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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되자
창 39:1-6
■ 영국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인 <브린트 갓 탤런트>가 있습니다. 여기에 출연한 37살의 남자가 있습니다. 그는 휴대폰을 판매하는 직장에 근무하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불룩 나온 배와 비뚤어진 치아, 그리고 별로 훈남 스타일이 아닌 외모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학창시절에는 왕따를 당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고, 중병에 걸리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친구들이 놀려도 노래를 하는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비록 음악을 공부하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속에는 노래를 부르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드디어 숨은 노래 실력자를 선발하는 영국의 노래 경연대회에 나옵니다. 그의 외모를 본 심사위원들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무슨 노래를 부를 것인가 묻자 오페라를 부르겠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의 노래가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열광합니다. 심사위원들도 믿기 어렵다는 흥분된 반응을 보입니다. 그가 바로 폴 포츠입니다. 그는 첫 번째 오디션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로소 폴 포츠임을 알았다.” 내가 누구인가를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고, 전 세계를 돌면서 희망을 전하는 전도사가 됐습니다.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야구의 재미는 바로 9회 말 역전에 있습니다.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9회말 투 스트라이크 쓰리볼 상황에서 극적인 홈런으로 승부가 역전될 때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합니다. 우리 인생도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질 때 엄청난 감동이 밀려옵니다. 오늘 우리는 인생의 놀라운 역전을 이룬 한 주인공을 만납니다.
그는 불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시련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공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본받아야 할 중요한 신앙의 모델이요, 인생 모델이요, 인생역전의 성공 모델입니다.
요셉이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인생역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비결을 함께 배울 수 있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셉의 삶은 한 마디로 고난의 연속입니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편애 속에 형들로부터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됩니다. 이복 형들로부터 왕따를 당합니다. 멀리서 양을 치고 있는 형들에게 안부를 전하라는 부모님의 심부름을 갔다가 어려움에 빠집니다. 꿈쟁이 요셉이 온다고 비아냥거리던 형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를 죽여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에게 물려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자고 모의를 합니다. 맏형인 르우벤의 제안으로 목숨만은 살려줍니다. 결국은 물이 없는 구덩이에 던져집니다.
우리의 인생 여정도 밑바닥 구덩이에 던져질 때가 있습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수고의 땀도 흘리며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원치 않는 순간에 구덩이에 헌신짝처럼 내동이 쳐집니다.
왜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켜주신다고 말씀하신 주님께서 그런 아픔과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내가 붙잡고 몸부림치고 있는 것을 내려놓으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능력으로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애를 씁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도 할 수 있다는 교만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고난은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합니다. 고난은 자신의 교만을 깨뜨리는 망치와 같습니다. 고난은 내가 붙잡고 있는 세상의 줄을 놓게 만듭니다. 고난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우리를 떠나게 하려는 하나님의 아이디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30년간 애굽에서 살고 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학정에 시달리게 하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애굽의 삶이 진절머리가 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편안히 먹고 잘 살았다면 결코 그곳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독하게 일을 시키고, 핍박을 하고, 심지어 태어나는 사내아이들까지 죽게 만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약속의 땅, 축복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한 놀라운 계획이 숨겨져 있습니다.
밑바닥의 고난은 우리를 잘못된 자리에서 떠나게 합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세상의 썩은 줄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움켜쥐고 있는 손을 활짝 펴게 만듭니다.
■ 전에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잡는 법을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원주민들이 원숭이를 잡기위해 해질 무렵에 조롱박에 구멍을 뚫어서 나무에 매달아 놓습니다. 그 속에 원숭이가 좋아하는 바나나, 땅콩 같은 것을 넣어둡니다. 밤이 되면 원숭이가 나타나 손을 펴서 조롱박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 안에 있는 음식을 덥썩 집고 나면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원숭이는 밤새도록 손을 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런데도 손이 빠지지 않습니다. 동이 트고 기진맥진해 있는 원숭이를 원주민이 나타나 잡습니다. 손에 붙잡고 있는 것을 놓기만 하면 도망칠 수 있을 텐데 욕심 때문에 끝까지 쥐고 있다가 붙잡히게 됩니다. 이것이 어쩌면 우리 인생의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허탄한 것을 붙잡고 끝까지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대나무가 자신의 속을 비워내야 세상을 울리는 피리가 되듯이 우리 안에 쌓여 있는 욕심과 정욕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붙잡고 있는 나쁜 습관과 버릇, 잘못된 생각과 거짓, 불의와 교만함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는 시기와 질투, 방탕함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큰 손은 빈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욕심으로 가득찬 내 손을 펼 때 하나님께서 더 풍성하게 채워주십니다.
