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라딘의 질문에 정찰부대로 나갔다 도저히 믿을수 없는 상황을 목격하고 돌아온 병사는 아직도 오한이 나는 듯 부들부들 떨며 살라딘에게 보고했다.
"틀림없습니다. 안티오크의 시가지에서는 곳곳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성벽 주변에 여기저기 전투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확실하게… 안티오크의 에미르의 머리가 창에 꿰여져서 성문에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린가? 그곳을 점령한 적들이 존재할 것 아닌가?"
"이미 철수한듯 하였습니다. 그곳에서는 또다른 난민들만이 흩어져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몇몇 광야로 도망쳐 나온 난민들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는데, 워낙에 예상치 못하게 다급하게 들이닥친 기습이어서 다들 정황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어떤 강대하고도 엄청나게 빠른 군대가 안티오크를 기습해서 현지 에미르를 제거하고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버린 다음 흔적도 안남기고 이동하였다는 것 밖에는… 아무런 단서가 없는 상태입니다."
"알았다… 이만 쉬어라."
"아닙니다. 지금 오론테스 강너머로 간 동료들에게 돌아가 의문의 적들의 행방을 더 추격하겠습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곧, 적의 정체를 파악하겠씁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살라딘의 허락을 받은 정찰병은 목례를 하고 물러났다. 살라딘은 무거운 표정으로 우리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구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잠시 얼마전의 일을 회상했다. 해안선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으로 북상하던 우리 일행은 제법 커다란 규모의 강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을 본 라와드가 기뻐하며 소리쳤다.
"오론테스강이로군요. 이제 다왔습니다. 안티오크는 오론테스강의 하류에 위치한 도시죠. 이제 이대로 강의 흐름을 따라 해안을 향해 가면 우리의 거대한 여정이 마무리 됩니다. 알라께서 우리를 축복하셔서 마침내 맘루크의 영지를 벗어나 해방의 땅으로 인도하셨군요."
그리고 그의 말을 케두스가 받았다.
"주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축복하셨습니다. 이제 슬슬 안티오크와 리마솔에 사절을 보내야 할 듯 합니다. 이 정도로 난민들을 데리고 맘루크의 영역도 아닌 중립지에 이동해왔는데, 제국도 황제 폐하의 의지와 세간의 여론을 의식해서라도 어쩔수 없이 우리를 도울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개입할 명분을 주는 사절의 파견이 필수적이겠죠.
그리고 안티오크에도 이제 슬슬 자신들의 영지에 들어온 불청객의 입장에서 그들의 입에 뭔가 물려줘야 할 듯 합니다. 뭘 물려줘야 기분이 좋아져서 우리를 수용해주고, 항만 시설을 통해 레반트에서의 탈출을 허락해줄까요? 허허허… 거지 신세인 조직의 재상은 곤란하군요. 멜리장드양, 그렇게 머리에 김나게 고민하지 마시고 천천히 저랑 같이 의논해 보시죠."
그의 말에 멜리장드가 죽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의 위기가 돌발상황에 의한 것이라면 앞으로의 고민은 예상했지만 도무지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대한 타개라구요. 대체 그 무기력하지만 욕심은 많은 파티마 가문의 영주를 설득할 만한 방법이 뭔지… 방법이 잘 잡히질 않아요.
그리고 제국에 구원을 요청하는 것도 그렇구요. 저번에 논의한 것처럼, 경우에 따라 제국이 여전히 강경하게 우리의 수용을 거부할 경우 안티오크를 넘어 아르메니아의 비잔틴 영토로 가는 플랜 B를 다시 검토해야 해요. 이제 식량도 두주분량 밖에 없는데… 여유부릴 상황이 될련지 모르겠군요."
살라딘은 미소지으며 말했다.
"뭐,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하죠. 일단은 정찰병을 보내서 현지의 동향을 조금 파악해보도록, 하고 교섭을 위한 타이밍을 계산하도록 하죠. 그런데 좀 이상하기는 하군요. 이 정도의 군중이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그곳에 알려지지 않을리가 없는데, 그런것 치고는 안티오크 에미르의 반응이 너무 조용하군요. 무슨 일이 생긴걸까요?"
그때, 살라딘의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돌아온 정찰병은 예상치 못한 무정부 상태의 안티오크의 동향을 보고했다. 우리는 우리앞에 닥쳐온 어처구니 없는 사실에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고뇌에 빠진 사람들의 의견을 들었다. 첫 의견은 항상 그렇듯이 멜리장드였다.
"일단… 정치적인 관점에서 상황이 대단히 심각합니다. 안티오크는 럼, 아이유브, 제국, 비잔틴 4국이 합의한 중립 지역입니다. 그곳을 건드렸다는 것은… 그 합의를 깰 능력과 의지를 가진 자라는 의미입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일까요? 그 정도로 깽판을 칠 정신 나간 놈은 샤를 카페 정도 밖에 없을꺼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이미 죽은 마당에 대체 누가…"
그녀의 말을 받은 것은 안젤모였다.
"단순한 미친놈이 아니다. 안티오크를 기습으로 하룻밤만에 함락시키는게 쉬운 일일 것 같으냐? 1차 십자군도 죽어라 고생해서 겨우 탈환한 오랜 성지이자 레반트의 고도다. 그런 곳을 정체조차 들키지 않고 점령해 버렸다면 그것을 주도한 자는 상당히 용의주도하고 빈틈이 없는 강력한 자일 것이다. 적어도… 군대를 움직이는 일에 있어서는 샤를 카페보다 한수 위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안젤모의 발언은 우리를 더욱더 우울하게 만들었다. 샤를 카페를 상대로도 정말 죽을 뻔한 고생을 했는데… 그보다 더한 상대라니… 대체 누굴까? 나는 그 의문이 들자 잠시 손을 들고 발언했다.
