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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묵상글 ( 사순 제2주간 월요일. - 자비의 여정, 자비의 학교.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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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자비의 여정, 자비의 학교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역시 하느님 아버지의 소망이 담긴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드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십시오. 결론하여 성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얼마전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거룩한 사람, 완전한 사람이 되라 말씀하셨는데 결국 자비로운 사람으로 모아집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성인이 되어가는 “자비의 여정”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공동체는 “자비의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졸업이 없는 죽어야 졸업인 평생 회개와 더불어 아버지의 자비를 배워가는 자비의 학교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자 자비(慈悲)란 글자를 보면 뜻이 분명해집니다. ‘사랑할’ 자(慈) ‘가엾이 여길’ 비(悲)입니다. 남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닮아 자애롭고 가엾이, 측은히, 불쌍히 여기는 연민(compassion)의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자비로운 사람, 불교식으로 말해 부처님을 닮아 대자대비(大慈大悲)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런 대자대비의 너그럽고 큰 사랑은 비단 사람뿐 아니라 생명있는 모든 중생에게 미칩니다. 생태위기, 기후위기가 날로 심각해지는 작금의 시대, 불가의 대자대비한 사랑의 실천이 절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수도원 본관의 숙소와 더불어 또 하나의 숙소 명칭도 새삼 적절함을 깨닫습니다. 당시 수도형제들의 생각을 공모했는데 본관의 숙소 “자비의 집”은 제가 제안했으며, 또 하나 “형제의 집”은 다른 수도형제가 제안했습니다. 결론하여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형제들이 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어제 주일은 새벽 5시부터 불암사의 선재동자란 말에서 유래한 선재善財라는 희고 껑충한 순한 개가 하루종일 수도원 ‘자비의 집’ 주변에서 서성이며 수도원 개들과 밥도 먹고 놀다가 저녁 7시쯤 떠났습니다. 이제 수도형제들의 사랑을 받는 선재가 되었습니다. 수사님들이 쓰다듬어 줘도 가만히 있고, 저녁무렵에는 혼자 외로이 피곤한지 쉬고 있다가 불암사로 떠났습니다.
순간 ‘아, 개도 외로워서 수도원을 찾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 외로워 시간나는 대로 수도원의 착한 개들과 수도형제들을 찾는 선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델라 자서전을 읽으며 27년 수감생활중 가장 힘들었던 벌은 빛도 들어오지 않는 독방에서 혼자 지낼 때 였다는 것입니다. 이때처럼 사람이 그리웠던 때도 없었다 합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함께 하는 형제들은 물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에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필수입니다. 제가 요즘 심취하여 계속 읽고 있는 책들은 위인들의 평전입니다. 만델라 자서전에 이어, 조선시대 세종대왕 평전, 이이(율곡) 평전, 허균 평전, 우계 성혼 평전을 읽었고 지금은 정조대왕 평전을 읽는 중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순간 평전에 대한 깨달음의 진리는 사랑이, 자비가 없다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의 시비를 가리는 일은 참으로 분명했던, 당쟁으로 인한 무자비한 살육의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됐던 선비들의 당쟁사인 조선역사였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뚜렷한 선악의 이분법적 분류요 상대방은 평화공존의 동료들이 아니라 없애버려야 할 대상으로 원수와 같이 여겼습니다.
흡사 좌우로 분열되어 극단으로 대립되어 원수같이 지내는 작금의 정치현실도 연상되었습니다. 이념에 중독되어 광신, 맹신의 지경에 이르면 신앙도 무력해지는 느낌입니다. 자비로우라는 주님의 가르침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던 교회의 현실이었던지 장구한 교회 역사가 이를 입증합니다.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참으로 절박한 주님의 호소요 간청입니다. 새삼 자비 역시 평생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적 자비의 선택에 자비의 훈련, 자비한 삶의 습관화입니다. 바로 이를 위한 우선적 조건이 끊임없는, 한결같은,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회개입니다. 기도와 회개가 한 셋트입니다. 이런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조선선비들에게는 이런 인격적인 자비하신 아버지에 대한 신앙이 아예 존재할 수 없었으니 자기 수양에 절대적인 구체적 기도와 회개가 부재할 수 뿐이 없었기에 그처럼 원수라 생각되는 상대방의 적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잔인한 보복이었던 것입니다. 이래서 “그리스도는 인류의 빛”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보십시오. 오늘 제1독서 다니엘의 기도와 회개가 그 모범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기도할 때 회개와 겸손이요 지혜요, 자비와 용서의 회복입니다. 다니엘 기도의 구체적 내용을 인용합니다.
