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나 중학교까지 시골에서 마친 후, 고등학교와 대학을 서울 등 대도시에서 유학(留學) ․ 졸업 후 사업을 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여 승승장구 하다가 초유의 한파를 겪으며 부도다 명퇴다 해서 40~50세 전후반대에 영세 자영업자로 전락하게 된 사람들.
이것도 안되면, “고향가서 농사나 짓고 살지!”
평소 저를 따르며 좋아하는 후배가 한명 있습니다. 매주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 에 자기의 고향 안면도로 내려가 농사를 짓는 후배이지요. 이 후배는 평소에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겠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던 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배는 출퇴근 시에도 무적의 탱크를 몰고 다닙니다. 이름하여 1톤짜리 포터. 운전자포함 5명이 탈수 있고 뒤에는 1톤 정도의 화물을 실을 수 있는 차입니다. 아니 서울에서 회사다니는 놈이 어떻게 그 먼 시골까지 가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느냐구요? 가능합니다 !
이 후배는 어머니가 혼자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사실 때 어머니가 힘드실 거라며 최소 2주에 한번 꼴로 자기식구를 끌고 내려가 어머니를 도와주던 효심 많은 후배였습니다. 나는 후배 어머니 살아생전에 3번을 갔었고 돌아가셨을 때 갔었으니 그 동안 4번은 갔었던 시골이었지요. 두뇌회전도 빠르시고 농담도 잘하시던 어머니이셨는데...
어머니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가 살던 시골집과 농사짓던 농토는, 사업하시는 형님이 전부 처분하여 혼자 가지셔서 형님하고는 말도 안하고 지낸다고 합니다. 어머니 살아 생전에도 사업하는 장남이 가장 잘 나가고 있어 마음이 든든하다고 하셨던 형님이었는데.... 여동생들도 셋이나 있고.... 참으로 재물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 봅니다. 있는 사람들이 더 무서우니 .....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 하긴 염세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올이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재물이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이 난다”
이 후배가 만나면 입버릇처럼 하는 말, “형! 이번 주 시간 어때? 나 농사짓는데 가서 하루 생활해 봄세!” 하여 정말 벼르고 별러 5월 첫째주 토요연휴를 이용, 1박2일 체험 삶의 현장에 들어가 보니 ........ (이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한분 만이, 제가 벼르고 벼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다)
지금 농사짓고 사는 곳은, 후배 어머니가 살던 집에서 2킬로미터 정도 더 골짜기로 들어간 곳으로, 후배가 동네 할머니 혼자 살던 허름한 집과 그에 딸린 논과 밭을 사서 농사를 본격적으로 짓는 거라고 합니다. 3면이 산자락으로 둘러 쌓인 산 끝과 접한 농토이지요. 그런데 그 농토가 요즘 애들 말로 장난이 아닙니다.
논 3천평, 밭 3천평, 합이 6천평 !
고추를 가장 많이 심었고 양파 ․ 마늘 ․ 열무가 자라고 있었으며, 나하고는 가지 ․ 오이 ․ 호박 모종과 가족들이 먹을 참외 ․ 수박 ․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습니다. 물론 이 모종은 충남 서천(서산?)인가 어디에서 모종만 전문적으로 키워 판매하는 비닐하우스 농장에서 사온 것이지요. 태어나서 처음 가 보았습니다. 엄청 큰 비닐하우스(연립주택이 아니라 연립 비닐하우스로 보시면 쉽게 이해)에서 수십종인지 수백종인지 모를 모종이 자라고 있었으며 후배가 모종을 고르고 있는 중에도 모종을 사려고 연신 작은 짐차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있었습니다. 모종의 종류에 따라서 포기 당 50원에서 80원 정도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게 ~~~ 그 깥 100원도 안되는 것 가지고 !”라고요 ?
여러분! 4각의 계란판 아시지요 ? 계란판은 안의 모양이 계란을 담기 좋도록 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만, 모종판은 대략 그 정도의 4각 크기에 원형이 아닌 작은 4각형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판에 70~80 포기씩 심어 싹을 틔어 모종으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모종판을 후배가 5~6판을 삽니다. 양이 얼마 안되 보이는데도 5만원~7만원입니다. 제가 순간적으로 대략 계산을 해 봤을 때, 한 10 억원어치는 넘지 않을 까 ?
몇 명의 아저씨들은 모종 농가의 상호가 새겨진 종이상자에 쉴새 없이 모종판을 담아 포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종을 파는 도매상들이 상자 단위로 사가는 것 같았습니다.
