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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에 사진 5장을 첨부한 글을 별도로 첨부했습니다.
멕시코 여행기
지난 11월, 미국 캔사스주에 사는 딸네 부부와 함께 우리 내외는 멕시코의 유카탄반도를 여행했다. 9박10일의 여정에 마야 유적 답사와 킨타나오로에 맞닿아 있는 카리브해 해변을 즐기려다 보니 멕시코시티가 빠졌다.
멕시코는 면적이 1,964천 Km2로 한반도의 거의 9배나 되고, 인구는 1억2천만으로 한반도의 2배가 넘는 큰 나라다. 1인당 GDP는 11,200불 수준이고 우리와 같이 OECD 회원국이다. 인구 구성은 약 65%가 유럽계와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조이고 원주민 인디언이 20%, 백인이 12% 그리고 흑인과 동양계는 2% 정도라 한다. 이들의 약 90% 가까이는 천주교를 믿고,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쓰며, 원주민은 약 50여 민족으로 각각의 토착 언어를 함께 사용한다.
여행 일정과 소요 경비
여행은 11월8일 캔사스시티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10월17일에 돌아왔으니 9박10일이다. 계획은 안내서를 참고하여 직접 짜고 교통편과 숙박을 미리 예약 했다.
교통비 총합 ; US$ 2.548
- 항공권(저가항공), 캔사스시티 <-> 칸쿤 ; $487*4 person= $1,948
- Car rent(보험료 포함) ; US$ 600
숙박비 총합 ; US$ 1,360
- Valladolid; $ 65*2Room*2Night=$260
- Merida; $50*2R*3N=$300
- Tulum; $100*2R*4N=$800(아침 식사 포함)
이상 고정비 외에, 3끼 식대와 고속도로 사용료, 유적지 입장료 등으로 약 US$ 2,000 정도를 썼으니, 우리 일행 4명이 모두 US$ 6,000 정도가 들어간 셈이다.
오늘날의 멕시코
멕시코는 땅이 넓고 인구가 많은 큰 나라만이 아니라 자원이 많은 나라다. 석유는 세계 7위의 산유국이고, 은·동·금·납·아연·철 등은 주요 수출품이다. 농산물은 자급자족하며, 목재와 종이 펼프 생산량도 상당하다.
전반적으로 산이 많은 나라에서 얼마 안 되는 저지대에 속하는 석회암 대륙붕 지역인 유카탄반도는 독특한 마야문명의 유적과 카리브해역의 킨타나오로 해변의 환상적인 풍치는 세계의 관광객을 불러들인다.
마야문명은 치아파스나 유카탄반도를 중심으로 서력기원 바로 전에 개화하기 시작되었다. 학식이 풍부한 학자들이 천문학 체계를 발전시켰고, 여러 가지 역법을 개발했고, 독특한 상형문자를 사용했으며, 철(鐵)기 없이, 짐을 나를 수 있는 짐승(소나 말)이나 수레바퀴가 없이도 거대한 공공건축물을 그렇게 많이 남겼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마야문명의 주역이었던 마야족은 멕시코-미국전쟁 때 일으킨 카스트전쟁의 보복으로 백인과 메스티조의 역공을 받아 유카탄 반도를 중심으로 마야족 절반 가까이가 목숨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인구 300만이 국내 가장 큰 원주민 집단으로 살고 있으며, 1994년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EZIN)이라는 게릴라부대를 조직하여 치아파스고원지대의 몇 개 주요 전략 도시를 장악하였고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원주민 농민의 고통스러운 삶과 차별을 전 세계에 알리고 있다.
멕시코는 한국보다 20여 년 일찍 1970년과 1986년 두 차례 월드컵대회를 주최하였고, 1968년에는 하계올림픽대회을 주최하였다.
1994년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시행된 이후, 미국 등 해외 직접투자가 크게 증가했으나, 경제양극화는 더욱 확대되고 또한 강력한 마약조직들이 영향력확대를 위해 무력을 사용함으로 치안이 불안한 모습도 보인다.
