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회계법인] 소송에 휘말린 회계법인
요즘 회계법인은 우울하다 못해 초상집 분위기다.
회계법인이나 공인 회계사를 대상으로 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이 꼬리를 잇는다.
‘사면 송사(四面訟事)’라는 말이 흉흉히 나돌 정도다. “설령 기업들이 조작된 회계자료를 제출했어도 감사를 맡은 회계법 인이 업무상 ‘과실’로 적발해 내지 못해 기업이나 금융기관이 손해 를 봤다면 회계법인도 책임을 져야 한다.
증권선물위원회에 요청한 감리 결과를 근거로 회계 법인의 공동 책임이 요구되는 손실에 대해 서는 법적 절차를 밟아 손실 보전을 요구하겠다.
”(최명수 예금보험 공사 특별조사기획부장) “기업이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악의’를 갖고 제출한 회계 자료를 ‘샘플링’ 검사해 감사보고서를 내는 회계법인에 대해 분식회계 책 임을 묻는 일은 부당하다.
공적자금 원인 제공자는 부실 기업과 관치 금융에 따라 대출을 해준 금융권이지 회계법인이 아니다.
회계법인에 까지 분식회계 책임을 묻는다면 국내 회계 시장의 존립기반을 위태롭 게 할 뿐이다.
법정에서 회계법인에 책임이 없음을 증명하겠다.
”(김 익래 안진회계법인 부회장) 최근 예금보험공사(예보)는 부실 기업들의 분식회계를 적발해 내지 못한 과실을 이유로 안진회계법인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로 결 정했다.
소액 투자자들이 잇따라 회계감사 부실 혐의로 회계사들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한 데 이어 예보도 ‘공적자금이 투입된 기업의 공적자금 회수율을 높이겠다’며 회계법인에 대해 거액의 손 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하기로 했다.
예보는 증권선물위원회에 요청한 감리 결과를 바탕으로 부실기업 감 사를 맡았던 회계법인에 대해 ‘업무상 과실이나 고의성’ 여부를 따 져 회계법인 책임으로 여겨지는 손실에 대해 추가적인 손해배상 청구 를 할 계획이다.
이 같은 예보의 결정에 따라 고합의 회계감사를 맡았던 안진회계법인 이 첫 손해배상 소송 상대가 됐다.
실제 고합은 예보와 채권은행 통보에 따라 8월 20일 서울지방법원 본 원에 안진회계법인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접수했다.
총 소송금액 78억5000만원 가운데 일차적으로 21억원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 여기서 승소할 경우 나머지 금액에 대해서도 증액한다는 방침이다.
부실 기업 회계를 맡았던 다른 대형 회계법인들에 대한 소송도 이어 질 전망이다.
예보가 금융감독원에 회계 감리를 요청해 놓고 결과에 따라 회계법인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방침을 세워두고 있기 때문이 다.
최명수 예보 특별조사기획부장은 “회계법인의 과실 여부를 가려 감사를 맡았던 회계법인들의 책임을 추궁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우, 보성인터내셔널, 진도, 대농, 나산 등 부실기업들 감사를 맡았던 삼 일회계법인, 안건회계법인 등 대형 회계법인들이 예보의 다음 소송 상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거액의 손해배상 소송을 앞둔 안진회계법인 분위기는 의외로 담담하 다.
김익래 안진회계법인 부회장은 “세종법무법인 자문을 얻은 결과 충분히 승소가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언론에 끌려 계속 분식회 계 문제가 불거지는 것보다 법적인 판결을 빨리 받아내는 게 회사 경 영에도 낫다”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소송 결과보다는 분식회계를 적 발하지 못했다는 비판에 따른 고객 이탈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예보와 안진회계법인의 소송 과정에서 최대 관건은 법원이 ‘과실’ 에 대한 부실감사 책임을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달려 있다.
