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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복자성당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
소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자료 모음 코너입니다. 소공동체 모임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자료와 모범사례 등을 소개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자료들이 소공동체 모임을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적 교회상은 교회를 하나의 '사회적 제도'로 보는 입장이었다. 이는 교회법과 성사 중심 교회관으로, 교회의 공동체적 차원을 간과한 것이다. 반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의 공동체성을 부각시키는 '친교의 교회상'을 천명한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친교는 친교공동체로서 교회의 원천과 출발점이며, 교회는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모상이 된다.
하느님의 삼위일체적 친교의 사랑이 교회 구성원들의 친교를 통해 드러날 때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일치를 이룰 뿐만 아니라 갈라져 나간 개신교 형제들과 일치, 나아가 비그리스도교와 일치를 위한 실천적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후 아시아지역 교회들은 공의회 지침에 따라 신앙 토착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특히 아시아 주교들은 1990년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개최한 제5차 아시아주교회의 연합회(FABC)에서 '공동체들의 친교'를 '아시아 교회의 새로운 존재 양식'으로 규정하고, '아시아적 친교 공동체 건설'을 아시아교회 토착화를 위한 목표로 설정했다.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토착화된 친교 교회 실현을 통해 민족복음화에 기여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초기 지도자들은 당시 조선사회 문화전통에 기반을 두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수용, 양반계층뿐만 아니라 서민과 부녀자층을 위해서도 토착화된 표현 양식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대중화하고자 노력했다. 그들은 중세 스콜라철학과 이에 대한 중국의 동양적 설명이 유대관계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사상을 과감하게 수용하는 결단을 내렸다. 동시에 유교사회의 전통적 미풍양속을 보존하고 한국인의 종교심성에 부합하는 표현양식에 따라 교리를 해설하는 토착화한 신학과 신앙생활을 정립하고자 했다.
초기 한국교회 신자들은 당시 수직적 절대군주사회 체제에서 오늘날 만인이 추구하는 자유ㆍ평등ㆍ형제애의 이상을 정착시키려고 노력하면서 경직된 신분 체제를 과감히 초월, 만인을 하느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대하고 모두가 형제 자매라는 복음적ㆍ친교적 교회상을 실천했다. 이러한 초기교회 모습에서 오늘날 추구하는 소공동체 토착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한국교회는 외래 종교인 불교나 유교가 1000년 이상 세월을 거치는 과정에서 민족사와 하나가 되고 한국인 사고방식이나 문화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소공동체 토착화를 위해 이미 토착화된 불교, 유교, 도교는 물론 민속신앙에 내재된 한국인의 종교심성을 발굴하고 이를 가톨릭 신앙생활로 수렴함으로써 교회 구성원들의 내적 성숙과 영성 심화를 도모해야 할 것이다.
토착화한 소공동체를 창출하려면 논리ㆍ분석적이기보다는 직관ㆍ종합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특성에 맞게 법리주의에 입각한 형식적 인간관계보다 미풍양속의 근간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기초한 인격적 관계를 정착시키도록 노력할 필요가 있다. 이런 덕목에 입각해 그리스도 복음을 살아가는 구성원들로 이뤄진 소공동체는 지배와 소유를 지향하는 '죽음의 문화'가 만연한 현실에서 '사랑의 문화', 즉 섬김과 나눔을 생활화하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역군으로 드러나리라 확신한다.
* 심상태 몬시뇰 (한국그리스도사상연구소 소장) / 평화신문 2005년 9월 4일
신학적 측면에서 소공동체 기원은 신약성서 사도행전(2,42-47;4,32-37)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새로운 체험인 동시에 교회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다.
'교회가 되는 새로운 방식'인 소공동체는 무엇보다 공동체이다. 즉 공동체 안에서 서로 경험을 공유하며 교류를 통해 서로 돕는 것을 의미한다. 또 복음을 중심으로 모이고 교회와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교회적 공동체'다. 아울러 교회 기초이면서 지금까지 소외되어온 평신도를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바닥(Base) 공동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소공동체를 '교회적 친교의 진정한 표현이며, 복음선포의 중심'이라고 밝혔다. 교황은 회칙 「교회의 선교사명」에서 "소공동체란 소수의 가정이나 인근 신자들이 기도와 성서읽기, 교회 공부, 인간적ㆍ교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 등을 통해 공동책임을 도출해내는 소수 신자의 집회"라고 정의했다. 또 「아시아 교회」를 통해 "교회는 '공동체들의 친교'임을 신자들이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며, 소공동체 건설은 신자들의 '친교'체험에 필수적이며 신앙생활을 활성화하는 데 효과적 방법"이라고 소공동체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공동체는 △삶의 자리 △복음 △실천(활동) △보편교회와 일치-본당 및 교회와 일치 등 4가지 요소로 이뤄져 있다. 협의적 의미에서 소공동체 기본 구성단위는 가정과 구역ㆍ반이다. 교회 안에서는 어떤 공동체들도 교회 모체와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동시에 각자 위치에서 고유한 독자성을 유지하는 핵으로서 중심 역할을 한다.
복음은 소공동체가 하느님, 이웃과 사랑ㆍ일치ㆍ친교를 이루게 하는 중심이다. 복음나누기는 부활하신 주님을 초대하고 그분 말씀을 듣고 인격적으로 그분을 만나는 것으로, 일반 모임과 소공동체를 구분짓는 요소다.
소공동체는 그 지역에서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을 찾아가는 사도직 활동을 통해 세상과 만나며 세상을 하느님 사랑의 힘으로 변화시키게 된다. 삶의 현장과 복음이 결합될 수 있는 가장 효과적 장소가 소공동체다.