재미있는 자료 하나, 미국 경제에서 빌 게이츠의 비중은 1%, 멕시코 경제에서 카를로스 슬림의 비중은 7%, 한국은 범삼성그룹의 비중이15% 이상이란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독립
카톨릭 교회는 많은 땅과 풍부한 광산을 소유하여 식민지 멕시코에서 큰 권력을 쥐고 있었다. 교회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몇몇 가문이 정부를 지배했다. 일부 끄리오요(멕시코에서 태어난 스페인의 후손)들이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이들도 페닌술라르(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에게 부여된 특권을 누리지는 못했다. 미국의 혁명과 계몽운동의 이념에 자극을 받아 사회개혁을 지지하는 불만에 가득찬 끄리오요와 사제들을 중심으로 19세기 초에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독립의 기회는 뜻밖의 사건을 통해 다가왔다. 1808년 3월,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스페인을 점령하고 스페인 왕실로부터 아메리카 식민지를 양도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인 호세 보나파르트를 내세워 1813년까지 스페인을 통치했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새 군주를 인정하지 않고 투쟁을 전개하는 혼란 상황이 나타났다. 이를 틈타 먼저 독립의 기수로 등장한 이가 미겔 이달고 신부였고(1810년 9월16일), 이어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신부가 대를 이어 위용을 떨치며 입헌주의 전통을 세워가며 투쟁했으나, 자신들의 기득권에 집착한 끄리오요들의 비협조로 첫 번째 봉기는 실패한다.
1820년 대 초반 스페인에서 자유주의자들이 페르난도 7세에 대항해 자유주의 체제를 회복하고 의회를 구성하면서 반란을 일으켰다. 의회는 급진 노선의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했고 교회를 개혁하는 등 체제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멕시코의 보수주의자들은 더 이상 본국을 신임할 수 없게 되었다. 식민지 경영의 책임을 맡은 귀족이나 고위 성직자들은 본국에서 불어 닥치는 개혁에 대항해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반란자들의 개혁에 참가하게 되었다. 스페인 군에서 독립군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아구스띤 데 이뚜루비데는 부유한 끄리오요들 사이에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하기로 결심하고 독립군 지도자 비센떼 게레로와 공모하여 이구알라 계획을 선포하고, 1821년 8월24일 꼬르도바협정을 체결에서 멕시코의 독립과 주권을 인정받는다. 아스떼까 제국의 황제가 항복한 것이 1521년 8월13일이니 꼭 300년 만의 일이다. 결국 아이러니하게 멕시코의 독립은 스페인 자유주의 정권에 대항하던 보수 끄리오요 세력에 의해 완성된 셈이다.
따라서 독립은 발전과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혼란과 대립을 가져왔다. 끄리오요 사이의 권력투쟁과 보수파와 자유주의파 사이의 격돌로 민중의 삶은 피폐해져갔다. 처음부터 독립은 민중의 더 나은 삶을 위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특권층의 이익증대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미국-멕시코 전쟁과 후아레스 대통령의 개혁
독립 이후 반세기동안, 정치·경제·사회·외교 등에 걸쳐 혼돈 상태가 계속되었다. 연이은 군사 반란과 무기력한 여러 정부가 번갈아 들어서고, 또한 전국적인 반란도 일어났다. 한편 시골에서는 대지주들이 공유지를 탈취하고 농장 노동자들이 무자비하게 착취당했고, 지방의 유력자들은 반항하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탄압했다.
