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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 1931년. 오쿠도이 텐가이(奧土居天外) 著)에서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충주연초경작조합 연혁>부분만 옮깁니다.
먼저 《충주관찰지, 1931년》원문과 번역문을 싣고(p83 ~ p98.), <충북발전연구원 鄭三哲 編譯, 2012년>에서 펴낸《충주관찰지》번역문(p70 ~ p81.)을 뒤에 실었습니다.
<일제시대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엽서
빨간색으로 표시된 곳이 엽연초산지(葉煙草産地)다.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1932년.
《엽연초종류별산지분포도》
大正十一年度末現在. 1922년.
大五로 썼는데 誤字다.
회녹색이 조선종(朝鮮種), 옅은 분홍색이 내지종(內地種), 노란색이 황색종(黃色種), 보라색이 토이구종(土耳口種, 터어키종) 산지(産地)를 표시했다.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1932년.
담배가 자라면, 경작자는 곁순을 따고, 해충을 잡는 등 꽤나 바쁘다.(煙草が成長すると、耕作者は腋芽を摘み、害虫をとるなど中々忙しい)
수확(收穫).
아래 동일 인물이 나오는데 잡지 사진을 찍기 위해 연출한 것이다.
봄의 묘상(모종밭) 준비에서 파종으로, 그리고 이식(아주심기)으로, 여름에는 중경(김매기), 배토(흙돋우기) 등 여러 가지 관리가 필요하여, 담배 경작자의 노고는, 면밀주도한 정성과 함께 크다. 수확기가 되면 더욱 바빠지지만 기쁨은 온몸에 넘쳐흐른다. 미국종의 재배시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파 종(씨뿌리기) : 3월 중순
이 식(아주심기) : 5월 중순중경
배토(김매기 및 흙돋우기) : 6월 상순부터 7월 상순까지 3회
수 확 : 7월 중순부터 시작(春の苗床準備から播種へ、そして移植へ、夏は中耕、培土など色々な手入があり、煙草耕作者の勞苦は、綿密周到な心遣ひと共に大きいものがある。收穫期になると、いよいよ忙しいが歡びは全身に溢れて來る。米國種の耕作季節は大體次の通りである播 種……三月中旬移 植……五月中旬中耕培土……自六月上旬 至七月上旬 三回收 獲……七月中旬から開始)
잡지에 싣기 위해 연출한 사진이다. 지게질은 남자 장정들이 했지 여성들이 하지 않았다. 지게 다릿발이 몸체에 비해 유난히 길다. 남자 장정이 쓰던 지게다.
흰고무신이 눈에 띄인다.
담배밭과 건조실의 모습이다.
수확해 온 잎담배를 새끼줄로 엮어 긴 줄을 만들어 건조실에 걸어 넣는다.(取つて來た葉煙草を藁繩で編み連を作つて乾燥室に吊り込む)
건조실의 구조와 아궁이에 불을 때는 모습.
《수납 (收納)》
수확하여 손질하고 건조한 잎담배는 매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정부에서 수납한다. 이를 위해 지방전매국 아래에 산지와 교통 상황 등을 고려하여 전 조선에 23곳의 수납관서(收納官署)를 두고, 나아가 경작자의 편의를 도모하여 각지의 주요 거점에 수납취급소 207곳을 설치하며, 수납 기간 동안 전매국 직원들이 출장하여 수납 업무에 종사한다. 경작자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배상금(수매 대금)은 매년 2천만 원(엔)에 달하여, 지방 농촌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크다.(收納 收獲した手を入れて乾燥した葉煙草は毎年十月から翌年三月に迄に政府で收納する。その爲めには地方專賣局の下に、産地や交通の状況等を考慮して、全鮮に二十三箇所等の收納官署を置き、更に耕作者の便宜を圖つて各地に於ける樞要の地に收納取扱所二百七箇所を設け、收納期間中專賣局職員が出張して收納に従事する。耕作者の懷に入る賠償金は毎年二千萬圓に上り、地方農村經濟に寄與する所が極めて大きい。)
① 持込むと: 가져오면
② 受附番號をつけられ: 접수 번호를 부여받고
③ 鑑定に趨る: 등급 감정을 받고
④ 秤分: 무게 달기
⑤ 排列 : 배열하기
⑥ 壓搾せられて捆包みとなる: 압착되어 포장 꾸러미가 된다.
⑦ それから賠償金を受取つてにこ〜顔が並ぶ: 그리고 수매 대금을 받아 싱글벙글하는 얼굴들이 늘어선다.
《조선の전매, 1941년》에서 옮겼다.
출처 : 국립중앙도서관
<원문>
p83
京城專賣支局忠州出張所
第一章 沿 革
明治四十四年六月黃色煙草の耕作豫定地として他の各地と共に忠州も選定せられ煙草耕作に對する諸種の調査行はれたる結果當地は其最も適地たることを認められたり。 明治四十五年二月二十五日元忠州の財務署廳舍を借受け度支部司稅局出張所となし四月一日より事務を開始せり。 忠州面龍山里四二八の高地に事務所を新築し大正元年九月十六日新廳舍に移轉し耕作に
p84
する事務を管掌することゝなり、黃色煙草の耕作事業も漸く其緒に就きたり。 關同年六月より作業上必要なる生葉乾燥室及び再乾燥室、作業室、農具肥料舍、農夫舍等の建築に著手し十月落成玆に此事業に對する諸種の準備全く完成せり。 大正五年四月度支部に專賣課新設せられ司稅局出張所を專賣課出張所と改稱するに至れり。 更に大正十年四月朝鮮煙草專賣令を公布され同年七月より同令實施さるゝに當り專賣課出張所を京城專賣支局忠州出張所と改稱し收納取締事務を管掌する事となれり大正十一年四月管轄區域の變更に伴ひ當所に於て販賣事務をも兼ねて取扱ふことゝなり當時淸州出張所の販賣管轄區域たりし忠州、堤川、丹陽の三郡を移管せられ爾來當所管轄區域として忠州郡。槐山郡。(靑川面、文光面、淸安面、曾坪面を除く)陰城郡及び堤川郡白雲面。淸風面。水下面。水山面。寒水面。德山面を包括せり。 然るに大正十四年四月專賣官署の管轄區域統一に依り從來當所の管轄區域たりし堤川郡の販賣事務は寧越出張所に移管さるゝに至れり。其後昭和二年十二月各地に散在せる煙草
p85
