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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성경은 번역본마다 다르지만 보통 구약은 히브리어 마소라 본문과 70인역,
그리고 신약은 헬라어(그리스어) 사본을 기조로 번역본을 만들어 낸다.
혹은 라틴어 역본이나 영어 역본을 기반으로 번역한 것도 있다.
각 역본을 보고 싶다면 아래의 바깥 고리 참고.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남유다가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 이후
히브리인들은 정복자의 언어인 아람어를 입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는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하에서도 계속되어, 유대인 회당에서 전문 통역자가
타나크의 본문을 히브리어에서 아람어로 통역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구두로 통역되고 전승되던 것이 기록으로 정착되어 타르굼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오경(율법서)를 번역한 가장 권위있는 바빌로니아 타르굼(Babylonian Targum)이 이시기에 번역되었다.
신약 성경의 경우, 사도들과 예수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였던 만큼, 초기부터 번역이 이루어졌다.
다만, 라틴어 번역본처럼 아람어 번역본도 처음부터 완역을 하진 못하고 복음서와 시편들을 부분적으로 번역했다.
시리아 교회에서는 이렇게 따로 분리 번역된 복음서와 시편들을 예배와 독서에 활용했다.
이후, 신학자와 번역가들의 노력으로 원본과 번역본들을 비교, 수정, 재번역하여
성서 전체를 아람어로 완역한 '페쉬타' 성서가 불가타와 비슷한 시기에 나왔다.
이 페쉬타 성경은 '타르굼'과도 통하는 점이 많으며 고대 성서 번역본 중에 가장 번역이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2.2. 헬라어(그리스어) 번역. 구약
헬라어(그리스어)가 국제 공용어일 때(기원전 약 2-3세기) 고대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그리스어) 로 번역하였는데, 이를 흔히 70인역본(약칭: LXX)이라 한다.
‘70인’이라는 명칭은 이 번역본과 관련한 전설에 따라 생긴 명칭이다.
전설에 따르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사서, 데메트리우스가 프톨레마이오스 2세(기원전 285-247년경)에게
유다인들의 율법(토라 곧 오경)의 번역을 추진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임금은 이 제안에 동의하여 이스라엘 12지파에서 각각 6명씩 번역자를 선발하였는데,
이렇게 모인 72명(혹은 70명)이 각각 독방에 들어가 작업한 토라 번역이 모두 동일했다.
사실 이 전승에는 히브리어 본문과 칠십인역의 차이점에 관한 추가적인 전승이 있다.
하지만 그 아래로 나와있는 차이의 예시가 현재 칠십인역에선 발견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는데,
이는 프톨레마이오스 2세의 요청으로 번역된 칠십인역이 남아있지 않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70인역의 특징으로는 개신교 성경에는 포함이 안 된 제2경전(외경)이나 추가 부분이 들어 있고,
하나님을 지칭하는 '야훼'라는 단어가 '주님'으로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후기 유대교 사상 가운데 메시아에 대한 기대가 번역본에 담겨 있다.
유대교에서는 70인역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은 데 반해,
초기 크리스토교 에서는 활발히 사용하여 신약성경 안에 인용된 구약 성경의 상당수가 70인역이다.
70인역본은 가톨릭에서 쓰이는 제2경전의 원전이 되는 번역본이기에,
가톨릭에서는 불가타와 함께 중시 여기는 번역본이기도 하다.
정교회에서는 이에 더 나아가서 타낙의 마소라 사본이 아닌 70인역본에서 번역된 것을 중시한다.
70인역본을 'LXX'로 표기하기도 한다. 비록 가톨릭-개신교에서 타낙의 마소라 본문이 가장 원문에 가깝다고 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70인역은 마소라를 보완해줄 중요 참고 본문으로 인정받고 있다.
기존에는 70인역이 마소라 텍스트와 차이가 있으므로 '변질'되었다는 식의 비판도 있었으나,
사해문서의 사무엘기 상하권 사본 중 70인역의 저본이 되는 사본이 발견되는 등
(마소라의 권위에는 밀릴지언정) 성서학에서는 고대성을 가진 훌륭한 번역임이 인정 받고 있다.