「돌밭을 개간한다」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속 표현 중에, 돌밭을 개간하여 ~~~~ ~~~ 라는 표현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아마도 바닥이 돌투성이라 마을에서 아무도 손대지 않는 땅을, 땅 한 뙤기 없는 소설속 주인공이 엄청 고생하면서 논과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는 모습을 표현하였다고 보여집니다. 그렇게 어렵게 고생하면서 자식들을 대처에 내보내어 성공시키셨던, 자기희생의 우리 부모님세대 모습을 그린 것이었겠지요.
논두렁은 한~두삽 푹 파서 콩(동부콩 ? 저는 무슨 콩인지 모릅니다. 지송!)을 심으면 됩니다. 논두렁은 진흙이 말라 약간 꾸덕꾸덕해진 땅이라 그래도 쉽게 삽질이 됩니다. 그러나 산자락에 접해 있는 밭두렁과 산자락 끝에 붙어 있어 아무도 손대지 않는 약 10평 정도의 잡풀만 나있는 유휴지(?)에 구덩이를 팔 때에는 ?
후배가 여러 가지 모종을 살 때, 호박모종은 25개를 사더군요. 모종판은 필요한 숫자만큼만 가위로 잘라 팔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첫째날 낮에는 온종일 모종심고 물을 주고, 초저녁 무렵에 삽과 곡괭이를 들고 밭으로 갔습니다. 후배가 밭두렁과 잡풀만 나있는 유휴지(?)를 가리키며, “형! 이곳에 10개, 저곳에 15개 파야 돼. 직경은 한 30센티 정도, 깊이도 한 30센티 정도 파면 돼”하며 호박심을 준비를 해야된다고 하더군요. 곡괭이로 몇 번씩 찍어내고 삽으로 퍼내고 하기를 10회~15회 정도해야 해야 구덩이 한 개가 겨우 만들어 집니다. 후배가 주도가 되어 했는데도 25개를 다 파고 나니 하늘이 노래집디다. 밭두렁은 돌투성이이고, 유휴지는 순 돌밭이었던 것입니다. 호박심을 구덩이에 음식찌꺼기로 만든 거름을 한 바가지씩 집어 넣고 흙으로 덮은 후 중앙 한가운데에 나뭇가지를 푹 꽂아 놓더군요. 저도 따라 했습니다. 작업하는 동안 중학교 1학년생인 후배 아들이 연신 냉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호박구덩이 파는 작업을 끝으로 첫날의 일과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호박 모종은 내일 아침에 심는다고 하더군요. “왜? 지금 심어버리지 내일도 다른 할일이 있다며? 오늘 다 끝내버리자” 하니, 후배 왈 “지금 심으면 다 타죽어. 거름이 독해서. 한 숨 죽여 놔야 돼 ” 잠시 후배와 같이 밭두렁에 앉아,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바람을 온 몸으로 맛을 보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저의 마음속에 와 닿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책으로만 막연하게 느꼈졌던 표현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가슴속에 와 닿았을까? 간접경험도 좋은 경험이지만, 직접경험 만큼 훌륭한 스승은 없겠구나 !
“형! 나는 퇴직하면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거야. 여기 오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 !”, “형! 나 노후준비 충분하지? ” 환하게 웃으며 농담하는 후배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래, 열심히 사는 인간의 모습이 참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 것이야...내 마음속으로 화답하며, “야 임마! 너 이제 그 더러운 성질 좀 죽이고 살아라. ○○(후배 아들의 이름, 초등학교때부터 지 아버지를 도우며 자라서 그런지 말 안해도 전체 상황을 판단해서 자기가 할 일을 척척 잘한다. 후배한테는 속내를 잘 얘기안해도 나하고는 이런 저런 얘기를 잘한다. 서울에서 유치원․ 초 ․ 중학교를 다녀도 어른스러우며 순진하다)가 너를 안 닮은 것이 다행이다. 그래도 자식은 잘 키워 가지고...”
자식 잘 키웠다는 소리에 그래도 흐믓한 표정이다. 후배는 불의를 보거나 상대편의 얍삽한 모습을 보면 순간 참지 못하는 성질때문에 회사에서 간혹 상사와 충돌한다. 밑의 직원들은 잘 챙겨주면서 .... 그럴 때면 이 후배와 같이 쏘주한잔 하면서 울분을 토하기도 하고 다독여 주기도 하고..... 하긴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후배들 중의 한명이 된 것이지만 ....