元賣捌組合を全部併合し朝鮮煙草元賣捌株式會社を創設せらるゝに際し當所の販賣事務は全然廢止せられ收納取締のみを取扱ふ事となれり其際再度管轄區域の變更ありて槐山郡道安。沙梨の二箇面及び陰城郡の三成。大所。孟洞の三箇面は淸州出張所に移管されたる結果當所の管轄區域は忠州郡の全部十三箇面槐山郡の内槐山面、七星面、佛頂面、沼壽面、甘勿面、延豐面、上芼面、長延の八箇面陰城郡の内陰城面、遠南面、金旺面、甘谷面、蘇伊面、笙極面の六箇面及び堤川郡の内白雲面、淸風面、水下面、水山面、寒水面、德山面の六箇面計三十三箇面を所屬するに至り尙昭和四年十月忠淸北道令に依る面區域變更に伴ひ自然面の分合異動を來し堤川郡水下面は淸風面及び寒水面に分轄併合し且つ寧越出張所管轄の堤川郡錦城面の上川里、下川里、桃花里、綾江里は水山面に所屬し水下面の後山里外八箇里を淸風面に同面の鳴梧里外五箇里を寒水面へ分合したる爲め一箇面減し現在に至りては忠州郡の全部槐山郡の内槐山、七星、佛頂、沼壽、甘勿、延豐、上芼長延の八箇面、陰城郡の内陰城、遠南、金旺、甘谷、蘇伊、笙極の六箇面、堤川郡の内淸風、寒水、白雲、水山、德山の五箇面計三十二箇面包容管轄するの狀況なりとす。
p86
第二章 黃色煙草耕作の沿革
黃色葉煙草の栽培は明治三十九年韓國政府財政顧問部にて調査の結果朝鮮の風土は黃色煙草主産地たる北米「ウアヂニャ」「北カロライナ」等各洲に酷似し此の種葉煙草の栽培に適するを認め京城大和町(當時樂善坊)に苗床を設け苗を育成し耕作者に給與し移植を試みたるを嚆矢とす。次に四十年代平安南道成川郡岐倉に出張所を設けて「エルローオロノコ」種を試作せしめ尙附近耕作者に種子を配布して耕作を行はしめたるに鮮人耕作者は耕作方法の不熟練に依り遂に成績の見るべきものあらざりしも直營試作は好結果を示せるを以て更に研究を進めむとなせるうち四十一年夜半暴徒の襲擊に遇ひ事務所は燒失せられ所員亦非命の死を遂くる者あり、事業中絶の己むなきに至れり四十二年慶尙北道大邱府に煙草試作場を設け各種煙草と共に黃色煙草の試作をも經營し四十三年更に同試作場を忠淸南道大田に增設し始めて成績の確實なるを認め四十四年六月遂に黃色煙草產地形威の議を定め其豫定地を京畿道廣州、楊州、黃海道海州、載寧、江原道金化、金城、鐵原、平康及び忠淸北道忠州とし之が選定に著手し卽ち耕作面積農家戶數地質土地勢及び位置、氣象、對抗作物、
p87
勞銀、肥料、燃料等の供給に付精密に調査したる結果忠州は北米「ウアヂニャ」洲の煙草產地と緯度を同ふし氣象は從來農作物に大なる害を及ぼすべき變動現したる事なく交通の便稍開け且つ二千餘町步の一大平野を有し地形は排水の良好なる狀態在り且つ本種煙草の耕作に最も忌むべき鐵分の含有を認めざる等黃色煙草產地を形成するに適當なるを認むるや同郡の地を選定し明治四十五年當時の度支部司稅局出張所を開設して專ら之が耕作準備著手し爾來綿密なる土壤分析を行ひ種子は米國原產地の「エルローオロノコ」「アライトレルロー」「ヘスター」「コンクエルロー」「ケンタツキエルロー」外六種を選び先づ民間耕作上の模範を示し次年度に耕作すべき種子の採取及び試驗耕作を目的とする直營耕作を行ひつゝ民間には耕作用物資の無償給與及び謝金を給し囑託耕作を行ふ等幾多の苦心と努力を拂ひし結果成績漸く擧りて逐年產地を擴張し今日の大を成すに至れり。
第三章 黃色煙草耕作の消長
叙(敍)記の如く黃色煙草の事業漸く其緒に就き耕作の勸誘耕作地の選定等漸次其步を進め民
p88
間耕作者には謝金を給與して囑託耕作を行ひ漸次生葉の買上げをも行ふに至り他作物收益に比し有利なる事を自覺するもの増加し囑託耕作より漸次民間耕作に轉移するを得爰に煙草耕作の基礎略確立したるは大正二年三月にして煙草耕作組合を設立せしめ耕作者に對し耕作資金の融通、肥料の無償配付耕作稅金の補助等種々の便宜興へ又地方生産葉煙草の販路に付ては内外の需要狀況に照し何等憂ふべきなしと雖も生産者をして杞憂なからしむる爲特に東亞煙草會社へ全部購買の契約を結び斯業の安全を期して極力産地の發展を計りたるも偶々作柄良好と相俟て漸次進況を示し耕作反別増加して煙草耕作に對する一般農家の意嚮良好となり爾來更に耕作指導員を産地に配置駐在せしめ苗床本圃收穫乾燥調理等の指導に努めたるを煙草耕作に對する理解を得るに至りたるに依り年々成績良好に向ひ漸次耕作者の利益を増進し爲に農民の意嚮一變し來り耕作反別益々増加の趨勢を示し耕作希望反別は年々政府豫定反別の制限を超過するの傾向となり今や忠州郡を中心とし陰城、槐山、堤川の四郡三十一箇面、二百六十一箇里洞に散在し極めて健全なる積極的大産地を形成するに至れり其事蹟の經過も揭記すれば左の如し。
p89
第四章 耕作事蹟表 (自大正元年 至昭和四年)
p90
第五章 葉煙草貯藏狀況
本年度貯藏葉煙草は前年度繰越八〇五、一三二〆一〇〇匁、收納及び再乾燥其他に依る受入れ一四一三、三七三〆四〇〇匁、計二二一八、五〇五〆五〇〇匁にして其内排出は製造作業關係に依り需用の都度京城、大邱、全州、平壤等に回送せる量目四一三、九五四〆四〇〇匁内地專賣局及び三井物産株式會社へ賣却の爲輸出量目一六七、五四二〆四〇〇匁再乾燥の爲及標本其他に依る排出五六一、六二二〆五九〇匁計一一四三、一一九〆三九〇
p91
匁を示し年度末貯藏葉煙草現在一〇七五、三八六〆一一〇匁となれり。 而して四年度中貯藏最高實績一、三二五、六七八〆四〇〇匁にして昭和四年十一月中竣工せる煙草耕作組合倉庫三棟八〇八坪の借上げに依り倉庫運用上遺憾なきを得全物の貯藏を了したる次第なるが之が保存上に關する狀況は別途敍述の通りとす。
p92
《京城專賣支局忠州出張所職員》
所長 木佐貫浩吉
雜賀茂樹 / 中村好武 / 巖村憲 / 市木良 / 金鎬實 / 幡野三郎 / 川本義雄 / 金東輝
川谷添豊 / 澁谷時之助 / 金子豊 / 岡田三郎 / 樋口重助 / 廣島信介 / 田島廣喜 / 劉鎭浩
金貫郁 / 川畑隆 / 佐々木嚴 / 裵魯根 / 姜小允 / 崔相雄
p93
忠州煙草耕作組合沿革
忠州地方に於ける黃色煙草耕作の起源は明治四十五年二月朝鮮總督府技師岡田虎輔氏及び同府技手星子鐵男氏實地調査の結果當地方の黃色煙草耕作に適することを認められ同年四月一日司稅局忠州出張所の開設を見るに至り耕作準備に着手せしに始まれり。 由來忠州地方は朝鮮在來種煙草の産地に非らざりしを以つて當時一般農家は政府の施設を歡迎せざる風ありて若し煙草を栽培せむか諸種の病害發生し收穫皆無に陥るべしと速斷して容易に耕作の獎勵に應ずる模様なかりしも忠州郡守徐晦輔氏の熱心なる盡力に依り十四年度耕作は漸く貳百五拾名を得たり而して同年耕作面積は出張所直營試作と合し僅に拾四町七反九步に過ざりしも耕作成績良好にして識者間に於て黃色煙草の他作物に比し收益遙かに多く地方の福利増進を期するに唯一の適業たる事を認めらるゝに至れり、玆に於て岡田司稅局忠州出張所長及び徐郡守幹施の下に黃色煙草耕作組合設立の企圖成川地方
p94
有志と謀りたる結果大正二年一月三十一日を以て組合の開設を見るに至れり爾來本組合は官憲の保護監督の下に黃色種の改良發達圖り組合員に對し耕作資金の融通肥料の無償配付又は耕作稅の補助等諸般の便宜を興へて極力産地發展を謀りたりと雖も耕作者は是等恩典に對し却つて一種疑惑の念を懷き敢て耕作を爲さむとする意嚮を喚起するに至らず是が爲大正二三年間は耕作獎勵上當事者の苦膽九廻想像に餘り在り然るに煙草の作柄は逐年良好となり耕作者の收得金増加するに伴ひ一般農家の意嚮一變し大正四年には耕作希望者違かに激増し總督府の豫定に比し二倍を超過するの盛況を見たり然りと雖も本種の耕作乾燥には特殊の技術を要するを以て産地の擴張は勢ひ技術指導者の増員を要し總督府に於ては事業着手と同時に直營試作をなして技術者の養成に努めたりしも人員に限定ありて結局四年度は指導者の許す限リ擴張する事とし二百三十三町步卽ち前年の二倍の面積となれり。 當年も幸ひ作柄頗る良好にして總督府の豫定數量七萬貫に對し拾壹萬壹千餘貫の收量なりしかば需要の關係を考慮し五年度には僅に五十七町步の擴張に止めたるを以て希望者の大部分は耕作し得ざりき然るに當年を作柄不良にして豫定數量に達せず之に反し鮮內及び