신약은 처음부터 헬라어(그리스어) 로 저술되었긴 하지만,
헬라어(그리스어) 역시 신약 당시의 코이네 헬라어(그리스어)로부터 많은 변화를 거쳤으므로
현대 헬라어(그리스어) 번역본의 형태로도 존재한다.
다만 정교회의 성찬예배는 비잔티움 시대의 전통을 바탕으로 당대의헬라어(그리스어)를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례문과 봉독되는 성경 구절은 코이네 헬라어(그리스어)를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원문을 비잔틴 본문이라고 하며, 9세기경 통용되었다.
때문에 헬라어(그리스어) 원어민이라도 특별히 교육을 받지 않는 이상 이해하기 쉽지 않다.
헬라(그리스)는 정교회가 국교인 종교국가로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기도문과 코이네 그리스어, 중세 헬라어( 그리스어)를 학습하게 커리큘럼이 짜여있다.
엄밀히 말하면 번역은 아니지만, 헬라어(그리스어) 신약성경의 비평본은 본문비평의 주요한 목적이다.
최초의 신약 원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은 수사본(手寫本)들이기 때문이다.
서방교회에서 출판된 최초의 비평판 헬라어(그리스어) 신약성경은 에르스무스가 1516년 출판한 것이 최초로,
이를 공인본(Textus Receptus)이라 한다.
이 비평판 역시 비잔틴 본문을 기초로 한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그가 발견한 판본들에서 자의적으로 본문을 수집하여
사실상 본문 가치가 낮은 비잔틴 본문들을 가져왔고 반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수많은 이문들이 발견되었다.
이후 시나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등 4세기 필사 사본들과 이집트 옥시린코스 파피루스 단편들을 토대로
본문 비평을 시작해 1898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신약성서가 새로 출판되었는데
여기서 시작한 비평본이 현재 성경 원문 연구에 쓰이는 Nestle-Aland이다.
2.3. 라틴어 번역최초의 성서 라틴어 역본이 언제 형성되었는지, 누가 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테르툴리아누스, 키프리아누스, 오리게네스 등 서방 교회 교부들이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3세기 경에는 확립되어 있었다. 해당 본문은 70인역을 기반으로 또 다른 히브리어 원문을 참고하여 번역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4세기경 원문 번역이 필요하다는 교회의 필요로 성 예로니모가 마소라 사본을 바탕으로 새 역본을 만들었다.
4복음서[11], 시편 등은 고대 영어로 번역을 시도했고 9세기경에는
샤를마뉴와 마찬가지로 알프레드 대왕이 성경의 영어번역을 독려하기도 했지만
신구약 성경전체를 영어로 번역한 것은 1390년 존 위클리프와 후배 학자들의 번역이 최초였다.
그러나 존 위클리프의 번역은 최초의 영어본이라는 데서 의미는 있지만 영어와는 문법적 구조가 다른
불가타를 거의 직역한 수준이라 가독성이나 번역 그 자체의 수준이 높진 않았다.
이후로 15세기 중반 인쇄술의 발달과 대륙의 종교개혁으로 번역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는데 16세기에 들어
윌리엄 틴들(William Tyndale)은 옥스퍼드 대학교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공부하며
대륙의 종교개혁(루터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틴들은 당시 성직자들이 너무 무식하여 일반인에게 성경을 가르칠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고,
농부들과 목동들도 성서를 볼 수 있게 하겠다는 구상 하에 성경 번역을 결심한다.
그런데 당시 잉글랜드는 종교개혁 이전이었다.
틴들 혼자 번역하기엔 너무 위험했기에 대륙으로 도피하여 가명으로 번역 작업을 시작했고,
런던의 상인들에게서 재정지원을 받았다.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라틴어가 아닌 히브리어와 헬라어(그리스어) 원전을 바탕으로 번역했으며,
인문주의자들이 밝혀낸 불가타본의 오역과 필사과정에서 들어간 오탈자 삽입 구문을 정리했다.