허약한 중앙정부는 외국의 간섭을 초래했다. 멕시코시티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 프랑스인들이 손해를 입은데 대한 배상을 요구하며 프랑스가 1838년 베라크루스항을 봉쇄했다(페이스트리 전쟁). 1846년에는 미국이 날조된 불만과 관련해 텍사스를 병합하기 위한 목적으로 멕시코에 전쟁을 선포하고 이어 태평양 연안의 영토를 탐냈다. 미국-멕시코 전쟁(1846-1848) 결과, 미국은 멕시코시티를 점령하고 현재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 캘리포니아주에 해당하는 지역을 할양받았다. 멕시코는 영토의 반을 잃고 리오브라보강(미국명 리오그란데강) 아래쪽의 땅으로 밀려났다.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는 양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모든 전투가 멕시코 영토 내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멕시코에는 인적 물적 패해가 막심하였고, 생산량이 급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자긍심과 희망에 차있던 멕시코인 들에게 심리적인 수모감과 국가적 위상 추락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미국은 외국과의 첫 전면전에서 쾌거를 올렸다. 빼앗은 땅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쉬가 터지고 태평양 해안의 항구는 태평양 시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후일 텍사스에서는 ‘검은 금‘이라는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이 전쟁 이후 미국의 역사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어 세계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이 전쟁의 승리로 협상보다는 무력이 더 효과적임을 깨달은 미국은 더욱 호전적이 되었고 중남미를 자기 안방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대미전쟁 이후 이어지는 정치적 혼돈 속에서 오아하까주의 사포떼까족 원주민 출신의 법률가 베니토 후아레스(1806~1872)가 1857년, 국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교회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개혁법을 제정했다. 새 헌법에 반대하는 (군대·카톨릭교회·대토지 소유자 중심의)보수주의자들과의 개혁 전쟁(1858~1861)에서 후아레스까 이끄는 자유주의자들이 승리하고, 이어 후아레스는 멕시코의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 후아레스는 외채를 갚을 수 없었고, 이를 구실로 프랑스가 멕시코에 개입한다. 프랑스는 멕시코를 침략해 보수주의자들과 손잡고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합스부르크가의 막시밀리안(1832~1867)을 1864년 황제로 앉혔다. 1867년 프랑스 군대가 프러시아와 싸우기 위해 철수하고, 망명 중이던 후아레스가 군대를 이끌고 멕시코시티로 되돌아온 이후, 후아레스는 게레따로 전투에서 승리하여 황제를 생포하여 처형한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이어 5년 간 국가를 통치하다가 1872년 심장마비로 죽는다.
후아레스는 멕시코 역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추앙 받는다. 비록 그의 개혁들이 다 성공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개혁의 방향과 향후 멕시코 발전을 위한 비젼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 받는다. 인권에 대한 수호와 종교와 언론의 자유, 무상교육,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 재설정과 분리 등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디아스의 영구집권과 멕시코 혁명
디아스의 통치하에서 멕시코는 정치·경제적 안정을 얻게 된다. 전면적인 철도망이 갖춰져 국내외 물자를 수송할 수 있게 되었고, 광산업 및 기타 산업이 성장하고, 외국인 투자가 활발했다.
반면에 언론의 자유와 정치적인 토론을 심각하게 억압하고, 멕시코의 경찰연합군단인 루랄레스가 전 국민의 저항을 탄압했다. 디아스가 대토지 소유자나 산업자본가 세력 등 특권층만을 위한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새롭게 등장하는 중산층이나 하위계층의 불만을 야기했고 특히 농민들의 토지는 불법으로 몰수되고 빚에 묶여 대규모 아시엔다에 종속되었다. 디아스는 유럽문화에 심취하여 화려한 공공건물을 여러 곳에 지었을 뿐 아니라, 나라의 유럽화 전략이 추진되었다. 나아가 북부의 야키(Yaqui)와 마요(Mayo)족을 학살하거나 유카탄으로 강제 이주시켜 인종개조의 비난도 받았다.
머리다의 새 도시 지역에 인류학 및 역사박물관이 있는데, 이 건물의 다른 이름은 칸톤 궁전(Palacio’ Canto’n)이다. 건물 이름의 연유는 이 엄청난 궁전은 디아즈 정권시절 유카탄 지역사령관 Francisco Canto’n 이 1909~1911에 사저로 지었는데, 이 사람은 1864~1867 사이 프랑스 식민지 시절 막시밀리안 황제 밑에서 일하다가 프랑스가 패퇴하자 디아즈 장군과 손잡고 군부독재를 이끈 주요 인물이다. 지상 2층의 화려한 건물의 설계는 프랑스풍이고 건축자재는 이태리 대리석을 비롯해 모두 유럽에서 수입해 썼다.