p95
海外よりの需要遽に増加し供給不足を告ぐるに至りしを以て翌六年度には更に耕作反別大擴張の方針なりしも前年の不作は頓に耕作熱を低下せしめ漸く二百拾町餘步増加し五百町步となれり。 當年品質良好ならざりしも收量増加の爲め收得金比較的勝かりしを以つて耕作希望者相當多く本府の方針も亦擴張を計りたるが爲更に二百町步を増加し七百町步の産地となせり。 當年各地共水害甚だしく收量平年に比し二割五分の減收となり品質は更に前年より低下し耕作の危機に遭遇せるも時恰も諸物價暴騰に伴ひ葉煙草の價格も引上となりたる結果耕作者の收得金増加し煙草耕作の熱度翕然として高まり大正八年度に於ては前年度の二倍を超ゆる盛況なりしも需要關係品質改善乾燥燃料等の諸點を考慮するの必要に迫り一千町步の耕作に歩めたり。 爾後耕作の改善に努力し産地の發展を謀りて大正拾年度に千二百町步更に大正拾四年度に於て一千五百町步の一大産地たるの記録を得たり。
p96
大正二年當組合の創設以來今日迄實に十有八年此の間或は地方農家の錯覺により事業の進展を阻止し或は天候の災害に遭遇して豫定の實績を得ざる等幾多迂餘曲折の苦難對し政府の適切なる指針と當事者の熱誠は常に耕作の改善に邁進し大正十年專賣制度創定せらるゝと共に面目を一新し組合業務の内容を整備し業蹟特に見るべきもの多く現に忠州郡一圓陰城郡六ヶ面槐山郡八ヶ面堤川郡三ヶ面卽ち四郡三十ヶ面を組合區域とし耕作面積千四百町步組合員二千三百二十名を擁し組合財政の鞏固なる事全鮮唯一なり稱せらるゝに至り。忠州を中心とする地方の特用作物として生産より受くる經濟は農家を主として一般に大なる影響を齎し忠州を知らむとせば煙草耕作の實狀を見逃す譯に行かぬのである。
《忠州煙草耕作組合》(忠州面龍山里 電話二七番)
組合長 從六位勳五等 鄭 熙 鳳
理事 正六位勳六等 靑 山 豊 次
書記 益 田 龜
同 瀧 口 健 一
技手 小 泉 清 次
同 荒 川 竹 意
p97
事務員 甲 斐 薫
同 勳八等 關傳兵衛
同 橫山繁
同 禹 永 培
同 李 漢 龍
同 尹 元 植
同 中川助藏
同 金 熙 培
同 蔡 奎 守
同 吳 顯 大
同 洪 秀 東
同 朴 勝 謙
同 劉 元 豊
同 金 洪 義
同 李 大 榮
同 金 駿 鎬
事務員 張 象 源
同 李 河 圖
同 金 四 陽
同 崔 根 潤
同 徐 相 漢
同 白 月 文
同 李 奉 孫
同 洪 天 植
同 盧 炳 鈺
同 柳 長 成
同 金 東 勳
同 張 鉉 悳
同 趙 煥 榮
同 李 銀 永
同 金 相 冕
同 張 元 金
p98
事務員 劉 錫 河
《忠州煙草耕作組合評議員》
槐山郡 槐山面 金 相 瑄
同郡 七星面 小 田 勝 吉
同郡 佛頂面 沈 元 澤
同郡 甘勿面 李 相 起
同郡 延豐面 曹 秉 俊
同郡 上芼面 安 吉 洙
陰城郡 陰城面 趙 東 煥
同郡 遠南面 成 俊 鏞
同郡 金旺面 崔 貞 根
同郡 笙極面 洪 亨 植
同郡 笙極面 金 商 皓
忠州郡 忠州面 平 野 乙 五 郎
同郡 乷味面 沈 成 澤
忠州郡 利柳面 徐 丙 兩
同郡 周德面 洪 宅 憙
同郡 薪尼面 李 範 春
同郡 老隱面 申 昌 均
同郡 仰城面 李 晚 榮
同郡 可金面 金 商 鶴
同郡 東良面 李 琦 夏
同郡 山尺面 崔 周 煥
同郡 嚴政面 尹 泳
堤川郡 寒水面 金 榮 植
同郡 白雲面 南 鳳 熙
同郡 白雲面 韓 世 東
<번역문>
p83: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제1장 연혁
명치 44년(1911년) 6월, 황색잎담배(Yellow Tobacco)의 경작 예정지로 다른 여러 지역과 함께 충주도 선정되어 담배 경작에 대한 여러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이곳이 가장 적지(適地)임을 인정받았다. 명치 45년(1912년) 2월 25일, 옛 충주의 재무서 청사를 임차하여 탁지부 사세국 출장소로 삼고 4월 1일부터 사무를 개시하였다. 충주면 용산리 428번지의 고지대에 사무소를 신축하여 대정 원년(1912년) 9월 16일 새 청사로 이전하였으며, 경작에
p84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되면서 황색잎담배의 경작 사업도 비로소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같은 해 6월부터 작업상 필요한 생엽 건조실 및 재건조실, 작업실, 농구·비료창고, 농부사(農夫舍) 등의 건축에 착수하여 10월에 낙성(落成)함으로써 이 사업에 대한 제반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
대정 5년(1916년) 4월 탁지부에 전매과가 신설됨에 따라 사세국 출장소를 <전매과 출장소>로 개칭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대정 10년(1921년) 4월 《조선연초전매령》이 공포되고 같은 해 7월부터 시행됨에 따라 전매과 출장소를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로 개칭하고 수납 및 단속 사무를 관장하게 되었다.
대정 11년(1922년) 4월 관할 구역 변경에 따라 본 출장소에서 판매 사무도 겸하여 취급하게 되었으며, 당시 청주출장소의 판매 관할 구역이었던 충주, 제천, 단양 3개 군을 이관받았다. 이로써 본 출장소의 관할 구역은 충주군, 괴산군(청천면, 문광면, 청안면, 증평면 제외), 음성군 및 제천군 백운면, 청풍면, 수하면, 수산면, 한수면, 덕산면을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대정 14년(1925년) 4월 전매관서의 관할 구역 통일에 따라 기존 본 출장소의 관할 구역이었던 제천군의 판매 사무는 《영월출장소》로 이관되었다. 그 후 소화 2년(1927년) 12월 각지에 산재해 있던 연초
p85
원매쇄조합(원매도조합)을 전부 병합하여 《조선연초원매쇄주식회사》를 창설할 당시, 본 출장소의 판매 사무는 전면 폐지되고 수납 및 단속만을 취급하게 되었다.
이때 다시 관할 구역 변경이 있어 괴산군의 도안·사리 2개 면 및 음성군의 삼성·대소·맹동 3개 면이 청주출장소로 이관되었다. 그 결과 본 출장소의 관할 구역은 충주군 전체 13개 면, 괴산군 중 괴산면·칠성면·불정면·소수면·감물면·연풍면·상모면·장연면의 8개 면, 음성군 중 음성면·원남면·금왕면·감곡면·소이면·생극면의 6개 면, 제천군 중 백운면·청풍면·수하면·수산면·한수면·덕산면의 6개 면으로 총 33개 면을 소속시키게 되었다.
