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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barnabak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축복
요한복음 10:1-10
가끔 열쇠를 가지고 가지 않아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족이 올 때까지 기다린 적이 있을 것입니다. 리는 경험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 자기가 잘못했음에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가족들한테 연락해서 ‘어디쯤 오고 있느냐?’ ‘빨리 오라’고 채근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날씨가 춥거나 피곤하고 힘든 날은 더 짜증이 날 수 밖에 없습니다.
빨리 집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밥을 먹고 좀 쉬고 싶은데 그런 것들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짜증이 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왜 사람들은 그렇게 집안에 들어가고 싶어 하고 집안에 잠시라도 들어가지 못하면 짜증을 내는 것일까요?
집안에는 평안이 있고 휴식이 있고 안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집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집안의 평안과 안식과 풍성함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집안의 축복은 안으로 들어가야 누릴 수 있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을 열고 통과해야 하는데 그 문이, 그 축복의 문이 잠겨있으니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 놓은 것일까요?
때로 멋으로 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음식점에 가면 아주 고전적으로 예쁜 창문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 창문이 너무 멋있어서 진짜 창문인가 하고 살펴보면 실제 창문이 아니라 폼으로 만들어 놓은 장식품 창문입니다.
때로 햇빛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 문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문의 용도는 제재의 의미가 있습니다.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문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가족 외에 다른 사람이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만들었고, 어느 때는 짐승이, 어느 때는 바람이나 소음이나 냄새 같은 자연의 현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 바로 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문을 갖고도 제재가 잘 안되니까 거기에 자물쇠까지 추가하고 그 위에 노크라는 말까지 붙여놓는 것입니다.
제재의 역할을 잘 할 때 문은 그 기능을 잘 감당하는 것이고 그래서 더욱 튼튼한 문을 만들기 위해 인류는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문은 들어가기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문이 없다는 것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문이 있다는 것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알리 바바와 40명의 도적에 나오는 그 문도 아무나 쉽게 열 수 있는 문은 아니었지만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외울 때 그 문은 열렸습니다.
예수님의 무덤도 돌로 문을 만들어놓았기에 문을 치우면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문은 제재와 더불어 들어가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나는 양의 문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는 00다’ 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의 유명한 내용가운데 하나입니다.
양의 문이라고 하는 것은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고 나가는 문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에는 양의 우리를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동네에 만들어놓은 튼튼한 우리가 하나있고요 또 하나는 날씨가 따뜻할 때 임시로 들판에 만들어놓은 우리가 있습니다.
어떤 우리가 되었던 예수님은 그 양을 보호하고 쉬게 하고 잠을 자게 하는 우리의 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양들에게 있어서 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예전에 제가 시골에서 소를 끌고 풀을 뜯길 때 저녁때가 되면 소가 집을 향해 가려고 합니다.
저녁이 다 돼가고 점점 날은 어두워 가는데 소가 평안하게 풀을 뜯고 아무 걱정 없이 그 자리에서 자려고 준비하는 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직감적으로 불안하고 여기는 위험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소리를 지르고 안절부절 못하고 빨리 와서 집으로 데려가라고 야단을 칩니다.
소가 되었던 양이 되었던 우리에 들어가지 못하면 위험할 수 있습니다.
보호를 받을 수 없고, 평안히 쉴 수 없고, 어떤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에게 있어서 우리에 들어가는 것은 정말 생명처럼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우리에 들어가는 양의 문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유명한 문들이 있습니다.
프랑스에 가면 개선문이 있고 독일에 가면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고 한국에는 독립문이 있고 광화문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세상의 그 어떤 문보다 유명한 문이 나오는데 그 문이 양의 문입니다.
이 양의 문이 왜 유명한 문입니까?
이 문이 유명한 것은 모양이 아름다워서가 아니고 그렇다고 문이 크고 웅장해서 유명한 것도 아닙니다.
어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이 문에 숨겨져 있어서 유명한 것도 아닙니다.
그 문이 유명한 것은 그 문이 양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양의 문’이라고 했을 때 이 말씀 속에는 ‘너희는 양’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 79편 13절에 보면, “우리는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대대에 전하리이다.” 했고,
시편 95편에서는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는 다윗의 시편 속에서 우리는 여호와가 나의 목자이실 뿐 아니라 나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힘이 없는 양에 불과하다는 다윗의 자기 인식이 깔려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이 위대하고 훌륭했다고 하는 것은 사실 자기에 대한 솔직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성경의 말씀대로 자신을 양으로 보았습니다.
자신을 양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는 목자 되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순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은 어릴 때부터 양을 치는 목동이었는데 그러기에 다윗은 누구보다도 양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솔직히 우리는 양에 대한 이해가 부족합니다.
양을 많이 대할 수 없기 때문인데 기록에 의하면 양에게는 10가지의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가 눈이 나쁘다는 것이고 둘째가 잘 속는다는 것입니다.