8번에 걸친 연임은 국민들에게 평화적 정권교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부정선거로 디아스가 다시 정권을 잡자 혁명가 프란시스코 마데로(1873~1913)는 멕시코 국민에게 11월20일을 기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고 사회개혁에 대한 약속을 담은 산루이스뽀또시 계획을 발표한다. 이에 대한 전국적인 반응이 일어나 북부지역에서 빤초 비야가 봉기했고, 중남부 지역에서는 에밀리아노 사빠따가 농민군을 이끌고 디아스 군대를 압박했다. 결국 디아스는 6개월 후 권력을 포기하고 프랑스로 망명했다.
멕시코 혁명(1910~1920)은 끝없는 배반의 연속이었으며(혁명 지도자 3명 모두가 암살돼), 대략 2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랜 싸움으로 나라는 경제적으로 황폐해지고, 정치적인 불안이 팽배했고, 선거를 통해 집권자가 바뀔 때마다 폭동과 불안이 뒤따랐다.
1920년 이후 승리한 혁명세력이 비야와 사빠따의 위대성을 축소하기 위해 무식한 약탈자와 무법자의 이미지를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그들은 농민과 민중 속에 개혁적인 혁명가요 영웅으로 기억된다. 멕시코 어디에서나 식당이나 매점 등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비야와 사빠따의 사진이 결려있다.
혁명의 제도화
혁명의 와중에 1915년 대통령에 오른 까란사는 국가를 재정비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업적이 근대 멕시코의 정치 사회적 구조를 확립한 1917년 헌법을 만들어 선포한 것이다.
혁명 이후 혼돈스러운 권력구조를 제도화할 필요성을 느낀 쁠르따르꼬 엘리아스 대통령은 1928년 제도혁명당의 전신인 민족혁명당(PNR)을 창당한다. 다시 말해 혁명의 성공 이후 각 지역의 군사적 우두머리들 간의 권력 게임이 폭력적 수단에 의해 전개되는 것을 지켜본 그는 정치적 안정을 기하기 위해 정당정치를 도입한 것이다.
1938년 마초아칸주의 군인 출신인 라사로 까르데나스(La’zaro Cardenas)는 당의 이름을 멕시코혁명당(PRM)으로 바꾸고, 진보파의 리더로 혁명과정에서 분출된 민중의 욕구를 실현하는데 앞장선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약속만 한 채 미루어왔던 토지개혁을 본격적으로 단행하고, 멕시코헌법 27조에 따라 당시 미국을 비롯한 외국자본에 의해 개발되고 있던 석유산업을 국유화하였다. 사실 이 조치는 멕시코혁명당(PRM)의 장기 집권을 가능케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PRM은 1946년 미겔 알레만 대통령이 제도혁명당(PRI)으로 개명). 또한 까르데나스는 정당개혁을 통해 장기집권을 위한 기반을 구축한다. 그는 정당 내에 노동자, 농민, 군부, 중산층을 4개의 지지기반으로 하는 조합주의 체계를 구축한다.
기억해야 할 또 한 분은 PRI 소속 대통령 에르네스또 세디요 대통령이다. 1994년 권력을 잡은 그는 페소화 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치개혁을 단행한다. 선거관리기구의 공정성, 선거자금의 형평성, 대중매체의 공정성 확보 등을 담은 정치개혁법을 1996년 가을에 모든 정당들의 합의를 바탕으로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결과로 1997년 총선은 여소야대로 나타나고, 2000년 대선에서 만년 야당인 국민행동당(PAN) 후보에게 대통령을 내어준다. 이로서 72년간의 제도혁명당(PRI) 장기 집권이 막을 내리고 역사상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진다.
