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러운 남자, 부드러운 여자가 됩시다.
빠다킹신부
피해가지 않는 은총
-민경철 신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매달 봉성체 날 뵙게 되던 한 할머니가 생각납니다.
아는 것이 참 많으셨습니다. 말도 기똥차게 잘 하셨지요. 스스로 배움이 없는
사람이라고,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니 보통이
아니셨습니다. ‘신부님 신부님 우리 신부님 어서 오쇼’ 하면서 인사하자마자
신부를 앉히더니 신앙강좌를 따발총처럼 쏴대신 분이셨습니다. 이 양반이 신부가
되었으면 분명 설교가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셨을 텐데….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는지 물어봤더니 하루 종일 평화방송 라디오를 들으신다는 겁니다.
작은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하루 하루 방송 메시지가 할머니의
교회지식과 신심을 높여준 것이지요. 듣기만 한 것이 아니고 기도는 또 얼마나
열심히 하시는지 묵주알 돌리며 하루 종일 중얼중얼 하시고 사셨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오랜 세월 홀로 살아오신 분이셨는데, 예수님 뵙기만을 기다리며
여생을 준비해온 삶이 오늘 복음의 한나와 많이 닮아 있어 불현듯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경건함으로 한 생을 살아온 한나가 한 아기에게서
메시아의 영광을 볼 수 있는 은혜를 입었듯이 참되고 열심한 신앙인에게
은총의 순간은 결코 피해가지 않을 것입니다.
감사하자
-박용식 신부-
아프리카에서 룸코라는 연수를 받던 중 연수원에 있는 개에게 물려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병원에서 돌아와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처난 양미간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오른쪽 눈꺼풀에 실 같은 상처가 있었다. 개 이빨이 눈꺼풀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서 미간에 상처를 냈던 것이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했다. 0.1밀리미터만 눈 안쪽으로 지나갔더라면 영락없이 눈을 다쳤을 것이다. 나는 개에게 물린 것이 속상하고 화가 나면서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감사의 마음이 일어났다. 눈을 다쳐 실명할 수 있었는데도 양미간만 다쳤을 뿐 눈을 다치지 않은 것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전에는 건강한 두 눈에 감사하지 못했지만 그후에는 멀쩡한 눈에 감사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대개 불행해지기 전에는 감사하지 않다가 불행에서 헤쳐 나오면 감사드린다. 내가 만일 하느님이라면 건강한 사람에게 불치의 중병을 걸리게 하거나 평화로운 사람에게 고민거리를 준 다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기도를 들은 후 치유해 주고 해결해 줌으로써 감사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와 같이 하지 않으신다.
지금 내 몸이 건강하다면, 큰 문제 없이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 자체에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 불시에 병이 찾아오고 우환이 닥치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끊임없이 기도할 수있다면 그 자체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느님은 그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기에. 오늘 복음에서 한나가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수 아기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처럼 우리도 감사하며 살자.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이회진신부-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하느님께 봉헌하기 위해 성전에 데리고 갔을 때,
아기 예수의 부모는 예언자 시메온으로부터
그가 구원의 표징이자 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나 역시 아기 예수를 보고 난 뒤,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모든 이에게
아기에 대해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신앙인으로 그리고 수도자로 살아가면서 때로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
혹은 예언자 시메온이나 한나처럼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일을 식별할 수 있는
분들을 간혹 만나게 됩니다.
그럴 때면 내심 그분들의 통찰력에 대해 부러움과 신비로움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까지 복잡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복잡한 마음은 결과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모습이기도 합니다.
세상 안에서 혹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을 움직이는 하느님의 힘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능력은 어떻게 얻게 되는 것일까요?
한나는 기도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간 예언자였습니다.
그녀는 적어도 50년 이상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기도하였습니다.
한나의 이러한 항구한 기도는 그녀를 하느님과 매우 가까운 관계로 이끌었고,
이러한 친밀함은 주님에 대한 내적 지혜를 갖도록 그녀를 이끌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이런 항구한 기도가 가능할까요?
우리 자신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온갖 경쟁과 유혹들이 난무하는 이 세상 한 가운데서 항구한 기도는 가능할까요?
성 이냐시오는 “활동 안에서 관상”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었습니다.
“활동 안에서의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활동 안에 자신의 삶을 친밀하게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람들이 활동에 집중하거나 속박되는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그는 세상 안에 자기 자신이 존재하고 활동하기를 원했으나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기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세상 안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이 되는 한편,
세상과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항구한 인식을 동시에 갖는 것입니다.
“활동 안에서의 관상”은 이렇게 자신의 삶 속에서
주님께 눈을 맞추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항구한 기도”가 필요한 것이죠.
오늘 복음에서 한나 예언자는 하느님께 “항구한 기도”를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0년이 넘는 동안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인식을 갖았기에
그녀는 세상 안에서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목소리를 식별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하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습니다.
그러나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너무 많은 것에 관심이 있어서
기도할 시간조차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길 원하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길 원한다면
자신의 삶 속에서 한나 예언자처럼 “항구한 기도”는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그럴 때는 우리가 그런 능력을 지닌 이들을 부러워하거나 질시할 필요도 없겠죠.
왜냐하면 항구한 기도 안에서 이미 자신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식별하고 있을 테니까요.
오늘 주님께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달라 청합시다.
“주님, 기도하는 데 지치지 않게 하소서. 주님, 기도하는 것이 보상받을 것이 있음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을 함께 느끼는데 있음을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영원한 고향(故鄕)
-이수철신부-
시간과 죽음 앞에는 누구나 공평합니다.
그 누구나 하루 스물 네 시간을 살아야 하며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유한한 시간 안에서 영원한 자유를 누리며,
또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을까요?
서서히 한 해가 저물어가는 오늘 새벽 말씀 묵상 중,
‘아,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왔음은
하느님께 갈 날이 가까웠음을 뜻하는 구나!’ 생각과 더불어
언뜻 기쁨을 느꼈습니다.
죽음의 날이 공포의 날이 될 이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안타깝겠지만
죽음의 날이 그리운 하느님과의 상봉이 될 이들에게는
세월의 흐름이 기쁨이 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의 거부나 배척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살면서도 세상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초연히 살라는 요한 사도의 권고입니다.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지 말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마음을, 믿음을, 희망을, 사랑을 두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께 뿌리 내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하느님께 뿌리내려야 세상 안에 살면서도
비로소 시간과 죽음에서,
세상의 피조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참 자유와 참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혼인해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 네 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는 동안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과 기도로 밤낮 하느님을 섬기다가
구세주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가 여기에 해당되는 성녀입니다.
세상 안에 살면서도
이미 하느님의 영원 안에 살고 있는 한나였습니다.
마침 오늘 매일 미사 책 끝부분에 나오는
성 암브로시오의 말씀이 좋아 나눕니다.
“우리는 온갖 선이신 하느님께로 마음을 드높여 하느님 안에 있고,
그분 안에서 살며, 그분과 일치하도록 합시다.
최고의 선이신 그분께서는
인간의 모든 생각과 이해를 뛰어넘으시며
모든 지각을 초월하는 한없는 평화와 고요함을 누리고 계십니다.”
이 복된 미사시간
이런 좋으신 하느님의 영원성을
우리의 전존재로 흡수하는 시간입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