나아가 소화 4년(1929년) 10월 《충청북도령에 따른 면 구역 변경》에 의해 자연스러운 면의 분할·합병이 일어났다. 제천군 수하면은 청풍면 및 한수면에 분할 합병되었고, 영월출장소 관할이던 제천군 금성면의 상천리·하천리·도화리·능강리는 수산면에 소속되었다. 수하면의 후산리 외 8개 리는 청풍면에, 동 면의 명오리 외 5개 리는 한수면에 분할 합병됨에 따라 1개 면이 줄어들었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충주군 전체, 괴산군 8개 면(괴산·칠성·불정·소수·감물·연풍·상모·장연), 음성군 6개 면(음성·원남·금왕·감곡·소이·생극), 제천군 5개 면(청풍·한수·백운·수산·덕산)으로 총 32개 면을 관할하는 상황이다.
p86
제2장 황색잎담배 경작의 연혁
황색잎담배의 재배는 명치 39년(1906년) 한국정부 재정고문부 조사 결과, 조선의 풍토가 황색담배 주산지인 북미 버지니아(Virginia), 노스캐롤라이나(North Carolina) 등 각 주와 매우 유사하여 이 종의 엽담배 재배에 적합함을 인정받은 데서 시작된다. 경성 大和町(당시 樂善坊)에 모종밭(苗床)을 만들고 모종을 육성하여 경작자에게 나누어주고 이식을 시도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이후 40년대에 평안남도 성천군 기창(崎倉)에 출장소를 두고 <옐로 오로노코(Yellow Oronoco)>종을 시작(試作)하게 하는 한편, 인근 경작자에게 종자를 배포하여 경작하도록 하였다. 조선인 경작자들은 경작 방법에 익숙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볼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나, 직영 시작(直營試作)은 좋은 결과를 나타내어 더욱 연구를 진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41년 밤에 폭도의 습격을 받아 사무소가 화재로 소실되고 소원(所員, 職員) 중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자가 발생하여 사업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명치 42년(1909년) 경상북도 대구부에 담배시작장을 설치하여 각종 담배와 함께 황색잎담배 시작(試作)를 경영하였고, 43년에는 동 시작장을 충청남도 대전에 증설하여 비로소 성과가 확실함을 확인하였다.
명치 44년(1911년) 6월 마침내 황색잎담배 산지 형성(黃色煙草産地形成, 원문 煙革은 煙草의 誤字다.) 계획을 확정하고, 그 예정지로 경기도 광주·양주, 황해도 해주·재령, 강원도 금화·금성·철원·평강, 그리고 충청북도 충주를 선정하여 착수하였다. 즉 경작 면적, 농가 가구 수, 지질, 토세 및 위치, 기상, 대항 작물(對抗作物)
※여기서 대항작물(對抗作物)은 담배나 고추 같은 가지과 작물은 선충이나 담배나방, 담배가루이 등의 피해를 받기 쉬운데, 이를 방제하기 위한 작물을 말한다. 메리골드나 마늘ㆍ양파 ㆍ대파, 결명자, 땅콩, 사탕수수 등이라 한다.
어떤 설명을 보면 뿌리혹선충 같은 병해충을 방지하기 위해 심던 참깨, 콩, 옥수수 등 非奇主作物을 말한다고 설명하는데, 이는 후작작물(後作作物)이다. 담배 수확 완료시기를 감안하면 콩, 들깨, 옥수수가 맞다. 참깨는 보통 8월 중순경 베어 수확하니 아니고 고랑에 미리 들깨나 콩, 옥수수를 심는다.)
p87
노임, 비료, 연료 등의 공급에 대해 정밀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충주는 북미 버지니아주의 담배 산지와 위도가 같고, 기상은 종래 농작물에 큰 해를 미칠 만한 변동을 보인 적이 없으며, 교통이 다소 편리하고 2천 여 정보(町步, 600만평이 넘는다.)의 대평야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형상 배수가 양호한 상태이며, 특히 이 종(黃色種煙草)의 담배 경작에 가장 금기시되는 철분(Fe) 함유가 인정되지 않는 등 황색잎담배 산지를 형성하기에 적당함을 인정받아 해당 군의 땅(同郡の地)을 선정하게 되었다.
명치 45년(1912년) 당시의 탁지부 사세국 출장소를 개설하여 전적으로 경작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이후 면밀한 토양 분석을 실시하였다. 종자는 미국 원산지의 '옐로 오로노코(Yellow Oronoco)', '아카디안 옐로(Acadian Yellow)', '헤스터(Hester)', '콘쿼러(Conqueror)', '켄터키 옐로(Kentucky Yellow)' 외 6종을 선별하였다.
먼저 민간 경작상의 모범을 보이고 다음 연도에 경작할 종자의 채취 및 시험 경작을 목적으로 하는 직영 경작을 실시하는 한편, 민간에는 경작용 물자의 무상 급여 및 사금(辭金, 辭禮金, 보상금)을 지급하여 위탁 경작을 실시하는 등 많은 고심과 노력을 기울인 결과 성과가 점차 나타나 매년 산지(産地)를 확장하여 오늘날의 대업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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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황색잎담배 경작의 소장(消長, 盛衰)
서술한 바와 같이 황색잎담배 사업이 비로소 본궤도에 오르고, 경작 권유 및 경작지 선정 등을 점차 추진하였다. 민간 경작자에게는 보상금(辭金)을 지급하여 위탁 경작을 실시하고 생엽(生葉)의 매입도 점차 진행함에 따라, 다른 작물 수익에 비해 유리함을 자각하는 자가 증가하여 위탁 경작에서 점차 민간 자율 경작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담배 경작의 기초가 대략 확립된 것은 대정 2년(1913년) 3월로, 담배경작조합을 설립하여 경작자에 대한 경작 자금 융통, 비료 무상 배부, 경작 세금 보조 등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다. 또한 지방 생산 잎담배의 판로에 대해서는 내외의 수요 상황에 비추어 전혀 우려할 바가 없었으나, 생산자로 하여금 쓸데없는 근심을 없애기 위해 특히 《동아연초회사(東亞煙草會社)》와 전량 구매 계약을 체결하여 사업의 안전을 기하고 극력 산지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때마침 풍작과 맞물려 점차 진전하는 양상을 보였고, 경작 반별(反別, 탄베츠, 농지나 임야의 면적)이 증가하여 담배 경작에 대한 일반 농가의 의향이 매우 좋아졌다. 이후 경작 지도원(耕作指導員)을 산지에 배치·주재시켜 묘상(苗床), 본포(本圃), 수확(收穫), 건조(乾燥), 조리(調理) 등의 지도에 노력한 결과 담배 경작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해마다 성적이 양호해지고 경작자의 이익이 늘어남에 따라 농민들의 의향이 일변하여 경작 반별(反別,면적)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경작 희망 면적은 매년 정부 예정 제한 면적을 초과하는 경향을 나타내어, 현재 충주군을 중심으로 음성·괴산·제천 4개 군, 31개 면, 261개 리·동에 산재하여 매우 건전하고 적극적인 대산지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적(其事蹟)의 경과는 아래 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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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경작 사적표(耕作事蹟表) (대정 1년(1912년)~ 소화 4년(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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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잎담배 저장 상황
본 연도 저장 잎담배는 전년도 이월 805,132시메 100돈(匁), 수납 및 재건조 등에 의한 인수 1,413,373시메 400돈으로 총계 2,218,505시메 500돈이다.
그 중 반출은 제조 작업 관계에 따라 수요가 있을 때마다 경성, 대구, 전주, 평양 등으로 회송한 수량이 413,954시메 400돈, 일본 본토(내지) 전매국 및 미쓰이물산 주식회사로의 매각을 위한 수출 수량이 167,542시메 400돈, 재건조 및 표본 등으로 인한 반출이 561,622시메 590돈으로, 총 반출량은 1,143,119시메 390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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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연도 말 저장 잎담배 현재량은 1,075,386시메 110돈이 되었다.
한편, 4년도 중 저장 최고 실적은 1,325,678시메 400돈이었으며, 소화 4년(1929년) 11월 중 준공된 담배경작조합 창고 3동(808평)의 임차를 통해 창고 운용에 차질 없이 전 물량의 저장을 마쳤다. 저장·보존에 관한 상세 상황은 별도 서술과 같다.
잎담배 저장 수량 조사 (소화 5년 3월 31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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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직원》
소장: 키사누키 히로키치 (木佐貫浩吉)
직원: 사이가 시게키 (雜賀茂樹) / 나카무라 요시타케 (中村好武) / 이와무라 켄 (巖村憲) / 이치키 료 (市木良) / 김호탁 (金鎬卓) / 하타카마 요시사부로 (幡鎌芳三郎) / 카와모토 요시오 (川本義雄) / 김동휘 (金東輝)
/카와타니소 토요 (川添豊) / 시부야 토시노스케 (澁谷時之助) / 카네코 유타가 (金子 豊) / 오카무라 사부로 (岡村三郎) / 히구치 주스케 (樋口重助) / 히로나가 신스케 (廣長信介) / 타지마 히로키 (田島廣喜) / 유진호 (劉鎭浩)/ 김두욱 (金斗郁) / 카와바타 시게타카 (川畑重隆) / 사사키 이와오 (佐々木巖) / 배노근 (裵魯根) / 강소윤 (姜小允) / 최상웅 (崔相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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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연초경작조합 연혁
충주 지방 황색잎담배 경작의 기원은 명치 45년(1912년) 2월, 조선총독부 기사 오카다 토라스케(岡田虎輔) 씨 및 동부기수(同府技手) 호시코 테츠오(星子鐵男) 씨의 실지 조사 결과, 당 지방이 황색담배 경작에 적합함을 인정받아 동년 4월 1일 사세국 충주출장소의 개설을 보게 되면서 경작 준비에 착수한 것에서 시작된다.