치첸이트사(Chiche′n Itza′)와 마야 유적
멕시코의 오래된 도시 바야돌리드에서 첫 밤을 보내고 다음날(11월9일) 아침 우리는 마야 유적 치첸이트사를 찾았다. 입장료는 외국인 145페소(내국인 137페소). 치첸이트사는 유카탄의 마야 유적 중에서 건축적인 면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위대하다. 유적지는 약 9Km2에 걸쳐 펼쳐져 있고, 번영을 구가하던 11세기에 이곳에는 무려 35,000 이상의 인구가 살았다 한다. 그러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1250년 무렵 이곳은 버려지고 만다. 그래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폐허로 버려져 있었다 한다.
이 유적지 안에는 카스티요 피라미드(멕시코 피라미드는 무덤이 아니라 사원임), 제(祭)의 목적으로 공놀이를 하던 구기경기장, 주랑 및 전사의 사원, 제사장의 무덤 등의 유적이 복원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건물로는 깃털 달린 뱀신(神)이 부각되는 피라미드다. 한 면의 계단 수가 91개, 4면을 합하면 364단이 되고, 맨 위층의 제단을 더하면 꼭 태양력 1년 일수인 365단이 된다(요즘은 계단을 오를 수 없다).
치첸이트사는 마야어로 ‘이트사의 우물 입구’라는 뜻으로 주변에 성스러운 샘 세노테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세노테는 피라미드에서 북쪽으로 약 8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데, 인간 제물을 던져 넣던 깊은 천연우물이다. 여기에는 인간 공양의 장소가 또 있는데, 피라미드 전면에 있는 공놀이 경기장이다. 가로 36미터, 세로 150미터나 되는 대형 경기장에서 벌어진 경기는 일종의 생명을 담보로 한 종교의식 이었단다. 이 외에도 돌기둥에 전사의 부조가 새겨진 전사의 신전, 재규어가 걷는 모습의 재규어 신전, 카라콜 천문대 등은 자랑스러운 유적들이다.
* 이곳 원주민들이 인신공양을 해야만 했던 이유는 고유한 종교·정치적 의도 때문이었다. 학자들은 연구를 통해 이곳 사람들이 인류를 살리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했던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따라서 이곳 사람들은 신들에게 빚을 졌다고 여기고 지속적으로 음식은 물론 가축 그리고 최고의 양식인 생명의 근원인 인간의 심장을 바쳤단다.
우리는 이것 말고도 마야유적으로 Ek Balam, Isamal, Coba, Tulum ruins 등의 마야 유적을 돌아보았다. 느낌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각각 그 규모에 놀라고, 건축물이나 조각물 등의 아름다움에 감탄한다. 철기(쇠)가 없는 시대에 짐을 나를 수 있는 짐승(소나 말)이나 수레바퀴도 없이 거대한 공공건축물을 어떻게 그렇게 많이 남겼나 하는 의문이다. 마야문명은 잉카문명과 달리 문자가 있었는데, 스페인 정복자들은 신전이나 비문에 새겨진 상형문자들이 사교(邪敎)를 전한다는 이유로 거의 모두 뭉개버리고, 옛 문서들도 ‘악마의 책’이라고 불태워버려 많은 부분이 전승되지 못한 아쉬움이 많단다.
