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 김선우 / 작품
김선우 시인
출생
1970년생)| 개띠
출생지
강원 강릉시
데뷔 1996년 창작과 비평 등단
학력 강원대학교 국어교육학 학사
시인은 과감하고 원초적인 언어로 여성의 정체
성을 묘사하고 돌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으로 인생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에코페미니즘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줬다.
*에코 페미니즘이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는 여성의 몸은, 우리
삶의 터전이며
산업화로 인해 고갈되는 지구생태계와 닮은꼴
이라는 통찰의 확산과 함께,
특히 생명의 원천인 여성의 몸에 대해 새롭고
다양한 관점들을 가져보는 흐름이다.
2008년에는 첫 소설도 썼는데 식민지 조선을
배경으로
천재 무용가 최승희의 삶을 그린 <나는 춤이다
>를 냈다.
어미木의 자살 1 / 김선우
그녀를 지날 때 할머니는 합장을 하곤 했다. 어린 내가 천식을 앓을 때에도 그녀에게 데리고 가곤 했다. 정한 물과 숨결로 우리 손주 낫게 해줍소. 그러면 나무는 솨아, 솨아아 소금내 나는 바람을 일으키며 내 목덜미를 만져주곤 하였다.
오래된 은행나무. 노란 은행잎이 꽃비 내리는 나무 아래 할머니가 오줌을 누고 계셨다. 반가워 달려가니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엄마로 변해 있었다. 참 이상한 꿈길이지. 오줌 방울에 젖은, 반짝거리는 은행잎이 대관령 고갯마루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죽었다고, 시름시름 앓더니 어느날 벼락을 맞았다고 했다.
그 땅에 새 길이 포장될 거라고, 길이 나면 땅값이 오를 거라고 은근히 힘주어 한 사내가 말하였다.
이상도 하지, 자살이란 말이 떠오른 건. 꿈 없는 길, 인간에 절망한 그녀의 자살의지가 낙뢰를 불러들였는지도 몰라. 부러진 가지, 그녀가 매달았던 열매 속에서 피흘리는 엄마들이 걸어나왔다.
대관령을 넘으며 내가 꾼 낮꿈은 엄마가 나를 가질 때 꾸었다는 태몽과 닮아 있었지만, 오래된 은행나무, 그녀를 몸삼아 산보하던 따뜻한 허공의 틈새로 절룩거리며 걸어오는 늙은 오후가 보였다. 순식간에 늙어버린 대기의 주름살 속으로 반짝거리며 사라져가는 태앗적 내가 보였다.
어미木의 자살 2
김선우
그날 내가 어머니의 살점을 씹으며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동공, 거대한 눈동자인 三十三天이 안으로 확 열리며 눈동
자를 감싸쥐고 있던 실핏줄들이 일제히 버석버석 말라가기
시작하는데, 그날 내가 본 것은 숯 된 거대한 자작나무 가지
였을까 강물에 띄워진 바리데기, 저를 버린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저승을 헤매다 온 한 따님이었을까 환신, 환신치고는
고약스레 서러운 나뭇잎 한장을 나는 조심스레 베어물었던
것인데, 검고 딱딱하게 굳어버린 늙은 혀 한잎은 배냇적처럼
얽혀들어 젖지를 못하고 서그럭서그럭 숯돌 소리로만 제 몸
을 갈던 것이다
그랬지 저 눈동자, 허공을 발라내어 아직 따뜻한 살점 당
신 숟가락에 얹어주고 싶었지만 바리, 내 어머니 죽음은 한
쌍으로 날아들더라 저승을 헤매어 구해온 영약은 기진한 그
네의 희뽀얀 젖줄기가 아니었을까 바리, 피곤에 지쳐, 불어
터진 젖을 아비에게 물리고 한잠 곤히 든 저 겨울나무의 쐐
기풀 같은 육신이 아니었을까 생이라는 이름의 죽음이 더 지
독하더라. 거듭거듭 제 죄로 죽을병에 걸려 앓아눕는 아버
지, 이제 그만 죽어주세요. 달같이 벗은 자작나무 온몸에 열
꽃이 돋아 꽃잎을, 하혈을, 마지막 꽃잎을, 강물처럼 쏟아내
는 밤이 오고 있었는데