또한 소공동체는 마치 우리 몸의 세포처럼 소공동체와 소공동체가 상호 유대를 맺고, 본당 사제들은 물론 교구장과 일치해 신자 전체가 하나인 교회로 나아감을 뜻한다. 위로는 하느님과 하나되고 아래로는 세상에서 소외된 불우한 이웃과 하나되어 하느님 사랑을 전하는 것이다. 이처럼 소공동체들이 일치할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교회는 세상의 일치를 위한 표지와 도구가 된다.
소공동체가 필요한 이유는 공동체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다수 교회(공동체)들이 독립성과 자율성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와 같은 모습으로 존재해야 한다.
소공동체는 교회와 신앙생활의 본질을 살아가고자 하는 운동, 즉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 위한 운동이다. 대형화된 본당의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 또한 소공동체다. 신앙인으로서 사회적 위기와 복잡다단한 병적 증세를 극복하며, 건강하게 '자아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인격적 친교 마당인 소그룹 조직, 곧 소공동체가 절실하게 요청된다.
소공동체는 평신도가 위임과 책임을 나누는 교회 주체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직무와 친교, 구원 활동에 참여하도록 부름받은 존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평신도들이 교회 주인으로서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사목적 제도를 마련해야 하는데, 이같은 제도가 바로 소공동체다. 성직자나 수도자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동체는 자생력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소공동체는 삼위일체 신앙에 바탕을 두는 그리스도인이 자기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장소이다. 하느님과 이웃과 더불어 사랑과 인격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깨달은 사람들이 그에 걸맞는 새로운 구조 안에서 서로 알고 사귀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소공동체 건설에 힘써야 한다.
* 곽승룡 신부 (대전교구 사목기획국장) / 평화신문 2005년 9월 4일
“진정한 친교의 교회로 나아가는 것이 바로 소공동체 모임입니다. 삶을 나누는 것이 친교인데 각자의 삶 속에서 친교가 잘 되면 서로의 역할 분담이 저절로 이뤄집니다. 이러할 때 진정한 공동체가 이뤄질 수 있습니다.”
대구 성 정하상본당 주임 류승기 신부는 ‘말씀의 힘’을 강조했다. 소공동체가 있게 하고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과 원천은 바로 하느님 말씀이란 점을 분명히 했다.
1년여 전 부임 후 류신부는 신자 전 가정을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류신부는 소공동체 모임에 참여의사를 물었고, 원하는 대상자들을 선별해 각 팀으로 묶어 주었다. 또 왜 소공동체 모임을 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본당 신자들에게 교육을 실시했다. 그 이후론 공동체 운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알아서 해나가도록 배려했다.
“소공동체는 각 팀원들이 소명의식을 갖고 자체적으로 이끌어 나가야 합니다. 본당 사목자는 그 초석만 놓고 나머지는 신자들 스스로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현재 류신부는 그룹 성경공부 모임을 별도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무엇보다 성경말씀을 바탕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신자들에게 보다 체계적인 성경말씀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이렇게 성경공부를 해서 신앙적으로 성숙해진 신자들은 다시 공동체로 돌아가 봉사하게 된다. 우선은 사제가 이들을 가르치지만 나중엔 성경공부를 이수한 신자들이 이 모임을 이끌게 된다.
류신부는 “소공동체 내 복음화위원회에서 각 모임들을 확인하고 교육하며 모임 활성화를 위해 앞장서고 있다”면서 “사제가 나선다고 모임이 활성화 되는게 아니고 자발적인 힘으로 서로 이끌고 나눌 때 진정한 소공동체 활성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향후 3~5년 정도 계속해서 이런 체제로 나간다면 소공동체 모임이 제대로 자리잡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류신부는 어떻게 하면 소공동체 모임을 잘 할 수 있냐는 기자의 우문(愚問)에 첫째 성경공부 둘째 가르친다 셋째 기다린다는 현답(賢答)을 내놓았다.
가톨릭 신문 : 2007-03-25
소공동체와 거룩한 독서
정 태 현(전주교구 군산 팔마본당 주임신부) /사목 2004년 10월호
소공동체가 서울대교구를 통해서 한국교회에 소개된 지 벌써 10년이 지났다. 본당사목에서 소공동체의 필요성과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해마다 전국의 소공동체 책임자들을 불러모아 세미나를 열고 교구는 교구대로 반모임을 통하여 소공동체를 본당에 뿌리내리는 데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이고 있다. 잘 아는 것처럼 소공동체는 본당의 여러 신심 단체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교회 조직 자체에 속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아래로부터의 교회”를 지향하는 소공동체는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국교회가 소공동체를 위하여 아낌없는 노력과 투자를 하는데도, 왜 대부분의 일선 본당에서 소공동체의 정착과 활성화가 이다지도 터덕거리는가?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 원인 분석이 나오겠지만, 시골 본당신부로서 본 대로 느낀 대로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 본다.
우리 본당은 인구 20여만의 중소도시에 속해있다. 교적상 신자수는 2,300명이 넘지만 오래도록(설립연도는 35년 전) 교적 정리를 하지 않아(사실은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제도적으로 할 수가 없다) 소재 파악이 안 되는 신자가 부지기수이고 주일미사에 참석하는 신자수만 따지자면 아이들과 중고생까지 합하여 450명 정도이다. 옛날에는 도심 한복판이었으나 아파트 문화 탓에 도심의 달동네로 전락하여 갈수록 빈곤화와 고령화가 심해지고 있는 이 본당은 주변의 특별한 상황변화가 없는 한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한국의 전형적인 보통 본당이다.