예보 측은 증권선물위원회가 99년 11월 고합 감리 결과 밝혀 낸 회계법인의 ‘ 자산, 부채 과소 계상 미지적’을 근거로 회계법인의 감사 과정 소홀 함이 명확히 증명된다는 입장이다.
반면 안진회계법인은 “속인 사람(고합)이 속은 사람(안진회계법인) 을 상대로 ‘속은 것’에 대해 소송을 제기하는 격”이라며 “과거 회계 감사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고 반 박한다.
두 소송 당사자 간 대립이 팽팽한 만큼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올 때까지 한 치도 물러설 수 없다는 분석이다.
다른 회계법인들도 예보의 소송 결정에 따라 긴장하는 분위기가 역력 하다.
안진회계법인이 ‘운이 나빠’ 첫 상대가 됐을 뿐 어차피 회계 법인들이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공인회 계사회는 예보의 소송 결정에 대해 “회계법인의 책임은 고의나 중과 실이 입증된 사례에만 한정해야 한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A 회계법 인 대표는 “안진회계법인이 패소한다면 국내에서 감사 업무를 제대 로 할 수 있는 회계법인이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며 이번 소송에 우려를 나타냈다.
예보가 회계법인에 대해 대규모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기 전부터 회계법인과 회계사들은 소송에 시달려 왔다.
90년 이후 현재까지 기 업 회계 부실 감사와 관련, 회계법인에 대해 제기된 소송은 금융감독 원에 신고된 사례만 22건. 최근 3년간 금감원이 회계법인 사업보고서를 검사해 통계를 낸 결과 최근 3년간 9건, 이 가운데 직전 회계년도(2001년 4월∼2002년 3월) 에만 5건이 집중돼 있다.
97년 한국강관 부실감사 사건에 대해 대법 원 첫 판례가 나온 후 소액 주주들의 손해배상 소송이 급증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 한국강관 감사를 맡았던 청운회계법인에 대해 대법원은 “재고 자산에 대한 실사 절차를 소홀히 했고 받을 어음과 외상 매출금 등 매출채권 확인을 소홀히 했다”며 투자자 손을 들어줬다.
회계법인에 대한 책임이 강조되면서 도산한 대기업들의 분식회계나 부정에 가담한 청운회계법인(99년 4월)과 산동회계법인(2000년 9월) 이 문을 내리기도 했다.
2001년 2월에는 회계사가 분식회계와 관련해 처음으로 구속됐는가 하면 지난 3월에는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 회계법인에서도 파트너 4명이 파면됐다.
지난 5월에는 소액주주 Y씨 가 프로칩스 감사를 맡았던 회계사 K씨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일부 승소 판정을 이끌어 내는 등 손해배상 소송도 이어지고 있다.
하승수 한누리 법무법인( www.han nuriraw.co.kr) 변호사는 “증권시 장 활성화와 함께 소액투자자들의 의식이 높아지면서 부실 회계감사 에 대한 소송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다.
투명한 회계와 감 사에 대한 투자자들의 요구는 높아진 데 비해 회계 감사가 아직 투자 자들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 변호사는 또 “감사보고서를 가장 신뢰성 있는 투자정보 가운데 하나로 활용하는 현실에서 소액 투자자들이 부실 감사에 따른 ‘선의의 피해자’가 되 기 때문에 부실 감사에 대한 소송이 소액 투자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돼야한다”고 강조했다.
대한투신증권 임규환 변호사도 “기업체의 불법 행위를 감시하는 회 계 법인들에 대해 투자자들 태도가 강경해졌다”면서 “부실 감사 책 임을 묻는 소송이 크게 늘어날 것”이라 덧붙였다.
회계사들도 이 같은 대세를 인정하고 있다.
