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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대처와 성경연구를 함께하는 이단 특강(1) 1. 관주 사용하기 목차
3. 문맥 따라 성경읽기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 뜻일까?’ 본 특강은 집회에 참석한 한 성도의 반응 때문에 시작됐다. 필자는 이단 대처 집회를 할 때 종종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곤 한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잘 하는 어떤 성도가 있다고 해 봅시다. 그는 주일예배는 물론, 각종 모든 예배에 참석을 하고 있습니다. 말씀생활과 기도생활을 잘 하고 있으며 인격적으로도 훌륭합니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도 모범이 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그는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성도가 있다면 그는 점점 더 ‘사람’ 다워질까요? ‘신’ 다워질까요?” 신(神)처럼 보이기 위해 어떠한 흉내를 내려는 이단들의 모습을 비판하려는 게 질문의 주된 의도다.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을 누리자는 권면을 위해서다. 위 질문을 받은 집회에 참석한 성도들은 웅성거린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확인해 보며 또 자신의 생각도 정리해 보려는 모습이다. 대체로 ‘사람’쪽 의견이 다수를 이룬다. 이때 어느 집회에서 독특한 일이 발생했다. 한 성도가 손을 높이 들었다. 의견을 직접 말하겠다는 표시다. 그를 편의상 ‘홍길동 씨’라고 지칭하겠다. 필자가 그를 지목하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소리로 “신 다워집니다”라고 말했다. 순간 집회에 참석한 모든 이의 이목이 홍길동 씨에게 집중됐다. 그는 말을 이었다.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며 요한복음 10장 34절이 바로 그 성경구절이라고 했다. 이미 그 성경구절을 외운 듯 역시 큰 소리로 그 성경구절을 읊기도 했다. 그 성경구절은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집회장은 조용해졌다. 필자는 성도들의 얼굴을 왼쪽 끝에서 오른쪽 끝까지 ‘쭉~’ 둘러보았다.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려는 이가 없어 보였다. 홍길동 씨가 성경구절까지 언급했으니 정답이 나온 것처럼 여기는 듯했다. 누가 그 성경구절을 반박을 할 수 있겠는가. 홍길동 씨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 준다는 성경구절이 있다는 것 때문이다. 필자는 이 사건을 계기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20여 년 간 이단 문제를 취급해 오면서 얽히고설킨 실타래 하나가 풀어진 듯했다. 바로 이단자들이 이단 교리를 언급하면서 당당해 하는 이유와 정통교회 성도들이 이단 교리를 듣고도 쩔쩔매는 이유가 동일하다는 것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성경구절을 제시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이단에 속한 자들이 얼토당토 않는 이단 교리를 배우면서도 당당해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교리를 뒷받침해주는 성경구절이 있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성경적으로 정통이라고 확신하고 있다. 이 논리가 정통교회 성도들에게도 설득이 된다. 누군가 성경구절을 인용해 가며 특정 사상을 말하면 ‘올바른 것’이라고 여기게 된다. 왜 그런가. 바로 성경구절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누가 제시된 성경구절에 반박할 수 있겠는가. 특정 사상이 성경구절에 슬쩍 묻혀서 ‘정통’처럼 보여지게 되는 방식이다. 이제 그 틀을 깨보자.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다음과 같은 관점을 제시해 본다.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 이단자들이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하는 많은 성경구절들 앞에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를 갖고 접근하면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성경구절을 제시하는 이단자들 앞에서 우리가 당당해 질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경우에 따라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으로 사용된 것일까요?’라는 말만 해도 이단자들이 당황해 하기도 한다. 자신들도 그런 생각을 미쳐 안 해보았기 때문이다. 위 관점은 이단 대처에 보다 안정감과 적극성을 준다. 과거 이단과 요즘 이단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과거 이단 문제는 단순한 면이 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경 이외의 경전이 있다, 교주를 신격화 한다, 여자 문제와 돈 문제가 발생한다, 특정 기도원을 조심하라’는 식으로 구분이 어렵지 않았다. 대처하는 법도 자연스럽게 보다 간단하다. 그러나 요즘 이단은 정통교회와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 과거의 기준에 해당되지 않는 곳이 많다. 오히려 정통교회 성도들보다 더 열심히 성경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미지화 되어 있다. 이단자들이 대화하자며 성경을 내 밀고 다가오면 정통교회 성도들은 불안해진다. 두렵기도 하고 피하고 싶다. 물론 그들은 정통교회 성도들을 유혹하기 위해 훈련하고 접근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과 대면하는 것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이단 문제에 보다 진지하게 접근해 보자.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관점을 가져보자. 당당하게 담대하게 말이다. 신앙생활을 너무너무 잘 하면 정말로 ‘신’이 될까?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나타난 한 장면을 살펴보자. 사도행전 14장에 나타난 이야기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전도를 했다. 그곳에 태어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사도 바울이 그에게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쳤다. 그러자 그 사람에게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그가 걷게 되었다.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일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보고 ‘신’이라고 불렀다. 누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일을 일으킬 사람이 있겠는가. 급기야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대상으로 제사를 드리려고 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어찌해야 할까. 세 가지 경우의 수가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적극적으로 ‘YES’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고 신처럼 행동하는 일이다. 두 번째는 묵인이다. 