"의외로… 그 일을 주도한 대상자를 좁히는 것이 가능한거 아닌가요? 샤를 카페는 신성동맹의 맹주였어요. 그보다 더한 존재라면… 아마 세상에 그 존재를 숨기기도 쉽지 않은거 아닌가요? 아마 이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사람이리라 생각되는데… 대충 이 근방에 유력 인물들을 검토해보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나는 그말을 마치고, 당혹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그들의 표정에서 왠지 언급하고 싶지 않은 그 어떤 존재에 대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거… 설마 또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는거야? 잠시 후 살라딘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솔직히 말씀드려서, 지금 가장 유력한 후보가 한명 우리들의 머리속에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이런 일을 벌일 능력과 의지와 이유를 가진 자입니다. 그러나… 제 진심을 말씀드리자면, 죽어도 그 사람만은 아니기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그 자가 이번 일에 개입한다면… 이건 그야 말로 시작조차 할 이유가 없었던 일이 되버립니다. 그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버릴 힘을 가진 자이니깐요."
"대체, 누구이길래 그렇게 엄청난 표현을 하시는 건가요? 살라딘님은 어지간해서는 과장같은거 잘 안하시잖아요. 샤를 카페에게도 그 정도 묘사는 안하셨던 것 같은데…"
나의 말에 에라드만이 유일하게 동료들중에 나와 같이 제대로 상황을 인식 못한듯 이어서 물었다.
"그러게요… 살라딘, 당신을 이렇게 겁먹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는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데요. 샤를 카페도 동수 병력만 주어진다면 맞뭍어 볼만하다고 한 당신이잖아요. 저는 저외에 당신을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고는 생각해본적이 없는데요? 대체 누구입니까? 그 자식이…"
에라드의 말이 좀 미묘하게 생각해볼 여지가 있고, 존대가 낮춰진건 넘어가도록 하자. 그의 말에 살라딘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
"잠시 여담 같은 이야기로 설명을 시작해야겠군요. 20여년 전에, 유럽에는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열명의 명장들이 존재했습니다. 요한 우드, 레드 차이노 등을 비롯한 그들은 서로 누가 우위라 하기 힘든 경지를 보이며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고 있었는데… 그 균형을 깨뜨린 것이 에라드 위체 경이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라드는 자신의 부친의 이야기가 나온 것에 당황해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은 이어졌다.
"에라드 위체 경은 빵빵한 제국의 후방 지원과 마틸다 위체의 정보망, 그리고 무적의 퀸스가드를 운용하여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이름난 10인 중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을 패퇴시켰고, 그 정점에 서버렸습니다. 근데, 그가 너무나 대단한 공적을 세우자, 사람들은 그를 최고롤 꼽기보다는 후보의 범위를 유럽 밖으로 넓혀 우랄 산맥 서쪽의 영역, 서방세계에서 최고의 명장들이 누군지를 토론하였죠.
그리고 시간도 흘러 루키들이라 할만한 사람들도 명장의 반열에 오르기 시작하자 나름, 그럴듯한 서방의 5대 명장이라는 타이틀로 각 장군들이 지목되었죠. 일단 당연히 에라드 위체는 1순위로 그 자리에 올랐고, 그 뒤를 이어서 4명의 장군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잔틴의 바랑기안 근위대 선임대대 대대장인 헥터 바넬, 맘루크의 총사령관 바이바르스, 이미 잘아시는 신성동맹의 맹주이자 템플기사단 단장인 샤를 카페, 그리고 마지막으로… 잘랄 웃딘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말에… 에라드는 당황해서 소리쳤다.
"잘랄 웃딘? 그 몽골 제국의 대칸인 칭기즈칸도 두려워했다는 호라즘의 잘랄 웃딘? 하지만… 그는 이미 죽었잖아요. 그가 어떻게 명장의 반열에…"
"네 맞아요. 그는 죽었죠.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전쟁터에서 패퇴시키고 죽인 사람을 그를 대신하여 5대 명장의 반열에 올렸죠. 하지만… 곧 그 5대 명장의 내용 자체가 그냥 흘러간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잘랄 웃딘을 죽이고 새롭게 부상한 그자는… 자신이 5대 명장 같은 범주로 취급되고 있다는 이야기에 어이없어 하며, 다른 5대 명장들을 쓰러뜨려 자신이 세상에 유일한 최강자임을 증명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것을 해냈습니다. 그는 2차 미리오케팔른 전투에서 제국의 에라드 위체와 비잔틴의 헥터 바넬을 동시에 맞아 싸워 패배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내었죠. 그리고 이어서 안티오크의 대치에서 바이바르스를 한발 물러나게 하여 그 우위를 증명하였으며, 샤를에게 자신의 우위를 인정할 테니 적대하지 말아 달라는 서신을 받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나자 그는 자신이 최강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고 더 이상 5대 명장 같은 것은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마도… 우리를 노리는 자는 그가 틀림없을 것 같습니다.
럼술탄국의 계승권을 가진 왕자로서, 기울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운 남자, 공세를 취하던 제국과 비잔틴의 팽창에 제동을 건 남자, 자신이 직접 지휘한 수십차례의 전장에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남자, 잘랄 웃딘, 에라드 위체, 헥터 바넬, 바이바르스, 샤를 카페, 그 이름만 들어도 두려움을 주는 그 명장들을 굴복시키고 정점에 선 남자… 아나톨리아의 마룡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그 남자…"
그리고 그 순간 막사밖에서 정찰을 보냈던 병사들이 뛰어들어와서 소리쳤다.
"크… 큰일 났습니다. 오론테스강 상류에서 적들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이 그려진 검은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가짜 깃발이 아니라면 그들을 이끄는 자는 바로…"
그리고 정찰병과 살라딘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카이쿠바드 아르슬란, 그자가 틀림없습니다."