방울과 칼을 주렴 아가야
요령 소리를 내며 나뭇잎 혼절하게 흔들리던 그 밤에 내가
씹어삼킨 메마른 혀는 어느 눈동자에 박힐 칼이었을까
어미목(木)의 자살 3 / 김선우
전봇대는 자라지 않는다 꽃 피우지 않는다 알을
낳고 어린 새끼를 기르지 않는다 자라지 않는 전
봇대를 위해 자라나는 가로수를 해마다 절단한다
전깃줄 아래 웅크려 가로수는 해마다 스스로 가
지를 친다 삐뚤고 굽은 무늬고 나무들 낭하로 기
어간다 허리 아래 어디쯤 툭, 툭, 독하게 어린 새
끼들을 내지르면서
가로 정비원들이 조경톱 자국을 만들어놓고 간
자리 플라타너스는 무혈(無血), 몸속에 무혈 혁
명을 차곡차곡 쟁여 쌓는다 원주(圓柱) 밖으로
어린 새끼들을 내지르던 독한 슬픔이 흰 무명 끈
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제 아기들을 먼저 죽
여 가지 끝에 새까맣게 매달아 놓고 전깃줄 아래
이 앙다문 나이테를 갈던 밤
바람이 분다 주렁주렁 매달려 말라가는 죽은 아
기들, 이빨 부딪는 소리를 내며 흔들린다 한 이파
리 치욕도 잎 틔우지 않은 정결한 주검을 뿌리 뽑
으러 내일이면 덤프트럭이 달려올 것이
피어라, 석유! / 김선우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 나를 꽃 피워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를 내려놓을게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게요
(현대문학상 수상 詩)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꽃나무 / 김선우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는데 문 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 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 때 왜 그 소릴 부끄러워 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 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딸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화전(火田)에서 소금을 캐다 / 김선우
강원도 산골 깍아지른 비탈의 화전을 지난다 삼복 무더운
날 소금단지를 열었을 때 훅, 끼쳐오던 소금내음 밭고랑에
물큰하다 고갯길 지나 하늘벽 지나 시골집 뒤울에서 피어
오르는 연기 한 자락 짜디짜다 하루 세 번 손가락 끝에 불꽃
을 매달고 소신공양하는 낡은 집 굴뚝으로 참매미 울음소리
소금짐을 지고 온다 지상의 며칠을 필사의 노래로 오체투지
하는 매미울음 짜디짜다 몸 피할 바람 한 점 없는 불붙은 폭
염의 날이라야 소금밭에는 향기로운 소금이 오신다고 하였
다 맨무릎으로 땅에 엎드린 집 한 채 속에 오체투지로 웅크
린 검은 아궁이, 한 끼 밥도 사랑도 오체투지 없이는 허락되
지 않는 화전의 타는 맨발이 짜디짜다
헤모글로빈,알코올,머리칼 / 김선우
(머리가 깨진 날 기뻤어요
내상보다 외상이 덜 위험하거든요)
보도블록을 깨다 손목 베이자 불타는 머리칼,
바리케이드 위에 살점을 널던 팔십년대
그 격렬한 외상의 날들
자고 일어나면 새살이 돋아 있곤 했지요
추억의 쓴물에 어금니를 담그거나
이적성 표현은 아닙니다
구십년대는 우울한 내상의 날들이어서
걸핏하면 넘어지고 발목을 삐는데
피 한방을 흐르지 않고 멍만 듭니다
세계 인구의 열배도 넘는 세포가 모여 이룬,
육체의 나날은 출혈없이 평화롭습니다
그런데 어제 머리를 깼지요
만취해 돌아오다 길에 누워버렸습니다
두개골은 멀쩡하고 상처도 크지 않은데
폭포처럼, 피 흘리는 머리칼
친구의 웃옷을 벌겋게, 치마를 물들이고
길바닥에 누워 해실해실 웃더랍니다
"아아 상쾌해" 하면서 말예요
빨간 다알리아 꽃들이(기억나요?)