셋째가 잘 넘어지고 네 째가 넘어지면 스스로는 잘 못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중심을 금방 못 잡고 여섯 번 째는 이기적이고 제멋대로라는 것입니다.
일곱 번째가 방향감각이 없고 여덟 번째는 한 번 왔던 길로 다시 돌아온다는 귀소본능이고 아홉 번째는 방어력이 제로라는 것입니다.
열 번째가 죽을 때가 되면 온순해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러한 양의 모습이 곧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습니다.
양에게는 목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그 목자를 잘 바라보고 따르고 순종할 때 양이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다윗은 목자 되신 하나님을 항상 의지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을 위대한 인물로 이스라엘의 성군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내가 양이라고 하는 성경의 시각을 얼마나 솔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부족하고 연약하고 힘이 없는 양의 이미지가 곧 나라는 사실을 얼마나 받아들이고 살고 있습니까?
정말 그렇게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목자 되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가 목자라도 되는 것처럼 나를 바라보고 나의 힘과 지혜를 의지하면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 만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인간의 비극은 자신을 양으로 인정하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자신이 목자인양, 하나님인양, 자신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자신을 의지하는 교만이 인간을 비극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머리터럭 하나라도 희고 검게 할 수 없다는 말로 인간의 연약함을 잘 지적해주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머리털의 한 가락도 내가 내 마음대로 희고 검게 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양은 언제나 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양이 사자의 옷을 입었다고 사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호랑이의 옷을 입었다고 호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문화의 옷을 입고, 기술의 옷을 입고, 문명의 옷을 입었다고 인간이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발달된 옷을 입었거나 입지 않았거나 인간은 그냥 인간일 뿐입니다.
인간 문명이 발달했다고 여러분 절대 목자가 되었다고 착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돈의 옷을 입고 명예의 옷을 입고 권력의 옷을 입었다고 양 이상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무늬의 옷을 입고 어떤 모양의 옷을 입어도 인간의 인간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그저 양 일 뿐입니다.
양은 스스로 길을 찾아갈 수 없고 스스로먹이를 구할 수 없습니다.
양은 자기의 생명을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습니다.
양이 양 자신을 책임질 수 없는 것처럼 또한 새끼를 책임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자녀를 책임지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때문에 자녀들이 잘못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양된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의 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얻는 축복이 있습니다.
먼저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에서 주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했습니다.
문은 구원의 역할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문을 통하여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통하여 방주에 들어갔을 때 그의 가족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 양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구원의 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하십니다.
다른 구원의 문이 여러 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문이 유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다른 문은 없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문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문밖에는 없습니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문도 그 중에 하나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러한 유혹에 우리가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문만이 천국으로 향하는 구원의 문임을 확신하면서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양의 문이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좋은 꼴을 얻게 됩니다.
9절 하 반절에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꼴을 얻게 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좋은 꼴을 얻게 된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꼴은 양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이요 축복입니다.
그 꼴을 양들은 스스로 얻을 수 없습니다.
양들이 그 좋은 꼴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며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을 배우며 그 분을 따라가는 것이 좋은 꼴을 얻는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꼴이 세상의 어떤 문화나 예술이나 오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을 믿으시고 예수님만을 따라가는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양들을 유혹하는 도둑들은 좋은 꼴이 교회에 있지 않고 세상에 있다고 꼬득입니다.
그래서 양의 문을 통하여 드나들게 하지 않고 세상의 어떤 문화나 취미나 오락을 통하여 드나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꼴을 우리들에게 주지 못합니다.
좋은 꼴을 얻는 비결은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며 그 분을 통하여 배우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그럴듯한 유혹에 넘어가지 마시고 오직 끝까지 주님만을 따라가는 여러분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만을 따라갈 때 우리는 좋은 꼴을 얻게 되고 생명을 얻고 축복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로 양의 문이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서 살아갈 때 생명을 얻게 되고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에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들을 방목할 때 어느 때는 양들을 들판에서 재워야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 양들은 한데 모여서 서로 의지하며 잠을 잡니다.
그런데 양들이 그렇게 평안하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은 목자가 양의 문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춥다고 양들을 버려두고 텐트 속에 들어가서 자는 것이 아니라 양들이 모여 자는 그 앞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곳에는 울타리도 없고 담도 없습니다.
우리라고 말할 수 있는 장치는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목자가 양 옆에서 지키고 있다는 그 한 가지 사실만으로 양들은 안전하게 편안하게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지 그곳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곳이든 양의 문이신 우리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고 의지할 때 우리는 생명을 유지하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양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양의 행복은 절대로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목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목자를 떠나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목자와 함께 하는 것이 양의 행복입니다.
내 스스로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인도하는대로 따라갈 때 행복을 자연히 찾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 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양의 행복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감으로 구원을 얻고 평안을 얻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