1)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
우리 본당의 소공동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반모임 실태를 들여다본다. 26개 반이 각각 한 달에 한 번 모임을 갖는데, 모두 낮 시간이다. 자연히 숨 가쁜 생활전선의 남녀 교우는 거의 다 빠지고 나이 지긋한 자매님들이 주고객이다. 그나마 몸이 불편해서, 피치 못할 집안 사정 때문에 한 번 빠지고 두 번 빠지면 개인적으로 반모임에 참석하는 횟수는 일 년에 반도 안 된다. 반모임은 복음나누기 7단계를 바탕으로 꾸며진 교구의 반모임지에 따라 진행된다. 아무런 사전 준비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주어진 복음의 한 대목을 놓고 나눔을 하려니 성서 말씀에 깊이 맛들이기보다는 신변잡담으로 흐르기 십상이다. 본당신부가 채근하지 않으면 이런 반모임이 제대로 유지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반모임과는 달리 레지오 마리애는 조직도 탄탄하고 구성원들의 참여도도 매우 높다. 한 개의 꾸리아 아래에 25개 쁘레시디움, 250여 명의 단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쁘레시디움 단원들의 면모를 보면 대부 대자, 대모 대녀, 친구나 이웃, 선후배 등으로 구성되어 유대관계와 친화력이 끈끈하다. 지난주에 우리 본당에서는 레지오 마리애 도입 40돌 기념잔치를 벌였는데 대성황을 이루었다. 본당이 설립되기 5년 전부터 첫 번째 꾸리아 회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본당 자체로 특별 강의를 마련하면 호응이 별로 없지만 레지오 단원 교육이라고 하면 인원 동원이 잘 된다. 하다못해 다른 본당 신축기금 바자회 티켓을 팔더라도 레지오 조직을 이용하면 한결 쉽다. ‘레지오 마리애가 본당신부나 사목회와 상관없이 잘도 굴러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반모임을 매주 가지라고 했더니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다. 소공동체는 교회의 기본 조직이고 레지오는 여러 신심 단체들 가운데 하나이니 당연히 반모임에 우선적으로 참석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해도 소용없다. 쁘레시디움 주회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건너뛰는 법이 없다. 명절이 닥치거나 본당의 큰 행사가 있어서 제날짜에 하지 못하는 경우에는 다른 날로 시간을 바꾸더라도 반드시 모임을 갖는다. 무슨 모임이든지 한 달에 한 번 갖게 되면 형식에 지나지 않고 친목회 이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 그래서 매주 쁘레시디움도 하고 반모임도 하라고 하니 사는 데 바빠서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이다. 레지오와 소공동체가 서로 상충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만하다.
소공동체와 레지오의 상충은 시간 문제만이 아니다. 책임 간부직의 중첩도 큰 문제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반장들은 레지오 마리애 단장직을 겸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사목회 임원들이고 그 밖의 다른 단체의 간부들이다. 시골 본당에서 활동할 만한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서너 개의 간부직을 맡는 것은 보통이다. 결국 타성에 젖거나 과도한 활동으로 맡은 바 직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어렵다.
2) 모임의 장소와 시간
소공동체 모임은 원칙적으로 본당이 아니라 삶의 현장인 소공동체 구성원의 가정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파트 촌에서는 반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반원들을 불러모으기가 편하고 쉽다. 반원들이 단독 주택에 띄엄띄엄 떨어져 사는 시골 본당에서는 부지런히 뛰어다녀야 한다. 반모임의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이를 반원들에게 공지하여 한데 불러모으는 것이 여간 큰일이 아니다. 반장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이 여러분의 발걸음을 금자로 재고 있어요.” 하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격려하지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본당 회합실의 빈자리와 빈 시간을 이용하여 모임을 갖는 것이 훨씬 간편하다. 또 어려운 살림살이 덕분에 간단한 다과와 음료를 나누는 것 자체도 부담스럽다. 한 달에 한 번 가지는 모임이라면 몰라도 매주 모임을 갖는다면 이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우리 본당에서는 다과와 음료 비용을 2천 원으로 정하고 다달이 반장 모임 때에 모든 반장에게 지불한다. 소공동체 모임은 인구 밀집 지역인 대도시나, 중소도시라도 아파트 집성촌에서나 어울리는 모임이지 단독 주택이 많은 본당에서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본당신부들도 많다.
3) 반모임과 거룩한 독서
반모임의 핵심은 거룩한 독서이다. 소공동체에서 반모임을 하드웨어라고 한다면 거룩한 독서는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다. 거룩한 독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반모임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런데 반모임의 거룩한 독서는 남아프리카에서 개발된 룸코의 형식에 따라 복음나누기 7단계로 진행된다. 현재 각 교구 반모임에서 시행하는 복음나누기 7단계는, 모임이 있는 그 달 네 주일 복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읽고 묵상하고 나눈 다음에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되어있다.
우리 교구에서 시행하는 복음나누기 7단계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① 성령께서 오시기를 청하는 기도를 바친다.
(두세 사람 정도 차례로 짧은 기도로 바친다.)
② 한 사람이 성서 본문을 천천히 읽는다.
(5분 정도 침묵한다.)
다른 사람이 본문을 다시 한 번 읽는다.
(들을 때에는 등장인물, 움직임, 동사에 특히 주의를 기울인다.)
③ 마음에 와 닿는 단어나 구절을 세 번씩 소리내어 기도하듯 외친다.
(외치는 사이에는 잠시 침묵을 지킨다.)
④ 다시 한 번 성서 본문을 읽는다.
(5분 정도 침묵하며 이 구절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특히 그 메시지를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를 묵상한다.)
⑤ 마음 안에 들려온 말씀을 나눈다.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들려주시는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눈다.)
⑥ 침 묵
(형제들과 함께 나눈 것에 대해 잠시 묵상한다.)
⑦ 각자가 기도를 짧게 바친다.
이 7단계에 대한 전체적인 느낌은 ‘너무 고급스럽다!’이다. 여기서 요구하는 묵상 수준은 가히 수도자 급이다. 시골 본당의 나이 드신 분들이 이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란 무리다. 앞뒤 문맥이 단절된 복음을 놓고 세 번씩이나 낭독하고 그 사이마다 계속해서 침묵을 지키며 묵상하라니 거룩한 독서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에 다가가고 그 말씀이 나에게 다가올 수 있겠는가? 즐거운 거룩한 독서가 아니라 고역이다. 형식은 간단하고 내용은 알차야 한다.