뭉텅뭉텅 꿈 밖으로 걸어나갑니다
편지를 썼다가 구겨버렷어요
- 내 몸은 나를 보호할 의지가 없나봐
방금 당신께 전보를 쳤습니다
- 안 보이는 상처가 나를 시들게 해
다알리아 꽃모갱이를 꺾으며 울었습니다
우리 말고 또 누가 이 밥그릇에 누웠을까 /김선우
이 집 한 채는
쥐들의 밥그릇
바퀴벌레들의 밥그릇
이 방을 관 삼아 누운
오래 전 죽은 자의 밥그릇
추억의, 욕창을 앓는 세월의 밥그릇
맵고 짠 눈물 찐득찐득 흘려대던
병든 복숭아나무의 밥그릇
멍든 구름의 밥그릇
상처들의,
이 집 한 그릇
밥그릇 텅텅 비면 배고플까봐
그대와 나 밥그릇 속에 눕네
그대에게서 아아 세상에서 제일 좋은
눈물 많은 밥냄새 나네
완경(完經) / 김선우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의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하는 것도 다 걷혀
마치 이즈음이 그러기로 했다는 듯
붉은 동백 기진하여 땅으로 곤두박질 칠 때
그들도 즐거이 그러하리라는 듯
즐거워라 거꾸로 가는 생은
예기치 않게 거꾸로 흐르는 스위치백 철로
객차와 객차 사이에서 느닷없이 눈물이 터져 나오는
강릉 가는 기차가 미끄러지며 고갯마루를 한순간 밀어 올리네
세상의 아름다운 빛들은 거꾸로 떨어지네
나생이/ 김선우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을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 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리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나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두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날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빈집 / 김선우
불현듯 강바닥으로 내려앉는
빈집
황지였나 사북이었나
고분처럼 폐석더미 쌓인 마당
발가벗은 아이 혼자 놀고 있었다
무엇이 고팠던 걸까
어린 성기를 만지작거리며
토닥토닥 흙집을 만들던 마당가
이따금씩 개미가 손등을 타오르고
폐석더미 옆 고즈넉이 깨꽃 붉었다
흰 구름 데리러 간 엄마는 왜 안 오나
깨꽃 입술만 흙집 싸리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아름다운 식탁 / 김선우
사마귀는 사랑 속에서 살을 나눈다
사랑한다고 믿을 때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식탁
당신을 안고 빛나는 어둠을 먹으러 가고 싶다
얼레지 / 김선우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 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한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무덤이 아기들을 기른다 / 김선우
버즘나무 이파리 서쪽으로 눕던 길, 그 길 끝에 놓여 있던 비둘
기의 주검, 선명한 자동차 바퀴자국.
새의 내장도 무겁구나, 파리해진 잎사귀의 반쪽을 가리며 오래
도록 주검을 맴돌던 슬픈 애인이 펄럭였다
술잔 속에서 끊임없이 피 묻은 깃털이 올라오던, 그날 애인을
안고 속삭였던가
갓 태어난 아기들의 뱃속을 생각해봐 작은 정원 같은, 붉은 다
알리아 콩닥콩닥 김을 뿜고 삐비풀이 연초록 길을 만들이 노랑
주홍빛 채송화, 토란잎 위에서 장난치는 피톨들, 붉고 흰 물방울.
물방울은 동그란 무덤이야 우린 누구나 무덤의 집이라구 따스한,
내 가슴에 떡잎처럼 매달려 우는 어린 애인, 덜 여문 내 꽃자리
로 사르륵 통증이 지나갔고 나는 무덤을 열어 젖꼭지를 물려주었
지만
어떻게 울음을 그쳤는지 모른다 그날, 내 애인은
동구 밖에 비둘기를 묻어주고 내 등에 업혀 돌아오던 다섯살배
기 동생이 되어 내게 말했다 고마워 언젠가 나도 엄마가 되어줄
게. 향긋한 냄새가 그애의 정원에서 풍겨나와 핑그르르, 내 무덤
에서 정말로 젖이 돈 것만 같았다
오, 고양이 ! / 김선우
손가락 끝에서 피 한 방울 받아 현미경에 얹는다 보세요,
당신의 적혈구들이예요 몸 밖에서 나를 쏘아보는 내 피 한 방울
수백 마리 고양이 눈알을 삼킨 듯 검사실의 모니터가
오글거리는 눈동자로 발광을 한다
어느 산길에서 갓 낳은 산고양이 두 마리를 보았다
어린 고양이들 혀를 내밀며
가을볕을 냉큼냉큼 받아먹고 있었는데
이뻐서 그저 무심히 쓰다듬었던 노랑털
어린것은 다음 날 죽어 있었다
어린것의 몸에 밴 사람 냄새에
어미는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고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한 방울 피가 방주를 밀어올리며 범람하는 모니터 안,
싸늘하게 식은 어린것의 눈알과 제 새끼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밖에 없었던 어미의 눈알이 나를 노려본다
어느 깊은 새벽 검은 도독고양이에게 돌팔매질을 한 적 있다
밤마다 쓰레기 더미를 파헤쳐놓는 도둑고양이
산으로 가, 비굴하게 인간의 쓰레기 따위 뒤지지 말고
돌아가 제발, 돌멩이를 던지던 내 맨발이
가로등 불빛에 찔려 피 흘리던 밤
후미진 담벼락을 걷던 달 속에서
눈썹 성근 새끼고양이 밤새 울고
보아라 무엇인가 그리울 때마다 너희가 흘려놓은 저 적의를
찢어발겨 놓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얼굴을 쳐들고 나를 쏘아보던
이글거리는 눈알, 오 내 피 속의 고양이, 내 안의 그리운 것들이
나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오늘도 몇 구의 고양이 시체를 넘어왔다
이 많은 고양이는 다 어디서 오는지
국도에 눌러붙은 수많은 고양이 가죽들 길을 물들이면서
천천히, 야금야금, 전신을 샅샅이 훑으며 스며들다가
폭신한 살에 싸여 식탁 위에 올려진 내 몸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단번에 찢어놓고 간다
식탁에 떨구어진
내 피 한 방울 속에서 나를 쏘아보는 저 수천의 눈동자들!