1526년 독일 지역 보름스에서 신약성서 전부와 모세오경을 출판하였으나
1535년 브뤼셀에서 체포당해 1536년 10월 영국에서 화형당했다.
결국 틴들의 영어 성경은 구약부분이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꾸준히 영국에도 반입하나 헨리 8세 시절 틴들은 물론이고 반입자나 소지자도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했다.
당시 헨리 8세는 1537년 교황청에서 독립하여 성공회(영국국교회) 시대를 열었지만
신학적으론 여전히 거의 가톨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죽기 직전 틴들은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해 주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0여 년이 지난 후에 빛을 보는 영어 성경은 틴들 번역본의 단어 90%를 차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것이 킹 제임스 성경이다. 킹 제임스 성경은 새로 번역을 했지만 윌리엄 틴들 성서를 참조했다.
허나 틴들 성서에는 성공회가 받아들인 개혁주의(칼뱅주의) 신학용어와 거리가 있는 표현이 있었고,
왕권신수설과 주교제를 시행하는 성공회나 제임스 1세의 심기를 거스르는 어휘들 또한 있었다.
해서 틴들 성서를 참조하였지만 새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바뀐 부분들도 있었다.
그래도 어쨌든 틴들의 유산은 고스란히 킹 제임스 성경에 남아있다.
현재에 개정표준역 성경(RSV)에도 틴들판 번역성서의 단어 75%가 사용되고 있으니
영어 성경에 틴들의 영향력은 크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나 일반인의 오해와는 다르게, 마르틴 루터 이전에도 가톨릭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려 한 시도는 있었다.
4세기 경 독일 선교사였던 울필라스가 고대 게르만어로 번역을 시도했고, 6세기에 고트어로 된 구약과 신약이 있었으며,
8세기에 와서 라틴어에서 번역된 마태복음이 바이에른 방언으로 번역되었다.
9세기경에는 카롤루스 대제가 독일어로의 성경 번역을 독려하여 복음서들의 발췌 번역과 시편 번역이 나왔다.
물론 이때의 성경은 신구약을 통째로 옮긴 것이 아니라, 복음서나 시편 등의 일부분을 번역하는 것에 그쳤다.
이후「아우스부르크 성서(Ausburg Bible)」로 알려진 구약전서는 1389년부터 1400년 사이에 나왔다.
최초의 인쇄본 성서인 「멘텔 성서(the Mentel Bible)」가 나온 것은 1466년이고 1533년까지 18판이 나왔다.
구테베르크가 활자를 발명한 이후부터 루터의 번역 이전까지 18종의 독일어 성경이 탄생했다.
마르틴 루터가 기존의 독일어 성경번역가들보다 특별히 더 파급력이 컸던 이유는,
이전의 독일어 번역은 불가타를 직역한 것이였던 반면,
루터는 불가타본을 기초로 히브리어와 헬라어(그리스어) 사본을 참조해
보통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번역을 도입한 점에 있다.
루터의 번역은 그 이전의 딱딱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독일어 판본들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고,
루터가 죽기 이전에 이미 독일에 100만 부 이상 보급되었다.
이는 당시 문해율을 고려하면
글을 아는 거의 모든 이가 루터가 번역한 성경을 보유하기에 이른 것이다.
또한 루터는 작센 선제후 궁정의 공문서 작성 필법에 따라 고지 독일어로 성경 번역을 시도했는데
이 때문에 고지 독일어가 전국으로 퍼졌고, 필체의 격식은 표준 독일어의 탄생을 불러오기도 했다.
다만 루터 개인의 취향에 의해 정확성이 훼손되었다고 볼 여지는 있다.
예를 들어 로마서 3장 28절에서는 "믿음"에 "오직"이라는 단어를 루터가 삽입하여 "오직 믿음"으로 번역했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구원이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건 사실 루터의 관점으로든 가톨릭의 관점으로든 동일하지만,
'정확한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오직'을 추가한다고 민중의 가독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다르지만 비슷한 문제를 지닌 이야기로는 요한의 콤마를 거론할 수 있겠지만 이건 사본비평학의 문제라 별개로 논해야 한다.
