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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OWTH THEORY
Final Edition
구름의 그림자
「죽음의 나선 • 맹그로브 • 은화」
퀘이사 • 코리올리 힘 • 태양물고기
로켓방정식의 저주 • 포인트 니모 • 케이프 혼
라이프리뷰 • 구름의 그림자 • 새녘바람 • 기특해
#1. 죽음의 나선
땅의 끝은 바람이 한 점 없었고, 아침의 빛이 저녁이 되도록 변하지 않았으며,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았다. 오랫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던 소녀는 한층 초연해진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두 발이 놓인 땅은 어느덧 높은 산이 되어 있었고, 오른 적 없는 이곳에서 내려갈 방도가 없어 보였다. 어쩌면 이곳에 도달한 유일한 생명일지 모른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정신이 머물던 방은 커다란 유리가 천천히 조각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그러나 분명 그곳은 처음부터 존재하던 그대로의 공간이었다. 소녀가 바라보고자 하는 시각 외에 그 어떤 것도 변함이 없었다. 두 다리를 고정하고 버티는 것이 어려울 만큼, 몸속에는 체구보다 커다란 소용돌이가 일어난 것만 같았다. 소녀는 내면의 혼돈 속에서 작지만 커다랗게 울려 퍼지는 소리에 집중했다.
"만약 우리가 만나지 못한다면, 너의 불안을 스스로 사랑해줘."
이제 더 이상 변함이 없는 그 자리에 서서 시시각각 변하는 불안을 지켜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첫 번째, 눈을 떠야만 한다. 두 번째, 내디뎌야만 한다. 세 번째, 믿어야 한다. 소녀는 입술을 달싹하며 제법 단단하게 소리를 건넸다.
"안녕, 낯선 세계."
땅은 웅장한 배음과 함께 흔들렸다. 일어나는지 갈라지는지 생겨나는지 사라지는지 알 수 없도록 모래먼지가 바람처럼 온통 뒤덮었다. 이윽고 시야가 맑아지자 여러 모양을 한 벽과 길목, 그리고 누군가 문제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흔적은 오래되어 보이는 것부터 얼마 전으로 추정되는 것까지 다양했는데, 안도의 한숨 사이로 섬뜩함이 끼어들기에 충분했다.
라비린토스는 시야의 한도 내에서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없었다. 겉기 시작해야 조금이나마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굽이굽이 더욱 높아지는 벽 사이로 깊이 빨려 들어가는 듯 전진할수록 빛은 희미해져 감각에 의존해야 하는 캄캄한 어둠에 이르렀다. 손끝에 느껴지는 차가운 울퉁함으로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에 들어온 길을 따라 빛을 따라 곧장 걸어 시작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해야겠어.'
소녀는 앞을 가로막는 콘크리트 벽, 바닥을 가득 메운 가시넝쿨 길, 사탕수수 가루에 끈적이는 땅, 물 냄새가 나는 비좁은 지하통로, 붉은색과 푸른색이 칠해진 커다란 돌을 만났다. 갈래에서의 고민은 더 이상 불필요해 보였다. 우선은 다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으로 만난 빛으로 가득한 길은 온통 밝아서 어디부터 어디로 이어졌으며 어디가 끝과 끝인지 알 수 없었다. 쏟아지는 빛 세례를 받으면 눈이 부실 법도 한데 그렇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밝고 따뜻하며 어쩐지 고단한 몸에 부하가 느껴지지 않아서 서 있는 것인지 앉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누워 있는 것인 알 수 없는 안락함이었다. 이렇게 영원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좋겠다고 느꼈다.
"찰나가 영원히 될 때, 그건 영원의 끝에서 깨닫게 되는 것일 테니까."
소녀는 그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건 수년 전에 마음속에서나 읊었던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 찰나는 영원으로 가는 중이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그 빛이 안락함과 영원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아차리자 어떻게든 바둥거렸고, 정신을 차렸을 때 소녀는 처음 있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미로를 바라보며 소녀는 자신이 지금껏 걸어온 길들을 떠올렸다. 모든 경험은 허투루 되지 않아, 미로 속의 길을 헤쳐 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지만, 실제로는 그 무엇도 출구를 찾는 데에 답이 되지 못했다.
끝없는 파도가 치는 바다와 맞닿는 절벽 끝에서 소녀는 잠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완전히 낯선 세계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파도에 휩싸여 있는, 그러나 끄떡없이 서 있는 푸른 한 그루의 나무.
#2. 맹그로브
나무는 분명 육지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분명 그것은 바닷속에서도 우뚝 서서 생명을 이어가는 강인한 초록빛이었다.