다음날 아침 일찍 호박모종을 심었습니다. 제일 간단한 거라, 어제 한가운데 꽂아 놓은 나뭇가지를 뽑아내고 그 자리에 모종 한그루를 심었습니다. 후배가 빙그래 웃으며, “형! 그렇게 한가운데 심는 게 아냐! 그렇게 심으면 다 죽어!”
나뭇가지를 중심으로 반경 15센티 정도를 피해서 가장자리에 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모종이 뿌리가 내리면서 서서히 구덩이 속의 양분을 먹으면서 잘 자란다고 하더군요. 참! 나는 모종을 한가운데에 심으라고 나뭇가지로 중앙을 표시해 놓은 줄 알았습니다. “형! 이런 돌밭에 심어서 안 자랄 것 같지? 잘 자라! 가을에 무지 많이 열릴텐데 꼭 와서 가져가야 돼! 그 전에도 자주 오고 !”
저녁식사 후 낮에 물에 담가놓아 불렸던 콩을 가지고 두부만드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무슨 콩이냐 물어보니 메주만드는 콩이라고 하더군요. 큰 솥에서 팔팔 끓고 있는 물속에 콩 갈은 것을 다 집어 넣더군요. 그리고 아주 커다란 나무주걱을 두손으로 붙잡고 휘휘 젓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젓는 것이라며 시범을 보이고 나하고 교대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 “형! 한 방향으로만 저어야 돼. 그렇지 않으면 두부가 안 만들어져. 그리고 솥 바닥에 콩물이 늘어 붙어도 안돼. 늘어 붙으면 화덕내가 나서 두부를 못 먹어. 그러니까 쉴새 없이 꾸준히 잘 저어야 돼” 그 큰솥에서 늘어 붙지 않도록 젓는 것도 힘든 작업이었습니다. 나중에 간수를 넣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 약간 뭉글뭉글한 덩어리가 형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에 적당한 크기의 베로 만든 주머니에 약간은 걸죽한 콩 끓인 물을 채우더니 베주머니를 죽 짜내는 것이었습니다. 있는 힘껏 짜니 아래 바쳐 놓은 채 같이 생긴 그릇에 콩물이 떨어지고 베주머니에는 콩을 갈은 가루만 남았습니다. “형! 이게 비지야! 그리고 이 그릇에 있는 덩어리 같은 것이 내일이면 두부가 돼. 내일 묵은 김치하고 같이 한번 먹어봐! 그리고 내일 서울 올라갈 때 비지하고 두부, 묵은 김치를 줄테니 한번 끓여 먹어봐. 맛이 아주 죽여줘!” 이 작업이 끝나니 어언 11시가 조금 넘었습니다. 후배와 대청마루에서 인생(?)을 논하다가 12시 넘어 잠자리에 들어갔습니다.
평소와 같이(아침 5시30분~6시) 눈이 떠집니다. 아주 단잠을 잤습니다. 뜨끈 뜨끈한 구들장에서 자서 그런지 몸이 쑤시거나 뻐근한 데는 없었습니다. 그 정도 중노동을 했으면 온 몸이 뻐근할 텐데도 말입니다. 평상시 구들장을 예찬하던 후배의 모습이 잠시 생각이 났습니다.
호박모종을 심고 아침밥을 먹고 난 후, 점심먹고 후배 가족 모두가 바로 서울을 향해서 출발을 해야 하니까, 오전에 할 일을 할당 받았습니다. 어제 너무 고생했다고 오늘은 밭에 물을 주라는 것 이었습니다. 후배는 그 동안 논에 물꼬가 잘 터져 흐르는지 확인하고, 자기만의 방법으로 쌀겨에 미생물을 넣어 효소를 발효시켜 만든 비료(화학비료를 안써야 논두렁 개울가에 미꾸라지가 살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고추만은 유기농이 절대 안된다고 합니다. 농약을 많이 사용하느냐, 적게 사용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랍니다. 농약을 전혀 안 써 가지고는 살지를 못 한답니다)의 상태를 점검하고, 땔감을 전기톱으로 잘라 놓고, 넓은 밭에 혼자서 물을 쉽게 줄 수 있는 기구(?)를 창고에서 끌어내고, 초대형 함지박(고무다라 ; 성인이 들어가 서 있어도 어깨까지 물이 찰 정도의 크기)에 모터펌프로 끌어 올린 지하수를 받고 등등 엄청 일이 많았습니다. 저의 일은 후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코끼리 비스켓, 조족지혈 등 많은 표현이 있지요? )