송학운 안건회계법인 상 무는 회계사들을 상대로 한 소송 증가에 대해 “회계감사 책임이 강 조되면서 회계사들도 자성의 기회로 삼고 있다”며 “변화에 대한 요 구와 함께 언제든 소송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어느 때보다 높다”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이제경 팀장 / 김소연 기자 / 정광재 기자 / 명순영 기자> <매경ECONOMY 제1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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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회계법인] 회계감사-컨설팅 분리될까
회계 투명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금융감독원은 현재 두 가지 대안을 마련 중이다.
첫째는 금감원 내에 회계감리위원회를 설치하는 것. 지금까지는 회계 법인이 작성한 감사보고서에 대해 사후관리(감리)만 했지만 향후로는 회계법인이 관련법규를 제대로 지키며 영업을 하는지, 자체 감사 규 정이 적절한지 등에 대해 종합적인 검사를 한다는 방침이다.
또 회계 법인이 감사 업무를 맡고 있는 기업에 대해 컨설팅 업무까지 병행하 는 관행을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중이다. 이 중 회계법인의 감사와 컨설팅 분리는 현재 업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회계사와 회계법인의 반발이 보통이 아니기 때문. 감사와 컨설팅이 분리되면 지금처럼 저절로 컨설팅 업무가 따라오는 대신 회 계법인이 적극적인 수주 영업을 해야 하는 분위기로 바뀐다.
게다가 컨설팅 수수료는 회계감사 수임료보다 훨씬 고가(高價)다.
컨설팅 업 무를 잘 하는 회계법인에 고객이 몰리면서 업계 재편 바람이 불 경우 , 컨설팅 고객을 잡지 못하는 일부 소형 회계법인은 생존 자체가 어 려워진다는 고민도 있다.
이와 관련, 이광남 삼일회계법인 회계사는 “미국에서도 컨설팅과 회 계감사를 같이한다고 해서 회계감사가 부실해졌다는 결과는 나온 적 이 없다”며 “여론이 나빠지자 어떻게든 무마해보려고 나온 얘기일 뿐”이라 일축했다.
이 회계사는 대신 “회계부정을 한 기업의 대표 에 대해 엄중한 처벌이 훨씬 효과적인 방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 다.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방식만 바꾸는 식으로는 별다른 실효가 없을 거라는 얘기다.
대성회계법인 박성근 회계사는 “회계감사와 연관이 있는 컨설팅은 당연히 금지해야겠지만, 회사 제도 개선이나 내부통제조직과 관련한 컨설팅은 허용하는 게 오히려 회계투명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 얘기 했다.
박 회계사 역시 감사와 컨설팅 분리는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투명성에 대한 사회 전체적인 의식 이 높아지고 정치자금을 뿌리뽑는 게 투명회계의 지름길이지, 컨설팅 만 못하게 한다고 해서 소용이 있겠느냐”는 설명이다.
반면 조재환 민주당 의원(정무위 소속)은 “회계감사보다 용역 부문 수입이 많으면 소신있는 회계감사가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업무제한 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김일섭 이화여대 부총장은 “회계법인에서 컨설팅을 분리하는 것보다 는 컨설팅 회사를 회계감사할 때 업무를 약 30%로 제한하는 방법이 좋아 보인다”는 견해를 밝힌다.
회계감사를 중복하게 해 부실감사를 막아보자는 의도다.
회계감사와 컨설팅을 포함한 용역업무를 병행하는 회계법인은 날로 증가추세다.
99년 179개에서 2000년 227개, 2001년 266개로 각각 늘 었다.
김용운 삼일회계법인 이사는 “감사 보수를 제대로 받을 수 없 는 중소형 회계법인으로선 부대 용역업무를 통해 버틸 수밖에 없다” 고 전한다.
대형 회계법인의 경우 전체 매출 가운데 회계감사보다 용역업무가 더 많다.
삼일회계법인이 전형적인 사례다.
전체 매출액 2107억원 가운 데 회계감사를 통한 매출은 고작 665억원에 불과하다.
안진회계법인 도 컨설팅 매출이 많다.
807억원 매출 가운데 세무와 경영자문 등을 통해 벌어들인 돈은 454억원에 달한다.