모른 척하고 그 상황이 이끄는 대로 가만히 있는 방식이다. 신으로 받을 수 있는 각종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신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는 핑계로 빠져나갈 수도 있다. 꿩 먹고 알 먹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세 번째, 적극적으로 ‘NO’를 선언하는 일이다. 오늘날 일부 정통 교회에서도 위와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한다. 치병, 안수, 입신, 환상 등의 신비스러운 일들이 발생한 이후다. 대표자가 자신을 직접적으로 ‘신’이라고 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단 단체 신도들조차도 그 정도로 무지하여 교주를 따르는 이가 많지 않을 정도다. 문제는 두 번째 경우다. 몇몇 성도들이 자신의 종교심으로 인해 교주 또는 담임목사를 필요 이상으로 추앙하려는 경향이 흔히 발생한다. 개개인 성도들이 갖고 있는 종교심 때문이다. 담임목사의 목소리만 들어도 은혜 받는다고 표현한다. 하루 종일 설교 테이프(또는 파일)을 틀어놓는 이도 있다. 어쩌다 악수를 한 번 하면 성령충만해진 듯 그 감동을 잊지 않는다. 꿈에서 그분(?)의 모습을 만나기라도 하면 마치 재림 예수님이라도 만난 듯 기뻐하며 간증(?)까지도 한다. 그분의 책은 읽지 않아도 무조건 구입하고, 그분이 단위에 오르면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그 분은 아무런 행위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신’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각종 혜택을 누리게 된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했을까? 그는 세 번째 방법을 택했다. 적극적으로 ‘NO’를 외쳤다. 다음과 같다. “이르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행14:15) 사도 바울은 자신도 모인 무리들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외쳤다. 비록 자신이 복음을 전하면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베풀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어떠함’을 알리려는 것일 뿐, 자신의 ‘어떠함’을 드러내는 게 아님을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이를 위해 사도 바울은 옷까지 찢으며 자신의 신격화 현상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홍길동 씨가 제시한 요 10:34절로 돌아가 보자. 그는 그 성경구절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해 준다고 했다. 이제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라는 관점을 가지고 직접 살펴보자. 필자는 그 접근법으로 4가지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와 같다. 1. 관주 사용하기 정통교회 성도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렇다고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 접근법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성경 주해(exegesis)를 위해 사용하는 기초이자 핵심 방법이기도 하다. 필자는 <이단들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33가지 성경 이야기>(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라는 책을 낸 바 있다. 이단자들은 자신들의 교리의 정당성을 위해 성경구절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성경구절은 그들의 교리를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다. 그것을 분석한 책이다. 이때 사용한 분석 방법이 바로 위의 4가지다. 이 방법은 필자나 어느 특정인에게만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위 4가지 접근법이 또한 특별한 방법도 아니다. 누구나 사용할 수 있는 당연한 작업이다.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의 관점은 이단 문제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일반적인 성경공부에도 그래도 적용된다. 그동안 배워서 알고 있던 성경구절, 암송했던 성경구절들을 다시 살펴보자. 알고 있던 내용과 동일하다면 그 의미가 배나 더 깊이 있게 전달될 것이다. 반면 잘못 알고 있던 내용이 발견된다면 자연스럽게 교정이 될 것이다. 이단 대처와 성경 연구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이단 대처를 근본적으로 잘 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잘 연구하게 되는 결과를 얻게 될 것이고, 반대로 성경을 보다 깊이 있게 연구하게 되면 이단을 대처하는 게 당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성경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의 관점은 이 둘의 관계를 자연스럽게 연결해 주리라 본다. 1. 관주 사용하기 이단 대처와 개인 성경 연구를 함께할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관주 사용하기’다. 과거에는 ‘관주 성경’ 만나기가 어렵지 않았다. 많은 성도들이 그 성경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 서점에 가보면 상황이 달라졌다. 성경 판매 코너에 가 보자. 성경의 디자인과 형식이 너무도 다양해졌습니다. 어린이용, 큐티용 그리고 신혼부부를 위한 성경도 있다. 한국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성경(개역한글판)은 진열장에서 이미 뒷자리로 옮겨졌다. 대부분 새로 개정된 개역개정판 성경이 진열장을 장식하고 있다. <쉬운성경>, <현대인의 성경> 등 현대어로 번역된 성경도 다수 눈에 들어왔다. NIV 외의 다양한 영어성경과 일본어와 중국어 등 외국어 성경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예전 신학교 서점에서나 구입할 수 있었던 헬라어, 히브리어 성경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각종 주석이나 해설이 곁들여진 성경도 많았다. 성경 구입 선택의 폭이 정말로 넓어졌다. 그런데 아쉬운 점이 있다. 바로 ‘관주’라는 이름이 붙은 성경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주 성경을 찾는 이가 없으니 출판사에서는 만드는 것을 꺼렸을 것이고, 또 시중에 없다보니 독자들도 찾지 않는 악순환의 상황이다. 그래도 관심 갖고 찾으면 만날 수는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관주란 무엇인가? 관주는 ‘꿸 관’(貫)과 ‘구슬 주’(珠)의 한자어다. 구슬을 꿴다는 말이다. 관주는 신구약을 오가며 관련된 구절을 연결시켜 주는 ‘연결 끈’이다. 관련된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또는 단어와 문장 등을 이어줄 뿐만 아니라 인용, 비교, 참고 등으로 그 이유까지 설명을 알려주고 있다. 성경 전체를 하나의 네트워크 화 시켜놓은 셈이다. 이미 오래 전에 해 놓은 작업이라 관주 연결에 부족한 점이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주는 성경 하나만 가지고 성경이 성경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돕는 아주 훌륭한 성경 연구 도구다. 성경 연구는 물론 이단을 대처하는 것에 필요한 성경구절을 찾고 활용하는 데에 효과적인 도구이자 무기다. 