나는 뭐라 할말을 잃어버렸다. 그것은…정말이지 공포 그 자체였다. 오론테스강 동쪽 상류에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다가가자… 이미 그 위압감이 온몸을 저리듯이 밀려왔다. 군사에 문외한이었지만, 몇번 고생을 겪다 보니 그래도 눈썰미는 좀 생긴듯 했다. 군대는 적은 수라도 절도 있고 통일된 느낌으로 잘 정돈되어 있으면 그 위압감이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보다 더 강렬하게 느껴진다. 그저 몇백명의 보명으로도 그럴진데… 통일된 검은 갑주로 중무장된 수만명의 기병은… 그야말로 지옥의 군단과 대치하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보고를 듣자 마자 적정이 발견된 곳으로 도착한 우리는… 그 모습만 보고도 완전히 절망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감히 꼼수나 요행수로 어떻게 해볼 여지가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살라딘의 설명이 이어졌다.
"럼술탄국이 자랑하는 근위대들입니다. 미리오케팔른에서도 완벽하다 여겨졌던 포위 진형이 저들의 종심돌파가 이어지자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고 하더군요. 카이쿠바드는 특히, 기동성과 돌파력이 강한 중기병대를 선호하는데, 그래서 그런 병력들을 한곳에 모아 3만여명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진 기병 군단으로 성장시켰죠. 저들이 바로 쇠락해가는 럼술탄국을 지탱하는 마지막 보루이자, 서방세계에서도 두려워 마지 않는 마룡의 지휘를 받는 군단, 자신보다 열배가 넘는 적들도 감히 이기지 못하리라 평가되는 자들, 바로 샐러맨더(Salamander) 군단입니다."
그녀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내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저건 어떻게 해볼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토록 우리를 두렵게 했던 샤를 카페도 가진 기병 병력은 5천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완전히 몰살당할 위기에 처했다가 프라이팬 연대의 분투로 위기를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런 프라이팬 연대마저도 끝까지 적의 기병대를 괴멸시키는 대신 산속에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하였던걸 감안하면… 3만여명의 기병대로 구성된 저 압도적인 군단를 우리가 상대하는 것은…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무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약간의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는 발버둥으로 살라딘에게 물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정면 대결을 피하고 방어 태세를 취하면서 막아볼 여지도 없을까요? 이제 우리 병력도 살라딘님의 예루살렘 수비병 뿐만 아니라 굴람 보병에 프라이팬 연대도 조금 무리하긴 하지만 쓴다고 가정해 보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그러나 나의 말에 살라딘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절대 무리입니다. 병력차이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의 여정은 이곳이 종착지입니다. 그 말은 지금 현재 분산된 그룹들이 전부다 이곳으로 집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금 강력한 안티오크의 성벽조차도 막지 못한 그들을 광야에서 백만 군중을 지키면서 막아낸다는 것은 전쟁의 신이 온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나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확실히… 이제 무리의 합류가 눈에 띄게 불어나서 마치 모세의 출애굽기와도 같은 거대한 군중이 되어가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면서… 나 역시도 우려했던 점이기도 했다. 교전이 벌어지고 그들이 난민들의 학살을 결정한다면… 아마도 백만명이 전부 학살당하는데 걸릴 시간은… 일주일이 안걸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마디로 우리가 지금까지 숱한 희생을 통해 도달한 것을 단 한수로 뒤집어 엎을 힘을 가진 자를 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결국 상당한 체념의 마음을 품고 말했다.
"결국은… 절대 전투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군요. 어떻게든… 저들을 달래서 우리를 봐줄 마음이 들도록 설득하는 것 밖에는 길이 없겠군요. 협상이라는게 과연 가능할련지는 의문이지만 말입니다."
나의 말에 케두스와 멜리장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을 몰아 그들의 진지로 나아갔다. 그리고 한참 후 그들이 돌아왔다. 상당히 위축된 얼굴로…
"회담에 응한다고 합니다. 우리쪽 인원과 상관없이 10명을 데려 오겠다고 하더군요. 아마도… 그가 자랑하는 그의 친위대 10명의 대대장인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라도? 케두스 왕자님의 안색이 안좋아 보이시는군요."
나의 말에 케두스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나를 보며 말했다.
"그곳에서 저를 조금 불편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중에는 아마도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분들도 불편해할 사람들이 조금 섞여 있습니다. 카이쿠바드가 부하를 선발할때는 종교와 국적에 무관하게 능력만 본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의 심복인 10인의 대대장이 하나하나 출중한 자들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그 사람들일줄은 예상치 못했습니다. 일단은… 회담장소는 그들이 준비한다고 하니 곧바로 이동하도록 하시죠."
멜리장드의 표정도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나는 내 주변의 나의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표정에서 그곳에 누군가 서로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듯한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나는 그들과의 마음과는 별개로 아나톨리아의 마룡이라 불리는 그를 만난다는 사실에 긴장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떼어야 했다.
도착한 곳에서는 천막, 아니 작은 저택 같은 화려한 막사가 세워져 있었다. 온갖 장식들로 수놓아진 천으로 감싸고, 바닥에는 화려한 금사와 은사로 장식된 카펫이 깔려진 그곳은, 제왕은 잠시라도 귀한 몸에 흙먼지를 뭍혀서는 안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그곳에는 수십명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지는 않았다. 막사의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케두스와 동향으로 보이는 어느 중년의 흑인 장교였다.
"어서 오시죠. 왕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를 본 케두스의 눈은 전례없이 흉흉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런 그의 눈빛을 중년의 그 흑인 장교는 무시하듯, 혹은 비웃듯 내려보며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우리를 안내했다. 안이라고 해봤자, 바람이 잘 통하게 주변이 뚫려 있어, 저멀리 광야가 보이는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그 장소는 마치 따로 독립된 장소처럼… 까놓고 말해 궁전처럼 위엄있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가 있었다.