회계법인이 컨설팅 분야에서 매출을 올리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금융감독원이 주목하는 분야는 컨설팅을 한 기업에 대해 동시에 회계 감사까지 하는 회계감사와 컨설팅 병행 문제다.
컨설팅 수주를 따내 다보면 아무래도 회계감사가 무뎌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실제 로 미국에서도 이런 개연성이 현실로 드러났다.
감사와 컨설팅을 병행한 기업이 가장 많은 곳은 업계 1위인 삼일회계 법인이다.
92개 기업에 대해 컨설팅과 감사를 병행했다.
국민은행· 삼성전자·LG전자를 비롯한 상장사와 현대정보기술·엔씨소프트·도 원텔레콤 등이 삼일회계법인에서 컨설팅과 함께 회계감사도 받았다.
예를 들어 삼일회계법인은 국민은행 회계감사를 해주고 10억9000만원 을 받은 반면 컨설팅 용역 수입으로 27억8000만원을 받았다.
삼성전 자에 대해서도 용역수입은 22억8000만원에 달한 반면 회계감사 수입 은 9800만원에 불과했다.
LG전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은행(구 한빛은행) 컨설팅을 맡았던 안진회계법인도 회계감사로 6억원을 벌었고 컨설팅용역으로 5억6000만원 수입을 올렸다.
금융감독원이 밝힌 병행 건수는 독립법인 형태로 컨설팅을 하는 사례 는 제외됐다.
예를 들어 안건이나 삼정회계법인이 계열사를 통해 컨 설팅 업무를 했다면 병행 건수에서 제외된 것이다.
<특별취재팀 = 이제경 팀장 / 김소연 기자 / 정광재 기자 / 명순영 기자> <매경ECONOMY 제1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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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회계법인] 기업-회계법인 신경전 가열
‘불쌍한 공인회계사….’ 국내 ‘빅(Big)5’에 속한 한 회계법인 대표가 표현하는 공인회계사 의 현재 모습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잇달아 터진 소송과 징계다.
최 근 몇 년 새 소액주주들이 잇달아 감사업무 소홀을 이유로 소송을 제 기한 데 이어, 정부산하기관인 예금보험공사까지 손해배상청구를 냈 다. 분식회계 방조로 징계받은 공인회계사도 파트너급을 비롯해 수십 명에 이른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깐깐한 공인회계사’를 만들어내는 계기가 되 기도 한다.
과거 ‘봐주기’식 기업 회계감사 관행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뜻이다.
2000년 9월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으로 산동회계법인이 문을 닫았던 전례에서 보듯, 무조건 기업 편에 섰다간 소송으로 파산 위기에까지 몰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퍼져있다.
금융감독원 회계제도팀 이석준 팀장(공인회계사)은 “몇 년 전 만해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부적정 ’<박스기사 참조>이나 ‘의견거절’ 보고서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 라 말한다.
400억대 자산을 가진 비상장 중소기업 A업체. 이 업체 관계자는 감사 를 받기 2달전쯤인 지난해 12월 회계법인을 찾아왔다.
“이번 결산에 서 손실이 발생하면 은행에서 대출 받은 돈을 갚아야 하는데 아직 자 금을 마련하지 못했다”며 “한번만 봐달라”는 내용이었다.
“감사 보고서를 잘 내주면 용역도 주겠다”는 은밀한 제안까지 해왔다.
회계법인은 제안을 거부하고 ‘의견거절’ 보고서를 냈다.
감사에 참 여했던 P모 회계사는 “예전 같으면 부도위험이 없었다면 슬쩍 넘어 갈 법도 했으나, 만일을 대비하기 위해 정확하게 판단했다”고 귀띔 했다.
200억대 자산을 가진 제조업체인 B사는 분식회계를 꼭꼭 숨겨둔 경우 . “설마 알아내겠냐는 듯 부실을 감춰놓는 기업도 많습니다.
