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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징비록] 자체 핵무장,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자유일보
권태오
핵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는 총을 가진 자와 창·칼만 가진 자의 차이와 같다. 미국 아나폴리스에 있는 해군사관학교 중앙 홀에는 모교 출신 전사자들이 게시돼 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1876년 조선에서 전사한 분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신미양요 때 강화도를 공격한 미 해군 휴 매키(Hugh McKee) 소령이다. 여덟 시간 정도 지속됐던 이날 전투에서 조선 수비군은 250여 명이 거의 전멸했지만 미군은 휴 매키 소령을 포함 3명만 전사했다.
오늘날에도 이런 전투 차이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바로 핵무기를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전쟁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 개의 전쟁,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하마스 전쟁도 이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핵보유국인 러시아나 이스라엘을 어느 국가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회고록을 통해 재임기간 자신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해 엄청 노력했고 성공할 수 있었다는 식으로 말했는데, 또다시 현실 인지능력이 결여된 이상주의자 주장이라고 본다. 분명 북한은 김정은의 승계가 이루어진 이듬해인 2012년, 헌법 전문에 이미 자신들이 핵보유국이라고 명기했다. 이후 한 번도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거나 주춤한 적이 없었다. 그토록 평화를 주장했던 문재인 정부 기간 동안에도 북한은 핵무기 발사 플랫폼인 미사일과 잠수함 등 전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결국은 완성했다.
그동안 우리는 혈맹 미국의 비확산 정책에 동참해 자체 핵개발은 80년대에 일찌감치 스스로 포기했다. 90년대 들어서며 북한의 핵개발 기도가 확인되자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경수로 건설 등 경제지원까지 해주며 북한이 선의로 답해주기를 기다렸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결여된 핵보복 능력은 미국이 약속한 확장억제(핵우산)를 믿으며 연합훈련에 매진하는 선에서 대비태세를 유지해 왔다. 2006년 북한이 1차 핵실험을 하자 시작된 유엔과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또한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를 주었으나 이 역시 상상고문이었다. 지금 나타나고 있는 그간 노력의 결과는 상당한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첫째, 미국의 확장억제정책을 이제 더 이상 믿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원래 이 정책은 핵무기 개발 도미노를 방지하기 위해, 우방들에게 핵공격을 받을 시 미국이 가지고 있는 핵무기로 대응해 줄테니 너희는 핵개발 안해도 된다는 설득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본토마저 공격 가능한 핵무기를 지닌 적국에 대해서는, 우방이 공격 받았다고 미국이 자신의 핵무기로 보복해 주지는 않을 것임이 너무도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이를 노리고 미국까지 이르는 ICBM을 개발했고 그 능력을 연일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미국 내에서 흘러나오는 ‘한국 방위는 한국이 책임지라’는 주장은 그동안 우리가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 온 미국의 핵우산을 비웃는 말이지만, 자신들의 솔직한 심정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둘째, 북한의 핵무기 수준은 이미 비핵화를 논할 대상이 아니다. 이제 북한은 객관적으로도 핵보유국이 됐다. 핵탄두 개발에 필요한 수차례의 폭파 실험을 마쳤고 다수 다종의 전략무기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4월 23일 김정은이 참관한 가운데 실시했다는 ‘핵반격 가상훈련’은 핵공격을 받았을 때 자동으로 발사되도록 세팅됐던 냉전시대 소련의 데드 핸드(dead hand)를 연상시키고 있다. 무기체계뿐 아니라 운용전술까지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그동안 느슨했던 북-러-중-이란의 대미 카르텔은 미국 신고립주의의 영향으로 한층 공고화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러시아가 북한의 첨단무기 개발 지원에 박차를 가하는 모습은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방치해선 안된다는 절박감을 느끼게 한다. 능력을 갖추고 있었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착수하지 않았던 우리 자체의 핵무기 개발을 미룰 수 없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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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오 예비역 육군중장·군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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