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1944년생으로 인천 덕적도에서 1남 3녀의 맏이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다 1952년 큰이모집과 가까운 대부도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도에서 아버지는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리셨는데, 저는 어렸어도 새벽에 아버지를 따라 물고기도 잡고, 벽돌 쌓는 법도 보고 배우며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이사하고 몇 해 뒤, 집이 가까워 자주 왕래하던 큰이모가 뱀에 물려 24시간 만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평소 건강하시던 이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저도 충격을 받았지만, 큰이모집에 남겨진 어린 사촌 동생들이 울고불고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때 저는 슬픈 마음에 ‘하나님, 죽음이 없는 세상은 없나요?’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작은이모가 저희 집에 오셨습니다. 작은이모는 저를 어릴 때 교회에 데리고 다니던 분인데, 저에게 오셔서는 어느 교회에 다니고 있는지 물으셨습니다. 대부도로 이사하고부터 장로교회에 다니고 있을 때라 장로교회에 다닌다고 말씀드리니 이모는 “전도관에 나가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어릴 때 살던 덕적도에는 주변에 일가친척들이 모여 살면서 일요일이면 다 같이 감리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렸는데, 작은이모는 이후 전도관에 나갔던 것입니다. 이모는 전도관에 가서 들었던 이야기를 저에게 전해 주며 천국은 죽음이 없고, 아름다운 세계라고도 했습니다. 큰이모가 돌아가시고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던 저에게 작은이모가 들려주신 천국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찾던 곳이 바로 여기에 있구나.’ 싶을 정도로 저의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저는 당장 전도관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이모를 따라 천막으로 지어진 대부도 전도관에 가게 되었습니다.
대부도 전도관에 도착해 보니 때마침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전도사님이 서 계신 단상 쪽에 비가 막 내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상하다. 비가 오면 다른 곳도 와야 하는데 왜 저기만 오지?’ 하며 의아했지만, 잘못 본 것이라고 여기고 지나쳤습니다. 그날 제가 본 것이 이슬 은혜라는 것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대부도 전도관에 다녀오고 신이 났던 저는 이후 3살, 5살, 7살 동생들까지 데리고 더 열심히 전도관에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도 전도관에 나가고 얼마 뒤, 전도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나면서 열심이었던 대부도 교인들은 제단을 제대로 지어 하나님께 예배드리자고 마음을 모았습니다. 다양한 건축자재가 없던 때라 산꼭대기에 올라가 돌을 골라 내려오면 시멘트와 섞어 담을 쌓았는데, 저도 어른들을 도와 제단을 지으면서 더 열심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이런 저를 보시고 아버지께서는 제가 제단 일에만 신경 쓴다고 생각하셨는지 어느 날 저를 불러 “전도관에 나가더라도 좀 쉬었다가 나가거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아버지, 제가 길을 찾았는데 어떻게 쉬었다가 가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못 하겠습니다.” 하며 확고하게 말씀드린 후 계속해서 제단에 나갔습니다.
대부도 전도관에 다니고 있는 동안 다른 지역에서는 하나님을 모시고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여러 번 들려왔지만, 저는 아버지의 반대로 매번 다른 지역 집회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1956년 1월 인천전도관 개관 집회 소식을 접하고 어렵게 아버지께 말씀드리니 간절한 마음이 통했는지 다른 전도관에도 한 번 갔다 와 보라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직접 인도하시는 집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천 전도관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자리에 앉아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잠시 후 하나님께서 등단하셨습니다. 곧이어 하나님의 찬송 인도가 시작되면서 어디선가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나더니 금세 냄새가 싹 변하면서 백합화 꽃향기가 진동했습니다. 향기는 금방 코로 들어왔다가 사라지고 또 다른 향기가 왔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며 예배시간 내내 몇 번이나 맡아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단상을 치실 때는 서 계신 높은 단상에서 사람들 쪽으로 불덩이가 확 내려오는 모습도 보였는데, 그 순간 제 가슴 속은 불덩이가 들어간 것처럼 뜨거워졌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뜨거움은 차차 시원함으로 바뀌면서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앞사람이 안 보일 정도로 뽀얗게 내리는 이슬 은혜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단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이슬비나 불성신, 향취로 임하신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인천 개관 집회에서 직접 은혜를 체험하고 보니 제 앞에 계시는 분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3일 동안 저는 인천 권사님 집에 잠시 기거하며 매일 인천전도관으로 달려갔습니다. 집회에 참석하면서 놀라운 일이 많았지만 가장 놀랍고 신기했던 일은 제 옆에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앉아 있던 자리 옆에는 한 남자가 들것에 실려 와 예배시간 내내 거의 산 송장처럼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고 하나님께서 병 나은 사람은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니 들것에서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나 앞으로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하나님께서 단에 서 계시고, 은혜받은 사람들이 단상 밑에 나와 간증을 하던 때였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려고 안 다닌 곳이 없다. 외국이고 어디고 안 간 데가 없고, 그렇게 다니면서 그 많던 재산을 다 날렸다.”고 했습니다. 저는 ‘세상에 저렇게 다 죽어가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는 걸 보니 참 신기하다.’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예배를 드리고 난 후 옆에 있던 꼽추의 등이 펴지며 혹 같은 게 없어진 것을 목격한 것도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 집회에는 은혜가 내린다,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퍼지며 사방에서 물밀 듯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집회가 끝나면 참석한 사람들에게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저도 처음으로 안수를 받게 되었는데, 하루는 안수를 받고 또 받고 싶어서 안 받은 쪽으로 다시 가 앉아 있었습니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안수해 주시며 오시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하나님께서는 저를 쏙 빼놓고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저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하며 1958년 소사신앙촌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소사신앙촌은 1957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곳곳에 집들이 지어져 있었고, 제단 터 닦는 일도 한창 진행 중이었습니다. 매일 새벽예배를 마치고 우물이나 건물을 짓는 데 쓰일 돌을 저마다 머리에 이고 내려오면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 주셨는데,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평소 누구보다 큰 돌을 옮기고 싶어 커다란 돌을 머리에 이고 내려오다 하루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어 자그마한 돌을 방석에 싸서 가슴에 품고 내려왔습니다. 안수를 받으려고 하나님 앞에 섰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의 이마를 손가락 하나로 톡 찍듯이 안수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키가 너무 작아서 축복을 조금만 해 주셨나?’ 생각하며 다시 줄을 서서 안수를 받으니 하나님께서는 조금 전과 같이 손가락 하나로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셨는지 당시에는 그 이유를 미처 알지 못했습니다. 꾀를 부려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1958년 6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는 오만제단 터인 노구산에서 집회가 열려 은혜받으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저도 집회에 참석했는데, 자리를 뺏길까 봐 지척에 있는 집에도 가지 않고 집회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찬송을 인도하시면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고, 6일동안 물만 먹으며 자리를 지켰는데도 배고픈 줄 몰랐습니다. 은혜를 받고 즐거웠던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첫댓글 잘보고갑니다.
늘 잘 보고 있어요 ㅎㅎ
잘보고가요
잘 봤습니다~
잘보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