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列國誌] 891
■ 3부 일통 천하 (214)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23장 멸망하는 나라들 (7)
조(趙)나라의 한단성으로 들어가 곽개(郭開)를 찾아간 왕오(王敖)는 은근히 물었다.
"재상께서는 조(趙)나라가 망할 것으로 보십니까, 아니면 흥할 것으로 보십니까?"
왕오로부터 여러 차례 뇌물을 받은 바 있는 곽개(郭開)는 별 의심없이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趙)나라의 앞날은 그다지 멀지 않았소. 지진이 일어나고 기근이 드는 것이 그 증거요."
"재상의 말씀대로 조(趙)나라가 망하면 재상께서는 계속 조나라에 머물 작정이십니까, 아니면 다른 나라로 떠날 요량이십니까?"
"망한 나라에 몸을 남겨둘 수는 없소. 나는 제(齊)나라나 초(楚)나라로 가 몸을 의탁할 생각이오."
곽개의 사람됨을 재삼 확인한 왕오(王敖)는 다시 은근한 어조로 말했다.
"제(齊)나 초(楚)나라라......?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그 두 나라도 조(趙)나라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가 재상을 위해 한 말씀 드린다면, 재상께서는 진(秦)나라에 몸을 의탁하십시오. 진나라는 장차 여섯 나라를 모두 통합할 것입니다."
"재상께서 지금의 재산과 지위를 유지하려면 진왕(秦王)의 힘을 빌리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진나라가 나를 용납할 리 없잖소?"
"그거라면 염려마십시오. 재상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그대는 위(魏)나라 사람인데 어떻게 진나라에 주선할 수 있단 말이오?"
곽개의 의아해하는 표정에 왕오(王敖)는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밝혔다.
"실은 저의 스승이 진(秦)나라에서 국위 벼슬을 하고 계시며, 저 또한 진나라 대부입니다. 저의 스승인 위요는 일찍부터 재상이 명망이 높으신 것을 알고 서로 사귀고자 원해 왔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드린 황금도 모두 제 스승이 내준 것입니다. 만일 조(趙)나라가 망하여 가실 곳이 없거든 주저하지 말고 진(秦)나라로 가십시오. 우리 스승께서 재상을 상경(上卿)에 천거할 것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재상께서는 변함없이 지금의 부귀영화를 누리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고는 짐을 풀어 황금 7천 근을 곽개 앞에 내밀었다.
곽개(郭開)는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황금도 황금이거니와 그동안 은근히 걱정해왔던 자신의 안위 문제에 대해서 더 이상 근심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왕오의 두 손을 움켜잡으며 말햇다.
"진(秦)나라 국위(國尉)께서 나를 그토록 생각해주시는 줄은 미처 몰랐소. 이런 은혜를 받고도 보답하지 않는다면 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소. 나는 이제부터 진(秦)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오."
곽개(郭開)를 완전히 진나라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왕오(王敖)는 이어 본론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한단으로 오는 도중 이상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상한 소문이라니요?"
"조나라 장수 이목(李牧)이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화평 조약을 추진 중이라는데, 그 조약 내용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오?"
"한단을 내주는 대신 이목(李牧)이 대(代) 땅에서 왕 노릇을 하기로 했다 합니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재상의 신상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둘러 알아보심이 좋을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헛소문으로 판명나더라도 이목(李牧)의 존재가 재상께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니, 이목을 조속히 한단으로 불러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곽개(郭開)는 왕오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번 기회에 진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면 훗날 자신의 입지가 더 나아질 거라는 생각에 두말 없이 승낙했다.
"그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오. 그대의 스승에게 내 활약상이나 잘 말해주시오."
"그점은 염려마십시오."
다음날, 곽개(郭開)는 지체없이 궁으로 들어가 조유무왕에게 말했다.
"상장군 이목(李牧)이 진나라 군대와 내통하고 왕위에 오르기로 밀약을 나누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속히 진위 여부를 알아보시고 조처를 취하십시오."
조유무왕(趙幽繆王)은 크게 놀랐다.
이내 심복 부하를 보내어 이목(李牧)의 동태를 살펴오게 했다.
수일 후 심복 부하가 돌아와 보고했다.
"과연 이목(李牧)은 진나라 장수 왕전(王翦)과 연일 회담을 하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곽개(郭開)가 조유무왕에게 권했다.
"어쩐지 이목이 모든 권한을 일임해 달라고 청할 때부터 수상쩍었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왕께서는 이목(李牧)을 파면하고 조총을 새로이 상장군으로 임명하여 회천산으로 내보내십시오."
그말이 아니더라도 조유무왕(趙幽繆王)은 이미 이목(李牧)에 대해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체없이 명을 내렸다.
- 이목을 소환하라!
이목(李牧)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어쩌랴.
이미 왕명이 떨어진 것을.
한단으로 가 자신의 결백을 밝히고 다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막 한단으로 떠나려는데 또 하나의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 이번 이목(李牧) 장군의 소환은 재상 곽개(郭開)의 농간이다. 이목 장군은 한단으로 가면 목이 잘릴 것이다.
비로소 그는 이번 소환에 복잡한 내막이 깔려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목(李牧)은 허탈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이러한 나라에 태어난 것이 한(恨)스러울 뿐이다."
그 날 밤, 이목(李牧)은 상장군의 인수를 장막 안에 걸어놓고 칼을 뽑아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