머리다의 한국인 이민 기념박물관
4째날 오후 우리는 한국인 이민 기념박물관(Museo Commemorativo de la Immigracio′n Coreana)을 찾았다. 무료하게 박물관을 지키던 장씨 할머니가 반갑게 맞이하여 유창한 영어로 안내한다. 비교적 넓은 1층 홀을 모두 전시실로 쓰고 있는데, 애니깽 농장 농기구 외에 대한제국 외교부 여권, 100년 전 멕시코 시민권(출생지가 Seoul Corea Japan으로 표기), 임시정부 및 독립군 후원 모금 채권, 6.25 직후 1952년 고아 돕기 후원금 모금 증서, 도산 안창호 선생의 방문 기념사진과 대한인국민회 결성 등 귀중한 자료들이 수집·정리·전시되어 있어 관람객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1905년 새로운 삶을 찾아 1,033명의 한인들이 인천 제물포항을 떠나 이역만리 낯선 멕시코로 떠났다. 하지만 이는 중개인에 의한 불법 노동이민이었다. 영국 상선 일포드호를 타고 멕시코 남부 살리나크루스항에 도착한 한인들은 30여 개의 애니깽 농장에 뿔뿔이 흩어져 4년간의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애니깽은 선인장의 일종인데 독성이 강한 가시가 많은 용설란의 일종으로 그 안에 섬유를 뽑아 굵고 강한 로프(Rope)의 원료로 썼다 한다.
이들은 1909년 5월 4년간의 노동계약을 끝내고 해방될 수 있었으나, 경제적으로 자립 능력이 없었고, 게다가 조국은 일제에 합병되어 돌아갈 수 도 없었다.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이들의 생활은 나아지질 않았고, 1921년 멕시코 한인들 중 288명이 다시 쿠바로 재 이민을 가게 된다.
이 건물은 1935년에 매입하여 한인회가 사용해오고 있다. 대부분의 이민 2~3세들은 멕시코인들 과의 혼혈이 증가하고 있고, 멕시코나 미국으로 떠나서, 현재 머리다에는 약 1,200 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산층이란다. 이들은 지금도 후손들의 정체성을 위해 한국어학교를 운영한다.
폭력성과 불평등이라는 멕시코 문화
9일 저녁, 머리다의 한 이탈리아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데, 촛불을 든 30여 명의 젊은이들이 구호를 외치며 식당 옆 산타루치아공원으로 들어선다. 궁금하여 내용을 물어보니 지배인이 와서 들려준 얘기가 황당하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게레로주 아요치나파의 교육대학 학생들은 지난 9월26일 ‘교사 임용 차별 및 국고보조금 삭감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리던 중, 경찰의 발포로 6명이 숨졌고 43명이 체포됐다. 이들의 행방이 모연했는데, 7일 연방검찰총장 발표에 의하면 ”체포된 갱단 조직원 3명이 시위학생들을 경찰에게서 넘겨받아 모두 살해하고 주검을 불태웠다“는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주검들은 쓰레기장에서 10시간 이상 불태워져, 유전자 감식이 어려울 만큼 심하게 훼손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멕시코에서 흔한 일인 듯하다. 2012년에 멕시코에서 폭력사망자는 59,000 명에 달해 Vision of Humanity라는 NGO가 평가한 국제평화지수에서 멕시코는 166개국 중 133위를 했다. 그러니 현 대통령 Pena’ Nieto는 ‘살인·강간·납치를 줄이겠다’는 약속을 후보 공약에 넣었다.
멕시코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점의 하나는 그들의 폭력성이다. 독립·대외전쟁·혁명 등의 근현대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이 폭력(암살)이다. 이에 대해 원주민 문화의 유산이냐 아니면 스페인 식민지배의 유산이냐 하는 논의가 있는데, 내가 보기에 ‘법과 경찰이 가난한 이들을 보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절이나 권위적인 군사독재 시절 지배자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사법·경찰제도가 청산되지 않은 채 지금도 기득권자 보호를 위해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통성이 없는 권력은 썩기 마련이다.
멕시코가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모순은 불평등이다. 나타나는 겉 보습에서 고급 레스또랑의 손님들은 백인이 많고, 유적지에서 값싼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원주민이다. 통계에서도 나오듯이 12%에 불과한 백인들이 부유한 엘리트층을 독점한 반면, 인구의 약 1/4을 차지하는 빈곤층은 원주민과 메스티조란다.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낸 미국 뉴잉글랜드의 식민지 개척자들과 달리(한참 후에 미국 정부는 그들을 보호구역으로 몰아넣었다), 스페인 정복자들은 원주민과 상호 협력하여, 이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광산과 농장을 일으킨다. 이주자들은 원주민 여자를 첩으로 두거나 아내로 맞아 메스티조라는 계층을 만들었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이 서자들을 인정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메스티조들은 어떠한 법적인 권리도 누리지 못했다. 인디언과 백인 양쪽에서 거부당한 채 이들은 새로운 식민지 내에서 어떠한 정체성도 갖지 못하고 설 땅조차 얻지 못했다. 원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다. 인종차별 문제는 오랜 시간에 걸친 관습이라 당연한 일인 양 둔감해진 것뿐이다.
