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매창로 89에는 매창공원이 있는데 이곳에 특이하게도 기생의 시비(詩碑)가 있다. 바로 매창시비(梅窓詩碑)다.
매창(梅窓)은 조선 중기의 기생이자 여류시인, 본명은 이향금(李香今)으로 선조 6년 1573년 부안현 아전 이탕종(李湯從)의 소실에게서 태어났다. 자는 천향(天香)이고 매창(梅窓)은 본인이 스스로 지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어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리기도 하며 계랑(癸娘 또는 桂娘)이라고도 하였다.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 등과 교류가 깊었다. 부안(扶安) 태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룬다.
부안의 묘에 세워져 있는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이다. 여기에는 1513년(중종 8)에 나서 1550년(명종 5)에 죽은 것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다. 그의 문집 매창집 발문에 기록된 생몰 연대가 정확하다. 그녀는 37세에 요절하였다.
매창은 허난설헌에 버금가는 조선시대 대표적 여류시인으로 어려서 부친께 한문을 배웠고 시문과 거문고를 익혀 기생이 됐다. 아마도 어머니가 기생이 아니었나 싶다.
조선시대 여자들은 이름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매창은 이름과 자(字),호(號)까지 가진 기생이었다.
기생신분인 매창에게 수많은 남자들이 찝적댔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함부로 몸을 굴리지 않았으며 겁없이 앙탈을 부리는 남자들을 멋진 시구절로 물리치기도 했다.
매창은 죽은 후, 부안읍 남쪽 봉덕리 공동묘지에 분신처럼 아꼈던 거문고와 함께 묻혔다. 이 고장 사람들은 이 언덕을 지금도 매창이 뜸(현 매창공원)이라 부른다.
그녀가 죽은지 45년 후, 후세사람들이 무덤에 비석을 세웠다. 그 후 13년이 지나자 매창의 시 수백편을 모아 고을 사람들이 목판을 깎아 ‘매창집(梅窓集)’이라 이름짓고 인근 사찰 개암사(開巖寺)에서 시집을 간행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를 둘러봐도 한 여인, 그것도 화류계에 몸담았던 여성의 글을 단행본으로 발간한 기록은 없다.
이 시집이 나오자 너무 많은 주문에 발행처인 개암사의 재원이 바닥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 후 세월이 흘러 1917년 부안시인 모임인 부풍시사(扶風詩社)에서 높이 4척의 비석을 다시 세웠다.
지금도 음력4월이면 부안사람들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시조문학의 대부, 가람 이병기(李秉岐)선생은 매창의 무덤을 찾아 이렇게 노래했다.
돌비는 낡아지고 금잔디 새로워라
덧없이 비와 바람 오고 가건만
한줌의 향기로운 이 흙 헐리지 않는다.
이화우(梨花雨) 부르다가 거문고 비껴두고
등 아래 홀로 앉아 누구를 생각는지
두 뺨에 젖은 눈물이 흐르는 듯 하구나
비단적삼 손에 잡혀 몇 번이나 찢었으리
그리던 운우(雲雨)도 스러진 꿈이 되고
그 고운 글발 그대로 정은 살아 남는다.
매창의 묘는 부안읍 사람들이 돌보기전에는 나무꾼들이 돌아가면서 벌초도 하면서 돌봤다고 한다.
유랑극단과 가극단이 부안에서 공연할 때는 먼저 매창의 무덤을 찾아 한바탕 신명나게 놀면서 대시인의 넋을
기린다고 한다. 기생 매창을 자신의 선배로 인식하고 예를 갖춘 것이다.
1974년 4월27일 매창기념사업회에서 시비를 다시 세웠다. 그녀의 묘는 1983년 지방기념물 65호로 지정됐다.
필자도 2012년 2월 부안에 있는 매창의 무덤을 찾았다.
황진이 무덤 찾던 백호의 심정으로
그동안 그려왔던 님을 찾아 왔더니
봉분의 눈(雪)녹은 물이 눈(目)물처럼 흐른다. - 필자
첫댓글 매창공원 이라는 유행가 노래도 있더군요ㆍ
매창은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듯해요
저도 불과 몇년전에 우연히 노래듣고
알았거던요
위에 나오는 이병기선생이
가야금 타며 tv에 나오던 그 분이신지 ㆍ
아마도 아닐 겁니다. 이병기 선생님은 돌아 가신지 오래 되었습니다.
1892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시조문학에서는 대부이십니다.
@물그림자 그렇군요
가야금 타던분은
김병기선생님 이신가 봅니다
썬시티님 댓글에 매창공원은 기생 매창을 기념하는 공원이 맞습니다.
도봉산 입구에
유희경 이매창 시비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