"어서 오시죠. 제국의 왕자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부하들 십여명이 광택이 나는 검은 고급 갑주로 무장하고 있는 가운데, 홀로 제왕처럼 황금빛으로 빛나는 갑주를 입은 사나이, 마찬가지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투구가 마치 왕관처럼 보이는 그는 샤를보다 조금 윗 연배로 보이는 대단히 수려한 남자였다. 단정하게 다듬은 콧수염과 턱수염이 잘 어울어지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보는 이로 하여금 주눅을 들게 만드는 위엄을 이미 날때부터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는 뭔가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듯한 광채를 발하면서도 그리 거만하지 않게 친절한 태도와 목소리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마주보고 섰다. 낡아빠지고 땟국물이 쩌든 옷차림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과 머리카락의 내 모습은 그 누가 봐도 패배한 다음 항복하러 온 사람의 모습과 다름없었다. 나는 애써 두려운 마음을 감추고 그에게 인사를 건내었다.
"이렇게 만나뵙게 되서 반갑습니다. 이미 폐출된 몸이니 왕자라는 칭호는 과분합니다. 그냥 죤이라고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럼의 후계자시여."
그는 나의 말에 알 듯 말듯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권했다. 내게 권해진 자리는 아름다운 장식으로 수놓아진 좋은 쿠션이었고, 그 뒤에 나의 동료들의 자리로 마련한듯 십여개의 쿠션이 놓여 있었다. 그는 우리가 자리에 앉자 나와 마주보는 위치에 화려한 앉은뱅이 의자에 앉았고, 그의 부하들은 다들 뒤에서 시립하였다. 서로 자리에 앉자 그는 각자의 부하들의 소개로 대화를 시작하였다.
"일단은,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알라께서 이교도인 당신에게도 축복을 내리신 모양이시군요. 당신과 당신의 부하들의 지난 몇 달간의 행적은 이곳 럼에서도 흥미로운 이야기로 퍼져나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곤 하지요. 덕분에, 여기 계신 당신의 각료분들을 저는 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제 부하들을 모르시겠죠? 일단 소개부터 하고 시작하는 것이 예의일 듯 하군요. 각자, 나가서 죤 왕자님에게 자기 소개를 하도록 하게. 겸사겸사 자네들의 옛 지인들과도 재회하고 말이야."
그가 그렇게 말하자 처음 우리를 안내한 흑인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아디스 솔로몬입니다. 만나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죤 왕자님, 그리고… 예루살렘의 마부 청년도 오랜만이야. 요즘은 거기 벌이가 시원치 않은가봐. 여기까지 영업을 뛰는 걸 보면… 언제 시간이 되면 내 말도 한번 좀 봐줬으면 좋겠군."
그러자 케두스가 조용히 분노를 담아 입을 열었다.
"조국을 팔아먹고 외국에 망명해서 동포들의 피를 빨아 호의호식하더니, 결국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구나. 솔로몬의 개자식아."
그러나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자리로 들어갔다. 다음으로 나온 것은 금발의 청년이었다. 그는 멜리장드를 보며 말했다.
"위그 드 샤티용이다. 예루살렘을 말아먹은 그 영감태기는 아직도 안죽었더냐? 그 소아성애자 영감태기가 여왕을 빨아먹다 못내 아쉬워, 앙주의 마녀에 들러붙더니 이제 여왕의 이름을 붙인 손녀를 성지로 보내다니… 재밌네."
"뻔뻔스럽게도… 멜리장드 여왕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마라. 네놈이 레날 드 샤티옹의 손자라면, 너 또한 왕국의 성문을 열고 멸망을 이끈 역적의 일족이다. 그리고 네놈이 오랫동안 로도스에 주둔하고 있는 구호기사단에 행패를 부리다 기독교 세계에서 공식적으로 추방된것도 모자라 이렇듯 우리를 욕보이다니… 주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다음 사람은 왠지 나도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체스의 지명수배자 공고에서…
"죤, 이 마녀와 사생아의 자식놈이 잘도 이곳까지 왔구나. 나를 알아보겠지? 조지 노르망디, 네 아비가 찬탈한 왕좌를 수호하던 베드포드 공작의 아들이다. 앞으로 네놈은 편히 잠을 자긴 힘들꺼다. 그리고, 에라드 위체… 네놈도 용서하지 않겠다. 네놈의 아비가 앙주에서 모든 질서와 평화를 망가뜨렸다. 원래 베드포드의 마굿간지기나 하던 자가 에드워드에게 들러붙었다가 결국 제국에 들러붙더니 결국 주인을 물었었지. 위체의 피는 세상에서 영원히 저주받을것이다."
나는 에라드 역시 발끈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라드는 조지 노르망디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조용히 그를 무시하고 눈앞에 카이쿠바드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무시당한 조지 노르망디는 분통을 터트리며 물러났다. 다음 사람은 살라딘을 보고 말했다.
"쿠투시 아이유브다. 알 아프달이 미친게 틀림없군. 계집애를 그 노른자위 같은 땅의 주인으로 앉히다니. 결국 이렇게 꼴사납게 추방되었을 것을…"
"입닥치시죠, 쿠투시 숙부… 아니 당신은 일족으로 부르는 것조차 화가 나는 군요. 술탄의 자리를 노리고 내전을 벌이다 결국 다다른 곳이 겨우 여기인가요? 조부께서 당신이 구제불능이라 평하신 말씀을 일족 모두가 귀담아 들었어야 했는데… 당신만 아니었다면 아이유브가 이렇게 허망하게 맘루크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을 겁니다."
다음 사람은 조금 건들거리며 아이샤에게 말했다.
"아론 요세푸스, 군단 보급관이다. 듣자하니 오는 길에 하레디들은 다 뒈졌다지? 거 속이 다 시원해지는 기분이구만. 근데 눈앞에 하나 남았군."