밑바닥의 고난은 우리를 정결하게 만듭니다. 세상의 줄을 놓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잡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더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밑바닥의 고난은 새로운 희망의 출발점입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발버둥을 치고 있는데 그 옆에 도사 같은 사람이 말했습니다. “조용히 물 밑을 보라. 뭐가 보이는가?” “바닥이 보입니다.” “바닥까지 내려가서 힘껏 치고 올라오너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사람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둘 중에 하나입니다. 누군가가 구해주던지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바닥으로 내려가 바닥을 박차고 다시 올라오는 것입니다.
바닥은 절망의 자리, 포기의 자리, 실패의 자리가 아닙니다. 바닥은 다시 새로운 미래를 향해 솟구쳐 오를 수 있는 기회요 축복의 자리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는 자리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처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때로는 우리에게 주어진 밑바닥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바닥 속에 주님의 놀라운 뜻이 있음을 헤아리는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가 파송의 찬양으로 부르는 찬송가 620장 ‘여기에 모인 우리’ 2절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 주님이 뜻하신 일 헤아리기 어렵더라도 언제나 주 뜻 안에 내가 있음을 아노라♪
우리는 내가 가는 인생의 여정을 다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벌어져 고난의 밑바닥으로 떨어질지라도 나의 모든 삶의 주님의 뜻 안에 있음을 믿으십시오. 함께 고백해 볼까요? “나의 모든 삶은 주님의 뜻 안에 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 여러분의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생각대로,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는다고 원망 불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내가 수고하고, 애를 쓰고, 최선을 다했지만 여전히 바닥에 머물고 있다면 그 자리가 바로 은혜의 자리요, 축복의 자리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기를 원하시는지요. 내가 처한 현실이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문제를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밑바닥에 던져져 있다면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을 붙잡으십시오. 그리고 내일을 향한 꿈을 꾸십시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최선의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습니다. 고난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둘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9장에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표현이 네 번이나 반복됩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3절에도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21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23절에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요셉이 형통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가 위대한 꿈을 꾸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남보다 탁월한 지혜나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의 인생은 언제나 잡초와 같은 인생입니다. 인신매매를 당하고, 감옥에 갇히고, 별 볼일 없는 변방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요셉과 동행하십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삶에 간섭하시고, 그의 꿈까지도 지켜주십니다. 요셉은 잡초같은 인생위에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입니다. 우리들이 어디에 있느냐? 환경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환경을 보면 요셉은 원망불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손가락질을 하며 ‘해도 너무 하십니다’라고 소리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비록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킴으로 감옥에 갔지만 여전히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봅니다. 자신에 꿈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꿈을 이루실 것을 믿음으로 기대합니다. 요셉은 다시 바닥으로 추락했지만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 바닥은 바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새롭게 그려보는 기회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변하지 않습니다. 비록 믿음을 지키다가 감옥에 갔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또 다른 축복의 기회가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드라마를 펼쳐가는 무대가 됩니다. 요셉은 감옥에 갔지만 특별한 감옥에 갑니다. 그곳은 폭력배나 소인배들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왕과 관련된 일로 잘못을 저질러 잡혀온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당시에 애굽의 최고의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감옥입니다. 요셉은 여기서 특별한 정치와 외교와 경제에 관한 개인교습을 받습니다. 그는 돈 한푼들이지 않고 당시 최고의 실력자들로부터 개인레슨을 받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외면하거나 버리시지 않습니다. 어디로 가든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숨결을 깨닫고 사는 자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을 누가 고발하리요?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와 항상 동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숨결을 깨닫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어떤 밑바닥의 고난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는 자는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역전인생의 주인공으로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셋째로, 사명을 붙잡고 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가장 힘든 밑바닥의 고난을 통과했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 힘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붙잡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명을 가지고 사는 자는 어디서나 최선을 다합니다. 적당히 일하지 않습니다. 사명자의 특징은 성실함과 책임감입니다.
