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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팔각채>
광서, 귀주, 중경, 무한 여행기 1 계림 그리고 자원의 팔각채(桂林, 资源八角寨) "계림의 밤은 수류탄을 들고 돌진하여 산화하는 무명 용사다"
<광시족 자치구 자원의 지질 공원에 있는 "삶과 죽음의 계곡(生死谷: 생사곡)" 표지석>
여행의 가장 핵심은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다. 아무리 경치가 좋아도, 아무리 볼 것이 많아도, 바로 자기 집 근처에 있는 곳이라면 크게 관심을 끌 수는 없다. 설령 볼 것이 없어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을 여행지로 선택하는 것이 바로 여행 목적지를 고르는 핵심이다.
사람은 낯익은 것에 쉽게 지루함을 느끼는 법이며, 자기 주위에 있는 낯익은 것에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여인을 부인으로 둔 남자가 왜 이혼하는지, 보통 사람은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저런 여자만 곁에 있으면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술이 없어도 노래가 나올 것 같지만, 어쩐 일인지 그 사람은 어여쁜 부인을 멀리하고 누가 보아도 추녀인 여자를 쫓아다니지 않는가?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본래 낯설음에 호기심이 발동하며 가슴 설레기 때문이다.
누가 계림에 다녀왔다고 해서 그곳이 얼마나 볼 거리가 많은지 관심을 갖는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계림은 장가계나 황산과 마찬가지로 이미 낯익은 장소로 우리 마음 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팔각채는 정말 낯설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특히 바로 이 생과 사의 계곡(生死谷)에서, 사람이면 누구나 겪어야 할, 내 곁에 있지만 너무 먼 듯한 죽음을,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이 세상에서 반드시 해야 할 것은 죽음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없다. 부모를 모시지 않으면 욕 얻어 먹으면 되고, 군대가지 않으면 감옥 갔다가 오면 된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으면 거기에 알맞은 직업을 택하면 되고,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면 된다. 이 세상에 수 없이 많은 " ~해야 한다"라는 말대로 따르지 않아도 인생살이에 큰 지장은 없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지구가 태어난 이래, 이 세상에 육신을 갖고 태어난 자,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 글의 첫 머리에 내가 왜 이런 죽음을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사실 나는 팔각채의 V 계곡을 지나면서 검은 바탕에 흰 글자로 쓰인 생사곡(生死谷)을 본 순간, 내 주위를 음험하게 맴돌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떠올렸던 것이다. 여기에서 발을 한 발자국 잘못 떼어 놓으면 죽음을 맞는다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부터 46억년전 운석의 충돌로 엄청난 열과 진동이 발생하여, 바로 내가 걷는 이 자리가 죽음처럼 처절했는지, 나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한다. 단지 나는 이곳을 지나면서, 영명(英明)한 풍수(風水)만이 직감적으로 느끼는, 내 심장을 꿰뚫는 시퍼런 비수(匕首)의 섬찟함을 느꼈을 뿐이다.
<계림의 칠성공원: 계림은 거리고 공원이고 계수나무 천지다>
<계림의 가로수 계수나무 아래서 주민들이 운동을 하고 있다.>
계림(桂林)에서 桂자는 "계수나무 계"자이다. 실제로 계림은 글자 그대로 계수나무 천지였다. 거리에도 공원에도 산에도 계수나무가 널려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한국에서 계수나무를 보았는지 기억이 없다. 혹시 부잣집 정원에서 한두 그루 보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렸을 때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자랐고 실제로 달에 계수나무가 있다고 믿었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노든 달아
적어도 이 동요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계수나무로 집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용도로도 많이 쓰이는데, 사전에 따르면, 계수나무는 "가공성이 좋고 비틀림이 적은데다 옹이의 결점이 없고, 나뭇결이 고와서 용도가 광범위하다. 목재는 가구재·합판재·미장재·기구재·바둑판·악기재 등으로 쓰이며, 가지는 계지(桂枝), 껍질은 계피라 하며 건위약제와 과자·요리 및 향료의 원료로 쓰인다."