"당신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채무 담보로 사람 가슴살을 걸게 하고 실제로 도려내는 죽음의 고리대금업자. 조슈아 오라버니도 막장이기는 했지만, 당신의 행동에서 발생된 출혈은 부당징수라고 법정에서 교리를 주장한 덕분에, 성지에서 추방된 앙심을 품은 모양인데… 용서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음 사람은 조금 중늙은이지만 상처입은 눈빛은 빛나는 어느 이탈리아 노인이었다.
"주세페 도리아다. 안젤모라는 이름은 제노바에서 무차별 살인을 부르는 이름이지. 내 눈을 이렇게 만든것도 그 이름을 가진 자였지. 얼마전에 아이유브 해군을 엿먹였다지? 나는 그렇게 쉽게 안될꺼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살 각오를 해야 할걸?"
그의 말에 안젤모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그거 영감 발기 패턴이야? 뭐 틀린 말은 아니네. 원래 그 나이 먹으면 세울려고 용쓰기 보다는 다 포기하고 마음을 놓아야 잘되거든. 참고로 난 항상 의지만 있으면 살아. 전쟁터에서든, 침대에서든 상관없이 말이야. 함 보여드릴까?"
노인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뭔가 들이 박으려는 듯 하다가, 카이쿠바드의 눈치를 보더니 겨우 물러났다. 우리쪽에서 겨우 1승한건가? 다음 사람은 중년의 무슬림 남성이었다.
"마시아프의 핫산이다. 그 유명한 체스의 검은과부거미가 네놈이렸다? 어새신 교단에 수치를 안겨준 네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 중에 있는 우리중의 배신자도 용서치 않으리라."
"미안하지만 그거 나 아니야. 하지만, 그 이름은 내가 물려받았다. 네가 약쟁이 칼잡이들 리더 산중의 노인이냐? 그래, 붙어보자. 느베리는 원래 후방이 아니라 전방에서 적의 시체로 계단 만들어 밟고 올라 체스안에서 출세한 집안이다. 내 사수에게 잘못놀린 혓바닥에 대가를 츠리게 해주마."
다음 사람은 다소 거대한 체격의 그리스 청년이었다. 그는 아그네를 바라보며 말했다.
"칼리스토 콤네누스다. 계집애들 따위가 태어날 때 출산실 하나를 잘잡았다는 이유로 황위의 후계를 논하니, 그 약해 빠진 알렉시우스에게 황위를 빼앗기고 밀리는거지. 널 붙잡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플로 가겠다. 바실렙스의 자리는 정당한 후계자인 내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각오해라, 동생아."
"당신이 나의 아버지, 안드로니쿠스의 피를 이었다는 건 당신 어머니의 주장에 불과하죠. 이전에 이미 서방을 셋이나 뒀던 당신 어머니 말이죠. 제국의 후계가 보랏빛 방에서 정해진다는 것은 천년의 불문율, 당신은 감히 그것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다음 사람은 조금전 소개를 마친 위그와 마찬가지로 서방 출신의 기사였다. 그리고 그의 가슴에 있는 붉은 십자가가 그의 출신을 짐작하게 해주었다.
"마르탱 블루아다. 샤를 단장을 죽였다지? 이 배신자년… 네년은 절대 편하게 죽지 못할것이다. 주님의 진노가 너에게 향할것이다. 너를 만나 복수할 기회를 주신 주님께 감사한다.
"아뇨, 주님이 복수할 기회를 주신건 당신이 아니라 저입니다. 산타 카탈리나의 만행을 주도한 범죄자를 처단하라는 기회를 저는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단장은 죗값을 치뤘으니, 이제 그 실제 주모자인 당신의 차례입니다."
크리스틴과 신경전을 벌이고 들어간 마르탱에 이어 나온 마지막 사람은 무슬림 중년 사내였다.
"후세인 자르카이다. 순교하러 갔다가 이교도에게 빌붙어 먹고 뻔뻔하게 살아돌아와서 죄를 뉘우치지는 못할 망정, 여전히 이교도들과 붙어먹는 짓을 하는 네놈은 알라께서 용서하지 않으실것이다. 정통의 교리로 너를 심판하겠다."
"오랜만이군요, 광신자 후세인 선생… 이제는 명예살인 선동도 지겨워 지셨나 보더군요. 럼의 군종장교로 참여해 수많은 쿠르드족을 학살하고 다닌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설마했는데 이렇게 다시 볼줄이야. 하긴, 당신 뒤를 봐주던 탈레반들이 씨서펜트의 손에 아작이 났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겠지만… 아무튼, 나 역시도 당신은 용서할수 없소. 당신 손에 처참히 희생된 여성들과 교리의 차이로 학살된 백성들의 뜻을 모아 당신의 죄를 물을 것이오."
결국… 자기 소개라기 보다는 서로 기분만 대판 험악하게 만든 상견례를 마치자, 카이쿠바드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이런이런… 서로 재회를 하라고 했더니, 이래서야 뭐 당장이라도 칼들고 한판 할 모양이 되버렸군요. 분위기가 너무 고조되어 버렸는걸요? 조금은…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겠군요. 그러기 위해서 일단은 우리가 당신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을… 조금 이르지만 전달해 드리는 것이 도리일 듯 하군요.
그의 말에 나는 황당한 기분을 느끼며 물었다.
"선물이라니요? 무슨…"
"별로 대수로운건 아닙니다. 저기를 보시죠."
그의 손이 가리킨 곳은 뒷편에 그들의 진영에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다른 작은 구릉이었다. 그곳에 희미하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몇마리의 말과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멜리장드가 시야 안에 다른 병사들을 들이는 것은 관례에 어긋난다는 듯 항의를 하려는 찰라, 그가 팔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저너머에서 우리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깃발을 휘둘렀다.