후배는 조금이라도 혼자서 일하기 편하도록 여러 가지 기구나 도구를 직접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땔감을 자르기 쉽도록 철공소에서 사용하는 커터기에 원형 톱을 부착시켜 전기톱처럼 사용하고(통나무도 쉽게 토막냄), 콩을 갈아 직접 두부를 해먹기 위해서 시장에서 사용하는 소형 콩가는 기계를 구입하여 사용하고, 릴처럼 만들어진 고무호스가 혼자서 들고 이동하기에는 무거우니까 혼자서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쇠판을 붙인후 소형 리어카 위에 앵글로 짜서 고정시킨 쇠와 용접을 하고, 물 나오는 고무호스 끝에는 탐침봉 막대 같이 생긴 끝에 사방으로 물이 나오도록 제작된 원뿔모양의 추(철제)를 달아 사용하는 등 이리 저리 뚝딱거리며 만들어 편리하게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탐침봉 막대 끝에 붙어 있는 원뿔모양의 추(철제)는 밭의 지표면에서 가만히 세워 막대를 붙잡고 있어도 물이 나오고, 바짝 마른 밭에 원추를 쑥하고 깊이 박아놔도 땅속으로 충분히 물이 스며들 수 있도록 만든 기구였습니다. 제일 쉬운 이 일을 오전 꼬박 했는데도 점심 먹을 때까지 겨우 바짝 마른 고추밭을 다섯 고랑 정도(약 100평 ?) 밖에 못 주었습니다. 저 넓은 밭을 바라보며, 아~~~ 비 한번만 오면 이런 고생을 덜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 비는 그냥 비가 아니라 존경스러운 「비님」입니다.
요즘에는 아파트단지에 사는 분들이 서울근교에서 분양한 주말농장을 구입하여 가족 전체가 밭농사 체험을 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습니다. 반마지기나 한마지기에 해당하는 밭100평~200평을 경작하는데 매주 가서 신경을 써도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도 않고 힘도 많이 들더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도시사람들이 200평의 밭을 가꾸는데도 쩔쩔 매는데, 그 30배인 밭3천평과 논3천평을 그것도 일주일에 한번 가서 경작한다는 것이 상상이나 가시겠습니까 ? 물론 혼자서 전혀 할 수 없는 일 예를 들어 모심기 같은 것은 이앙기 있는 마을 주민에게 도급제로 품삯을 주어 경작한다고 합니다. 그 이외에는 전부 후배와 가족이 합니다.(막내는 이제 초등1학년이라 어리광만 부리고, 중1인 큰아들과 집사람이 같이 합니다) 힘들다고 이것 저것 도급을 주면 농사지어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고향시골에 농토를 가지고 있고 퇴직후에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살지!」 하는 계획이 있으신 분은 지금부터 연습을 해놔야 될 것입니다. 정말 정신없이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나갔습니다. 올라올 짐을 같이 꾸리면서 후배에게 농담을 하였습니다. “자네, 누가 직업을 물어보면 「농업」이라고 대답하고 부업은 「회사원」입니다. 하고 대답해야 겠네”
쌀 한톨 허수이 버리지 않으셨던 우리의 아버지, 할아버지 세대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리 호강하고 사는 줄도 모르고 내 잘 났다고 고개 빳빳이 들고 큰소리치던 나 자신, 부처님이 보시면 한 마리 불쌍한 미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시골에서 농사 짓는 분들의 노고에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부처님 오신날에 즈음하여 올해에도 풍년이 들기를 기원합니다.
곡식 하나 하나, 야채 하나 하나가 농부들의 땀이 이루어낸 것이기에 음식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며, 농부들을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생각하며 큰소리로 불러봅니다. 『農者天下之大本 이라 !』
첫댓글 왕손님 좋은 체험 하셨네요~~~ 농사 아무나 할 수 있는것 아닙니다....고생속에서 보람을 얻는거지요....좋은글 감사....
간수 넣고 뭉글뭉글 순두부지여....보자기에 꼭 싸서 눌러놓으면 두부가 되구여....지금은 논두렁에서도 전화만 하면 짜장면,피자,통닭 모두 배달이 되어 편하다지만 ~농사일은 정말 하루아침에 배워지는게 아니랍니다..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핑클님! 먹을거리가 풍부하다고 먹다남은 음식을 함부로 버려서는 안되겠습니다.
활동적이고 성실한 아우님 두시여 무쟈게 좋겠습니다...^^~ 후에 옥수수며 콩이며 고추며 쌀이며 완죤 자연산 식품을 우선 순위로 먹을수 있으니..하하하.../ 자랑스런 아우님과 형님으로 오랜동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강남둘리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