<리강>
계림에서 또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이곳에는 아름다운 리강(漓江)이라는 강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리강 자체보다는 "리강"이라는 이름이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내가 여기를 찾아갔을 때, 가까이에서 사람들이 빨래를 하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하는 사람이 보였고, 좀더 먼 곳으로 끊임없이 배들이 강을 따라 오르내리고 있었다. 내의를 입고 파카를 뒤집어 써도 추위를 느끼는 판국에, 강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는 사람들은 나와 전혀 다른 체질인지, 아니면 죽음을 무릅쓴 모험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그들의 용기만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찬사가 저절로 나오게 했다.
<리강>
<리강>
<복파산 동굴>
계림에는 몇 군데 관광 명소가 있었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그냥 걸어서 간 곳이 복파산, 독수봉(왕성 포함), 그리고 칠성 공원이었다. 오래 전에 북경과 계림을 묶어서 한 번 다녀간 적이 있었지만, 이런 장소들은 전혀 가본 적이 없는 듯 낯설기만 했다. 복파산에서는 특별히 볼 것이 있다기 보다는 봉우리 정상에서 시내를 둘러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복파산 아래 동굴에서 중국 사람들이 온갖 해괴한 자세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것이 볼거리라면 볼거리였다.
<복파산 봉우리에서 본 풍경>
<왕성에서 관광객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명광대정"인지, "정대광명"인지 모르지만 한국에서는 "광명정대"라고 한다. >
<칠성공원>
<계림: 칠성공원>
칠성공원은 공원 안에 7개의 봉우리가 있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는데, 하늘에 있는 북두칠성을 연상시킨다. 칠성공원에 중국인들이 단체관광으로 와서 사진을 찍는 모습이 자주 목격되었고, 계림 사람들이 계수나무 아래서 카드놀이를 하거나 장기를 두는 모습도 눈에 뜨였다. 한쪽에서 아이들이 금붕어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는데, 아기 우유통 같은 곳에 금붕어가 좋아하는 액체를 넣어 놓고 물속에 집어 넣으면 금붕어가 먹이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장면이 신기했다. 이것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은 흥미를 주었는지는, 다른 사람이 발로 찬 공이 아이의 머리에 맞아 분명 머리가 흔들렸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물고기를 응시하는 아이의 눈빛에서 알 수 있었다. 아이를 지켜보던 어른들도 가끔 아기 우유통을 들고 달려들었는데, 어른이나 아이나 호기심 어린 눈빛이 초롱초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것은 이런 일에 빠져있는 아이나 어른을 관찰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는 일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자원(資源: 쯔위엔)은 계림에서 북쪽으로 약 140킬로 위치에 있으며 버스로 약 3시간 걸린다. 가는 길은 평범한 시골길이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다면 길 양쪽에 있는 산에 대나무가 많다는 것이다. 대나무 젖가락을 만들려는지 껍질을 벗긴 흰 대나무가 7톤 트럭에 가득가득 실려있는 것이 보이고, 길옆 야적장에도 역시 대나무가 제철소 앞의 강철처럼 첩첩이 쌓여있다. 계림과 마찬가지로 가로수는 계수나무였고, 이런 계수나무 행렬은 자원시내에 도착해서 정갈하게 댕기를 두르고 있는 가로등이 보일 때까지 계속된다.
<자원으로 가는 길 옆 산의 대나무>
<자원 시내에 도착하면 나타나는 가로등>
<팔각채 입구>
자원 시내를 반쯤 통과하다가 왼쪽으로 코너를 돌아 한참 들어가면 드디어 팔각채에 도착하는데 정식명칭은 "광서자원국가지질공원"이다. 왼쪽으로 가면 공원 협곡을 지나게 되고, 오른쪽으로 가면 도로 건설 노동자를 만나게 된다. 산 정상 부근에 새로운 길을 건설하는데, 바로 여기서 말에 자갈과 시멘트를 싣고 간다. 여기서부터 길은 잘 나 있고, 동네 아주머니 한 사람의 안내를 받아 등산이 시작된다.