나눔이 부담스러워서 반모임에 나가기 싫다는 사람도 많다. 또 나눔 시간에 개인의 사생활이 노출되고 이를 반모임 밖으로 유출시켜 말썽이 일어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래서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지 않으려고 성서 본문과 관련된 객관적인 사실이나 메시지만 나열하기도 하고, 아니면 성서 말씀과 전혀 관련 없는 뉴스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끝나는 경우도 많다.
나눔 시간은 자신을 선전하거나 강의·토론·잡담 등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자신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다른 이들과 나눔으로써 서로를 격려하는 시간이다. 바오로 사도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 그대로이다. “내가 여러분을 애타게 만나보려는 것은 여러분과 함께 영적인 축복을 나눔으로써 여러분에게 힘을 북돋아주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피차의 믿음을 통하여 서로 격려를 받으려는 것입니다”(로마 1,11-12).
나눔이 제대로 안 되니 각자 돌아가며 하는 자유기도도 잘 안 된다. 그래서 묵주기도나 다른 소리기도로 대체하는 경우도 있다. 남이 지어준 기도에 익숙해 있으니 기존의 소리기도를 바치면 부담 없고 편하다.
거룩한 독서가 제대로 안 되는 상태에서 반모임을 끌고 가려니 힘들 수밖에 없고, 알맹이가 빠져 있으니 시간 낭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본당신부는 소공동체가 교회의 본질이라느니 매주 모임을 가져야 효과가 있다느니 하면서 몰아대니 신자들로서는 마지못해 응하는 형편이다. 소공동체의 필요성을 느끼고 강조하는 본당신부가 있을 때는 조금 활성화되는 듯싶다가도 그렇지 않은 본당신부가 오면 사그라지기 일쑤다.
몇 년 전 전주교구 사제들이 소공동체 세미나를 가지면서 이용한 「소공동체 자료 모음집」을 보니 소공동체의 문제점, 성공 사례와 더불어 소공동체의 활성화를 위한 여러 가지 이론과 대안이 제시되어 있었다. 자료 모음집은 본당신부의 사목방침과 관심사에 따라 소공동체와 레지오 마리애의 충돌이 일선 본당에서 생각보다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충돌을 막는 획기적인 대안을 제시한 예는 별로 없고 과도기인 만큼 인내하고 순명하는 자세로 기다리라고만 한다. 또 자료 모음집에 나와있는 설문조사에 따르면, 신자들은 복음나누기 7단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개선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지 그 방안을 제시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일선 본당의 한 사목자로서 거룩한 독서의 정착을 통해서 레지오 마리애와 소공동체의 충돌을 어떻게 조정해 나가고 본당의 얼굴을 어떻게 바꾸어나가고 있는지 소개한다.
1) 거룩한 독서와 레지오 마리애
2년 8개월 전 부임하면서 첫 일성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재현하자!”였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여기에서 ‘사도들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와 나중에 신약성서의 핵심이 된 예수님에 관한 복음, 곧 그분의 삶과 가르침이다. ‘서로 도와주는 것’은 친교를 말하고, ‘빵을 나누어 먹는 것’은 성찬 또는 미사를 가리킨다. 성서, 친교, 미사, 기도, 이 네 가지에 전념하는 것이 바로 초대교회의 모습이다.
친교와 미사와 기도는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평균 수준이지만, 성서는 기대치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성서 봉사자는 한 사람도 없고 성서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지 않는 정도였다. 그래서 거룩한 독서를 시작하기로 하였다. 부임하고 2개월이 지난 뒤, 모든 신자를 대상으로 수요일마다 저녁 두 시간씩 거룩한 독서 입문 강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본당의 모든 간부, 곧 사목회 임원들, 레지오 마리애 꾸리아와 쁘레시디움 단장·서기·회계, 각 단체의 장, 각 반의 반장, 꾸리실리스타들을 총동원하니 120명가량 되었다. 묘하게도 초대교회의 창립 멤버 수와 같았다(사도 1,15). 12개 반으로 나누어 거룩한 독서 모임을 갖게 되었는데, 한 달 정도 지나니 30여 명이 떨어져나가고 90명 정도가 꾸준히 나왔다.
수요일 저녁에는 미사도 없고 행사도 없다. 그래서 이때를 이용하여 거룩한 독서를 실시하였다. 유일한 교재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유일한 교사는 성령, 안내서는 본당신부가 쓴 『거룩한 독서 1: 모세오경과 네 복음서』였다. 거룩한 독서를 시작한 지 15주간이 지나 모세오경이 끝났다. 그동안에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바라보며 레지오 마리애와 관련하여 본당신부의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들을 정리해 보면 이렇다.
첫째, 이 본당은 마리아 신심이 대단하다. 오래된 본당답게 레지오 마리애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렸다. 그런데 레지오 단원들이 타성에 젖어서 회합 이외에 어린 양(미신자)이나 잃은 양(냉담자) 찾기 등 사도직 활동에는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다. 레지오 단원들이 성서보다 더 중요시하고 더 많이 읽는 레지오 교본을 보면 성서적으로 교리적으로 문제 되는 생각이나 표현이 적지 않다. 더구나 시대적 징표나 요청을 고려하기에는 교본의 내용이 너무 낡고 경직되어 있다.