그리고, 순식간에 엄청난 광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두 마리의 말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우리는 그 말들에 밧줄이 묶여져 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이어진 밧줄의 중심에는… 한 사람이 묶여져 있었다. 그리고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말들이 힘차게 달려나가자 줄은 곧 팽팽해졌다. 그리고 사람이 치솟아 올랐다. 두 밧줄은 그 사람의 양쪽 다리에 묶여진듯 했다. 곧 다리가 활짝 벌려져 꺼꾸로 들려진 그의 모습은 T자 모양이 되었고… 그 T자 모양이 달려나간 말의 힘을 못이기고, 두개로 찢어졌다.
순간 발생한 엄청난 처형 장면에 우리는 할말을 잃어버렸다. 먼 동방에서 대역무도한 죄인을 죽일 때 사용한다고 소문만 들은 처형이 우리 눈앞에서 벌어졌다. 나는 겨우 고개를 돌려 여전히 흐믓하게 웃고 있는 카이쿠바드를 보며 물었다.
"대체… 왜? 저 사람이 누구길래?"
그러자 나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저자는… 우리가 함락시킨 안티오크의 에미르의 장자입니다. 안티오크를 기습해 함락시키고, 관련 문서들을 찾아보니… 재밌는 내용이 있더군요. 그것은 방금전 처형된 저 멍청이의 야심찬 계획이었습니다. 그는 자신들의 영내에 들어온 당신들을 습격해서 재물과 인질을 확보하고, 그것으로 제국에 한몫을 챙길 터무니 없는 야심을 품고 있더군요.
그래서, 분수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아무렴, 샤를 카페도 넘어서서 나에게까지 온 당신들이 저런 녀석에게 당하겠습니까만은… 그래도, 저런 송사리가 대국적인 거사가 이뤄지는 상황에서 물을 흐리는 것은 도리가 아니죠. 뭐, 만족스럽지는 않겠지만 우리측 성의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잘 해내셨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덕분에 예상치 못한 기습공격 한가지는 더신거 아닙니까?"
나는 그제서야 알수 있었다. 그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범주로 대화해서는 안되는 상대라는 사실을… 그에게는 정말 저것이 선물인 것이다. 절대로 빈정거리거나 비꼴려는 생각이 아닌 것이다. 그에게 사람의 목숨은 그야말로 몇푼어치 선물로 주고 받을수 있는 그런 것이다. 결국, 뭔가 대등한 입장에서 지금까지 행운이 함께했던 그런 협상으로 생각했다가는 처참한 대가가 따를 것이 틀림없었다. 이것은 협상이 아니다. 그저 일방적인 그의 의사 관철에 불과할것이다.
뒤를 돌아보았다. 나의 동료들 역시도 방금전의 처참한 처형 장면에 기가 질린듯 조금전 오래전의 숙적들을 만나 보여주던 살기는 온데간데 없고 그저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카이쿠바드의 부하들은 의기양양하게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으며 그에게 말했다.
"바라던 상황은 아니지만… 어찌되었건 저희에게 호의를 보내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당신의 의지를 이 땅에 펼치시는 그 힘을 칭송합니다. 그러니, 보여주신 호의를 좀더 우리 불쌍한 백성들에게 더 관대한 마음으로 베풀어 주실수는 없으실지요? 저는 어리석고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런 저를 따라 이곳으로 온 백성들을 지킬 힘이 부족합니다. 바라건데 자비와 관용으로 저희들이 가는 행보를 축복해주시고 세상이 널리 칭송할 미담을 남기심이 어떠실지요?"
나의 말에 그는 조금 나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그런 겸양을… 모세의 업적을 능가할 일을 성공의 목전에 두신 분께서 겸양이 지나치시군요. 확실히… 샤를이 말한 그대로군요. 클라크 데 슈발리에서 결전을 치르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낸 서신에서 당신을 녹록하게 보지 말라고 충고를 아끼지 않더군요. 딱히 그의 충고가 아니라고 해도,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 멍청한 바라카처럼 당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망신을 당하는 어리석음을 행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당신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 많은 군중들을 이끈 업적은 물론이고, 샤를을 잡은 시점에서 당신의 행보는 전 세계에 주목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좀더 자신을 가져도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몸이 직접 당신을 만나기 위해 우리 영지도 아닌 이곳 안티오크에 까지 온 무리수가 의미없는 행동이 되어버리겠죠. 나는 너무 하찮은 자와는 직접 대화를 하지 않는답니다. 그러니 자신을 낮추는 행동은 이제 그만하시죠. 그건 저를 모욕하는 일입니다."
역시나… 아부가 먹힐 사람은 아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왜 저 강대한 병력을 몰아 안티오크를 공격하시고, 평정한 다음 우리 후방에 주둔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단순히 우리의 여정에 호의를 가지시고 우리를 해할 음모를 꾸민 안티오크 에미르를 벌하고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오신게 아니라는 건 알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십니까? 말씀해주시죠. 어차피 무력으로 당신의 의지를 막을 힘이 없다면, 요구 조건을 듣고 그것을 수용하는 것으로 백성들의 안전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말씀해주십시오. 당신이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절할 힘이 없는 우리에게 당신이 요구하고자 하는 것을 알려주십시오."
그는 나의 말에 조금 흡족한듯 기분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팔걸이에 비스듬히 뉘이며 차분하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인 말이 더 마음에 드는 군요. 일단은 나의 요구조건을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조국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 우리 럼은 나날이 세력이 위축되어가고 있습니다. 한때는 잘랄 웃딘의 군대도 물리치고, 제 2차 미리오케팔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둬 그 흐름을 늦추기도 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인 쇠락의 속도는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지속되고 있는 상황이죠.
어느 국가든 영원할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상을 꿈꾸고 잘랄 웃딘처럼 어리석은 조국을 일으키는 무리수를 두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원인과 방법이 명백한 상황이라면 나라를 물려받을 정당한 계승자로서 손을 놓고 있을수만도 없는 법이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쇠락하는 조국을 좀더 오래도록 유지할수 있도록 지탱하는 것이 지배자의 의무입니다. 현재… 우리 럼은 표면적으로는 비잔틴의 부흥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있지만, 이면에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제국입니다.