관주 사용하기를 적극 권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관주 성경>이 필요하다. 필자는 오랫동안 영어와 한글이 함께 있는 성경을 사용해 오다가 몇 년 전부터 <관주 여백 성경전서>(개역개정판, 대한성서공회, 2004)를 사용하고 있다. 두 권 모두 관주가 있는 성경이다. 이제 관주를 활용한 예를 하나씩 들어보자. 1-1. 모세 이야기 간단한 것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관주 성경이 있는 분은 직접 성경을 펼쳐서 함께 따라해 주시기 바란다. 출애굽기를 펼쳐보자. 출2:1-2절이다. 아래와 같다. “1 레위 가족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 들어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출2;1) 레위 지파의 어떤 신혼 부부(?)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아들을 낳았다. 성경을 계속 읽어 가면 그 아이는 ‘모세’임을 알 수 있다(출2:10). 그 부부는 모세의 부모를 말한다. 과연 모세의 부모는 누구일까? 이때 관주가 도움을 준다. 필자의 성경에는 위 성구 첫 단어인 ‘레위’에 ‘ㅠ’라는 표시가 붙어 있다. 이것이 관주다. 그 관주가 연결해 주고 있는 성경구절을 보니 ‘출 6:20’라고 해 놓았다. 과연 어떤 구절과 연결해 놓은 것일까? 그 성경 구절을 찾아보자. 아래와 같다.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아론과 모세는 형제라는 사실과 그 부모가 또한 누구인지 이름을 말해 주고 있다. 그 부모는 ‘아므람’과 ‘요게벳’이다. 바로 이것이다. 위 레위 지파의 신혼 부부가 바로 아므람과 요게벳이고 그들이 아론과 모세의 부모라는 말이다. 물론 관주를 사용하지 않고 출애굽기를 6장까지 계속 읽어 가면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설명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주가 출애굽기가 아닌 다른 성경과 연결을 시켜주고 있다면 상황이 어려워진다. 관주는 그것을 바로 연결해 주고 있어 우리에게 보다 쉽게 내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위 내용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더 언급해 보자. 계속해서 관주 활용의 예를 살펴보고 있다. 계속 출 2:2이다.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겼으나”(출2:2) 아기가 태어났다. 모세를 말한다. 그 어머니(요게벳)는 아기가 태어나자 그를 석 달 동안 숨겼다. 이는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다. 이는 큰 문제다. 그들은 지금 애굽에서 노예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왕명을 어기는 것은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몰살당할 수도 있는 엄청나게 위험한 일이다. 이 사실을 모르지 않을 어머니는 왜 이런 행동을 한 것일까? 다시 언급하지만 자신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는 매우 중대한 일이다. 왜 그렇게 했을까? 모세가 성장하여 훗날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을 베풀며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부모가 이미 알고 있었을까? 그렇게 보기 힘들다. 그냥 갓난아기일 뿐이다. 그런데 왜? 출애굽기 2장 전체를 읽어봐도 그 이유를 찾기 힘들다. 다만 출2:2 중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라는 것밖에는 없다. 한 마디로 잘 생겼다는 게 이유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갓난아기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어머니는 자신은 물론 온 가족의 생명이 위험해 질 수도 있는 일을 벌이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가능한 일일까? 당시 상황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때 역시 관주가 도움을 준다. 필자의 성경엔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앞에 작은 글자 ‘으’표시가 있다. 이것이 관주다. 그리고 그 관주는 사도행전 7:20로 연결을 시켜주고 있다. 그 구절을 따라 성경을 펼쳐보자. 아래와 같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의 아버지의 집에서 석 달 동안 길리더니”(행 7:20) 스데반의 설교 중 한 장면이다. 즉 스데반이 설교하면서 모세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다. 스데반은 모세의 부모가 죽음까지 무릅쓰고 갓난아기, 즉 모세를 석 달 동안 숨겼던 이유에 대해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라고 설명하고 있다. 무슨 말인가. 모세의 부모는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존재를 하나님의 시선에서 보았다고 스데반이 해설을 해주고 있다. 바로 그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다. 물론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어야 한다. 거꾸로 구약성경이 신약성경을 해설해 주는 방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시간의 논리상 그렇지 않은가.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에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 달 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히11:23)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 부모의 목숨 건 행위를 ‘믿음’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결국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으로 인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목숨 건 행위를 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멋지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어떠한 참고서를 접하지 않은 채 오직 성경 하나만을 가지고 성경의 의미를 파악해 가고 있는 중이다. 바로 관주를 통해서 말이다. 이것이 곧 주석(또는 주해)하는 기초 작업이다. 스스로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이며, 또한 이단 대처를 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준다. 1-2. 니고데모 이야기 요한복음 3장을 읽으면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유대인이며 바리새파 지도자임을 성경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께 찾아왔다. 그는 왜 왔을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으로 인한 가나 혼인 잔치 기적 사건, 성전 청결 사건 등을 최소한 소문이라도 들었을 것이다. 요한복음 3장 앞의 1~2장의 사건들이다. 이것으로 인해 예수님께 무엇인가 질문하고자 한 게 있었던 모양이다. 밤중에 온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예수님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며 인사말로 먼저 대화를 신청했다(요 3:2). 