“아, 주님, 위대하시고 경외로우신 하느님,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 계약과 자애를 지키시는 분! 저희는 죄를 짓고 불의를 저질렀으며 악을 행하고 당신께 거역하였습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그러나 저희는 오늘 이처럼 얼굴에 부끄러움만 가득합니다. 저희가 당신께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주 저희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시고 용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러나 저희는 주님께 거역하였습니다.”
바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깊은 공감과 울림을 주는 겸손한 회개의 기도입니다. 마침 수도형제가 보내준 메시지가 심신의 관리에 유익하다 싶어 그 내용을 나눕니다.
1.성격은 얼굴에 나타난다.
2.생활은 체형에 나타단다.
3.본심은 행동에 나타난다.
4.미의식은 손톱에 나타난다.
5.청결감은 머리에 나타난다.
6.배려는 먹는 방법에 나타난다.
7.마음의 힘은 목소리에 나타난다.
8.스트레스는 피부에 나타단다.
9.차분하지 못함은 다리에 나타난다.
10.인간성은 약자에 대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대부분 공감이 가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추스리기위해 끊임없는, 한결같은 기도와 회개입니다. 자비로운 사람은 저절로가 아닌 기도와 회개와 더불어 구체적 훈련이 필요합니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다음처럼 표현됩니다.
1.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2.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3.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남을 용서하여라, 명시하지 않음으로 남은 물론 자신도 용서하라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4.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심판할 분은, 단죄할 분은 하느님뿐인데 어찌 남을 심판하거나 단죄할 수 있겠습니까? 심판이나 단죄는 무조건 보류하고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결코 심판이나 단죄로 결론내어 닫아버리지 말고 늘 보류한채 활짝 열어두라는 것입니다. 사실 착각이나 오해로, 편견이나 선입견으로 잘못 판단할 위험은 얼마나 많은지요!
앞의 둘은 “하지 마라”는 부정적 금령이요, 뒤에 둘은 “하라”는 긍정적 명령입니다. 하느님을 닮아 용서하는데, 나누고 도와주는 선행이나 물질적 나눔인 자선에 지치지말라는 것입니다. 끝없는 용서요 사랑의 실천입니다. 한번 자비의 성덕 점수를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기본 점수 2점에다 4항목 각자 2점 만점으로 하여 10점만점으로 계산해 보세요.
저의 경우 기본점수 2점에 3개 항목 도합 6점, 4째 항목 1.5점, 도합 9.5점이니 너무 후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정말 자비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비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결정적 도움이 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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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같은 됫박으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은
심판하지도 단죄하지도 않는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런 것입니까?
무자비한 사람만 심판하고 단죄합니까?
그런 거라면 심판이란 무엇이고 단죄란 무엇입니까?
죄를 지어도 괜찮다고 묵인해주는 것입니까?
자비로운 세상이 되기 위해 검사나 판사는 없어야 한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로운 심판과 무자비한 심판이 있을 뿐이며
그래서 주님도 심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자비한 심판을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겁니다.
과거 우리나라 역사에서 볼 때 올바른 심판을 해야 하는데
검사나 판사들이 독재자나 권력자의 눈치를 보느라
또는 그들의 편에 서 있어서 잘못된 심판을 많이 하였고
그래서 참으로 억울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죄를 지었는데도 죄가 없다고 판결한다면
그것은 피해자에게 자비롭지 않은 것임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엄청난 죄를 지었음에도 단죄하지 않음으로 죄에서 벗어나지 않고
계속 죄를 지으며 살게 하는 것이기에 죄인에게도 자비롭지 않은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죄인에게의 자비는 죄를 뉘우치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 자비이고
그래서 죄인에게는 심판도 단죄도 다 자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단죄가 전부이면 그것도 무자비입니다.
