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 온 '진아춘(進雅春)'
2002년 조두영/ 정신과 의사
옛날 동숭동 문리대 건너편 중국집 ‘진아춘(進雅春)’ !
점심시간부터 밤 늦게까지 대학촌 남녀노소가 들끓던 산동(山東)요리 집이다.
해방 전 대학나온 사람들도 이 집을 아는 것을 보면 역사가 꽤 긴 듯 하다. 최소한 1940년대 초에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50년 대에는 문리대, 법대, 의대, 수의대 학생들이 드나들었고, 70년 대에는 음대와 치대 학생들도 끼어 들었다. 우리세대는 이 집 짜장면에 길들여진 세대로, 그를 바탕으로 다른 곳에 가서 짜장면을 찾으니 입맛이 당길 리가 없다. 방이 없던 시절, 더러는 지나가던 서울 다른 동네의 청춘군상이 급한 김에 이곳 2층 판자 칸막이 방을 러브호텔로 이용하였기에, “한국사람, 불 끄고 짜장면 오래 먹어!”라는 ‘짱께’의 말이 이 집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대학 초년 악동시절, 우리는 그런 불 끄고 사람이 들어가 있는 방의 옆 방을 찾아 들어가 숨 죽이고 청각(聽覺) 포르노를 감상한 적도 있다. 한번은 아무리 기다려도 너무 조용해 무등을 타고 올라가 이웃 방을 기웃거리다가 칸막이가 무너지는 바람에 두 방 사람 모두가 얼굴에 골아터진 짜장면과 고추가루를 뒤집어 쓴 적도 있었다.
그 집 주인이 묵는 골방 선반 위에는 언제나 다섯 개의 사과상자가 있었는데, 사과는 없고 대신 손목시계, 학생증, 도민증과 시민증, 기타 물품이 품목별로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기타 물품이란 여름에는 구로메가네(색안경), 겨울에는 마후라와 가죽장갑으로서, 이 전리품은 다름아닌 학생들 외상 담보다. 한번은 괴짜 음대 남학생이 들고 온 첼로를 잡히려는 것을 보았는데, 부피가 크다고 주인이 한사코 거절하면서 다른 것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학생들과는 달리 교수들과 조교들은 줄 근 노트 장부에 이름 칸을 하나 만들어 두고 그 밑에 얼마라고 서명만 하는 혜택을 받았다. 이런 고위층 대우를 받는 인사는 졸업하고 뿔뿔이 헤어지는 인문계 보다 바로 옆 건물의 의대 사람이 많았다. 매월 25일 저녁이 되면 진아춘 주인인 중년의 孫씨가 때 묻은 노트를 들고 의대 연구실 방마다 문을 두드리고 들어 와 그 달치 외상 값을 챙겼고, 돈이 없다면 군 말 없이 물러갔다. 돈 없던 시절이라 주인은 몇 달을 기다리기도 했다. 주인은 돈 받을 때를 귀신처럼 알아 내었다. “어어! 세균학 교실 金조교 방에서 아니 찾던 배갈, 탕수육과 잡채를 한꺼번에 시키는군!”하고 벌떡 일어나 직접 주문요리를 들고 그 방을 찾아가 “축하합니다!”라고 소리쳤다. 바로 그 날이 방 주인이 교수 발령을 자축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의대에서 도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K모 교수가 학장으로 취임한 첫 날이었다. 취임식을 마치고 학장실에 막 돌아 왔는데, 손님이 찾아 왔다. 직원이 미리 받아 전해 주는 손님 명함을 보니 ‘재한화교연합회(在韓華僑聯合會) 회장’이 아닌가! 오늘부터는 나도 국제적으로 놀아야 되는구나 하고 들어서는 사람 얼굴은 보지않고 상대의 감투에만 신경을 쓰게 된 학장은 먼저 “먼 걸음 하셨습니다”라고 공손히 머리를 오래 숙였다. 그러다 “저에요, 저! 짱께요!”라는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자세히 보니 양복 정장을 한 진아춘 주인 孫씨가 아닌가. 이래서 학장은 결국 학교 돈을 꾸어서 두어 해 밀린 외상 값을 갚지않을 수 없었다 한다.