예수님은 그가 온 이유를 이미 아시고 다음과 같이 화두를 던진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3) 그러자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의미에 대해 초점을 맞추어 다시 질문을 한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 3:4)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 ‘거듭난다’는 것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있게 말씀하신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네고데모는 더욱 혼돈에 빠진다. 같은 수준의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된다.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요 3:9) 니고데모의 반복되는 질문과 달리 예수님의 대답은 정점을 향해간다. ‘복음’의 핵심의 메시지를 선포하신다. 바로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요3:16’ 말씀이다.“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때 한 가지 궁금한 점이 발생한다. 복음을 선포한 예수님과 직접 대화를 한 당사자인 니고데모는 구원을 받았을까 하는 점이다. 바로 코 앞에서 그 말씀(요 3:16)을 그가 들었기 때문에 당연한 것처럼 여겨질 수 있지만 성경에는 그런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요 3:16절 이후를 읽다보면 예수님과 대화하던 니고데모의 존재가 사라지고 만다. 분명 요 3:16절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메시지인데, 니고데모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요한복음 본문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과연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구원은 받았나? 이때 역시 관주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요3:1절 ‘니고데모’라는 단어에 관주 ‘ㅎ’표시가 있다. 그리고 두 개의 성경구절이 주어졌다. 요7:50, 19:39절이다. 각각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먼저 요7:50-52절까지 살펴보자. “50 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1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요7:50-52). 무슨 말인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때 니고데모가 등장한다. 요한복음 3장에서 사라졌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요한복음 7장에서 다시 등장한 것이다. 그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변호한다. 그도 유대인이자 바리새인이다. 동료들과 함께 예수님을 비난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않았다. 이는 매우 위험한 행동이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도 있다. 실제로 동료들이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며 몰아세웠다. 그럼에도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옹호했다. 왜 그랬을까? 그의 앞선 행동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때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무엇인가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기는 어렵다. 요한복음 19장에 한 번 더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살펴보자. 다시 니고데모가 등장했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이라는 문구가 같은 인물임을 확인해 준다. 위 구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상황이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가 가져다가 무덤에 두었다. 이후 예수님의 제자들이 장례를 위해 방문했다. 이때 니고데모도 나타난다. 그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가지고 찾아왔다.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다. 니고데모는 어떠한 말을 남기지 않았다. 요한복음의 저자도 더 이상 그에 대해 더 이상 기록을 하지 않았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 외에 다른 복음서나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니고데모에 관한 기록은 지금까지 본 게 전부다. 그럼 다시 처음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을까?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끝은 여기까지다. 1-3. 가인과 아벨 이야기
“요즘 제가 새로 정착할 교회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교회를 개척하여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필자의 귀가 쫑긋해지는 말이었다. 그는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더욱 구미에 당기는 말을 던졌다. “큰 교회보다는 이 교회처럼 작고 아름다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제가 교회를 결정하면, 저와 교제를 나누고 있는 동료 3-4 가정이 함께 옮길 것입니다. 이번에 교회를 옮기면 이제는 평생 교회로 섬기려고 합니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순간, 그런 마음이 들었다. 교회를 옮기고 싶으면 그냥 말 없이 행동을 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의 다음 말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었다. “목사님께 하나 여쭈어 볼 게 있는데 괜찮을까요? 다른 목사님들이 대답을 잘 못하셔서 말이죠.” 목사 테스트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그가 질문할 게 있다고 하니 들어보기로 했다. 필자는 그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의 모습이 두 가지로 보였다. 첫 번째는 정말 성경을 읽다가 궁금한 점을 발견해서 찾아온 경우다. 그렇다면 굳이 필자의 연락처를 뒤져서 찾아오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제법 큰 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유명한 목회자와 또는 주석서 등 참고서를 통해서 답을 얻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필자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 1%의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실 위 질문에 정답을 못 찾는 이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그가 어느 이단 단체에서 훈련 받아 파송 나온 경우다. 적당한 크기의 교회를 선정해 동료들과 함께 교회에 침투, 결국 그 교회를 이단 단체화시키려는 전략에서 나온 행동이다. 이때 그들이 바라는 바는 자신들의 질문에 목회자가 답을 하지 못해야 한다. 소위 성경에 분별력이 떨어지는 목사와 그 교회를 찾고 있는 셈이다. 