이런 기업은 발각되면 여지없습니다.
” 이 업체를 감사한 A회계법인 K모 회계사가 전하는 현재 분위기다.
회계법인은 태생적으로 기업에 목을 매야 하는 운명이다.
감사 받을 회계법인을 선택하는 건 전적으로 ‘클라이언트(client)’인 기업 몫 인 탓이다.
감사뿐 아니라 기업들이 회계법인에 주는 용역(컨설팅)도 상당하다.
감사 결과가 기업에 불리하게 나오면 기업은 으레 “당신들에게 용역 을 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한다고 한다.
일부 회계법인은 감사 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용역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훨씬 많기 때문 에 기업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내 20대 대기업에 속하는 H업체는 감사보고서에 ‘의견거절’이 나 올 듯 보이자, 회장이 직접 찾아와 감사비의 5배에 해당하는 용역을 줘 ‘한정’의견으로 바꿨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 IT업체는 ‘적정’의견이면서도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주석이 달린 감사보고서를 받았다.
이 업체는 감사를 한 S회계법인에 그 내 용을 빼달라고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W회계법인으로 바꿔버렸다.
일선 회계사들은 “이런 관행 하에서 회계법인이 기업눈치를 보며 자 연스럽게 ‘밀월관계’가 형성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결 국 회계사들은 각종 분식회계수법(박스기사 참조)을 통해 기업 편에 서왔다.
그러나 사정이 바뀌었다.
회계법인 파트너급 이상 중역들의 인식전환 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다.
우량인지 부실인지를 가리지 않고 무조건 고객을 잡으려던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국내 최대 회계법인인 삼일 회계법인 서태식 회장은 “차라리 고객 하나를 잃는 게 그나마 가장 작은 손해”라고 강조한다.
회계법인이 변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고객을 고를 뿐 아니라 통과의례처럼 여겼던 관행에도 경각심을 갖기 시작했다.
삼일회계법인은 지난 4월 LG산전 부실감사 책임을 물어 파 트너 4명을 파면했다.
회계법인 주주격인 파트너가 무더기 해고당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사과정에서 발견한 문제는 윗선에 보고합니다.
예전 같으면 피감 사기업이 무너지면, 국가경제가 위태롭다는 등 핑계를 대며 적정을 내도록 조장하는 면이 있었어요. ‘웬만하면 고객 편에서 생각하라’ 고 종용하죠. 부하직원으로서 어쩔 수 없이 말을 듣게 됩니다.
하지 만 지금은 파트너부터 몸을 사리니 일선 회계사들이 부정을 넘어갈 이유가 없죠.” (삼정회계법인 K모 회계사) 회계법인 내 내부검토도 강화됐다.
일선 회계사가 1차로 감사보고서 를 작성하면 회계법인 내 중역들이 다시 ‘리뷰(review)’라는 내부 심리과정을 거친다.
“과거에는 상장기업만 대상이었으나, 지금은 모 든 감사보고서를 다 검토합니다.
폭이 훨씬 넓어졌다는 뜻이죠. 게다 가 문제점이 없는지 훨씬 까다롭게 오랫동안 분석합니다.
” S회계법 인 H모 회계사는 “실무 감사보다 리뷰가 더 까다롭게 느껴질 정도” 라 전한다.
회계법인이 꼼꼼해질수록 기업과의 갈등은 심해진다.
기륭전자와 삼 경회계법인 간 대립이 대표적인 사례다.
코스닥등록기업인 기륭전자 는 “상반기 실적에 대해 회계감사법인인 삼경회계법인의 검토의견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다.
기륭전자는 회계법인 의견을 무시한 채 지난 8월 14일 자체 회계기준 을 적용해 산정한 실적을 일방적으로 공시했다.
반면 삼경회계법인은 ‘한정의견’으로 감사결과를 명시한 검토보고서를 금융감독원에 제 출했다.