최고의 해안선 킨타나로오
칸쿤은 널리 알려진 휴양지다. 따라서 세계 최고급 호텔이 몽땅 들어와 있고 해변이 모두 고급호텔 전용 리조트와 비치가 되어 있을뿐더러, 미국의 패스트푸드 체인점들이 즐비하다.
킨타나로오(Quintana Roo)는 칸쿤을 개발하기 시작한 직후인 1974년에 주로 지정되었다. 위대한 마야 유적지, 최고의 해안선, 열대 우림 그리고 연간 따뜻한 카리브 바닷물과 산호초 등이 어우러져 최고의 관광휴양지로 부상했다. 따라서 현지의 운동가 단체 중심으로 천연자원을 보호해야 한다는 운동이 거세다. 칸쿤에서 툴룸(Tulum)까지는 140Km 정도 거리인데, 4차선 자동차 도로가 있어 여기에서는 리비에라마야(Riviera Maya) 해안 자동차 도로라 부른다. 140Km 해안에 Puerto Moleros, Paamul, Akumal 등 해변이 유명하다.
우리는 14일부터 연이어 3일간 툴룸 비치를 찾았다. 왜 세상 사람들이 카리브해 바캉스를 최고로 치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선 규모가 엄청나다. 폭이 20~40m나 되는 모래사장이 약 1.5Km까지 펼쳐져 있는데, 깨끗한 모래가 마치 미숫가루처럼 부드럽다. 조석 간만의 차가 거의 없고, 경사도 완만하여 안전하다. 게다가 물이 따뜻하여 오랜 시간 물속에서 놀아도 춥질 않다. 평일이라 그런지 이러한 천혜의 비치에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이 3~400 명이라니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해변의 식당은 모두 4곳인데, 비치 파라솔(의자 4개, 탁자 1개, 조정 가능한 침대 1개 포함)을 빌리는데 200페소를 지불했다. 음식 행상은 거의 없다.
해변의 야자수가 (베어버렸는지?)없어 뭇 해수욕객들이 햇볕을 가릴 그늘이 없다는 게 아쉽다. 동네 아이들이 투망으로 고기를 잡는데, 덩치가 큰 펠리칸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돈다. 스노클링(Snorkeling) 보트가 성업 중인데, 요금이 1인당 US$65, 어린이 US$40이란다. 옆 파라솔 노인은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왔다는데, 15일 정도 머무를 예정이라며 만족해한다.
힌국과 멕시코 사이의 교역
한국과 멕시코 사이의 교역규모는 2007년 기준으로 85억 달러에 이르고 한국이 무려 65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양국 간의 교역이 이처럼 활발해진 것은 1994년 NAFTA 발효 이후 북미시장을 겨냥한 한국기업들의 대규모 투자가 단행된 이후다. 이후 급격히 증가한 투자와 교역으로 2007말 멕시코는 한국 수출의 9위 시장, 흑자규모 4위를 기록하고 있다.