단죄를 하고 그것으로 끝이라면 무자비하다는 겁니다.
‘죄를 지었으니 죽어야 돼!’하고 죽여 버리고 말면
그것은 사랑은 없고 단죄만 있는 것이기에 무자비한 겁니다.
미움과 분노의 단죄가 그런 것이 아닙니까?
누구에 대한 미움과 분노가 가득할 때
단죄할 거리를 찾거나 없는 죄도 만들어 단죄하고는
그를 어떤 식이로든 파괴하거나 심지어 죽여 버리려 들지요.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
심판하고 단죄하는 그 무자비한 마음이 남한테만 그러할까요?
양식이 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휘두르는 같은 칼로
자신을 먼저 베고 찌르는 법이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남에게 퍼주는 그 됫박으로 그대로
받게 된다는 말씀도 이런 뜻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고서도 죄의식이 없고
남을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싸이코패스가 아니라면
남을 단죄하면 단죄받고,
찌르는 칼로 찔리는 법이지요.
같은 식으로 용서하면 용서받고
사랑하면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많이 사랑하면 많은 사랑을 받겠지요?
이것이 하느님의 공평하심이고 정의임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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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이는 단지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는 말씀인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자비로운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먼저’ 자비를 베푸셨다는 사실, 곧 우리는 아버지의 ‘먼저 베푸신 자비’를 입었다는 사실을 깨우쳐줍니다. 나아가서, 우리 안에 당신의 거룩한 형상인 자비의 얼굴을 심어놓으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바로 그 자비의 얼굴을 드러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비를 베풀 것인가?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심판, 단죄하지 말라’는 부정의 지침이요, 소극적인 지침입니다. 뒤의 둘은 ‘용서하고 베풀어 주어라’는 긍정의 지침이요, 적극적인 지침입니다.
<첫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우선 심판과 단죄를 하지 않으며,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악을 피하여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을 심판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들여다보며,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기보다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자비의 실천’은 아버지께서 ‘먼저’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듯이, ‘먼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묘한 것은 ‘먼저’ 용서하면, 저절로 단죄와 심판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단죄, 심판하지 않고 용서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용서하면 단죄, 심판하지 않게 됩니다. 이는 악을 피하되 선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비록 자신이 죄에 떨어지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나가지는 못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결국, 악이 스스로 선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을 베풀면 악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을 행하는 것이 악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됩니다. 그러니 어둠을 저주하기보다 한 개의 촛불을 켜야 하고, 평화를 보존하려하기보다 평화를 창조해야 할 일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0,21)
그러니 우리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혹은 ‘용서가 안 된다’고 말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나아가서 이미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용서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아직도 용서하지 않고 있는 자신마저도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먼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죄를 주님께 용서 청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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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성직자의 어려운 점을 농담 삼아 얘기합니다.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 “너무 직선적이야”하고, 지적하지 않으면“너무 타협을 하는구만!”하고 말합니다. 강론할 때 원고를 보고 하면, “너무 딱딱하고 재미없어”하고 원고 없이 하면, “왠지 깊이가 없는 것 같애”하고 말합니다. 여러 예화를 들면 “성경 말씀은 도대체 하질 않는구만!”하고 예화를 안 하면“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관심을 두면 “인기 끌려고 그러는구만!”하며 부자와 가까이 하면, “돈 있는 사람만 좋아하고 너무 귀족적이야!”하고 말합니다. 이래저래 한 소리 들으니 성직자가 고집스러워지나 봅니다.