기륭전자 관계자는 “2년 연속 적자에서 벗어나 흑자를 달성했는데도 회계법인이 이연법인세차 17억7000만원을 비용으로 계상할 것을 요구 했다”고 주장했다.
기륭전자 관계자는 “지난 2년 간 164억원 경상적자가 발생하면서 쌓 인 이연법인세차를 단계적으로 비용처리할 계획”이라며 “일시 계상 하는 건 무리한 요구”라 덧붙였다.
반면 삼경회계법인 담당 회계사 는 “문제없이 처리했다”는 태도다.
기륭전자는 “금융감독원에 중 재를 요청하고 회계법인을 새롭게 지정받을 계획”이라 밝혔다.
회계법인과 피감사기업 간 주로 쟁점이 되는 부분은 재고자산평가와 외상매출금에 대한 평가회계기준변경문제다.
기업들은 재고자산에 대 해 높은 평가를 원하지만 회계법인은 좀더 엄격하게 평가하려 한다.
한 코스닥등록 휴대폰 제조업체는 회계법인이 “국내판매 불가능하다 ”며 호출기 재고를 자산가치로 인정해주지 않자 감사 회계법인을 바 꿔버렸다.
외상매출금도 논쟁거리. 회수가능성 판단에 따라 기업과 회계법인 입 장차가 첨예하다.
기업은 감가상각비 적립기준 등 회계처리기준변경 으로 순익을 높이려 하면서 충돌이 빚어진다.
【잠깐 용어】 · 이연법인세 : 기업회계상 손실과 비용 인식기준이 세무회계상 기 준과 달라 발생하는 법인세비용과 법인세 부담액 차이를 말한다.
당 기순이익, 자산과 부채를 적정하게 표시하기 위해 99년 6월부터 시행 하고 있다.
■ 4가지 감사의견 ■ 자산 총액이 70억원 이상인 주식회사는 반드시 회계법인으로부터 1년 에 한 번 외부 감사를 받아야 한다.
회계법인은 기업이 작성하는 결산보고서를 감사한 뒤 감사보고서에 적정, 한정, 부적정, 의견거절 등 4가지 의견을 표시한다.
· 적정 : 범위에 제한 받지 않고 감사한 결과, 재무제표가 회계기준 에 따라 적정하게 작성돼 신뢰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는 재무제표가 회계기준에 따라 작성됐다는 뜻일 뿐, 기업 경영상태가 좋다는 말은 아니다.
· 한정 : 기업회계 준칙에 따르지 않은 몇 가지 사항이 있지만 그것 이 재무제표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경우다.
· 부적정 : 기업 결산보고서가 회계기준에 위배, 기업 경영 상태가 전체적으로 왜곡됐다고 판단한 경우다.
기업회계가 완전 엉터리라는 얘기로 부적정 의견은 기업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같다.
· 의견거절 : 필요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재무제표 전체에 대한 의견을 낼 수 없거나 감사인이 독립적인 감사업무를 수행할 수 없는 경우 낸다.
■ 분식회계 수법 ■ 먼저 창고에 쌓여 있는 기말재고를 과다 계상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 어 실제 재고는 1000억원어치인데 장부상에는 5000억원으로 적는다.
이렇게 하면 매출원가가 줄어들어 그만큼 순이익이 올라간다.
두번째는 실제 팔지 않았으면서 허위로 거래처의 매출전표를 끊어 매 출채권을 부풀리는 방법이다.
대우그룹을 감시했던 한 회계사는 "매 출채권이 의심스러워 거래처에 매출확인서를 요청했더니 대우직원이 확인서까지 위조했다"고 전했다.
세번째는 매출채권 대손충당금을 적게 쌓아 이익을 늘리는 방법이다.
거래처가 부도났거나 장기간 받지 못한 매출 채권은 실제 회수가능 금액을 기준으로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하는데도 세법상 매출채권의 1 %만 비용으로 인정된다는 이유로 추가로 충당금을 쌓지 않는 것이다.