둘째, 본당신부가 가장 중요한 사목방침으로 제시한 거룩한 독서에 레지오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것 같지 않다. 두세 가지 이상의 직책을 맡은 간부들이 또다시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어떤 본당신부처럼 레지오를 해체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레지오와 거룩한 독서를 접목시켜 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였다. 교본 연구시간에 거룩한 독서를 하게 할까 아니면 레지오 회합이 끝난 다음에 하도록 할까 하다가 잘못하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서 좀 힘들더라도 둘을 독립적으로 끌고 가기로 하였다.
셋째, 내키지 않지만 레지오에 관심을 더 기울여주고 그 대신 거룩한 독서의 참여를 독려하는 데 레지오 마리애의 조직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꾸리아 간부들에게 관심을 더 보이고 쁘레시디움 회합에 충실히 얼굴을 비쳤다. 그랬더니 서서히 효과가 나타났다. 거룩한 독서에 불참하는 간부들은 개별적으로 만나 그 사정을 들어보고 왜 거룩한 독서를 해야 하는지 설명하였다.
모세오경 15주간이 끝나자 이번에는 모든 신자에게 문호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지난 경험을 바탕으로 모임을 이끌 만한 사람들을, 새로 조직하는 거룩한 독서의 그룹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룹장의 역할은 출석 확인과 연락이 우선이고 모임에서 그룹을 가르치거나 지도하는 것이 아님도 주지시켰다.
새로 편성된 그룹들은 처음 모세오경부터 다시 시작하여 네 복음서까지 마치게 되었다. 그러고는 출석률에 따라 성물 상품권으로 개인 시상을 푸짐하게 해주었다. 출석률이 좋은 그룹도 한둘 골라 단체 시상을 하였다. 거룩한 독서를 시작한 지 1년쯤 지나자 신자들의 삶에 큰 변화가 왔다. 회개와 치유가 일어나고 친교의 분위기가 저절로 무르익는 가운데 전례 분위기가 좋아졌다. 무엇보다 할머니들이 “신부님 강론 말씀이 이제 귓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고 신기해하였다. 우려했던 레지오 마리애와 거룩한 독서 사이의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둘 다 잘 되어나갔다. 레지오 단원들의 활동난에 거룩한 독서도 기입하게 하였더니 모두들 좋아하였다.
2) 반모임과 거룩한 독서
첫째 단계인 『거룩한 독서 1권: 모세오경과 네 복음서』가 끝나갈 즈음 반장들 모임에서 신자들의 의중을 떠보았다. 반모임을 매주 해보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불가능하다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다소 형식적인 반모임은 그대로 지속하도록 버려두고 거룩한 독서 둘째 단계를 시작하면서 새 틀을 짰다. 이제껏 거룩한 독서를 충실히 해온 사람들이 어떤 반에 속해있는지 확인한 뒤에 그들이 속해있는 가까운 반을 두세 개, 인원이 안 될 때는 더 많은 반을 하나로 묶어 새 그룹을 만들었다. 반모임의 외적 구조를 참조하여 거룩한 독서 팀을 재편성한 셈이다. 이는 거룩한 독서를 제대로 할 수 있어야 반모임이 성공할 수 있다는 본당신부의 신념에서 나온 해법이다.
강론 시간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룩한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거룩한 독서와 반모임을 위한 기도문’을 만들어 매일 미사 전에 바쳤다. 그러고 나서 8개월 정도가 흘러 구약의 역사서와 신약의 사도행전(『거룩한 독서 2』의 내용)을 마쳤다. 반장 모임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거룩한 독서를 꾸준히 하고 있는 신자들이 복음나누기 7단계의 분위기를 주도적으로 잘 이끌어간다는 것이었다. 염려와는 달리 거룩한 독서의 나눔 시간에 노출된 사생활 이야기가 외부에 발설되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떤 신자가 이런 말을 하였다. “신부님, 우리 성당에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총칼만 들지 않았지 이건 정말 혁명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나눔 시간에 나눈 이야기로 본당에 폭풍이 휘몰아쳤을 텐데 지금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본당신부가 답변하였다. “성령이 이끄시는 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요.”
현재 거룩한 독서 모임은 어른들만 14그룹이다. 화요일 오전에 주일학교 자모회 1그룹, 수요일 저녁에 10그룹, 목요일 낮에 3그룹이 모인다. 수요일 저녁만 되면 7시 30분부터 여기저기에서 성가 소리가 들리고 거룩한 독서를 시작하는 기도가 울려퍼진다. 많은 신자들이 30분 전에 미리 나와 조용히 성서를 읽는다. 본당신부가 그룹에 들어가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한다. 성서 본문보다 말씀 봉사자와 성서 교재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기존의 성서 교육과는 퍽 다른 모습이다.
올해부터는 청소년과 중고생들을 위한 거룩한 독서 교재를 매주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주말에는 청년 두 그룹, 그리고 토요일에는 중고생들이 거룩한 독서를 한다. 어릴 때부터 성서가 재미있고 유익한 책이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심어주고자,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구원의 역사를 따라 이야기 중심으로 만들고 있는 교재다.
먼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의 새 번역 성서 본문을 인터넷에서 발췌하여 소개하고, 거기에 간단한 해설을 한 다음 나눔 주제를 정해준다. 청소년들은 매주 재미있는 성서 이야기를 읽고 해설을 통해 이야기 안에 담긴 메시지를 깨우친다. 그리고 그 메시지를 삶과 연결시키는 나눔을 통해 성서 메시지를 자기 것으로 삼는다. 지금처럼 한국교회가 청소년, 특히 중고생들에게 속수무책인 시절이 없었던 것 같다. 입시 준비와 학원 교육 앞에서 일선 본당의 신앙교육은 발 디딜 틈이 없다. 각 교구와 본당마다 청소년 문제만 나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렇다고 팔장 끼고 불구경하듯 바라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3) 성서 공부와 반모임의 복음나누기
현재 한국의 대표적인 성서 교육 프로그램들을 열거해 보면, 수도회에서 주도하는 가톨릭 성서모임, 성서 40주간, 여정, 통신 성서, 우리성서모임을 비롯하여 성서 백주간과 성서 못자리 등이 있다. 그런데 기존의 성서 교육과 거룩한 독서에는 몇 가지 차이가 있다.