숨을 헉헉 거리며 조그만 봉우리에 올라 뒤를 돌아보면, 바로 내가 걸어온 길이 고래등처럼 펼쳐져 있고, 저 멀리 둥근 봉우리가 시야에 가득 찬다. 봉우리의 몸둥아리는 발가벗었고, 머리는 대머리인데 머리 꼭대기만 중국 아이처럼 머리털로 덮혀있다. 여기저기서 "와, 야, 저런, 미치겠네, 과연 ----"등의 말이 울려퍼진다. 이 산의 모습이 팔각형의 뿔처럼 생겼다해서 팔각채라고 한다고 하는데, 팔각은 각이 8개란 뜻이고 채라는 것은 난간 또는 돌 등으로 둘러싸는 것 또는 그 안에 있는 마을을 말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하나의 돌산이 8각형으로 되어 있고, 산 주위에 마치 난간을 휘둘러 놓은 것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말하기 좋아 8각형이지 실제로는 둥근 절구통을 연상하면된다. 나는 이곳을 오르면서 한국의 전북 진안에 있는 마이산이 떠 올랐다. 팔각채라고 하는 곳은, 한 마디로 마이산의 두 개의 봉우리와 같거나 또는 그보다 큰 봉우리가 눈에 보이는 곳까지 쫙 깔려있다고 보면된다.
어느 정도 올라가면 옆으로 감아돌아가는 길이 나온다. 소리를 지르면 마치 동굴처럼 내가 한 말이 울려서 되돌아 온다. 중간중간에 있는, 마귀가 살것같은 수 많은 동굴이, "너 이놈 지옥에 온 것을 환영한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라고 말하는 듯 하고, 발 밑을 바라보면 천길만길 낭떨어지가 입을 벌리고 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듯 하다.
듬성듬성 놓여있는 나무 다리는 "세명의 무게만 담당한다"라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세 명의 무게만 담당한다"라는 말이 분명 한국말은 한국말이로되 뭔가가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니, 동사 "담당한다"라는 말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담당한다"라는 말은, 문장의 주어가 "사람"이나 어떤 "부서"가 주어가 되어야 하는데, 무생물인 "다리"가 주어이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국어를 담당한다. 우리 부서는 물품 구매를 담당한다"는 말이 되어도 "이 차량은 운반을 담당한다, 이 우산은 비를 담당한다"는 말은 이해는 할 수 있지만 뭔가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 이런 것이 외국어를 배우는데 있어서 어려움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산을 휘돌아 사찰을 지나고 바위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햇빛을 바라보며 혹시나 당장이라도 바위가 무너지지 않을지 겁부터 나기 시작한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앞사람의 발만을 응시하며 걷다보면 어느새 등산로의 종착점인 정상에 도착하게 된다.
정상에는 천궁사라는 절이 있는데, 조용한 사찰에 한 스님이 한가로이 앉아서 멀리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계신다. 속세에 두고온 여인을 생각하는지, 아니면 백팔번뇌를 구름 속에 흘러 떠 내려 버리려는지 알 수 없지만,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문득문득 주위에 엄습해 오는 허무함만은 어쩔 수 없는 듯 하다.
<산 봉우리 정상에 있는 천궁사(天宫寺)>
천궁사를 지나 몇 걸음만 걸으면, 그 아래 펼쳐진 모습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장관을 이룬다. 신들린 석공이 도끼로 내려치고, 망치로 멋을 내고, 끌로 완성한 듯한 모습이다. 어찌보면 못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쇠뿔 같기도 하고 또 어찌보면 꼬마가 쓴 고깔 모자 같기도 하다. 한 무리의 돌산이 앞 줄에 서서 뒷줄의 졸병들을 호령하면 뒷줄에서 명령을 받아 다음 줄로 전달을 하고, 이 전달은 물결을 이루고 파도를 이루어 이리 훨 저리 훨, 굽이굽이 돌아 멀리멀리 소용돌이쳐 눈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끝없이 펼쳐진다. 바위는 바위로되 바위가 아니요, 산은 산이로되 산이 아니다. 산도 아닌 것이 바위도 아닌 것이 이리 꿈틀 저리 꿈틀, 주위를 맴돌다가 급기야 회오리 바람쳐 하늘을 가득 채우고 소리지르며 멀리 멀리 사라진다.