기존까지는 라틴어 성경을 사용하다가, 처음으로 프랑스어역 완역 성경이 나온 것은 13세기였다.
파리 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자들을 동원하여 번역한 것인데, 그 대본은 라틴어 성경이었다.
1487년에는 가톨릭 학자들이 성서를 번역하여 「큰 성서(La Grande Bible)」로 출판하였다.
개신교 쪽에서는 1535년에 올리베탕(Olivetan)으로 알려진 피에르 로버트(Pierre Robert)가 성서를 번역하였다.
몇 차례 개정을 거듭하였고, 1546년판을 낼 때에는 칼뱅이 서문을 썼다.
1553년에 인쇄업자 스테파누스 (Robert Stephanus, 일명 Robert Estine)가
이 번역을 제네바에서 출판할 때 원문의 장절을 구분하여 출판하여 오늘날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대 번역본에는 2000년 완성돼 바이블리카가 출간한 바이블 듀스뮤어(BDS)도 있는데,
이는 좀 더 현대적인 루이 수곤 성경(Louis Sougon)에 사상적으로 더 가깝다는 평가가 있다고 한다.
1987년 얼라이언스 비블리크 유니버스에서 출판한 바이블 앙 프랑수아 투어랑(BFC)도 있다.
유대교 성경 타나하(기독교 성경 구약성경)의 프랑스어판 랍비 성경(Bible du Rabbinat)은
1906년 완성되어 1966년 개정이 이루어졌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에 의해 1974년 『신세계역성경』이 출간되었고 1995년 개정되었다.
약 700년 전인 1300년대부터 여러 스페인어 성경 번역본이 만들어지며 활용되어 왔다.
고전적인 스페인어 성경 번역은 Cipriano de Valera가 개정한 Casiodoro de Reina의 번역이다.
그것은 초기 프로테스탄트 운동을 위한 것이었고 킹 제임스 버전과 동등한 스페인어 완역 성서로 널리 간주되었다.
더 최근의 버전들 중에서, 완전한 가톨릭 성경의 첫 공식 번역은 Nácar-Colunga (1944)에 의해 수행되었고,
이어서 Bover-Cantera (1947)와 Straubinger (1944-51)에 의해 수행되었다.
1960년대 이후 판매 부수가 많은 성경 판본으로는 라틴 아메리카 성경(1972년), 스페인 신성경(1975년),
칸테라-이글레사아(1975년), 사그라다 성서(1978년), 오늘 말씀하시는 하나님(1979년), 성서(1992년),
순례자의 성서(1993년), 미주 성경(1994년), 우리 민족의 성서(2006년) 등이 존재한다.
최초의 폴란드어 번역 성경은 1563년 개신교의 '브레스트 성경'(Brest Bible)이었다.
이러한 번역의 흐름은 1632년의 '그단스크 성서'(Gdańsk Bible)로 이어진다.
1561-1577년 가톨릭의 폴란드어 번역 성경으로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이는 예수회 야쿠부 부예크(Jakub Wujek, 1541-97)에 의해 번역된
1593년 야쿠부 부예크 성경(Jakub Wujek Bible)에 이어
16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오랫동안 폴란드 가톨릭 교회에서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은 1965년의 '밀레니엄 성경'(Biblia Tysiąclecia)으로,
이것은 폴란드에 대한 그리스도 전래(Christianization of Poland)로서 2000년을 기하여 명명되었다.
개신교는 '그단스크 성경'을 대신하여 1975년 현대 폴란드어 번역 '바르샤바 성경'(Biblia Warszawska)을 사용하고 있다.
러시아 크리스토교에서 성경 번역의 전통은 성경과 옛 교회 슬라브어 번역에서 시작된다.
표트르 대제는 러시아 사람들이 그러한 판본을 준비하기 위해
1703년 요한 에른스트 글뤼크 목사에게 권한을 부여한 자국어 성경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글뤼크는 170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프란치스크 스카리나 (1490년경-1552년?)는 슬라브어와 체코어 성경을 바탕으로
루테니아어로 성경의 번역과 인쇄를 시도한 최초의 사람이다.