그래야 그 교회를 이단화하려는 데 보다 쉽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장이 위 경우의 수 중 두 번째에 해당된다고 판단을 했다. 어디에선가 특별 교육을 받지 않고는 이 질문을 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목회자에게 ‘미끼’(?)를 던지는 곳이 어느 곳인지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그 원장에게 질문에 답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해 주기로 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을까? 왜 그리하셨을까? 해당 성경 본문인 창세기 4장 1-5절을 천천히 다시 읽어보자. “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아담과 하와가 두 아들을 낳았는데 각각 그 이름이 가인과 아벨이다. 어느 정도 세월이 흘렀다. 그 아들들이 각자 제사를 드릴 나이가 될 만큼 장성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사들 드리는 날이다. 가인의 직업은 농업이었다. 그는 농사를 지어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반면 아벨의 직업은 목축업이었다. 역시 아벨도 그가 치던 양 중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다. 하나님은 이때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차이를 주었다. 즉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신 것이다. 왜 그리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시는 분들이 계신다. 하나님은 농산물이 아닌 양의 피흘림을 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피흘림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분의 의도는 무엇인지 알겠지만, 창세기 4장 전후 본문을 모두 읽어보아도 그 명확한 근거를 발견하기가 힘들다. 제사 제도를 설명한 레위기 이후에 나온 사건이라면 이해될 수 있지만, 지금 시점은 창세기 4장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피흘림으로 인한 죄의 전가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흘림을 염두에 두고 가인과 아벨의 제물에 차이를 둔 것일까. 정말 그렇다면 적어도 농업이 직업인 가인에게도 제물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정당한 게 아닐까? 또 어떤 분은, 하나님은 많이 드린 것을 좋아한다고 설명한다. 가인은 ‘땅의 소산’ 1개를 드렸지만, 아벨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의 2개를 드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다.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과 같은 줄로 판단한 모양이다. 그러면 무엇일까? 창세기 4장을 여러 번 읽어봐도, 영어 성경 등 다른 번역 성경을 찾아서 읽어봐도, 누워서 읽고 일어서서 읽어봐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을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아! 그렇다. 정답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신 이유를 히브리서 기자는 명확하게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바로 ‘믿음’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농업보다 목축업을 좋아하신다는 것도 아니고 또 1개보다 2개를 더 사랑한다는 것도 더욱 아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갖고 제물을 드린 아벨의 제사는 받으셨지만, 믿음 없이 제물을 드린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는 말이다. 성경이 스스로 성경을 설명해 주는 멋진 장면을 우리는 다시 한 번 발견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가 궁금했던 가인과 아벨 사건을 믿음의 문제로 설명을 해 주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배, 찬송, 기도, 성경공부 그리고 각종 모임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간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믿음’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우리에게 권면을 해 주고 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벨이 가졌다는 그 믿음, 반대로 가인이 갖지 못했다는 그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 하는 점이다.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인가. 아벨은 어떤 믿음을 갖고 제사를 드렸으며, 또 가인은 어떤 믿음을 놓치고 제사에 임했던 것일까? 그들의 믿음이 오늘 우리들의 ‘예수님 믿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그에 대한 접근은 본 책 3장(문맥 따라 성경읽기)에서 접근해 보겠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시기를 바란다. 가인과 아벨 사건에 대해 필자의 설명을 들은 그 원장이 조금 당황해 하는 듯했다. ‘설명을 잘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또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등의 적극적인 반응이 나오는 게 맞을 상황인데 그는 그렇지 않았다. 무덤덤했다. “더 질문 있나요?”라는 필자의 물음에 “아닙니다”라며 자신이 시작한 대화를 정리하려 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원장은 이내 대화 주제를 바꾸었다. 그것도 잠시일 뿐, 그는 ‘교회 분위기가 좋다’, ‘종종 연락드리겠다’는 등의 너스레를 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다음 헤어졌다. 이후 수년째 그에게서 연락이 온 바는 없다. 그 원장과 지인들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예배 참석은 물론 각종 모임에도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교인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집사, 안수 집사 그리고 교회 운영을 할 수 있는 장로가 되는 것이다. 빠르면 3-4년 정도면 가능할 수도 있다. 또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 다음 그들은 성경공부 모임을 만들 것이다. 성경공부를 하자는 데 누가 반대를 할 것인가. 처음에는 목회자의 지도를 받겠지만, 점차 자체적인 성경공부와 또는 외부 강사를 초빙해 모임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서서히 이단 사상을 주입시키게 된다. 1-4. 유월절 이야기