그 생명력의 빛은 소녀의 불안한 마음에 강인함을 드리웠다.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의 소리가 절규처럼 들려왔지만, 왠지 모를 평온함으로 한 발 한 발 절벽 끝에 다가섰다.
그제야 비로소 낯선 세계에 인사를 건네는 일은 각오가 동반된 것이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녀는 집중했다.
"내 선택이 나를 지켜 줄 수 있기를."
소녀는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졌다.
물속의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경험이었다. 차가운 바닷속으로 뛰어든 소녀는, 물속에 잠긴 맹그로브 나무의 뿌리 주변에 서식하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목격했다. 그 생명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나무와 조화롭게 공존하며 왈츠와 같은 하나의 노래를 구성하고 있었다.
천천히 나무에 다가갈 때, 소녀는 이 나무가 단순한 생명체를 넘어서는 것임을 깨달았다. 나무는 마음을 읽어낼 수 있었고, 소통을 위해서는 보다 정갈하고 투명한 가짐을 해야 했다.
"지혜를 간직한 자에게 인사합니다."
말 없는 나무는 소녀의 앞에 새로운 생명으로 잉태할 열매를 떨어뜨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파도의 소음 속에서도, 나무와의 교감은 명확했다.
은하와 시간을 건너온 소녀와 달리 맹그로브는 한자리에 오래 머무른 듯했지만, 깨달음이 경험에 비례하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소녀는 차분히 지혜를 흡수하고 싶었지만, 이곳에 너무 오래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딱 한 가지의 질문을 골랐다.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다면, 모든 것은 정해져 있나요?'
맹그로브의 뿌리가 춤추듯 뻗어 나가자 그 속에 담겨 있던 수많은 생명체들은 무리를 지어 소녀를 깊은 바다로 호위했다.
너와 내가 연결돼있잖아
조금도 두려울 것 없다
모든 길이 이어져 왔잖아
한치도 망설일 것 없다
'하지만···'
당연한 질문이야
묻지 않는다면 영영 알 수 없을 테니
#3. 은화
차가웠던 물의 온도가 익숙해질 무렵, 마냥 두렵기만 했던 바다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바로 눈앞에 있는 것들에 온 신경을 집중하며 두려움에 떨던 소녀는 세상이 넓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맹그로브의 뿌리 속에 숨어 사는 생명체부터 깊은 바다를 가로지르며 유영하는 생명체까지 살아있는 수많은 것들의 서식지는 이어져 있었다. 생명의 존재를 느낀 소녀는 다른 종류의 떨림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때 저 멀리 은빛의 무언가가 반짝였다. 해수면에서 반사된 햇빛일까 아니면 숨겨둔 해적의 보물일까. 가까워질수록 호기심이 일던 찰나 반짝이던 무리가 눈앞에서 튀어 올랐다. 은빛 드레스를 맞춰 입고 한껏 춤을 추고 있는 한 무리의 물고기 떼였다. 소녀는 이곳에 정말 길이 있는지 궁금했다.
"어디로 가니?" 소녀가 물었다.
"우린 저 먼바다로 갈 거야"
귀여운 은빛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물고기가 대답했다. 당당한 눈빛과 포부에 찬 대답은 이들이 소녀가 가야 하 길을 알려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했다.
"너는 어디로 가고 있어?" 반짝 빛나는 방울 장식을 단 작은 물고기가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 소녀가 답했다.
"그러면 우리가 가는 곳으로 가자."
맨 앞에서 구호를 외치던 대장 물고기가 말했다. 소녀는 솔깃했다.
바다를 모르는 소녀에게는 어느 쪽이 동쪽인지 아는 것도 한참이 드는 일이었다. 낮에는 태양이 움직이는 궤적을 확인하고 밤에는 별의 이름을 몇 개쯤 읊은 뒤에야 알 수 있는 것을 물고기들은 바다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만으로도 알 것이다. 소녀는 그들의 여정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One, two, three and four!
유유히 바다를 헤엄치던 물고기들이 힘찬 구호와 함께 튀어 오른다. 반짝이는 은빛 무리들은 행선지가 없는 소녀를 이끌고 더 먼바다로 향한다. 무엇이 올지 무슨 이일 벌어질지는 눈부시게 반짝이는 설렘 사이에서 조금의 추측도 무의미했다.
함께 한다면 내내 강해지지
전체는 부분의 합 보다 더 크니까
소녀의 동행은 은빛 물고기들에게도 설레는 일이었다. 언젠가 그들은 오늘의 바다 이야기를 여과 없이 늘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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