아우구스트 헤르만 프랑케 (1663년-1727년)는 값싼 러시아 성경책을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최초의 정교회 성경은 1876년에 등장하였다. 19세기에 러시아 성서 공회(알렉산더 1세의 동의하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812년 설립) 설립과 관련하여 자국어로 된 성경을 준비하도록 남겨두었다. 이 작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신학 아카데미(이후 모스크바 대주교)의 총장인 필라레트와 그 아카데미의 다른 교수진이 담당하였다.
복음서는 1818년에, 1822년에는 신약 전체가 출판되었다.
1820년에 구약성서 번역이 착수되었고 1822년에 Phileret의 시편 번역이 출판되었다.
1825년에는 모세오경, 여호수아, 사사기, 룻기가 발행되었다.
1826년에는 비정치적인 경우에도 모든 종류의 사적 결사를 금지함으로써
성서 공회 활동이 잠시 중단되었다가 1858년이 되어서야 번역 작업이 재개되었다.
1876년에 성경 전체가 한 권으로 출판되었는데 이 번역본은 '총회역(Synod Version)'으로 통칭되고 있다.
구약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에 기초하고 있지만 70인역과 교회 슬라브어 성경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외경 책은 또한 러시아어 성경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다. 영국 및 외국 성서 공회도 외경을 생략한 러시아어판을 발행했다.
1990년 이래로 러시아 성경 협회와 러시아의 개신교는 러시아어로 더 새로운 번역본을 제작해왔다. 2000년 9월, 국제성서학회는 영어 신국제판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번역인 슬로보 지즈니(Slovo Zizny)를 완성했다. 2015년 5월 러시아 자오스키 신학교의 성경 번역 연구소(BTI)가 성 요한 바오로 2세와 공동으로 출판되었다. 모스크바에 있는 앤드류 성서신학연구소는 원래 언어에서 성경을 새로 번역했다. 이 번역은 M.P. 쿨라코프와 M.M. 쿨라코프의 편집 지휘 아래 종파간 학자 팀에 의해 준비되었다.
중국어 성경은 1810년 선교사 마르시만이 마태오 복음서를 번역한 데 이어
1822년 구약성경·신약성경이 합동으로 간행되었고,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성경에 중국어 성경이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청나라 멸망 후 가톨릭 성경 번역은 1935년 당시 아직 어린 프란치스코회 수도사 가브리엘 알레그라가 시작했다.
그는 구약성경을 히브리어와 아람어로 번역하기 시작했고,
10년 후에 그는 베이징에서 솔라나스 리 OFM, 안토니우스 리 OFM, 베르나르디누스 리 OFM, 루도비쿠스 리우 OFM을 모집했다. 그 후, 중국에서 내전이 발발하게 된다.
이러한 사건은 승려들이 1948년 홍콩에 있는 스튜디오 성경관을 옮기도록 이끌었다.
20년간의 고된 노력 끝에 1954년 마침내 첫 번째 구약성서가 출판되었다.
1968년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한 권으로 요약한 성경이 출간됐다.
20세기 동안 수많은 중국어 번역 성경이 출판되었지만,
현재 중국의 개신교 교회에서 가장 보급되어 있는 판은 '화합본'이라 불리는 1912년 작성으로 다양한 개정을 거친 번역이다 .
홍콩과 대만에서는 번체자인 '화합본', 중국에서는 간체자로 재편집된 '화합본'이다.
중국의 가톨릭교회에서 최근 가장 많이 사용되게 된 것은
1999년 번역이 완료된 '목령성경'으로 지금까지의 '사고성경'을 대체하고 있다.
예수회 창시자 중 한명인 선교사 프란치스코 사베리오가 1548년 마태오 복음서를 요약한 번역서를 만들었다.
1552년 예수회 선교사인 후안 페르난데스가 4대 복음서, 사도신경, 주님의 기도, 성모송, 십계명
그리고 그에 관한 주석을 번역하였다.