NAFTA체결을 전후에 삼성, 대우, LG 등 대기업이 나서서 멕시코에 지사와 공장을 설립했다. 2005년 이후에는 POSCO 등의 기업들도 합류했다. 2008년 3월 기준 대 멕시코 총 투자 신고금액은 341건에 9억9천79만 달러이고, 이중 실제로 집행된 투자는 452건에 6억3천479만 달러다. 분야별로 살펴보면 제조업이 353건에 3억5천917만 달러, 도·소매업이 48건에 1억9천525만 달러, 통신업이 3건에 4천949만 달러, 건설업이 26건에 2천917만 달러 순이다. 양국 간 교역의 상당부분은 산업 내 무역 형태 즉, 멕시코에 투자한 한국 기업들이 재수출용 또는 내수판매용으로 수입하는 원부자재가 대 멕시코 수출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005~2010년 사이 대 멕시코 투자금액(FDI)을 보면, 미국이 53.9%, 스페인이 15.6%, 네덜란드가 11.1%, 캐나다가 3.9%, 일본이 0.9% 한국이 0.4%라니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한국이 멕시코로부터 수입하는 주요 품목은 미정제동, 아연광, 동스크랩, 고철 등 광물류가 1차적이며, 이 밖에 무선통신기기, 유선전송장치 등의 부품류와 소고기 등의 일부 농축산물이 수입되고 있다.
양국은 현재 자유무역협정을 진행 중이지만 진전이 더딘 편이다. 협상팀은 1차 및 2차 협상을 각각 멕시코시티와 서울에서 개최하였으나, 멕시코 산업계의 반대로 상품 양허안 교환이 이루어지지 못해, 큰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멕시코 산업계는 기존의 FTA들이 자국의 상품 수출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1987년 멕시코 정부의 무역자유화와 외국인 투자유치로 한인사회가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멕시코 내 한인들은 약 15,000 명 정도란다.
마치는 말
여행 기간 동안 내가 만난 멕시코 사람들은 대부분 친절하고 낙천적적인 듯 하다. 아울러 주어진 삶을 즐길 줄 아는 멋이 있었다. 우리가 처음 머문 바야돌리드나 다음에 머문 큰 도시 머리다에서도 이들은 거의 매일 밤 시내 중심가 공원 옆 광장에서 음악회 겸 춤판을 벌린다. 날이 어두우면 한 무리의 악단과 춤꾼들이 나타나서 처음에는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선보이다가, 흥이 오르면 어김없이 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자발적 춤판(Dance Party)이 벌어진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가족 단위 또는 이웃과 함께 마음껏 밤을 즐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길 줄 아는 그들의 문화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멕시코의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점 하나는 그들 역사가 우리와 많이 닮았다는 점이다. 식민통치, 독립투쟁, 외세를 등에 업은 정권에 의한 독립투사들의 제거, 이념갈등에 따른 동족상쟁, 장기 권위주의 군부독재 등 그래서 오래 이어지는 폭력과 불평등 그리고 부패.
그러나 21세기 멕시코는 앞에 ‘혁명의 제도화’에서 밝혔듯이 여러 면에서 더디지만 발전하고 있다. 혁명의 여파 속에서 태어난 제도혁명당(PRI)은 1929년부터 72년간 제1정당의 자리를 지키다가, 2000년 대선에서 녹색당과 연합한 국민행동당(PAN)의 Vincente Fox 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는 평화적 정권 교체의 역사를 만들었다. 다음 2006년 대선에서 같은 당 Felipe Calderon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012년 대선에서 PRI당의 Enrigve Pena Nieto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민주주의 경험을 쌓아간다.
또한 혁명의 후유증이 아주 가시기 전인 1934년 이후 군사쿠데타가 없었다는 점은 다른 중남미와 다른 점이다.
참고문헌
1. 질문으로 풀어주는 멕시코, 정경원 저, 2009년 2월, 한국외대 출판부
2. 제3세계의 역사와 문화, 조흥국 외, 2007년 7월, KNOU press
3. 내셔널 지오그래픽 테마 여행 멕시코, 제인온스토트 저, 2006년 4월10일, YBM Si-sa.
4. CADOGAN guides YUCATAN & MAYAN MEXICO, Nick Rider, 2010.
5.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한비야 저, 2007년 10월, 푸른숲
6. 종횡무진 한국경제, 김상조 지음, 2012.3.26, 오마이북
7. 미래에셋자산운용(blog.naver.com/m.invest/120137413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