칭찬을 받는 것은, 자기 역할에 관계 없이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꾸중을 듣는다든지 비판을 받게 된다면 아무래도 기분이 상하며 마음에 화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좀 더 넓은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나를 부정적으로 생각한 그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사람입니다. 그래서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바른 인생길 알려는 사람은 훈계를 달갑게 받고 미련한 사람은 책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잠언12,1). 상대의 비판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나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비로운 충고로 그를 구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6,3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받기 위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얼마나 넓고 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국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주시지만 담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으면 혜택을 입을 수 없습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는 이웃을 비난하지 않는 데서 비롯됩니다. 교부 푀멘은“비난과 험담의 주제에 있어서는 그것들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마음속에서 파헤칠 필요조차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을 마음속에서 확실하게 분별하고자 하더라도 그것이 이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비난과 험담하는 입은 스스로 멸망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비방하고 험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구에게 충고 하려거든 자기 자신에게 먼저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충고를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피해를 주고 아프게 하였다면 그 사람이 악해서라기보다는 다른 사람보다 약해서 악의 세력에 이용당했다고 생각해 보면 어떨지요. 악의 세력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모두를 선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선한 능력이 크게 드러나게 되고 악의 세력은 발붙일 곳을 잃어버리게 될 것입니다. “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그렇다고 선한 이라도 그를 우상처럼 섬기지는 마라.”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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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흑기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을 대신 해 주는 사람을 뜻합니다. 술자리에서 간혹 흑기사를 볼 때가 있습니다. 술이 좀 과했거나,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 부득이 하게 술을 마셔야 할 때에 대신 술을 마셔주는 우정(?)을 보여주는 친구가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술 상무’라는 말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거래처와 회식이 있을 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술도 곧잘 마시면서 거래를 성사시키는 직원이 있습니다. 본인이 원하지는 않지만 친구를 위해서, 회사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람들입니다. LA에 신문 홍보를 오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저를 맞이해 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제게 보내 주시는 흑기사입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와 주시고, 제가 있는 동안 차량 봉사를 해 주십니다. 무엇보다 편안한 숙소를 마련해 주시고, 아침에 미사를 봉헌 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십니다. 가족처럼 지내는 부부들도 기꺼이 시간을 내 주곤 합니다. 제게도 흑기사가 되어 주시지만 LA에 오시는 다른 신부님들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 주십니다. 이런 분들이 계시기에 LA로 가는 발걸음은 늘 가볍고 편합니다.
주변을 보면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기꺼이 시간을 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퀸즈 성당의 본당 신부님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나그네 사제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줍니다. 남미에서 선교하는 신부님들, 유럽에서 공부하는 신부님들은 옹달샘에서 목을 축이는 다람쥐처럼,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사람처럼 사제관에서 머물다가 소임지로 돌아가곤 합니다. 때로 귀찮을 수도 있지만 신부님은 기꺼이 사제들을 위한 사랑방을 마련해 주십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에도 작년에 손님 신부님들이 왔었습니다. 시카고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메릴랜드에서 공부하는 신부님, 한국에서 은퇴하신 신부님이 머물다 가셨습니다. 기꺼이 흑기사를 하지는 못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머물다 가라고 했던 것처럼 저도 신부님들이 머물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줍니다. 젊으신 신부님들은 알아서 뉴욕을 다니기에 차량 봉사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흑기사들이 있기에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지상 최대의 흑기사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앉은뱅이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 주셨습니다. 5000명을 배불리 먹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흑기사가 되어 주셨습니다. 돌에 맞아서 죽어야 했던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었느냐?’고 율법학자에게 물었습니다. 율법학자는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생활은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흑기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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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어린 예수님을 사흘 동안 못 찾았을 때가 있었지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예수님께서 행방불명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사흘 뒤 성전에서 율법교사들과 대화하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런 원망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이 사건에 대해 복음에서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화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간직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신앙은 이런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을 어떻게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이 이해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 것입니다. 그 이해의 순간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실제로 그 순간에는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도저히 하느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는 깨닫습니다. “맞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구나.”라면서 그 순간이 은총이었고 감사할 일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신학생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그때는 능력도 없고 자신감도 부족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큰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친구들에게 그렇게 큰 역할을 할 수 없다고 하자, 하나같이 우리가 같이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말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도움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바쁜 신학교 생활에 자기 일하기도 벅찼으니까요. 그때 말만 하고 도와주지 않는 친구들을 얼마나 원망하고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서 얼마나 저 자신이 성장했었는지를 말입니다. 은총이고 감사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또 용서하고 주라고 하시지요. 솔직히 예수님 말씀과는 정반대로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심판과 단죄를 반복하고, 용서할 수 없다고 또 절대 줄 수 없다고 합니다. 나의 손해가 너무 큰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때 서두르게 판단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해하기 위해 한 번 더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서두름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속에 간직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이 신앙이었습니다. 나의 신앙은 어떠했을까요? 너무 급한 서두름으로 하느님의 손길을 보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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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은 출처가 무엇이건 간에 우리를 약화시키는 것이요, 용기를 앗아가는 것이요, 인생을 단축시키는 것이다(존 란카스터 스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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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까요? 우리는 언제부터 이 말을 처음 피부로 느꼈을까요?