베니스인들과 우리 럼의 공세에 시달리다 알렉시우스의 외교적 무리수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신생 제국에 지지와 인정을 가장 먼저 한 덕분에, 제국은 비잔틴에게 적극적인 우호 정책으로 감사를 표시했죠. 그것은 제국의 넘쳐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물자와 자본의 투입으로 이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리 큰 도움이 되겠나 싶었던 그 지원은 점차 비잔틴이 옛 저력을 되찾고 정국을 안정시켜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드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아나톨리아에서 그들을 상대하는 우리는 입장이 난처하게 되어버렸죠. 럼의 전방위에서 비잔틴은 압박해 들어왔고, 저는 그런 그들의 무력 도발에 대해 나의 친위대를 이끌고 적극적으로 대처하여 수많은 승리를 쌓아올렸지만, 정말이지 밑도 끝도 없이 몰려오는 적들의 공세에는 도리가 없더군요. 결국 나의 승리는 피로스의 승리로 몰릴 지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이 전쟁을 승리하기 위해서는 정면의 비잔틴의 공세를 막아내기 보다는, 후방의 제국의 지원을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눈앞의 적을 때려잡는 것보다도 쉽지 않은 방법이더군요. 한참동안 우리 럼의 수뇌부에서는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 상황에 적절하게도 샤를의 서신이 도착하고 그에 대한 작은 아이디어를 주더군요. 뭐, 이미 관련 의견이 발의된 적이 있긴 하지만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 의문이 들어 논하지 않았는데, 샤를의 조언을 참조해보니 해법이 나올듯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신에게 단 한가지 요구조건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그리고 한참후에 입을 열고 도무지 믿기 힘든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의 요구조건은 단 한명의 인질입니다. 그건 바로… 당신 죤 입니다."
그리고 침묵이 감돌았다. 나는 순간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머리속이 복잡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인질이 되라고? 그러나 그런 나의 의문과 무관하게 그는 말을 이어갔다.
"샤를은 좀더 당신과 복잡한 정치와 종교가 엮인 왕좌의 게임을 하고 싶었나 보지만, 나는 그런 것에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단순하게 제국의 공세를 저지할 수단만 확보하면 그만입니다. 당신을 따르는 수많은 백성들과 당신의 각료들… 솔직히 말해 어찌되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좀 다르죠.
당신은 제국의 여제의 아들, 폐출되었다고는 해도 내가 아는 제국의 여제는 자식에게 모질 어머니가 아니라고 생각되더군요. 당신을 확보하고 외교적으로 다소 험한 수사를 구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제국의 여제에게 충분히 압박을 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이 자신의 의지로 우리에게 투항하여 동행하고 럼으로 가주기를 요구합니다."
그의 말이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나는 겨우 무거운 입을 열어 그에게 말했다.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고 계신 것 같군요. 저는 황실에서 폐출된 몸입니다. 그리고… 이 데네브 작전에 참여하면서… 제국과도 척을 져버린 상태입니다. 저의 죽음으로 인해 제국이 결정된 정책 기조를 변경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황제 폐하의 강력한 의지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상관없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강경하게 고수한다고 하면, 우리는 당신을 통해 여제의 가슴을 아프게 할 결과물을 보내면 그만입니다. 그리고 설령 제국의 정책이 바뀌지 않아 비잔틴의 지원이 지속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발생될 의사결정에 약간의, 아주 조금의 망설일 시간을 주는 것 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합니다. 그 정도면 내 군단이 충분히 비잔틴을 물리치고 다시 럼의 영광을 구현하기에 충분한 빈틈입니다. 어느 쪽이든 간에 우리에게는 손해볼것이 없는 결과입니다.
자, 어쩌시겠습니까? 아니, 어차피 결론은 나있는 것이겠죠. 나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어떤 비극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이미 안티오크의 참변을 통해 충분히 목격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나의 조건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그대로 당신 한명의 신변만 확보한 다음 북쪽으로 발걸음을 돌려 럼으로 돌아갈것입니다. 남은 난민들은 단 한명도 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안티오크의 항구로 이동할수 있을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그들이 어찌되건 나에게는 알바가 아닙니다. 나는 오로지 제국을 저지할 목적만을 위해 이곳에 왔고, 그것이 관철될 때까지 돌아가지 않을 작정입니다. 나의 부하들을 소개해드렸죠? 다들 당신의 각료들과 은원이 있는 상대들인듯 하더군요.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유능한지는 내가 굳이 설명드리기 민망할 정도더군요. 백만명의 군중들? 그 의지없는 양떼들은 시체의 산 십여개면 충분히 소화할수 있는 분량이죠. 아마 맞을겁니다. 쿠르드족 백성 20만명이 시체의 산 3개로 충분했거든요.
나는 사람들 사이의 예의와 분수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미 나는 충분히 예의를 갖춰서 당신에게 제안을 하였고, 당신은 그저 그것을 마찬가지로 예의바르게 수용하면 일은 간단히 해결됩니다. 저는 당신이 다른 무례한들처럼 분수도 모르는 행동으로 내가 갖춘 예의를 무시하는 행동을 하질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나는… 뭐라 할말이 없었다. 그야말로 그것은 그냥 통고였다. 그에게 협상이란 약자들의 것이며, 백성이란 양떼에 불과하고, 죽음은 남의 일이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몸에 도는 오한을 억지로 억누르며 멍하니 있는 나에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조용히 말했다.
"물론, 바로 즉답할 필요는 없겠지요. 나는 관대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당신도 미약하고 볼품없을 지언정 한 조직의 리더이니, 품위를 갖추고 작별할 일주일의 시간을 드리지요. 우리는 오론테스강의 상류에 북쪽으로 가는 여울목 지점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일부 부대를 이곳에 남겨두겠습니다. 일주일 후에 당신 혼자 우리쪽으로 오길 바랍니다. 그러면 남겨놓은 부대들이 당신과 함께 이곳을 이탈해서 본진에 합류할 것입니다.