별의 여자들/ 김선우
태양의 흑점이 커지던 날, 바람이 사라졌다
내가 도달한 다른 우주의 문은 찬바람이 걸어간 산길이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어 나는 지구 몸속의 다른 별에 들어섰다
내 몸속에 내가 모르는 다른 우주가 자전과 공전을 거듭하는 것이
훤히 들여다보였고 화창하게 갠 날이 저녁 가까이 날고, 수많은 물고기
뼈들이 공중을 헤엄치며 아무 데서나 사랑을 나누었다
내가 셈할 수 있는 인간의 시간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별의 여자들은
내내 이곳에서 살아왔다 잇꽃빛 번지는 노을 속에 여자가 그늘을
묻는다 여자의 푸른 유방에서 죽은 별들이 흘러나왔다 여자가 텅빈
우주를 자궁 속에서 꺼낸다 지구 표면으로 통하는 모든 문 위에 붉은
부적을 걸고 싶은 날, 내 몸에 묻어 온 독기에 찔려 여자의 손이 자꾸
허공을 짚는다 둥글고 푸른 별의 생장점이 꼬리를 끊고 흘러갔다
나는 속죄의 말을 찿지 못했다
구불구불한 꿈을 한없이 걸어 서늘한 산길이 걸어 나온다
인간의 마을이 저물고 내 몸 깊숙한 곳의 뼈들이 오래전 은하수의
수로를 따라 흘러갔다 화창하게 갠 날에 가벼워지는 목숨들, 화창한
저물녘에 별의 여자들이 자기 몸을 비우고 또 비운다 텅 빈 여자의
중심 지구 몸속의 또 다른 별에서 지구가 눈물 한 방울로 뜨거워져 간다.
간이역 / 김선우
내 기억 속 아직 풋것인 사랑은
감꽃 내리던 날의 그애
함석집 마당가 주문을 걸 듯
덮어놓은 고운 흙 가만 헤치면
속눈썹처럼 나타다던 좋.아.해
얼레꼴레 아이들 놀림에 고개 푹 숙이고
미안해 - 흙글씨 새기던
당두마을 그애
마른 솔잎 냄새가 나던
이사오고 한번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나는 남자를 알고
귀향길에 때때로 소문만 듣던 그애
아버지 따라 태백으로 갔다는
공고를 자퇴하고 광부가 되었다는
급행열차로는 갈 수 없는 곳
그렇게 때로 간이역을 생각했다
사북 철암 황지 웅숭그린 역사마다
한그릇 우동에 손을 덥히면서
천천히 동쪽 바다에 닿아가는 완행열차
지금은 가리봉 어디 철공일 한다는
출생신고 못한 사내아이도 하나 있다는
내 추억의 간이역
삶이라든가 용접봉, 불꽃, 희망 따위
어린날 알지 못했던 말들
어느 담벼락 밑에 적고 있을 그애
한 아이의 아버지가 가끔씩 생각난다
당두마을, 마른 솔가지 냄새가 나던
맴싸한 연기에 목울대가 아프던.
민달팽이를 보는 한 방식 / 김선우
가출이 아닌 출가이길 바란다.
떠나온 집이 어딘가 있고
언제든 거기로 돌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
돌아갈 집이 없이
돌아갈 어디도 없이
돌아간다는 말을 생의 사전에서 지워버린
집을 버린자가 되길 바란다.
매일의 온몸만이 집이며 길인,
그런 자유를.....
바란다, 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