본래 충주 지방은 조선 재래종 담배의 산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 농가는 정부의 시설을 환영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만일 담배를 재배하면 온갖 병충해가 발생하여 수확이 전무하게 될 것>이라 단정하고 쉽게 경작 장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 씨의 열성적인 노력 덕분에 14년도 경작은 겨우 250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동년 경작 면적은 출장소 직영 시작과 합쳐 겨우 14정 7반 9보(14町 7反 9步, 44,109평)에 불과했으나, 경작 성적이 양호하여 식자들 사이에서 황색담배가 타 작물에 비해 수익이 훨씬 많아 지방의 복리 증진을 기할 수 있는 유일한 적업(適業)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에 오카다 사세국 충주출장소장 및 서회보 군수의 주도하에 황색담배 경작조합 설립 구상이 성천 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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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有志)들과 모의된 결과, 대정 2년(1913년) 1월 31일 자로 조합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이후 본 조합은 관헌의 보호 감독 하에 황색종의 개량 발달을 도모하고, 조합원에 대하여 경작 자금 융통, 비료 무상 배부, 경작세 보조 등 제반 편의를 제공하며 극력 산지 발전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경작자들은 이러한 은전(恩典)에 대해 오히려 일종의 의혹을 품고 선뜻 경작하려는 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대정 2~3년 동안 경작을 장려하는 당사자(耕作奬勵上當事者)들의 고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苦膓(腸)九廻想像, 九回之腸. 괴로움으로 인해 창자가 아홉번이나 뒤틀리다.)
그러나 담배의 생육 상태가 해마다 좋아지고 경작자의 수입이 증가함에 따라 일반 농가의 의향이 일변하여, 다대정 4년(1915년)에는 경작 희망자가 크게 격증하여 총독부의 예정에 비해 2배를 초과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하지만 본 종의 경작·건조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하므로 산지의 확장은 기술 지도자의 증원을 요하였다. 총독부에서는 사업 착수와 동시에 직영 시작을 하여 기술자 양성에 노력했으나 인원에 한계가 있어 결국 4년도는 지도자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확장하기로 하여 233정보(69만 9천평), 즉 전년의 2배 면적이 되었다.
해당 연도에도 다행히 풍작을 이루어 총독부 예정 수량 7만 관에 대해 11만 1천 여 관의 수확을 올렸다. 이에 수요 관계를 고려하여 5년도에는 겨우 57정보의 확장에 그쳤기 때문에 희망자의 대부분은 경작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해는 풍작을 이루지 못해 예정 수량에 달하지 못하였고, 반대로 조선 내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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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로부터의 수요가 갑자기 증가하여 공급 부족을 겪게 되었다.
이 때문에 이듬해 6년도(1917년)에는 경작 반별(면적)을 크게 확장하는 방침을 세웠으나, 전년의 불작(不作)으로 인해 경작 열기가 떨어져 겨우 210여 정보 증가한 500정보가 되었다. 이 해에는 품질이 양호하지 않았으나 수확량 증가로 인해 수입이 비교적 많았으므로 경작 희망자가 상당수 생겨났다. 총독부 방침 역시 확장을 도모하여 다시 200정보를 증가시켜 700정보(210만평)의 산지로 만들었다.
해당 연도에는 각지에서 수해(水害)가 심하여 수확량이 평년에 비해 25% 감소하였고 품질은 전년보다 더욱 떨어져 경작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물가 폭등과 함께 잎담배 가격도 인상된 결과, 경작자의 수입이 증가하여 담배 경작 열기가 급격히 높아졌다.
대정 8년도(1919년)에는 전년도의 2배를 넘는 성황을 이루었으나 수요 관계, 품질 개선, 건조 연료 등 여러 점을 고려해야 할 필요성에 따라 1,000정보(300만평) 경작에 그쳤다. 이후 경작 개선에 노력하여 산지 발전을 도모함으로써 대정 10년도에 1,200정보, 나아가 대정 14년도(1925년)에는 1,500정보(450만평)라는 거대 산지의 기록을 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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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정 2년 본 조합의 창설 이래 오늘날까지 실로 18년 동안, 지방 농가의 착각으로 사업 진전이 저해되거나 천재지변을 만나 예정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과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정부의 적절한 지침과 당사자들의 열성으로 항상 경작 개선에 매진하였고, 대정 10년 전매제도가 창정(創定, 전에 없던 법규나 제도를 처음으로 정함)됨과 함께 면모를 일신하여 조합 업무 내용을 정비하고 괄목할 만한 업적을 이루었다.
현재 충주군 일원, 음성군 6개 면, 괴산군 8개 면, 제천군 3개 면 등 4개 군 30개 면을 조합 구역으로 하고, 경작 면적 1,400정보, 조합원 2,320명을 포괄하며 조합 재정의 견고함은 전 조선에서 유일하다고 일컬어지기에 이르렀다. 충주를 중심으로 한 지방의 특용작물로서 생산을 통해 얻는 경제는 농가를 주로 하여 일반에 매우 큰 영향을 가져왔으므로, <충주를 알고자 한다면 담배 경작의 실상을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충주연초경작조합 (충주면 용산리, 전화 27번)》
조합장: 정희봉 (鄭熙鳳) (종6위 훈5등)
이사: 아오야마 토요지 (靑山豊次) (정6위 훈6등)
서기: 마스다 카메(益田 龜) / 타키구치 켄이치 (瀧口健一)
기수: 고이즈미 세이지 (小泉清次/ 아라카와 타케오키 (荒川竹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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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 :
카이 카오루 (甲斐薫) / 勳八等 세키 덴베이 (關傳兵衞) / 요코야마 시게루 (橫山繁) / 우영배 (禹永培) / 이한용 (李漢龍) / 윤원식 (尹元植) / 나카가와 스케조 (中川助藏) / 김희배 (金熙培) / 채규수 (蔡奎守) / 오현대 (吳顯大) / 홍수동 (洪秀東) / 박승겸 (朴勝謙) / 유원풍 (劉元豊) / 김홍의 (金洪義) / 이대영 (李大榮) / 김준호 (金駿鎬)
사무원: 장상원 (張象源) / 이하도 (李河圖) / 김사양 (金四陽) / 최근윤 (崔根潤) / 서상한 (徐相漢) / 백월문 (白月文) / 이봉손 (李奉孫) / 홍천식 (洪天植) / 노병옥 (盧炳鈺) / 유장성 (柳長成) / 김동훈 (金東勳) / 장현덕 (張鉉悳) / 조환영 (趙煥榮) / 이은영 (李銀永) / 김상면(金相冕) / 장원금 (張元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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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원: 유석하 (劉錫河)
《충주연초경작조합 평의원》
괴산군: 괴산면 김상선 (金相瑄)/ 칠성면 오다 카츠요시 (小田勝吉)/ 불정면 심원택 (沈元澤) / 감물면 이상기 (李相起) / 연풍면 조병준 (曹秉俊) /상모면 안길수 (安吉洙)
음성군: 음성면 조동환 (趙東煥) / 원남면 성준용 (成俊鏞) / 금왕면 최정근 (崔貞根) / 생극면 홍형식 (洪亨植) / 생극면 김상호 (金商皓)
충주군: 충주면 히라노 오토고로 (平野乙五郎) / 살미면 심성택 (沈成澤) / 이류면 서병양 (徐丙兩) / 주덕면 홍택희 (洪宅憙) / 신니면 이범춘 (李範春) / 노은면 신창균 (申昌均) / 앙성면 이만영 (李晚榮) / 가금면 김상학 (金商鶴) / 동량면 이기하 (李琦夏) / 산척면 윤영 (尹泳) / 엄정면 김영식(金榮植)
제천군: 한수면 남봉희 (南鳳熙) / 백운면 한세동 (韓世東)
《충주관찰지,1931년》
출처: 충북발전연구원 鄭三哲 編譯, 2012년 발행
<번역문> p70 ~ p81.