신구약 전체를 아우르는 본격적인 번역은 메이지 시대부터 진행되었다.
1887년 번역된 메이지원역(明治元訳), 1917년 번역된 다이쇼개역(大正改訳)이 있다.
전후에 1955년 평서체로 번역된 구어역(口語訳)이 있고, 1968년 공동역(共同訳)이, 1987년의 신공동역(新共同訳)이 번역되었다.
1987년 본문 전반에 걸쳐 불일치가 지적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개정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표명되자,
일본성서학회 이사회는 2009년 31년 만에 개정된 신간섭번역성서에 착수하기로 공식 결정했다.
2010년 3월 2일, 그들은 번역 프로젝트의 시작을 발표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열었다.
번역 작업은 2017년에 완료될 때까지 8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2018년에 일본 성서협회 상호 고백판으로 출판되었다.
스코포스 번역 이론을 활용해 '예배에서 읽기에 적합한 품격 있는 일본어'로 본문을 제시하면서
'다음 세대' 크리스토교인들을 섬기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나라에 크리스토교 가 전해진 경로와 마찬가지로 성경 역시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중국에 처음 전해진 크리스토교는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 받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인 경교(景敎)였다.
이들은 당나라와 원나라 시대에 주요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하였는데,
마태오 복음서 6장이 ‘세존보시론’(世尊布施論)으로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번역문이 신라나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한편 1271년에 프란치스코회 선교사 요한 몬테 코르비노가 신약성서와 시편을 몽골어로 번역했으나
고려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조선에 영향을 미친 크리스토교 문헌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명나라에 들어와 저술한 한역 서학서들이었으며,
1822년에 중국어 완역 성서가 번역될 때까지,
주로 참고한 것은 라틴어 성서를 한문으로 발췌 번역한 <성경직해>(聖經直解, 1642)와 <성경광익>(聖經廣益, 1866)이었다.
이 책들은 해당 주일이나 축일에 읽힐 성서들을 발췌하여 실어놓은 묵상이나 행동지침을 담은 해설서였다.
천주교에서는 각 주일과 주일 이외의 첨례 곧 축일(성탄 축일 등)에는 그 주제에 따라 성서 구절을 골라서 읽도록 되어 있다.
그리하여 1년의 52개 주일과 그 밖의 34개 축일에 읽게 되는 성서 내용은 각기 다르게 정해져 있다.
이 책들에선 이렇게 각 주일과 축일에 읽는 각기 다른 성서 내용을 한 항목으로 묶어서 펴냈다.
조선에 전래된 이 책들은 곧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는데,
<한국 천주교회사>를 쓴 달레 신부에 따르면, 이 한문본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역관 출신의 최창현이었다.
그는 <성경직해>와 <성경광익>을 필요한 부분만 번역 재구성하여 <셩경직해광익>을 펴냈다.
여기에 포함된 성서는 4복음서의 30.68%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이 책은 박해기 중에도 계속 보급되었는데, <성경 말구 누가> <성경 마두> <성경 요안> <성경 슈난> 등 4복음서 별로,
또는 수난 구절만 모은 성서로 분리되어 사용되기도 하였다.
비록 일부이지만 <셩경직해강익>은 평민의 문자인 순 한글로 옮겨진 첫 성서 본문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1890년 초에 필사되어 유포된 <고경>(古經)과 <고성경>(古聖經)은 일종의 교리문답서로서
창세기의 일부 내용이 발췌 번역되어 있어서 구약성서의 첫 소개라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병인박해 이후 한미조약과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어 어느 정도 박해가 잠잠해지고,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으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활력을 되찾고 성서 번역도 활발해지는데,
개신교에서 번역된 <예수셩교젼셔>와 <성경젼서> 등이 그것이다.
한편 천주교에서는 <성경직해>를 대량보급하기 위해 1892~97년까지 활판본으로 9권을 펴냈다.
더불어 1906년에 한글 성서 번역에 착수하여 손성재 야고보 신부가 마태오 복음서를,
한기근 바오로 신부가 마르코 복음서, 루카 복음서, 요한 복음서를 역주하고 뮈텔주교가 감준한 4복음서 번역본인
<사사성경 四史聖經>을 1910년 발간하였다.