제 기억을 더듬어 보겠습니다. 제가 어릴 적에 저는 작은 산촌에 살았습니다. 그 당시에 학교에 가려면 산을 두 개를 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1시간 이상을 걸어가야 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성적 우수자로 특수 과학반에 뽑혔습니다. 그리고 특수 과학반은 한 달에 한 번 제가 다니는 학교보다 더 먼 학교에서 수업받아야만 했습니다. 다른 학교로 수업받으러 가는 날, 어머니께서 버스 타고 돌아오라고 동전 몇 개를 주셨습니다.
제가 그 돈으로 버스를 탔을까요? 안았을까요? 상상하신 데로 저는 그 돈으로 먹고 싶은 아이스크림과 라면땅을 사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먼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가도 가도 집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빈손인 저는 버스를 탈 수 없었습니다. 그때 처음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하지 말고, 단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특히 용서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분명 용서한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거나, 그와 비슷한 일을 다시 경험하게 되면 우리 안에 아직 강한 분노의 불꽃이 남아 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신을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지 않으면 심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않으면 단죄받지 않을 것이고, 용서하면 용서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위해서 내가 꼭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로 세상에는 공짜가 없을지 모르지만, 주님 나라에는 공짜가 있습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보면 어떨까요?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자비로워지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다 보면 주님께서도 우리는 자비로운 사람으로 봐주실 것입니다.
오늘은 조금 더 자비로운 우리가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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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습관
저는 오늘 아침 ‘하루 습관’을 먹었습니다. 하루 습관은 다름 아닌 종합견과류의 이름입니다. 견과류는 우리에게 좋다고 합니다. 물론 과하면 문제가 되겠지만 적정한 양은 우리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견과류 제품 중 한 팩씩 먹기 좋게 나오는 제품이 많습니다. 제가 먹는 ‘하루 습관’말고도 다양한 제품들이 있겠지요. 건강 잘 챙기셔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하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운동하고, 숙면일 취하려 노력합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하루 습관은 뭐가 있을까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기도하기. 매일 매일 성경 읽기.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감사의 기도 봉헌하기…. 아마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몸을 지키기 위한 좋은 습관도 우리에게 필요하지만,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우리 신앙을 위한 좋은 습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위한 ‘하루 습관’을 만들어보세요. 한 팩에 담아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견과류 하루 습관처럼 하루에 담아 신앙을 건강하게 하는 신앙 하루 습관을 만들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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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06. 사순 제2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그대 하느님>
루카 6,36-38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나 그대 하느님>
나를 보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나를 보며
내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 안에 계신
하느님을 느낍니다
나를 보며
나와 그대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그대를 보며
그대와 나 사이에
하느님을 느낍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그대 앞에 선
나를 봅니다
하느님을 느끼며
내 앞에 선
그대를 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참으로 나요
그대는 참으로 그대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나는 비로소 그대요
그대는 비로소 나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 안에
하느님처럼
우리는 서로 자비요
우리는 서로 용서요
우리는 서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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