※誤字나 誤謬는 고쳤다. 번역문엔 서기년도만 써있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일본연호를 병기(幷記)한다.
p70
16.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
1)연혁(沿革)
1911년(명치 44년) 6월에 황색연초경작(黃色煙草耕作) 예정지로 다른 지방과 함께 충주도 선정되어 연초경작에 대한 여러가지 조사가 시행된 결과, 최적지임을 인정받게 되었다.
1912년(명치 45년, 대정 원년은 1912년 7월 30일부터다.) 2월 25일에는 원래 충주재무서 청사였던 것을 빌려서 탁지부 사세국(度支部 司稅局) 출장소로 하고, 4월 1일부터 사무를 개시하였다.
충주면 용산리 428번지의 고지(高地)에 사무소를 신축하여 1912년(명치 45년)에 신청사로 이전하고 경작사무를 관장하게 되었으며, 황색연초 경작사업도 점차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동년(1912년) 6월부터 작업상 필요한 생엽건조실(生葉乾燥室) 및 재건조실(再乾燥室), 작업실, 농구비료사(農具肥料舍), 농부사(農夫舍) 등의 건축에 착수하여 10월에 낙성(落成)하면서 이 사업에 대한 각종 준비가 완성되었다.
1916년(대정5년) 4월에는 탁지부(度支部)에 전매과가 신설되어 사세국출장소(司稅局出張所)를 전매과출장소(專賣課出張所)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1921년(대정 10년) 4월에 조선연초전매령(朝鮮煙草專賣令)을 공포하여 같은 해 7월부터 동령(同令)이 실시되어 전매과출장소를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로 개칭하고 수납단속 사무를 관장하였다.
1922년(대정 11년) 4월에는 관할구역의 변경에 따라 전매지국 충주출장소에서는 판매 사무를 겸하여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충주출장소의 판매 관할구역이었던 충주, 제천, 단양 3개 군을 이관 받아 지금은 충주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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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관할구역으로 충주군, 괴산군(청천면, 문광면, 청안면, 증평면을 제외한), 음성군 및 제천군 백운면, 청풍면, 수하면, 수산면, 한수면, 덕산면을 포괄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5년(대정 14년) 4월 전매관서의 관할구역 통일에 따라 종래 출장소 관할구역이었던 제천군의 판매 사무는 《영월출장소》에 이관되었다.
그 후 1927년(대정16년) 12월 각지에 산재한 <연초원매팔조합>을 전부 합병하여 <조선연초원매팔주식회사(朝鮮煙草元賣捌 株式會社)>를 창설함에 따라 출장소의 판매 사무는 모두 폐지되고, 수납단속만 취급하게 되었다.
그때에 다시 관할구역 변경이 있었는데, 괴산군 도안, 사리 2개면 및 음성군의 삼성, 대소, 맹동 등의 3개 면이 《청주출장소》로 이관된 결과, 당소(當所)의 관할구역은 충주군의 전부인 13개면, 괴산군 내 괴산면, 칠성면, 불정면, 소수면, 감물면, 연풍면, 상모면, 장연면 등의 8개면, 음성군내 음성면, 원남면, 금왕면, 감곡면, 소이면, 생극면 등의 6개면, 제천군내 백운면, 청풍면, 수하면, 수산면, 한수면, 덕산면 등의 6개면 등 총 33개 면이 관할구역으로 소속하게 되었다.
1929년(소화 4년) 10월에는 《충청북도령(忠淸北道令)에 의거하여 면 구역이 변경》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면의 분합(分合) 이동을 가져와 제천군 수하면은 청풍면 및 한수면에 분할 합병되었다. 또한 영월출장소 관할의 제천군 금성면의 상천리, 하천리, 도화리, 능강리는 수산면에 소속시키고, 수하면의 후산리 외에 8개 리가 청풍면에, 동면(청풍면)의 명오리(鳴梧里) 외에 5개 리가 한수면에 분할 합병되어 1개 면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충주군의 전부, 괴산군 내 괴산, 칠성, 불정, 소수, 감물, 연풍, 상모, 장연 등 8개면, 음성군내 음성, 원남, 금왕, 감곡, 소이, 생극 등의 6개면, 제천군내 청풍, 한수, 백운, 수산, 덕산 등의 5개면 등 총 32개 면을 포함하여 관할하는 상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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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황색연초 경작의 연혁
황색엽연초의 재배는 1906년(明治 39년) 한국정부 재정고문부(財政顧問部)에서 조사한 결과, 조선의 풍토는 황색연초 주산지인 북미 버지니아, 북 캐롤라이나 등의 각주(各州)와 매우 비슷하여 이와 같은 종의 엽연초 재배에 알맞음을 인정하고 경성 대화정(京城 大和町 : 당시 樂善坊)에 묘상(苗床)을 설치하고 묘를 육성하여 재배자에게 급여(給與), 이식(移植)을 시험토록 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다음에 평안남도(平安南道) 성천군(成川郡) 기창(岐倉)에 출장소를 설치하고 『에루로-오로노코』(エルロ/オロノコ)종을 시험 재배하였다. 그리고 다시 부근 경작자에게 종자를 배포하여 경작을 하도록 하였으나 조선인 경작자는 경작방법의 미숙으로 그 성적이 좋지 않았으나 직영으로 시험 재배한 것은 좋은 결과를 나타냈다.
이에 따라 다시 연구를 계속하여 오던 중 1908년(명치 41년) 한밤중에 괴한의 습격으로 사무소는 소실(燒失)되고 사무소 직원이 비명의 죽음을 당하자 사업을 중단을 하게 되었다.
1909년(명치 42년)에는 경상북도 대구부(大邱府)에 연초시작장(煙草試作場)을 두어 각종 연초와 함께 황색연초의 시험재배도 경영하였다. 1910년(명치 43년)에는 새로 동 시험재배장(試驗栽培場)을 충청남도 대전(大田)에 증설하면서 처음으로 성과가 확실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1911년(명치 44년) 6월에는 황색연초산지 형성을 논의하여 결정하였는데, 그 예정지를 경기도 광주(廣州), 황해도 해주(海州) 재령(載寧), 강원도 금화(金化), 금성(金城), 철원(鐵原), 평강(平康) 및 충청북도의 충주(忠州)로 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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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에 대한 선정에 착수하여 경작지면적, 농가호수, 지질, 토성(土性), 지세 및 위치, 기상, 대항작물(對抗作物), 비료, 연료 등의 공급에 대한 정밀조사 결과, 충주는 『버지니아』주의 연초산지와 위도(緯度)가 동일하고(충주시 동량면 지동리 지등산은 북위 37°가 지나간다.), 기상은 종래 농작물에도 큰 해를 미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리고 교통이 열리게 되자 2,000여 정보(600만평) 규모로 하나의 커다란 평야를 갖춘 지형은 배수가 양호한 상태이고, 또한 본 종 연초의 경작에 금기사항인 철분(Fe) 함유를 인정하는 등 황색연초 산지형성에 적당하다는 것을 인정하여 동군(同郡)의 땅으로 선정하였다.
1912년(명치 45년)에는 당시의 탁지부 사세국 출장소(度支部 司稅局 出張所)를 개설하여 주로 경작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면밀한 토양분석을 하여 종자(種子)는 미국원산지의 『에루로-오로노코』(エルロ/オロノコ), 『아라이토 옐로우』(アライトエルロノ), 『헤스타』(ヘスタノ), 『콩구옐로우』(コンクエルロノ), 『켄다스끼 옐로』(ケンタツキエルロ) 외에 6종을 골라 우선 민간에게 경작상의 시범을 보이고, 다음연도에 경작할 종자(種子)의 취급 및 시험경작을 목적으로 직영경작(直營耕作)을 하면서 민간에게는 경작용 물자의 무상급여(無償給與) 및 사례금(謝金)을 주어 촉탁경작(囑託耕作)을 하는 등 많은 고심과 노력을 쏟은 결과 성적이 점점 더 오르고 있으며, 매년 산지를 확장하여 오늘날과 같은 큰 발전을 이룩하게 되었다.