<계림의 한 식당에서>
계림의 밤은 이미 중국 산골의 초라한 밤이 아니다. 환락가로 변해 버린 계림의 밤은 거리에 몰려들어 북적거리는 젊은이와 그들을 맞아들이는 접객 업소의 음악소리로 시끌벅적하다. 신천지다! 이 거리에 휘청거리는 관광객이 몰려들면, 저 거리에 또 한패의 관광객이 바람처럼 거리를 빠져나간다. 어떤 곳에서는 알 수 없는 경연대회가 펼쳐지고, 또 어떤 곳에서는 술취한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또 다른 곳에서는 손님이 없는 거리에서 성냥팔이 소녀처럼 허공에 대고 힘없는 노래를 부르는 가련한 아가씨의 외침만이 존재한다.
<계림의 한 강당에서>
<계림의 밤거리>
<계림의 밤거리>
밤의 피날레는 역시 건물 전체를 쓸고 내려오는 빌딩 폭포다. 날이 저물고 사람들이 먹을대로 먹으면 어슬렁거리며 계림 광장에 모여든다. 술에 취한 사람은 취한 대로, 사랑에 눈멀어 손을 잡거나 어깨를 맞대지 않으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는 젊은이들이 광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드디어 카우트 다운에 들어가고 10, 9, 8 --- 3, 2, 1 초를 연호하면 천지를 뒤흔드는 음악과 함께 건물 꼭대기에서 아래로 물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함성과 찬탄과 외마디 소리가 음악과 합치고 쏟아지는 물과 얼버무려져 모든 이의 가슴을 타고 흘러내린다. 흔러내린 물은 다시 거리를 휩쓸며 쓰나미로 변하고 마침내 마법사에 쫒기는 낙엽처럼 하늘로 올라가 한줄기 바람되어 사라진다. 아, 장대하고, 장쾌하고, 장엄하다. 계림에서의 마지막 밤은 수류탄을 들고 산화(散花)하는 무명용사처럼 저렇게 처절하고 화려하게 검은 하늘로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건물 폭포>
(2012년 12월 21일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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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계림...또 가고 싶어집니다....
케이씨님이랑 가고 따로 또가고 했었는데....
몇날밤을 저거리를 헤매고 다녔던가~~~
리...위사진 앞집 자그만바의 가수 리가 생각나네요....
글세 저는 계림은 다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리장을 다시 한 번 가고 싶습니다.
높고, 비탈진 곳에 크게 겁을 먹는 저로써는 중국의 산은 천혜의 장관이 아니라, 정복해내야하는 어려움의 대상일 뿐입니다. 피할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겠지요. 생사곡(生死谷)이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로 실감이 나네요.ㅋ 사진으로나마 좋은 설명과 풍경 잘봤습니다. 계림의 밤거리 역시 또다른 낯선 재미를 선사해주겠지요. 다음에 가게 되거든 알바트로스님의 글을 상기해보겠습니다.^^
글은 글일 뿐이므로 항상 가벼운 마음으로 보세요.
감사합니다.
3인의 무게만 담당...담당이 아닌 감당이 적절할거 같으네요...
중국 관광지의 밤거리는 제법 운치가 있군요...
아마 한국에서 이런 표지판을 써 놓는다면,
"세 사람 이상 한꺼번에 건너지 마세요."라고 쓰여 있겠죠.
정말 가 보고 싶은곳이네요...고맙습니다.
정말 가 보세요. 고맙습니다.
저는 토란을 생각했는데 역시 각기 연상되는것이 다른가 보내요... 역시 몇번을 봐도 멋진.. 워터풀호텔..... 그리고 맥주취한 구이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