이 책이 첫 4복음서 한글 번역본이다.
그후 한기근 신부가 사도행전을, 베네딕토회 슐라이허 신부가 <신약성서 서간, 묵시편>을 번역하여
완전한 신약성서 번역본을 갖게 되었다. 이밖에 어린이를 위한 <쇼년 셩셔>도 출간했다.
한국전쟁 전후에 한국 천주교에서는 성서를 계속 다듬어가면서 발간 보급하였는데, 선종완[16] 신부는 <사사성경 합부 종도행전>에 해제와 주해를 새로 붙여 1948년에 <신약성서 상편>을 개정판으로 내었다. 이걸 나중에 <복음성서>란 이름으로 바꾸고, 이후 <서간 성서>도 펴내었다. 옛 번역판 성경은 아직도 성 비오 10세회와 성 비오 10세의 마리아 군대 등 한국의 전통 가톨릭 단체에서 사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판매도 하고 있다.
그 후 선교사가 아닌 우리말을 모국어로 쓰는 우리나라 성서학자들이 성서의 원어를 배워
원전을 직접 우리말로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함으로써 우리나라 성서 번역에 새 기원이 이루어진다.
선종완 신부는 1955년부터 히브리 원문에서 구약을 옮기기 시작하여 1958년부터 1963년까지 <창세기>를 비롯하여 모두 17권을 번역 간행하였는데, 이게 한국 가톨릭 최초의 구약성서 번역본이다.
이어 최민순 신부가 1968년에 라틴어성서 역본에서 옮긴 <시편>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시의 운율을 살린 번역문이어서
널리 전례문으로 사용되었다. 1977년에는 이 시편과 유고인 ‘아가서’가 합쳐진 <시편과 아가>가 출판되었고,
최창성 바오로 신부가 간추린 성서인 <구세사>를 펴냈다.
한편 평신도인 김창수가 일본어 성서와 영어성경을 번역대본으로 삼고 라틴어성서로 교열하여 신약을 펴냈고,
백민관 테오도로 신부는 1972년에 4복음서를 하나로 묶은 <합본 복음서>를 간행했다.
한편 한국의 개신교에선 독일 루터교회 선교사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가
충청도 고대도 인근에 상륙하여 20일간 포교를 하며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제너럴 셔먼호 전후로 당시 토머스 저메인 목사가 선교 목적으로 쓰던 서적은
한문성경으로 지하화된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일부 발췌 번역한 걸로 보인다.
개신교의 첫 번역은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1882)이고 신약전서 완역은 1887년 <예수셩교젼셔>이다.
이는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로스의 주도로 1872년부터 한국인 백홍준, 이응찬 등에게 한문성경을 전수하며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워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그런데 이들 한국인들은 평안도 의주 지역의 사람들이라 아무래도 서북 방언이 많이 섞였다.
때문에 이후 순차적으로 일부 번역이 계속되다가 1900년 <신약젼서>로 신약성서가 완역되었고,
몇 차례 개정을 거처 1906년 개정판 2만부가 발행되었다.
구약성서 완역은 1911년 <구약젼셔>로 역시 2만부가 발간되었다.
1938년 기존의 맞춤법 개정으로 아래아 같은 발음이 사라지고
기존의 우리말보다 원역에 가깝게 개정된 개역판이 발간되었으며
1956년 1961년 각각 맞춤법 개정으로 인한 <성경전서 개역 한글판>이 발간되었다.
1961년에 복음동지회 성서번역위원회에서 <새로 옮긴 신약성서1-마태의 복음서> 등이 나오다가
한국학자로 구성된 대한성서공회의 신약번역위원회가 성서 원어에서 직접 옮겨
1967년에 <신약전서 새번역>을 펴냄으로써 한국인 번역본의 꽃을 피웠다
. 이 <신약전서 새번역>은 「개역」이나 「구역」에 익숙한 개신교인들보다는,
성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특히 당시 우리나라 인구의 70% 이상을 차지하던 30세 이하의 청년들을 위한 전도용으로 번역한 것이다. 번역 원칙은 "풀어쓰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의미에서 번역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요 의무였으나,
누구나 읽어서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조건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초판 머리말에서 보여주듯이 기계적인 축자역과 자유스러운 풀이역 둘 다를 삼가는 태도를 취하였다.