신앙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 성경읽기로 흔히 요한복음을 권한다. 예수님에 대해 보다 쉽게 기록해 놓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2장을 읽다보면 ‘유월절’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 유월절에 관심을 기울여 보자. 의외의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요2:13절에서다. 먼저 살펴보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요2:13) 유월절의 의미를 알아보려는 게 아니다. 물론 유월절은 유대인의 3대 절기 중 하나다. 우리의 설이나 추석처럼 1년에 한 번씩 돌아온다. 우리는 유월절이 요한복음에 몇 번 등장하는가에 대해 살피려는 것이다. 관주 성경을 보면 요 2:13절의 유월절 단어 앞에 관주 표시가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관주는 두 개의 요한복음 성경 구절로 연결시켜 준다. 바로 요6:4절과 요11:55절이다. 각각의 구절도 찾아보자. 아래와 같다.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요6:4) “유대인의 유월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하게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요11:55) 유월절이라는 절기 이름이 성경에 등장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바로 시간이다. 지금 유월절에서 다음 유월절까지의 기간이 1년이라는 점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어림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월절을 통해서 말이다. 정리를 해보자. 요 2장의 유월절과 요 6장의 유월절 사이가 1년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요 6장의 유월절과 11장의 유월절 사이 역시 1년이다. 합치면 요 2장에서 요 11장까지 만 2년이라는 시간의 계산이 나온다. 물론 관주를 계속 찾다보면 유월절이라는 단어 자체는 요한복음에 몇 차례 더 나온다. 유월절 단어가 나올 때마다 1년이라는 시간이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요 11:55절에서 언급한 유월절이 유월절 당일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다. “유월절이 가까우매”라는 표현 때문이다. 그 아래 구절 요 12:1절을 보면 “유월절 엿새 전에”라는 말이 나온다. 한 번의 유월절과 연관된 표현들이다. 요한복음 2장 이전에도 예수님께서는 많은 활동을 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시고, 가나 혼인 잔치의 기적을 베푸시는 등으로 적극적으로 움직이셨다. 그 기간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리고 요 20장부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40일간 사역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요한복음의 유월절을 근거로 예수님의 전체 공생애 기간을 더해보면 약 3년이 됨을 어림잡을 수 있게 된다. 멋지지 않은가. 오직 성경만을 가지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따져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물론 관주 성경이 필요하다. 이 멋진 작업을 한국교회 성도들이 소홀히 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1-5. 마태복음 이야기 마태복음의 특징 중 또 하나는 구약 성경을 참으로 많이 인용했다는 점이다. 역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서다. 바로 구약에서 언급된 그분(메시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고 한 것이다. 살펴보자. 먼저 마1:22-23절이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1:22-23) 예수님의 탄생 사건이다. 이것 역시 구약성경과 연관되었음을 마태복음 기자는 언급하고 싶었다. 위 성구는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하시는 말씀의 일부다. 22절에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구약의 선지자가 하신 말씀과 아기 예수의 탄생 사건을 연결시켰다. 그리고 23절은 그 선지자가 하셨다는 말씀을 인용해서 기록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가 그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 선지자가 누구이며 또 그가 어떠한 말씀을 주로 하셨는지에 대해 어렵지 않게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렇지 않다. 알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관주가 있다. 관주가 우리를 그 선지자에게로 안내해 준다. 우리네 선배들의 수고의 땀방울이 이미 그렇게 길을 만들어 놓았다. 위 23절 중 ‘보라 처녀가’에 관주 표시가 있다. 그 관주는 ‘사7:14’로 연결시켜주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하신 말씀이다. 그 앞에 ‘인’이라는 글자는 인용되었다는 의미다. 즉 이사야 선지자가 하신 말씀을 주의 사자가 인용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찾아보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7:14) 구약 이사야서에 이미 그러한 내용이 있다니 정말 놀랍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마태복음의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약 성경의 인용은 예수님께서도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 받으시는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마4:1-11절까지의 말씀이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마4:1-11)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하라”(마4:3)며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님은 그 마귀의 시험을 보기 좋게 물리치셨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무엇일까? 칼 같은 무기를 사용하시거나, 하늘 군대를 부르시거나 또는 공갈 협박 같은 게 결코 아니었다. 이미 기록된 구약 성경을 사용하셨다. 4절에 나타난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시면서 말이다. 그 기록된 말씀은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이다. 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것이다. 그런데 그 말씀이 어디 기록되었다는 것인가? 구약성경을 처음부터 읽어보면 알 수 있겠지만, 힘든 일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역시 우리 선배들이 이미 정리해 놓았다. 바로 관주를 통해서다. “사람이 떡으로만” 앞에 관주 표시가 있다. ‘인 신8:3’이라고 되었다.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을 인용했다는 의미다. 그 말씀 역시 살펴보자. 다음과 같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8:3) 모세5경 중 하나인 신명기서에서 이미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님’을 교훈해 주고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떡이 아니라 말씀으로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신구약 전체를 통해 흐르는 하나님의 원하는 바인 것이다. 위 “사람이 떡으로만”에 있는 관주에 성경구절이 하나 더 있다. ‘비 요4:34’가 그것이다. 이는 요한복음 4장34절과 ‘비교’해 보라는 말이다. 그 지시대로 요4:34절을 찾아 비교해 보자.