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에 바디매오의 구원과 예수님
누가복음 18 : 31 – 43
여리고에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한 맹인과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가는 ‘맹인’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했습니다.(막10:46)
‘바디매오’란 이름은 히브리어로 ‘디매오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그의 아버지 ‘디매오’는 ‘불결한 자’란 뜻입니다. ‘바디매오’는 ‘불결한 자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디매오는 아들이 맹인 된 것을 저주받은 자라고 이름도 없이 내버렸습니다.
아버지로부터 버려진 맹인이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이름도 없는 그를 보고 ‘바디매오’(디매오의 아들)라고 부른 것이 그의 이름이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는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죄인들을 상징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죄인들은 농사하고 직장에서 땀 흘리고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바디매오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리고’는 ‘죄악 세상’을 상징합니다. 여리고는 바다보다 250m나 낮아서 따뜻하며, 요단강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풍부하고 넓은 초원에 꽃들의 향기가 많은 곳으로 향기라는 뜻으로 ‘여리고’라고 합니다.
여리고는 가나안의 첫 성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을 건너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막고 성을 높이 쌓고 대적하였기 때문에 여호와로부터 저주받은 여리고 입니다.(수6:26)
여호와께서 죄악의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킨 저주와 죽음의 바다 사해를 가장 가까이서 매일 보고 사는 여리고 입니다. 여리고는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 난 죄인들이 지옥을 바라보고 사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유월절 어린 양의 제물이 되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여리고를 지나가셨습니다. 갈릴리에서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멀고도 험난한 길입니다.
해발보다 250m 낮은 여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입니다. 여리고는 갈릴리에서 내려가야 하며, 다시 해발 762m나 높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1000m 이상의 급경사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야 하는 힘들고 험난한 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두 사람을 찾아 구원하기 위해서 여리고를 지나가신 것입니다.(눅19:10)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저와 여러분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서 험악한 죄악 세상을 찾아오신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맹인은 눈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귀는 밝아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한 푼 줄 수 있는 사람인가를 판단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듣지 못한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나사렛 예수’라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습니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는 같은 한 예수지만 의미는 다릅니다.
‘나사렛 예수’는 나사렛에 사는 사람이란 말이지만, ‘다윗의 자손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야 입니다.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부른 것은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고 나사렛 예수로 알았지만, 그는 나사렛 예수로 알고 믿었습니다.
길가에 앉아서 구걸하면서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고, 나병 환자도 깨끗하게 하며,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를 토론하는 소리를 듣고 예수가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믿게 된 것입니다.
바디매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으로 깨달아 알고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2:8,9)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쳤지만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습니다.(막10:48)
예수님께서 분명히 바디매오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 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만약 바디매오가 예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사람들이 꾸짖을 때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죽이고 숨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더욱 크게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맹인의 절규의 외침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위기감 속에서 그의 간절함과 믿음의 확신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면 다시 만날 수 없는 급박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힘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회는 자주 있는 것도 아니며, 다시 오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소리 지른 것은 마치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간절한 세리의 기도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돌아가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14) 바디매오가 다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애절하게 지르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께서 머물러 서시고 그를 데려오라 말씀하셨습니다.(40)
그래서 사람들이 맹인에게 가서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고 말해주었고 바디매오는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 나아왔습니다.(막10:50)
‘겉옷’은 그가 구걸할 때 거지를 상징하는 까운이며, 밤에는 덮고 자는 이불입니다. 흙과 먼지가 묻은 누더기 겉옷이지만 구걸하는 거지에게 없어 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가 겉옷을 내어버리고 뛰어 예수께로 나아간 것은, 예수님께 가면 그의 삶이 바꾸어 진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돌아와서 구걸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믿음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우리도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삶의 방향이 바꾸어 진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우리는 겉옷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예배드리고 돌아가서 겉옷을 다시 입고 구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맹인 바디매오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모두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열심히 구걸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느 직장에 누가 더 많이 주는가를 찾습니다. 몇천만, 몇억을 받아도 만족할 줄 모르고 여전히 구걸하는 것은 거지의 까운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은 신령과 진리가 없는 가증스러운 예배입니다. 예배를 빨리 마치기를 바라고, 돌아가서 벗어던 겉옷을 입고 다시 구걸하러 가는 우리가 아닌가를 돌이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겉옷을 버리고 일어나 뛰어오는 그를 지켜보시고 그의 믿음도 다 아셨습니다. 그래서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고,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41)
지금까지 그는 사람들에게 ‘한 푼 달라’고 구걸했습니다. 자신의 눈을 뜨게 해달라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보기를 원한다’고 간구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구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한 푼 달라고 구합니다. 좋은 직장을 구합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사람들에게 구하지 않은 것을 예수님께 구했습니다. 맹인이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야로 확신하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만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상에게 구하는 것처럼 한 푼을 구합니다. 그러나 다윗의 자손 예수로 아는 사람은 한 푼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합니다.
바디매오는 사람들에게는 한 푼을 구했지만, 예수님에게는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구했습니다. 자신의 어둔 눈을 밝게 해 달라는 것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능력을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니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마6: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는 말씀은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에 따라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바디매오에게 잠잠하라고 꾸짖었던 많은 사람은 바디매오와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나사렛 예수라고 말한 사람들에게도 이와 같은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잃어버린 바디매오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믿었기 때문에 감히 자신의 어둔 눈을 뜨게 해 달라고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즉시 그에게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42)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즉시 곧 그의 어둔 눈을 뜨게 되었고 밝게 보았습니다. 그는 다시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거지가 구걸하지 않아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둔 눈이 밝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은 그에게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것입니다.
그가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고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43) 그가 맹인이었을 때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심으로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뿐 아니라 새예루살렘, 천국에 들어가서 천군과 천사와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영원히 살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저주받은 여리고를 지나가시며 부모에게 버림받고 길가에 앉아 구걸하던 바디매오를 찾아 구원하심으로 영원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죄로 인하여 버려진 바디매오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찾아오신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믿읍시다. 바디매오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모든 백성과 함께 영원히 삽시다.
첫댓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설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