첫째, 성서 공부는 말씀 봉사자와 교재에 크게 의존하는 반면, 반모임의 복음나누기는 성서 본문과 자발적인 참여에 의존한다.
둘째, 성서 공부는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 시행되지만, 반모임은 선택의 여지가 없이 모든 사람에게 요청된다.
셋째, 성서 공부는 성서 본문에 관한 지식이나 성서의 메시지를 얻는 데 중요한 의미를 두지만, 반모임의 복음나누기는 개인의 체험을 중요시한다.
이런 차이점이나 특성과 관련하여 반모임의 복음나누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복음나누기는 말 그대로 복음만 가지고 나눔을 갖기 때문에 매우 제한적이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의 밀접한 관련이나 성서 전체의 흐름, 또는 각 복음서의 특성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갑자기 주어진 주일 복음의 본문만을 대하다 보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주어진 주일 복음이 성서 말씀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다.
둘째, 말씀 봉사자나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자칫하면 나눔 시간을 성서 본문의 깊은 메시지와는 상관없이 신변잡담으로 채울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반원들 사이에서 반모임 참석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셋째, 한 달에 한 번 반모임을 갖는 경우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매개체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열어 보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결국 피상적인 나눔만 하다가 끝난다.
4) 본당의 거룩한 독서
기존의 성서 공부와 반모임의 복음나누기에서 발견된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본당의 거룩한 독서를 제시한다. 어떤 본당 사목자는 거룩한 독서는 수도자들이나 하는 것이지 본당 신자들에게는 해당이 안 된다고 잘못 생각한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거룩한 독서를 소개하는 책들이 너무 수준이 높거나 우리 실정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거룩한 독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언제 어디서나 마땅히 실천해야 할 의무이다. 우리 본당에서 실시하는 거룩한 독서는 형식이 매우 간결하다.
거룩한 독서는 날마다 개인이 하는 거룩한 독서와 매주 한 번 하는 단체의 거룩한 독서로 나뉘는데, 이 둘은 반드시 겸해야 효과가 난다. 안내서는 네 권인데, 『거룩한 독서』 제1권은 구약의 기초가 되는 모세오경과 신약의 기초가 되는 네 복음서, 제2권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신앙의 안목으로 새롭게 해석한 구약의 역사서와 새로운 이스라엘인 초대교회의 역사를 다룬 신약의 사도행전, 제3권은 오경의 가르침을 일상의 삶에 접목시킨 구약의 시서·지혜서와 복음을 지역교회의 삶에 연결한 신약의 서간집, 제4권은 시대의 징표를 읽어 현실과 앞날에 필요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구약의 예언서와 구약성서와 신약성서 전체를 아우르며 교회에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신약의 요한 묵시록을 다룬다. 1-3권은 이미 출간되었고 제4권은 10월 초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 네 권의 안내서는 성서 전체의 맥을 짚어주고 성서 각 권의 해제와 매주 독서할 본문의 주요 메시지를 짚어준다. 기존의 성서 공부가 추구하는 객관적 진리(또는 메시지)를 밝혀줄 뿐 아니라 그 객관적 진리를 주관적 진리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한다.
날마다 개인이 하는 거룩한 독서는 전통적 방식대로 네 요소, 곧 독서, 묵상, 관상, 기도를 포함한다. 성령의 도우심을 청하는 거룩한 독서의 시작기도와 끝기도는 시편 119편을 바탕으로 간략하게 만들어 안내서마다 첫 속표지에 제시하였다. 성가는 『가톨릭 성가』에서 신자들이 잘 부르는 노래로 고르되 시편이나 성서 말씀을 가사로 지은 노래를 우선시하였다. 독서는 성서 본문(안내서에 보면 한 주간 동안 읽어야 할 본문의 범위가 주간마다 제시되어 있다. 각자가 알아서 이 범위를 날마다 조금씩 읽으면 된다.)을 조용히 읽으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묵상은 하느님의 말씀을 자기 현실의 삶에 연결하는 것이다. 관상은 추구의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공짜로 주시는 선물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느끼게 되는데, 그 현존과 사랑에 편안히 머무는 것이 바로 관상이다. 기도는 하느님께 찬양과 감사와 청원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안내서는 어디까지나 참고서일 뿐이고 거룩한 독서의 유일한 교과서는 오로지 성서뿐이다. 좀 더 깊이 공부하면서 거룩한 독서를 하고 싶은 이들이나 성서를 읽다가 의문점을 발견한 이들에게 안내서가 도움을 줄 것이다.
단체의 거룩한 독서는 매주 거르지 말고 해야 한다. 매일 거룩한 독서를 하는 사람들이 정해진 날짜에 모여 함께 주제 본문을 읽고 묵상하고 나눔을 갖고 기도한다. 그룹원들이 모이면 먼저 안내서에 제시된 성가 앞절을 부르고 거룩한 독서 시작기도를 바친다. 그러고는 주제 본문을 돌아가며 읽은 다음, 침묵 속에서 묵상을 하며 다시 한 번 본문을 숙독한다. 독서와 묵상이 끝나면 나눔 시간을 갖는데, 먼저 한 주간 동안 개인이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과 그 구절이 왜 나에게 와 닿았는지 발표하고 이어서 주제 본문을 읽으면서 마음에 와 닿은 구절과 묵상한 내용을 발표한다.