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무슨 말인가. ‘예수님의 양식 =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라는 방정식이 나온다. 위의 구절과 함께 정리해 보자. ‘떡’과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 그리고 ‘예수님의 양식’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들을 연결해 보면 멋진 하나의 메시지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인생의 참된 기쁨과 거룩함을 떡을 추구하며 살아갈 때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때 맛볼 수 있다는 식이다. 관주는 계속해서 연결이 된다. 위 요 4:34절에도 관주가 있다. 그것까지 찾아보면 더욱 풍성한 성경 연구의 결과가 나오리라 본다. 풍성한 성경 연구는 관주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함을 알 수 있다. 이 시점에서 한 가지 긴장해야 할 게 있다. 마귀도 구약성경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조금은 황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감히 성경을 마귀가 인용하다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이다. 바로 위에서 본 마태복음 성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의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의 말씀으로 유혹에 실패한 마귀는 집으로 돌아간 게 아니다. 이를 갈며 다시 준비를 하고 등장한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하셨던 것을 흉내내길 했다. 바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마귀는 두 번째로 예수님을 유혹할 때 이렇게 말했다. 아래와 같다.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마4:6) “기록되었으되”라는 말로 예수님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가 너를 ···하리로다”라며 성경 말씀을 직접 인용하며 사용했다. 마귀도 성경의 내용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증거다. 마귀는 어느 성구를 인용한 것일까? 이때도 관주가 우리를 도와준다. ‘그가’ 앞에 관주 표시가 있다. 그것은 ‘인 시91:11-12’으로 안내한다. 즉, 마귀가 시편 91편 11-12절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유혹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시 91:11-12절은 아래와 같다.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시91:11-12) 마귀는 성경말씀을 듣기만 해도 기절을 하거나 도망가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또한 마귀는 성경 말씀을 전혀 모르거나, 인용하더라도 스스로 혼동되어서 잘못 사용해야 할 것 같은데 그것도 역시 아니다. 마귀도 아무렇지도 않게 성경말씀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도 성경 말씀을 인용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를 주는가. 요즘 이단은 과거와 달리 성경 구절을 많이 사용한다. 많이 사용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공부하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는 정통교회 성도들보다 더 많이 읽고 외우는 데 열정을 낸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여러 개의 성경 구절을 읊조리며 접근하면 우리는 쉽게 ‘아! 성경 말씀을 사용하니 이단이 아니겠구나’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단들도 이것을 십분 활용한다. ‘우리는 성경말씀만 사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로 정통입니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많이 사용한다고 해서 결코 정통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이단일 수 있다’는 말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반성도 된다. 두 사람씩 짝을 지어 가가호호 방문 전도하면 이단이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우리가 이미 오랫동안 그렇게 전도를 해왔다. 어느 날부터 우리는 그러한 전도 방식에 소홀히 하였고 이단들이 그 틈을 파고들어 온 셈이다. 그래서 이제 가가호호 전도하는 이들을 조심하라며 경계한다. 슬프지 않은가. 그런 세상이 되었다. 성경 구절을 많이 활용한다면 오히려 경계를 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제 우리는 성경 구절의 단순한 인용을 넘어 올바른 ‘성경 해석’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그릇된 성경 해석을 하며 많은 성경 구절 인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또한 악한 일이다. 본 특강은 바로 올바른 성경 해석(주해)에 접근하고자 한 것이다. 그 첫 번째 방식으로 관주를 활용하여 성경이 성경을 스스로 해석하도록 하는 점을 살펴보고 있다. 1-6. 홍길동 씨 이야기 1
앞서 언급됐던 홍길동 씨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어떤 사람이 신앙생활을 갈수록 잘 한다면, 즉 주일예배는 물론 새벽예배와 철야예배 등 각종 예배 참석은 물론이고 매일 전도하고 주변을 사랑으로 섬기는 일을 해가 지날수록 더욱 더 잘해 간다면 그는 점점 ‘사람’다워질까 아니면 ‘신’다워질까 하는 질문이었다. 이에 홍길동 씨는 ‘신’다워진다고 대답했고, 그 근거라며 요한복음 10장 34절의 성경 구절을 들었다. 이제 홍길동 씨가 사용한 ‘그 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하는 관점에서 조금씩 깊이 있게 살펴보자. 본 특강의 순서(1. 관주 사용하기, 2. 다른 번역서 사용하기, 3. 문맥 따라 성경읽기, 4. 참고서 활용하기)에 따라 몇 차례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이번에는 지금 우리가 훈련하고 있는 ‘관주’를 활용하여 접근해보자. 요10:34절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아래와 같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요10:34) 언뜻 보기에는 정말로 사람이 신이 된다고 하신 말씀처럼 보인다. 그것도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말이다. 정말 그럴까? 홍길동 씨는 위 성경 말씀이 사람이 신이 된다는 의미라고 주장했다. 홍 씨의 말대로 그 성경 구절이 과연 그런 뜻일까? 이제 하나씩 접근해보자. 먼저 ‘기록된 바’라는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어! 어디서 많이 본 구절 아닌가. 그렇다. 예수님이 마귀에서 시험 받으시는 장면에서 살펴본 바가 있다. 즉 ‘기록된 바’의 다음 문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직접화법의 문장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차용해 온 간접화법의 문장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그 차용해 온 문장이 바로 그 다음에 나오는 문장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이다. 다시 말해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의 문장은 예수님께서 다른 곳에 이미 기록된 말씀을 빌려온 것이다. 