<특별취재팀 = 이제경 팀장 / 김소연 기자 / 정광재 기자 / 명순영 기자> <매경ECONOMY 제1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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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회계법인] 회계법인 판도 변화
“회계법인 판도변화는 피할 수 없을 겁니다.
정부는 어떤 식으로든 회계감사와 컨설팅 업무 병행을 규제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김일섭 이화여대 부총장(전 삼일회계법인 대표)은 회계법인 빅뱅을 예상한다.
환경변화에 따라 선택의 문제가 아님을 강조하면서도 내면 엔 회계법인 빅뱅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IMF 체제를 계기로 회계법 인은 좀더 반성했어야 했어요. 그러나 반성은커녕 현실에 안주했지요 . 이젠 전문가 집단답게 도덕성을 회복할 때라 봐요.” 회계법인 판도변화를 몰고 온 직접적인 계기는 두 가지. 하나는 미국 의 회계부정을 지켜보면서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 나는 부실회계 법인에 대한 소송이다.
미국 회계부정이 국내 회계법 인 업계에 미칠 파급효과는 회계감사와 컨설팅 병행 규제다.
대형 회 계법인일수록 회계감사보다 컨설팅 수입이 많기 때문에 회계감사와 컨설팅 병행을 규제했을 때 어떤 식으로든 판도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예금보험공사가 고합 부실회계를 문제삼아 안진회계법인에 소송을 제 기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도태할 회계법인이 생길 수 있고, 인수합병(M &A)도 뒤따를 수 있다.
과거 부실회계로 청운과 산동회계법인이 도태 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소송에 따른 판도변화는 가능성이 높은 전망 이다.
현재 국내 1위 회계법인은 삼일이다.
직원수만도 1208명에 달하고 지 난해 매출액은 2107억원이었다.
미국 최대 컨설팅법인인 PwC(프라이 스워터하우스쿠퍼스)와 손을 잡고 있다.
판도변화가 벌어진다면 1위 삼일회계법인을 타도하려는 움직임보다는 국내 소송 결과에 따라 M&A나 청산 등으로 순위가 바뀔 가능성이 높 다.
안진회계법인은 판도변화의 주체세력이다.
안진은 삼일회계법인 뒤를 이어 회계사수나 매출액에서 2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당초 7월에 하 나회계법인과 합병을 추진했으나 9월로 미뤄졌다.
예금보험공사가 안 진회계법인에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밝히자 합병을 늦출 수밖에 없었 다.
안진이 하나회계법인에 손짓을 하게 된 배경은 미국 파트너인 아더앤 더슨이 미국 회계부정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아더앤더슨이 문을 닫게 된 마당에 더 이상 파트너 관계를 지속할 수 없었다.
국내에서 컨설 팅 영업을 하기 위해선 어떻게든 미국 대형 컨설팅사와 손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하나회계법인에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회계법인은 미국 빅4 컨설팅회사인 딜로이트투쉬토머츠(DTT)와 파트너 관계를 맺고 있다.
안진과 하나회계법인이 어떤 식으로 합쳐 질 지는 미지수다.
하나회계법인 김재열 이사는 “부실회계가 소송으 로 이어졌을 때 승계 문제가 생긴다.
통합이나 합병 방식을 택하면 소송으로 연계될 수 있고 자산인수방식을 취하면 과거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서로 협상 중”이라 전 한다.
안진회계법인이 고합과 관련해 소송에 휘말리게 된 배경도 과거 세동 회계법인을 인수한데서 비롯된다.
반면 삼정회계법인은 산동회계법인 을 인수하면서 자산인수방식을 택했다.
산동회계법인을 청산하고 회 계사들만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설사 산동회계법인이 부실감 사를 했다 해도 나중에 법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
어떤 식으로든 회계법인의 업무제한은 있을 수밖에 없다.