한 사람이 두 가지 발표를 한 번에 다 하고 발표가 끝날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고맙습니다.” 또는 “잘 들었습니다.”로 응답한다. 발표를 할 때에는 반드시 단수 1인칭으로 해야 한다. 예를 들면 “저는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이 참 좋았어요. 하느님의 숨이 제 안에 있다는 것이 무척 고맙게 느껴졌거든요.” 이런 식이다. 3인칭(그, 그들)이나 복수 1인칭(우리) 화법은 성서 메시지를 객관화시켜 버릴 위험이 있다. 나눔 시간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거나 충고 또는 상담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 시간은 형제자매들 안에서 말씀으로 다가오신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거룩한 독서 세 번째 요소인 관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나눔이 끝나면 돌아가면서 자유기도를 바친다. 각 사람의 자유기도 끝에 다른 이들은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하고 응답한다. 마지막에 진행자는 “이 모든 기도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로 마무리하고, 다 함께 “아멘.” 으로 끝낸다. 거룩한 독서 끝기도를 함께 바치고 정해진 성가 뒷절을 부른다.
처음에 문제점과 어려운 점이 나눔과 기도에서 일어났다. 남을 가르치려는 전직 고등학교 선생님, 병치레 이야기만 늘어놓는 할머니, 자기 이야기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 남의 말꼬리를 잡고 그게 아니라고 우겨대는 똑똑한 사람 등이 나눔을 어렵게 만들었다.
기도를 바칠 줄 몰라서 못하겠다는 사람들에게, “‘아이고 하느님, 거룩한 독서에 나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는 바칠 수 있지요?” 했더니 그건 할 수 있겠단다. 이런저런 답답하고 어설픈 과정을 다 겪어내고 레지오 단원의 반 정도가 2년 반 가까이 거룩한 독서를 충실히 해오고 있다. 무슨 모임과 회합이든 본당신부가 시키지 않아도, 시작과 끝에 자유기도를 바치고 성서를 반드시 읽게 되었다. 회합 중에 성서를 봉독하는 쁘레시디움들도 생겨났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도 구분을 잘 못하고, 성서에 무슨 책들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신자들이 그나마 겨우 한 달에 한 번 모여 복음나누기만 해대니 소공동체가 밤낮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다. 먼저 말씀에 대한 본당 신자들 전체의 관심과 수준을 높여놓고 우리 삶에서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지를 깨닫게 하는 일이 급선무다.
거룩한 독서는 자발성이 관건이다. 소공동체의 성패도 이 자발성에 달려있다. 강제성을 띠는 레지오 회합과는 달리 거룩한 독서는 교우들이 좋아서 한다. 우리 본당 교우들은 레지오와 거룩한 독서를 매주 하면서도 시간 타령을 하지 않는다. 거룩한 독서는 방학도 없다. 지난여름 그렇게 더운데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거룩한 독서를 했다. 지금은 신약성서 서간편을 하는데, 앞으로 1년 정도 더 하면 창세기부터 묵시록까지 성서 전체를 거룩한 독서로 완독하게 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보완해야 할 점은 거룩한 독서의 나눔 시간에 자꾸 자신을 반성하는 데 급급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에 눈을 돌리지 않고 자기 영혼의 쓰레기통만 뒤지고 있다. 양심성찰과 자기반성에만 골몰하면 고약한 냄새뿐이 더 나겠는가?
청소년과 중고생의 거룩한 독서는 지금 24주째 하고 있다. 전체를 70주간 정도 생각하고 있는데, 3분의 1이 조금 지났으니 지금 평가하기는 이르지만 특히 청년들의 반응이 괜찮은 편이다.
신자들 전체가 말씀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깨닫고 말씀에 맛을 들이는 이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일선 본당에서 소공동체의 정착과 활성화는 앞당겨질 것이다.
한국교회는 위기상황인가? 교세증가율은 둔화되고 냉담자는 속출하고 교회를 찾는 예비신자는 줄고 있다. 젊은층의 교회이탈도 눈에 띈다. 당연히 적극적인 선교의지와 함께 마땅한 대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아니, 처음부터 우리가 목표로 하는 복음화가 무엇인지 다시 규명할 필요도 있다.
우리는 복음화율이라는 말을 한다. 신자가 많아지면 그만큼 그 사회는 복음화가 이루어진다는 단순논리다. 그러나 이런 양적인 면에만 관심을 두는 패러다임은 빈곤 심리에서 출발한다. 늘 허기질 수밖에 없다. 타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제로섬 상황이 연출돼 갈등을 빚을 수 있다. 남미나 과거 유럽 국가들의 대다수 국민들은 세례를 받은 신자들이다. 그렇다고 복음화가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복음화란 종래의 교회에서 전통적으로 말해오던 전교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보다 역동적이며 복합적인 개념이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에게 그리스도를 알리고 신자로 만들 뿐 아니라 그들이 생활하는 삶의 현장에 구체적인 변혁과 역전이 전개되도록 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복음화라고 말할 수 있다』
소공동체를 시작하던 당시 서울대교구장이던 김수환 추기경의 93년 사목교서의 일부다. 우리가 어떤 복음화를 목표로 해야 할 지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다.
지금 교회가 가지는 도덕적인 힘, 영향력은 많이 약화되었다. 대사회적 면에서만이 아니라 교우들에게서도 마찬가지다. 단적인 예로, 교회가 단호하게 금하고 있는 인공유산이나 이혼율이 비신자와 다를 바가 없다. 회칙과 교서 등 교회의 가르침과 사목자의 설교가 교우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신앙과 삶의 분리현상은 우리 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다. 일각에서는 더욱 강도 높은 교육을 외치기도 한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 교육할 것인가.