달라스 신학교의 총장이었던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요셉의 특징을 한마디로 “Integrity and Forgiveness” 라고 말합니다. "성실함과 용서“가 요셉의 인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어디서나 최선을 다합니다.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합니다. 얼마나 원망과 분노가 많았을까요? 그런데도 요셉은 최선을 다해서 일을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보디발이 보기에도 하나님이 함께하는 자임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자는 형통하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손을 대는 곳마다 복이 임합니다. 보디발의 집과 밭까지도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요셉처럼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잘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비록 과정은 힘들고 어렵지만 결국은 해피엔딩, 하나님의 사람은 복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성공 이전의 요셉은 삶은 성실함입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된 이후의 삶은 용서의 삶입니다. 저는 창세기를 읽으면서 가장 멋진 부분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합니다. 흉년이 들자 야곱이 아들들을 보내서 곡식을 사러 보냅니다. 형들을 본 요셉은 금방 알아챕니다. 막내 베냐민을 보기위해 형들을 애먹입니다. 두 번째 형들이 왔을 때 요셉은 자신의 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신분을 밝힙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45:5)
두려워 떨고 있는 형들을 향해서 요셉은 말합니다. 나를 애굽에 인신매매를 했다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한탄하며 후회하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형들보다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고백입니까?
요셉은 과거에 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전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우리는 종종 과거의 나쁜 기억이나 상처에 매여서 앞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불행한 인생으로 빠져듭니다. 그러나 사명을 깨달고 사는 자는 과거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밑바닥의 고난과 상처를 생명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로 삼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과정임을 깨닫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전 남아공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억울하게 27년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그 얼굴은 기쁨과 희망으로 가득했습니다. 원망과 분노가 없었습니다. 결국 진정한 용서의 사람이 되었던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흑인과 백인을 하나로 묶어서 남아공을 새롭게 만드는 위대한 지도자가 됐습니다.
■ 몇 년 전에 미국 샌디애고에서 훈련 중이던 전투기가 고장으로 주택을 덮쳤습니다. 안타깝게도 재미동포인 윤동윤 씨의 집이었습니다. 그의 아내와 두 딸, 그리고 서울에서 잠시 와 있던 장모님이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나 억울한 죽음입니까? 이게 마른하늘에 날벼락과 같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윤동윤씨는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투기 조종사는 사고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분노와 증오의 말을 쏟아내리라 기대했는데 뜻 밖에도 탈출한 조종사를 용서하고 기도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말라고 오히려 위로했습니다. 그의 말에 모든 미국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감명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쓰지않고 아내가 생전에 도왔던 어린이 재단과 기독교 단체에 후원금을 보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미국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엄청난 슬픔을 당한 피해자였지만 가해자를 용서하고 기도함으로 미국 사회에 하나님의 샬롬을 선포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를 이룹니다. 하나님의 평화를 선포하는 통로가 됩니다. 용서의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축복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 앞에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결과가 됩니다.
하나님은 밑바닥의 고통의 삶 속에서도 역전의 인생으로 거듭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누가 요셉처럼 역전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요? 고난 속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깨닫고 사는 자입니다. 언제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매이지 않고 하나님의 사명을 붙잡고 사는 자입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믿음으로 도전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모험의 발걸음을 떼는 자는 위대합니다. 앞으로도 어떤 밑바닥의 고난이 안개 같은 미래 속에서 우리를 기다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가야합니다. 사명을 포기하는 인생은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처럼 후회 없는 인생의 후반전을 향하여, 내 인생 역전을 꿈꾸며 도전하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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