3)황색연초 경작의 소장(消長)
앞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황색연초의 사업은 점점 그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경작에 따른 권유경작지(勸誘耕作地)의 선정 등도 점차로 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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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져오게 되었다. 민간경작자(民間耕作者)에게는 사례금(辭金)을 지급하여 촉탁경작(囑託耕作)을 하였다. 점차 생엽(生葉)의 매상도 하게 되었지만 타 작물의 수익에 비해 유리하다는 것을 자각(自覺)한 사람들이 증가하여 촉탁경작에서 점차 민간경작(民間耕作)으로 퍼져 나가면서 연초경작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1913년(대정 2년) 3월에는 연초경작조합을 설립하여 경작자에 대한 경작자금의 융통, 비료의 무상배부, 경작세금의 보조금 등 여러 가지 편의를 주었다. 또한 지방생산 엽연초(地方生産 葉煙草)의 판로에 대한 내외의 수요상황(需要狀況)에 비추어볼 때 하등 걱정할 것은 없었지만 생산자들에게 근심거리가 없도록 하기 위하여 동아연초회사(東亞煙草會社)에서 전부 구매계약(購買契約)을 체결하여 경작에 안전을 기하고, 적극적으로 산지(産地)의 발전을 도모하여 많은 경작자들이 생겨나 양호하게 되었고 작황도 점차로 나아지게 되었다.(作柄良好)
경작규모도 증가하여 연초경작(煙草耕作)에 대한 일반농가(一般農家)의 의향도 좋아지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경작지도원(耕作指導員)을 산지에 배치, 주재토록 하고, 묘상(苗床), 본포(本圃), 수확(收獲), 건조(乾燥), 조리(調理) 등의 지도에 노력하여 연초경작에 대한 이해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매년 성적이 양호하게 되고 점차로 경작자의 이익이 증진되어 농민의 의향이 한번 변하자 일변도로 경작규모별 수익이 매년 증가추세를 나타내게 되었다.
경작희망 규모는 매년 정부가 예정하는 규모의 제한을 초과하는 경향이 되었다. 지금은 충주군을 중심으로 음성(陰城), 괴산(槐山), 제천(堤川) 등의 4개 군, 31개면 261개 리·동에 산재하여 매우 건전하고 적극적인 대산지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 실적과 경과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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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12년부터 1929년 경작실적(自大正元年至昭和四年 耕作事蹟表)
<1912년 ~ 1929년간 경작실적>
※ 여기서 메(〆)로 표시한 것은 무게단위로 관(貫)으로 칸 혹은 시메(しめ)로 읽고, 1칸은 3.75kg이다. 일본에서 쓰던 무게단위다. 1912년 3,669貫, 13,758.75kg이 1929년 865,759貫, 3,246,596.25kg으로 늘어났다. 이 수치는 농가에서 수납한 건조 연초중량을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일당가격 이라 했는데 원문엔 일관당가격(一〆當價格)이다. 일당가격이라 쓴 것은 잘못이다. 단위중량당 가격을 말한 것이다. 1912년을 예로 들면 5,309円을 양목(量目) 시메(〆) 3,669貫로 나누면 반올림해서 1.447円이 된다. 나머지 년도도 같다. 쉼표가 아니라 점(ㆍ)이다. 잘못 읽은 것이다. 하여튼 <단위중량당가격>은 당해년도 물가를 반영한 것으로 중요하다. 1929년을 제외하면 증가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품질향상에 의한 것인지 담배소비자들의 증가와 수출이 증가하여 시장의 수요가 급증한 것인지는 밝혀야 할 과제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일본이 쓴 화폐단위는 엔(圓,
円), 센(錢, 1엔의 100분의 1 ), 린(厘, 1센의 10분의 1)이 있다.
5)엽연초 저장상황
본 년도(1931년, 소화 6년) 저장엽연초(貯藏葉煙草)는 전년도(1930년, 소화 5년)에 넘어온 805,132메(〆) 100문(匁)과 수납급 및 재건조 기타에 의한 수입이 1,413,373메(〆) 400문(匁)로 모두 2,218,505메(〆) 500문(匁)이다.
(〆은 무게단위로 貫으로 칸 혹은 시메(しめ)로 읽고, 1칸은 3.75kg이다. 匁은 몬메(匁), 메(目, め)라 부르며 3.75g이다. 금 한 돈 무게다. 전통 일본도량형 단위다. 1칸(貫)은 1,000(目)메가 된다.
이 책에서는 메(〆)와 문(匁)이라 썼는데, 시메와 몬메로 쓰던가, 아니면 메와 몬으로 쓰던가, 貫이나 目으로 썼어야 했다. 하여튼 미터법으로 메(〆)는 3.75kg, 문(匁)은 3.75g으로 표시했어야 했다.
그럼 805,132칸(〆)은 3,019,245kg이 되고 100메(匁)는 375g이다. 1,413,373칸(〆)은 5,300,148.75kg이 되고, 400메(匁)는 1.5kg이다. 총 8,319,393.75kg에 1.875kg을 더하면 8,319,395.625kg로 8,319톤 395.625kg이다.) 그 중에서 반출되는 것은 제조작업 관계에 의해 수용되어 각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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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京城), 대구(大邱), 전주(全州), 평양(平壤) 등에 보내어지는 양목(量目)은 413,954메 400문(匁)이다.
(1,552,329kg으로 1,552ton이 넘는다. 건조중량임을 감안해야 한다. 15톤 트럭으로 100대 분량이 넘는데 일제시대 도로 사정상 15톤 트럭이 있을리 없고 위에서 말한것 같이 건조중량임으로 부피가 큰 것이 운반에 어려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화물운반에 있어 중량은 물론 부피가 큰 것은 운반에 어려움을 준다. 침대 매트리스는 무게보다 부피가 커서 운반에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일본전매국(日本專賣局) 및 삼정물산주식회사(三井物産株式會社)에 매각되어 수출되는 양목은 167,542메 400문(匁)(628,284kg)이다. 또한 재건조(再乾燥)와 표본(標本)에 의한 반출이 561,622메 590문(匁)(2,106,084.713kg)으로 총 반출량은 1,143,119메 390문(匁)(4,286,697.713kg)이다. 그리고 연말 저장엽연초(貯藏葉煙草)는 현재 1,075,386메 110문(匁)(4,971,292.913kg)이 되고 있다.
이에 4개년 가운데 이룩한 최고의 저장실적은 1,325,678메 400문(4,971,294kg)이며, 1929년 11월중에 준공한 연초경작조합창고(煙草耕作組合 倉庫) 3동(棟) 808평(坪)을 빌려 창고 운용상에는 아무런 문제없이 전부 저장을 하게 되었으며 저장에 대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화우(火于), 연우(聯于), 잡엽(雜葉), 설엽(屑葉)은 수납되던 잎담배를 등급별로 분류한 것으로 보면 된다.
1)火于는 열을 가해 건조시킨 잎담배를 말한다. 과거 농가에서는 건조실(乾燥室)에서 잎담배를 쪄냈다.
2)聯于는 생엽(生葉)을 걸대나 새끼나 노끈에 엮어서 자연건조시킨 잎담배를 말한다.
3)雜葉은 등급외 잎담배를 말한다. 人蔘을 예를들면 파지를 말한다.
4)屑葉은 부스러기 담배를 말한다. 담배를 제조할때 고급잎담배만 쓰는 것이 아니고 여러 종류의 담배를 섞어서 풍미를 더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5)연포(莚包)라고 원문에 나온다. 筵包와 같은데 담배를 담는 가마니를 말한다. 예전 농가에서는 규격에 맞게 볏짚으로 일일이 담배를 포장할 수 있게 담배포를 만들었다. 대략 1970년대 말경부터 합성섬유로 만든 담배포가 보급되었다. 지금 톤백(폴리프로피렌, PP)을 만드는 재료와 같았는데 조리(調理)한 담배를 담고 묶으면 모양이 상자(箱子)와 같았다.
6)樽詰은 통에 넣은 잎담배를 말한다. 타루즈메(たるづめ).