그럼 어디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일까? 역시 관주가 고마운 일을 또 해주었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말씀 앞에 관주 표시가 있다. ‘인 시82:6’이라고 안내를 해 준다. 시편 82편 6절을 인용했다는 표시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구약 성경의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요한복음 당시 상황에서 말씀하고 계신 장면이다. 그렇다면 그 시편 말씀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시82:6) 지금 우리는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 34절에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찾으려 접근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해석을 위한 첫 번째 방법으로 관주를 사용하였고, 이때 관주는 우리를 시편의 한 구절로 안내했다. 위 시편 구절을 천천히 읽어보자. 다음과 같은 공식이 만들어진다. ‘너희=신들=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고 말이다. 있는 그대로 정리한 것이다. 자 그럼 이때 ‘너희’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그가 바로 ‘신’이고 ‘지존자의 아들’이 된다는 공식이다. 이 장에서는 일단 여기까지만 접근하겠다. 그 다음 해석을 위한 접근은 다음 장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관주에 대해 살펴보고 있으며, 또 그것을 연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만 인내하며 계속 정독하시기를 바란다. 현재까지 요 10:34절의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는 예수님께서 직접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시편의 한 말씀을 인용하신 것이라는 데까지만 살펴보았다. 1-7. 성구사전 사용하기 관주 활용에 조금 더 도움을 주는 도구가 있다. 바로 <성구사전>이다. 참고로 ‘성경사전’이 아니다. 사용 용도가 다르다. 서점에 ‘성구사전’ 이름으로 한두 종류밖에 없다는 게 조금 아쉬운 점이 없지 않다. 필자가 사용하고 있는 <성구사전>은 오래 전에 구입한 것으로 서울서적에서 출판한 1996년 판이다. 헌책방에서 그 책이 매우 저렴한 가격으로 진열되어 있는 것을 본 바 있다. 오래된 것이라 책의 편집과 활자 모양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성경 연구하는 것에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성경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개역개정판 이전의 개역한글판 성경을 사용했다는 점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성구사전>은 말 그대로 ‘성구’를 찾는 일을 도와주는 사전이다. 우리는 종종 “아! 00단어는 알겠는데 그것이 어느 구절에 있지?”라며 답답해 할 때가 있다. 이때 효과를 주는 도구가 바로 <성구사전>이다. 지금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도 보다 쉽게 검색하여 찾을 수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성구사전>은 지금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 준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는 방금 요한복음 10장 34절의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의 문장이 시편에서 인용된 것임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신(神)이란 표현이 성경에 얼마나 나올까’라는 궁금함이 일기도 한다. 그때 <성구사전>을 이용하면 된다. ‘신’의 단어를 찾으면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해당 성경구절이 나열되어 나온다. 좋은 점은 그 모든 구절이 한 눈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신’에 해당 구절이 너무 많아 시편에서만 사용된 예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아래와 같은 식으로 나타난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 시5:4 신약의 복음서에서 ‘신’의 단어는 위에서 언급한 요10:34절 외에는 없었다. 위 성구들을 직접 성경을 통해 살펴봄으로 ‘신’의 의미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다. 진짜 ‘신’의 의미로 사용된 것인지, 아니면 ‘신’과 같은 존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인지 아니면 또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가 있다. 앞서 언급한 ‘유월절’이라는 단어도 찾아보자. 우리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월절 단어를 통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어림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복음서에서 ‘유월절’을 찾으면 어떻게 될까? 예수님 공생애 기간에 대해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성구사전>이 도움을 준다. 누가복음에 나타난 유월절을 성구사전에서 찾아보자. 아래와 같다.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눅2:41 크게 두 번에 걸쳐 유월절 기간이 나타난다. 누가복음 2장과 22장이다. 누가복음의 저자가 유월절 절기에 대해서 요한복음의 저자보다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각각 어떠한가? 아래와 같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마26:2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막14:1 마태복음에서는 26장에서 집중되어 나타나고 마가복음에서는 14장에 한꺼번에 나타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보다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유월절’을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파악하기 훨씬 수월하다는 점이다. 다른 복음서와 달리 요한복음이 갖는 특징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자의 책상 바로 앞 책꽂이에는 항상 관주성경과 성구사전 등이 기본적으로 준비되어 있기를 권해본다. 본 특강이 진행되면서 몇 가지가 더 추가될 수 있다. 1-8 관주의 한계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관주성경의 ‘관주’가 기능상 완벽한 것은 물론 아니다. 관주의 안내를 따라 성구를 찾아가 보면 특별히 관련이 없는 구절이 나타날 경우도 적지 않다. 종종 엉뚱한 구절과 연결해 놓을 때도 있다. 반대로 꼭 필요한 관련된 성경 구절과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다. 아쉬운 점이다. 관주의 한계다. 이 부분은 3장(3-7 관주의 한계)에서 보다 자세히 취급하겠다. 조금만 더 참고 계속해서 본 특강을 읽어 가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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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