나
칠칠치 못한 역마살은 산천만 헤매이고
가슴에 흥건한 사랑은 언제쯤 분출될 수 있으련가?
세월은 이리도 바삐 가는데,
장마철 쏘나기 들어부을 때 사랑의 물꼬도 조금씩 틔워 볼까?
하루의 끝자락 머무는 평상 위에 피로한 객을 부르는 시골 완행 버스,
이제 나는 집으로 가고
구름 속에 햇살 기우는 섬진강은 그리움의 긴 여정을 몰아 도도히 흘러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