『지키도록 가르쳐라』(마태 28, 20). 단순히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지키도록」 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누가 지키고 행할 것인가. 바로 세상 속의 평신도들이다. 그렇다면 평신도 스스로가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이야말로 복음화를 이루는 핵심이고 주체이기 때문이다. 평신도는 사제들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성화되어야할 피동적인 존재만이 아니다. 이 시대의 사목은 한마디로 평신도의 역량을 길러주는 방향으로 가야 된다. 평신도가 주체가 되어 스스로 삶을 바꾸어 나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명감과 소명의식이 투철한 평신도를 어떻게 양성할 수 있을까. 그 대안이 바로 본당의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소공동체다. 소공동체 안에서 약한 이들도 교회의 지체로서 존중되며(1고린 12, 12~27참조)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된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의 소명에 소공동체 사목은 우선 충실하다.
소공동체는 어떤 의미에선 스스로 돕고 함께 성장하는 자조모임이다. 가정문제에서부터 삶의 모든 부분을 복음에 비추어 성찰하고 실천해나갈 것이다. 자신들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행함으로써 차츰 역량은 커질 것이다. 소공동체는 고정된 틀에 매인 획일적인 사목도 아니다. 농촌이면 농촌, 도시면 도시, 학력이 있든 없든 모든 이를 담아낼 수 있다. 구성원들이 스스로 찾아 나서게 되는 열려져 있는 사목이다. 적어도 복음에 입각하여 삶을 나누면서 소박하지만 「신앙 따로 삶 따로」를 극복하게 된다.
한국교회는 지나친 본당중심 사목에서 벗어나야 한다. 다만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단체나 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좋은 신자의 표지로 삼았을 뿐이다. 사목자는 단순한 성무집행자로 만족할 수 없다. 사목자는 관할구역 전체를 염두에 두는 선교사요 교우들의 일상 삶에 관심을 내는 어버이 마음을 가져야 한다. 즉 삶의 현장을 중시하고 평신도 스스로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익혀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화의 열매는 본당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짐을 명심해야한다.
김추기경은 퇴임 후 피데스(FIDES)지와의 인터뷰에서 교구장 재임 30년 동안 가장 큰 업적은 소공동체의 발전이라고 밝혔다(가톨릭신문 98년 5월24일자). 당시에도 논란이 없지 않았던 소공동체를 으뜸으로 꼽았다. 그것은 바로 소공동체야말로 교회의 비전이기 때문이다. 「소공동체로 엮어진 교회」는 복음화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에 적합한 교회의 자기존재양식이다. 신앙과 삶을 통합시킬 수 있는 역동적인 의미의 복음화다. 총체적인 사목이며 새롭게 보이지만 원천으로서의 교회 모습인 것이다.
- 가톨릭 신문 2004. 12. 5 에서
하느님 말씀의 힘으로 사는 공동체는 두려울 것이 없다. 거칠 것이 없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친교의 공동체를 일구며 하느님 말씀과 뜻에 따라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해나간다.
소공동체의, 소공동체에 의한, 소공동체를 위한 본당이 있다. 대구 성 정하상본당(주임 류승기 신부)은 모든 활동이 소공동체 중심으로 운영된다.
각각의 소공동체 안에 전례.청소년.사회복지 등의 분과와 위원들이 있다.
곧 소공동체 모임 일원이 되면 한 분과에 들어가 분과 위원으로 활동하도록 조직돼 있다.
현재 17개 팀이 매주 모임을 가지며 각자의 지역 안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앞으로 구성될 팀까지 더하면 30여개 팀이 본당 공동체에서 움직이게 된다.
주일학교 교사반 등의 별도 단체가 없는 것도 성 정하상본당의 특징이다. 모든 것이 소공동체로 통한다. 예를 들어 청소년 신앙교육도 소공동체 내 청소년 분과에서 모두 전담한다. 그러다 보니 교육장소도 성당이 아닌 집이다.
그리고 각 분과위원들은 해당 분과별로 별도의 모임을 갖는다. 거기서 각 위원들이 위원장도 직접 선출하고 분과별 활동들을 추진해나간다. 한마디로 모든 제반 사항들을 각 팀별, 분과별로 직접 챙기고 있다.
본당에서 열리는 사목회의에는 주임신부를 비롯해 각 팀별 대표와 분과위원장, 총회장 등이 참석한다. 여기에서는 본당의 중요한 사안이나 각 팀.분과별로 해결하기 힘든 일 등을 상의하고 해결해나간다.
이제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조금씩 자리를 잡아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어떻게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체계를 갖출 수 있었을까? 이는 성경말씀의 힘과 자발성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기 싫은 신자들을 억지로 모아서 만든 모임이 아니라 본인들이 원해서 시작했다. 본당 주임 신부는 모든 신자들의 집을 가정방문해 본인 의사를 묻고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모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모임 때마다 일일이 다 연락하는 방법은 취하지 않았다. 늘 그런 방식에 익숙해져 있던 팀원들은 처음에 의아해했지만 오히려 더 활성화됐다. 철저하게 나누고 싶고 알고 싶은 신자들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모임 자체에 힘이 생겼고, 점차 참여하지 않던 신자들도 함께 동참하게 됐다고.
최순희(글라라)씨는 “예전엔 성당에 관심이 없었는데 모임을 가지면서 우리 집과 내 마음을 다른 이들에게 활짝 열게 됐다”면서 “모든 팀원들과 하느님 말씀을 나누고 친교를 돈독히 하면서 신앙생활의 기쁨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본당 총회장 강정기(마리아)씨는 “많은 신자들이 매주 모임 날짜만 기다릴 정도로 모임의 참 맛을 알아가고 있다”면서 “팀원들 모두가 하느님 말씀을 함께 듣고 실천하며 친 가족처럼 가까워지다보니 이것이 바로 진정한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각자의 터전에서 본당 공동체와 지역사회에 봉사하며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는 성 정하상본당 신자들. 이들은 하느님 보시기 아름다운 공동체 건설을 위해 힘을 모으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말씀이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한 힘을 바탕으로 친교의 공동체, 나눔의 공동체 실천하는 공동체를 만드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가톨릭 신문 : 2007-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