현대 한국어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본문의 지문(地文)이 모두 “합니다”체로 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중등교육 이상을 받은 이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러한 양측의 노력은 교회일치운동을 강조하는 시대 분위기 속에서 <공동번역성서>라는 획기적인 성서를 낳게 한다.
1968년에 열린 교황청 성서위원회와 세계성서공회연합회의 공동번역 결정에 따라
한국에서도 그 해에 ‘성서번역공동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 큰 계획 때문에 한국 천주교 중앙협의회 쪽에서는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의 구약 번역을 도중에서 중단하였고,
개신교 쪽에서는 <신약전서 새번역>만 출판하고 <구약전서 새번역>은 중단했다.
특히 영국과 미국 계통의 크리스토교회가 사용해오던 1611년의 <제임스왕역>(KJV),
혹은 1901년의 <미국표준역>(ASV), 1946년의 <영어표준개역>(RSV) 등에 대한 개역이나 수정을 보류하였다.
그 후 천주교와 개신교 번역위원들의 작업으로 1971년에 세계 최초로 <공동번역 신약성서>를, 1977년에는 신약성서 개정판과 구약성서를 합본한 <공동번역 성서>를 내놓았다. 공동번역 성서는 천주교와 개신교가 처음으로 연합하여 직역보다는 내용의 동등성을 강조한 의역 중심으로 젊은 층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우리말로, 또 국내 최초로 '제2경전'을 옮겨 소개하였다. 한국 공동번역성서 영향은 북한에도 미쳐,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은 평양신학원 교수를 맡고 있던 이영태 목사의 주도로 북한식 맞춤법으로
공동번역성서를 수정하여 1983년에 "신약전서"를 1984년에 "구약전서"를 1990년에 신·구약 합본 "성경전서를 발행하였다.
1970년대 이후에 한국 교회는 커다란 변화를 겪게 되는데, 한국 전래 200주년을 맞이하는 천주교와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개신교는 폭넓은 신자 층에게 성서를 전달할 필요성을 느끼고 다양한 번역본을 내어놓게 되었다.
천주교에서는 1988년 추계 정기총회에서 가톨릭 구약성서 번역 사업을 성서위원회에 추진하도록 하였다. 임승필 요셉 신부를 성서위원회 총무에 임명하여 1992년 6월 <구약성서 새 번역 1-시편>을 시작으로 낱권 성서를 출간, 1999년 12월 <구약성서 새 번역 18 - 마카베오 상하>를 끝으로 구약성서의 새 번역을 마쳤다. 이어 2000년 10월 신약성서 번역 위원을 위촉하여 2001년 7월 신약성서 <새 번역 1-마태오 복음서>를 시작으로 2002년 12월 신약성서 <새 번역 10 - 요한묵시록>을 출간함으로써 신약성서의 새 번역을 마쳤다.
주교회의 전례위원회와 성서위원회 새 번역 성서 합본위원회에서 최종 번역문을 확정하여 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2005년 9월 20일 새 번역 <성경(구약성경, 신약성경)>을 발행하였다.
주교회의는 이 <성경>을 가톨릭 공용 성경으로 채택함으로써 2005년 대림 제1주일인 11월 27일부터 <매일미사>에 수록하여
전례에서 사용하고 있다. 주교회의 결정에 따라서 <공동번역 성서> 대신에 새 번역 <성경>이 가톨릭 공용 성서로 지정되었다.
이로써 교회 일치 차원에서 <공동번역 성서>는 의미가 컸지만,
한국 개신교계 대부분이 배척한 결과로 끝내는 천주교도 2005년 자체 번역본 완간으로 사용하길 중단(대체)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