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려고 아침 식사 후에 토마토를 한 개씩 먹는다. 어느 날 식사를 한 후에 내 반찬 접시 위에 토마토를 그대로 둔 채로 그릇을 챙기려다가 아내가 “왜 토마토를 안 먹었느냐?”고 물어서 토마토가 아직 존재 하고 있는 것을 지각했다.
이처럼 눈에 보인다고 다 보는 것이 아닌 것이다. 시각을 통하여 들어온 정보가 감각으로 인지 되기 위해서는 지각 기능을 거쳐야 한다. 즉 “토마토가 내 앞에 있구나”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지각현상을 단순하게 표현해 본 것이다.
아파트 공터에 쓰레기를 모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은 어린이집 원생들 대상으로 야외 공연을 하는 이동식 무대이다. 관리사무소에서 신청을 해서 문화예슬위원회가 후원하는 남녀 성인 2명과 여자어린이 2명이 포함된 4명이 무대를 설치하고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성인들은 프로답게 연기를 하는데 7, 8 살 정도의 어린이 2명이 아무런 표정 없이 탬버린과 북을 치는 모습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곡마단에 팔려간 아이들의 이미지였다. 더욱이 손자들을 데리고 왔던 어떤 영감이 공연이 끝나고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아이들 손에 만원짜리 한 장식 주었는데 잠시 후 남자 어른이 와서 아이들 손에 있는 돈을 가져갔다. 이쯤 되면 거의 틀림 없는 동화 속의 돈 주고 산 아이들을 착취하는 곡마단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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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1세기에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고 더욱이 돈 받고 하는 예술 활동에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조금 더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보니 그들은 한 가족이었다. 현상학적으로 판단중지를 하고 보지 않았더라면 크게 오해를 할 뻔 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현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은 항상 어려운 일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벌려 놓은 현상조차도 잘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이 감정이다. 감정적 판단은 냉정하게 현상을 분석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감정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감각이다. 날씨, 빛, 냄새, 소리 이 모든 것들이 기분과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디지털로 느낄 수 있는 새로운 감각도 있다. 즉 온라인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잠시 잠깐이라도 모니터를 떠나서 살 수 없는 현대에는 온라인에서 느끼는 감정이 차지하는 비중이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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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변함없이 자기 자신 뿐이다. 그러므로 혼란스러울 때는 잠시 판단중지의 자세로 물러서는 것이 필요하다. 판단중지를 뜻하는 `에포케(epoche)'는 고대 그리스어로 `정지, 중지, 보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현상학에서는 어떤 현상이나 사물에 대해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고 판단을 보류하거나 중지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도 있다. 즉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현상학에서는 선험(先驗)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판단중지 상태에서 아는 것이 선험인 것이다.
몇 해 동안 온라인 모임을 하면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겉으로는 항상 한 없이 온유하고 겸손해 보이던 사람이 조금 기분이 상하는 일이 생기자 날카로운 판단의 잣대로 비난을 퍼붓는 것을 보았다. 말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지만 생각과 행동이 일치 하지 않는 것은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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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니고 보지 못하는 것이 많다. ‘본 것’도 아니고 ‘생각’ 혹은 ‘단순한 주관적 느낌’을 가지고 우기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 그런 인간들이 자주 타인의 인격을 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