윤종규 국 민은행 부행장(전 삼일회계법인 부대표)은 “미국처럼 컨설팅 부문을 독립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국내 회계법인은 컨설팅업무를 하지 못 하면 생존 자체가 힘들다”고 말해 업무제한 폭이 크지 않을 것이란 입장이다.
손기원 I&S비즈니스컨설팅그룹 대표 회계사는 “대형 회계법인일수록 소송 위험이 많기 때문에 중소형 회계법인 설립이 많아질 것”으로 내다본다.
또한 회계감사보다는 위험이 없는 컨설팅 부문으로 업무영 역을 확대할 것으로 점친다.
회계감사 보수가 오를 것으로 보이고 감사 보수를 누가 부담할 것인 가를 놓고도 논란이 일 전망이다.
윤종규 부회장은 “대형 회계법인 위주로 회계감사 보수 인상을 요구할 것이다.
위험이 높아진 만큼 당 연하다”는 반응이다.
감사 보수 인상이 중소 회계법인으로까지 이어 질지는 미지수다.
워낙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중소 회계법인들은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부실감사 위험을 떠안으면서도 감사 보수 인상 을 요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손기원 대표 회계사는 “감사보수를 주식투자자들이나 금융기관들도 일부 부담해야 할 것”이라 말한다.
회계법인 내부에서도 영업마인드보다는 질적 경영을 강조하는 분위기 로 바뀔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누가 수주를 많이 따내느냐에 따라 보수가 달라졌지만 앞으론 부실회계 가능성이 높은 업체는 외면당할 것이고 기업 퇴출도 용이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별취재팀 = 이제경 팀장 / 김소연 기자 / 정광재 기자 / 명순영 기자> <매경ECONOMY 제117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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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로에 선 회계법인] 회계법인 선두주자 삼일회계법인
삼일회계법인은 ‘회계법인 업계의 삼성그룹’이라 불린다.
회계사 수나 매출규모 등 외형에서 다른 업체에 비해 월등히 앞선 이유다.
한국회계사(KICPA)만 1300명. 미국회계사(USCPA)도 200명에 이른다. 매출도 단연 선두다.
2001년 4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삼일의 매출은 2107억원이었다.
국내 54개 회계법인 매출 전체의 32%에 해당한다.
2 위와 3위에 해당하는 안건과 안진은 각각 544억원과 807억원에 불과 하다.
하지만 삼일도 최근 긴장감을 감추지 않는다.
정부가 회계법인의 컨 설팅 겸업을 금지하는 법안을 채택하면 가장 피해를 볼 수 있는 회계 법인이 삼일이다.
회계감사로 올해 665억원을 벌어들인 삼일은 경영진단 등 용역으로는 두배가 넘는 1390억원 매출을 올렸다.
그만큼 용역에 대한 비중이 높 다는 뜻이다.
삼일로부터 감사와 컨설팅을 동시에 받는 국민은행은 감사비로 11억원을 지불한 반면 용역으로는 28억원을 줬다.
감사와 용역업무를 동시에 하는 기업도 많아 2001년에는 모두 88개 회사에 이른다.
금융감독원 회계감독국 이석준 팀장(공인회계사)도 “감사와 컨설팅을 분리하면 대형 회계법인이 타격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삼일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의 목소리도 높다.
서태식 삼일 회 장은 “회계감사업무와 컨설팅업무는 사업부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독립성에 위배된다는 건 맞지 않다”며 “전산시스템 설치 등 특히 감사의 독립성을 전혀 해치지 않는 부분까지 규제한다면 무리가 있다 ”고 말했다.
삼일 내 한 회계사도 “회계사가 컨설팅을 휠씬 잘 할 수 있는 영역 이 있다”며 “무조건적인 규제는 실정을 잘 모르는 일”이라 우려했 다.
서 회장은 컨설팅 부문을 독립법인으로 분사하는 방법도 “괜찮은 수 단”이라 말해 분사가능성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