위 표를 보면 계수라고 썼는데, 원문엔 개수(箇數)다. 우리가 흔히 몇 개라는 말을 쓰는데 낱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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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경성전매지국 충주출장소직원
□소 장 ○목좌관호길(木佐貫浩吉)
□직 원 ○잡하무수(雜賀茂樹), 중촌호무(中村好武) ○엄재헌(嚴在憲), 시목실량(市木實良)
○김호탁(金鎬卓), 번겸방삼랑(幡鎌芳三郞)
○천본의웅(川本義雄), 김동휘(金東輝)
○천첨풍(川添豊), 삽곡시지조(澁谷時之助)
○김자풍(金子豊), 강촌삼랑(岡村三郞)
○통구중조(桶口重助), 광장신개(廣長信介)
○전도광희(田島廣喜), 유진호(劉鎭浩)
○김두욱(金斗郁), 천전중융(川畑重隆)
○좌좌목암(佐佐木嚴), 배노근(裴魯根)
○강소윤(姜小允), 최상웅(崔相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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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충주연초경작조합 연혁
충주지방에서 황색연초경작의 기원은 1912년(明治 45년, 7월 30일부터 大正 원년이 된다.) 2월에 조선총독부 기사(技師) 강전호보(岡田虎輔) 및 기수(技手) 성자철남(星子鐵男)이 실지조사(實地調査)한 결과, 이 지방이 황색연초경작에 최적지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동년(1912년) 4월 1일에 사세국(司稅局) 충주출장소(忠州出張所)를 개설하게 되어 경작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이 시작이었다.
예로부터 충주지방은 조선재래종연초(朝鮮在來種煙草) 산지(産地)는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일반농가는 정부시설을 환영하지 않았고, 연초를 재배하면 각종 병해가 발생하고 수확이 떨어진다고 속단하여 쉽사리 경작 장려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주군수 서회보(徐晦輔)가 열심히 노력하여 1912년도 경작에 마침내 250명이 참여하게 되었고, 동년(1912년) 경작면적은 출장소 직영시험재배(直營試作)을 합하여도 모두 14정(町) 7반(反) 9보(步)를 넘지 못했다. 그러나 경작성적이 양호하여 사람들 사이에 황색연초가 타 작물에 비해서 수익이 매우 많고 지역의 복리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업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강전(岡田) 사세국 충주출장소장 및 서(徐) 군수의 알선 아래 황색연초경작조합(黃色煙草耕作組合) 설립을 기도(企圖)하여 성천지방(成川地方) 유지(有志)와 협의한 결과, 1913년(대정 2년) 1월 31일에 조합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그 이후 본 조합은 관헌(官憲)의 보호감독 아래 황색종(黃色種)의 개량발달을 도모하고, 조합원(組合員)에게 경작자금의 융통, 비료의 무상배부 또는 경작세(耕作稅)의 보조 등 제반 편의를 주어 적극적으로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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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발전(産地發展)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경작자들은 이런 혜택에 대해 오히려 일종의 의혹의 생각을 보임으로써 경작하지 않으려는 의향을 환기시키지는 못하였다. 그에 따라 1913년, 1914년(대정 3년) 사이는 경작 장려에 있어 당사자의 어려움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연초의 경작상황이 몇 년간 양호하게 되어 경작자의 소득금액이 증가함에 따라 일반농가의 의향이 변화고, 1915년(대정 4년)에는 경작 희망자가 갑자기 급증해 조선총독부의 예상보다 2배를 초과하는 성황을 보였다. 그러나 본 종(種)의 경작과 건조(乾燥)에는 특수한 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에 산지확장에는 기술지도자의 증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총독부에서는 사업 착수와 동시에 직영시험재배를 하여 기술자 양성에 노력하였지만 인원이 한정돼 있어 결국 1915년도는 지도자(指導者)의 허가 범위를 확장하고 230정보(町步), 즉 전년의 2배 면적이 되었다.
최근에는 다행스럽게 작황이 매우 양호하여 총독부의 예정수량 7만관(7萬貫)보다 큰 11만 1천여관(1千餘貫)의 수량이 되었다. 이에 따라서 수요관계를 고려해 1916년도에는 약 57정보(町步)의 확장으로 끝나고 희망자 대부분은 경작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올해(1931년, 소화 6년)는 작황 불량으로 예정수량에 달하지 못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내(朝鮮內) 및 해외수요(海外需要)가 갑자기 증가하여 공급이 부족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17년도(대정 6년)엔 경작규모를 크게 확장할 방침이었지만 전년도에 작황불량으로 경작열이 저하되어 약 210정여보(町餘步)를 증가한 500정보로 하였다. 올해는(1931년, 소화 6년) 품질이 양호하지 못하였으나 수량의 증가로 소득금액이 비교적 많아지자 경작희망자가 상당히 많아 조선총독부의 방침도 확장을 계획하기 위하여 다시 200정보를 증가하여 700정보(210만평)의 산지로 설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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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1931년, 소화 6년) 각지에 모두 수해(水害)가 많아 수량(收量)이 평년에 비해 25%가 감수되고, 품질도 전년보다 저하돼 경작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물가의 폭등에 따라 엽연초(葉煙草) 가격도 인상되어 경작자의 소득금액이 증가하자 연초경작 의욕이 고조되고, 1919년도(대정 8년)에는 전년도의 2배를 넘는 성황을 이루게 되었으나 수요관계, 품질개선, 건조연료 등의 모든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어 1,000정보의 경작에 그치게 되었다.
그 후 경작 개선에 노력하여 산지의 발전을 꾀한 결과 1921년도(대정 10년)에는 1,200정보, 1925년도(대정 14년)에는 1,500정보의 일대산지(一大産地)로서의 기록을 얻게 되었다.
1913년(대정 2년) 충주연초경작조합 창설 이래 금일(1931년, 소화 6년)까지 실로 18년간 때로는 지방농가의 착각으로 사업 진전을 보지 못하였고, 혹은 천재지변의 재해를 만나 예정된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등 여러 차례 우여곡절과 고난을 겪었다.
그러나 정부의 적절한 지침과 당사자들의 열성은 언제나 경작개선에 매진하여 1921년(대정 10년)에 전매제도(專賣制度)를 새롭게 만들고 이와 함께 면목을 일신하여 조합업무의 내용을 정비하였다.
사업실적이 특히 많았던 현재 충주군 일원, 음성군 6개 면, 괴산군 8개면, 제천군 3개면, 즉 4군 30개 면을 조합 구역으로, 경작면적 1,400정보, 조합원 2,320명으로 조합재정이 견고한 전국유일의 조합이 되었다.
충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방 특용작물(特用作物)로써, 생산에서 얻게 된 경제효과는 농가를 주축으로 일반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충주를 모르면 연초경작(煙草耕作)의 실상(實狀)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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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주연초경작조합 (충주면 용산리 전화 27번)
○조합장 : 종 6위 훈 5등 정희봉
○이 사 : 정 6위 훈 6등 청산풍차
○서 기 : 익전구, 농구건일
○기 수 : 소천청차, 황천죽의
○사무원 : 갑비훈, 勳八等 관전병위, 횡산번, 우영배, 이한용, 윤원식, 중천조장, 김희배, 채규수, 오현대, 홍수동, 박승겸, 유원풍, 김홍의, 이대영, 김준호, 장상원, 이하도, 김사양, 최근윤, 서상한, 백월문, 이봉손, 홍천식, 노병옥, 유장성, 김동훈, 장현덕, 조한영, 이은영, 김상면, 장원금, 유석하
○충주연초경작조합평의원
괴산군 괴산면 김상선, 괴산군 칠성면 소전승길
괴산군 불정면 심원택, 괴산군 감물면 이상기
괴산군 연풍면 조병준, 괴산군 상모면 안길수
음성군 음성면 조동환, 음성군 원남면 성준용
음성군 금왕면 최정근, 음성군 생극면 홍형식
음성군 생극면 김상호, 충주군 충주면 평야을오랑
충주군 살미면 심성택, 충주군 이류면 서병양
충주군 주덕면 홍택희, 충주군 신니면 이범춘
충주군 노은면 신창균, 충주군 양성면 이만영
충주군 가금면 김상학, 충주군 동량면 이기하
충주군 산척면 최주환, 충주군 엄정면 윤 영
제천군 한수면 김영식, 제천군 백운면 남봉희
제천군 백운면 한세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