그 중간급이 되는 스토리도 많다. 조교생활 뒤 군의관 3년을 근무하고 전임강사 발령을 받으러 왔던 날에 어떻게 알았는지 孫씨가 달려 오더란 말도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 가서 살다 6년 만에 온 젊은 교수에게도 달려와 “김선생, 나빠요, 나빠!”라면서 때 묻은 외상노트를 펴 놓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나도 졸업 후 11년 만에 그 집 짜장면을 먹던 날, 그의 사찰에 걸렸다. 알아보고 반가워 하길래 나는 나오면서 장난기가 발동해 혹시 외상 값 밀린 것 없었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그렇지 않아도 방금 골방에 들어가 점검해 보았더니 없었다 하면서 씩 웃는 것이었다.
해방 전 만주에 살다가 온 친구에게 들은 중국인 상술에 관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하르빈 중앙시장에서 맥주 도매상인 일본인과 중국인이 가격경쟁을 시작하였는데, 중국인이 승리하더라는 것이다. 손님이 언제나 중국가게에 많아 등이 단 일본가게에서는 앙심을 품고 한동안 사 온 원가 보다 일전을 더 부쳐 맥주를 팔았는데, 그래도 손님이 늘지않아 알아보니 경쟁자는 원가에 팔더라 한다. 그래 무엇을 먹고 사는가 조사했더니 그 쪽에서는 맥주가 들었던 종이상자를 팔아서 살고 있었다.
그러던 진아춘이 80년대 초 없어졌다. 한국에서는 아무리 살아보아야 부동산을 구입할 수 없는 등의 제한이 많아 미국이민을 간 것이다. 막상 없어지니 이 집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더 커졌다. “어디 진아춘 짜장면 같은 것 먹을 곳이 없나?”가 의대 사람들 화두에 늘 오르는 말이었다. 문리대 출신들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주인 孫씨는 뉴욕에 ‘미국 진아춘’을 차려 잠시 반짝 했지만 어느 사이 미국식 중국요리에 길들여진 교포들이 늘어나 이 집이 외면당하기 시작했다. 다시 다른 도시로 옮겨 해보았지만 결과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90년대 말에 주인은 다시 한국에 돌아와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했는데, 손님이 예상보다 적었다. 그 십여 년 사이에 중국음식은 한국에서 서서히 하류층 음식이 되었고, 이제 서울대학도 관악으로 이사를 갔고, 남은 의대 사람들도 입이 고급화된 젊은 층으로 바뀌었는데다 더 큰 이유는 요리사 자신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미국영향을 받아 내놓는 음식이 시고 달고 한 미국 중국요리로 변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1년 만에 걷어 치웠다. 사라져 버린 것이다.
얼마 전 나는 우리 과의 젊은 의사들에게서 명륜동 시장골목에 새로 난 중국집 주인이 나를 안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손님을 끌려고 그러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하튼 기분이 좋아 가 보니 상호(商號)가 ‘進雅春’이다. 반갑게 달려 나오는 남자를 보니 왕년 철가방 주인이던 바로 옛 주인 孫씨의 조카가 아닌가. 그래서 오랜만에 옛날 짜장면을 맛보았다. 잡채도, 탕수육도, 깜풍기도 옛 맛이다. 이 조카는 이민을 가지않고 서울에 있으면서 다른 직업을 가졌었다 한다. 그래서 미국요리 바람이 들지 않았던 것이다.
자, 우리 동숭동 출신 늙다리들 가운데 진아춘이 그리운 사람들은 내게 연락 바란다. 나도 몇 달 있으면 여기를 뜰 사람이니 그 전에 마음껏 누려보자는 심뽀다. 신용카드가 있으니 이제는 봉변 당할 걱정도 없다. 다만 옆 방의 요염한 소리가 아무리 요란하다 한들 이를 숨 죽여 감상할만한 精力이 날라가 버린 것이 恨이 되겠지만.
첫댓글 https://youtu.be/eCnZPxJLH8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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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나(조두영)는 우리 과의 젊은 의사들에게서 명륜동 시장골목에 새로 난 중국집 주인이 나를 안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손님을 끌려고 그러는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하튼 기분이 좋아 가 보니 상호(商號)가 ‘進雅春’이다. 반갑게 달려 나오는 남자를 보니 왕년 동숭동 進雅春 철가방 주인이던 바로 孫씨의 조카가 아닌가. 그래서 오랜만에 옛날 짜장면을 맛보았다. 잡채도, 탕수육도, 깜풍기도 옛 맛이다."
이 進雅春을 찾아 올리신 윤길순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