만약에 잔꾀를 부리거나, 허튼 짓을 한다면… 남은 백성들의 안전은 보장할수 없습니다. 우리의 주둔지는 걸어서는 3일 거리지만, 우리 군단이 전력으로 기동한다면 반나절이면 다시 이곳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안에 백만 군중들을 어떻게 숨기거나 피신시킬 방법을 찾기는 무리겠죠? 그러니… 우리 샐러맨더의 칼날이 그들에게 닿게 하지 않길 바란다면 허튼 짓은 하지 않기를 권고합니다. 일주일후에 뵙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는 그렇게 말한 다음 일어선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막사 뒤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그의 부하들이 따라나갔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보고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남겨진 우리는 뭐라 더 할말을 잃은채 그대로 멍하니 있었다. 한참후에… 침묵을 깬 것은 안젤모였다.
"돈지랄도 가지가지다. 이 막사랑 카펫들을 전부다 여기에 버리고 가는거야? 곱게 싸서 챙겨다 씨서펜트호 선장실에 깔아 놓을까 보다."
유감스럽게도 그의 야망은 무산되었다. 그의 말이 끝나자 멍하니 자리에 일어서 우리 막사로 돌아가려고 밖으로 나오자마자 멜리장드가 횃불을 들어 막사를 죄다 태워버렸으니깐. 그리고 그녀는 분통의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라도 밖에 그들에게 해꼬지 비슷한걸 할 힘이 없는 우리 자신이 너무나 분해서 우는 눈물이라는 것을 나는 알수 있었다.
막사에 돌아와서 곧바로 대책회의가 진행되었다. 나는 그냥 평범하고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모두에게 의견을 전했다.
"갈게."
그리고 이번에는… 반발의 수준이 도를 넘어섰다. 멜리장드와 아이샤가 사이좋게 날라차기로 나한테 발길질을 날렸으니깐.
"크아아악!!!"
"케두스 왕자님, 당장 이 인간 꽁꽁 묶어요."
"안젤모, 아예 쇠사슬 가져와요. 자물쇠도 같이요!!!"
한참동안 옥신각신 난장판이 해결되고 겨우 두 사람을 떼어내자 나는 소리쳤다.
"대안이 없잖아! 대안이!!! 다른 방법있어? 저 인간같지도 않은 괴물을 상대로 난민들 안전하게 탈출시킬 방법이 있다면 그렇게 하겠어. 하지만… 이건 밑도 끝도 없는 끝판왕이잖아. 너희들 눈으로도 똑똑히 봤잖아. 이젠 방법이 없다고!!!"
나의 말에 아그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습니다. 왕자님은 우리의 주군이십니다. 지금 놈들의 요구는 이 거대한 조직의 수장을 내놓으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거래가 세상에 어디 있단 말입니까?"
"아뇨, 합리적인 제안입니다. 사람 하나만 내놓으면 그만이잖아요. 그리고 당사자가 동의까지 하고 있잖아요. 처음에 저에게 그러셨죠? 리더는 책임만 질수 있다면 돌멩이라도 상관없다고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인 것 같군요. 조직의 리더로서 책임을 져야 할 시간… 나는 이 조직의 리더입니다. 리더로서 나의 희생으로 모두를 살릴수 있는 제안이라면… 오히려 기쁘게 그 책무를 받아 들이는게 순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때 저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게 아닙니다. 지금 너무 앞서가시는 거라구요."
"아뇨, 앞서나가지 않았습니다. 이미…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어요. 샤를을 죽일 때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는… 내게 선택의 시간이 올꺼라고 말했어요. 그리고 이미… 그는 내가 무슨 선택을 할지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할수 있었어요. 그 어떤 형태이든간에… 샤를이 나를 위해 준비한 것이 죽음이거나, 혹은 그 이상으로 잔혹한 것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니깐요. 결국, 나는 그를 죽인 대가를 조금 일찍 치르게 되는거겠죠."
나의 말에 아그네 공주는 말을 잃었다. 그녀가 물러나자, 멜리장드가 소리를 치며 나에게 다시 달려들었다.
"지금…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거 아닌가요? 그게 그렇게 죽는 것 처럼 편한 처우라고 생각하세요? 럼의 인질이 된다는건… 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는 것을 말하는 거라구요. 당장 새장이라 불리는 그들의 귀빈실을 가장한 감옥에 갇혀서 마약에 쩔어버린 다음 이지를 상실시길 겁니다. 자기 이름도 기억 못하게 망가뜨려 버린 다음 각종 외교 석상에 끌려 나와 제국을 비난하고 폐하를 모독하는 언사를 하도록 강요당할겁니다.
그리고 그곳에 갇혀서… 강제로 성적인 모독을 당할겁니다. 수많은 여자 노예들을 동원해서 왕자님의 씨를 받아내어 제국에 혼란을 가져올 아이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성적인 학대가 지속될겁니다. 이미 그 정도 지경이 되면 이지를 잃으셔서 그게 고통인지도 모를수도 있겠지만요… 그걸 바라시나요? 그런 잔혹한 폭력을… 왕자님께서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래서, 그게 싫어서 가지 않으면? 뭐가 달라지지? 20개의 시체산을 뒤로 하고 끌려가 방금 말한걸 똑같이 할 뿐이잖아. 그냥 갈지, 아니면 백만개의 시신을 만들고 갈지를 묻는다면… 전자가 훨씬 낫다는 건 누가 봐도 명백하지 않아?"
그녀가 거칠게 소리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저에게 있어서는 백만명의 안전보다 왕자님의 안전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저는 왕자님을 그렇게 보낼수는 없어요."
나는, 결국 마지막 수를 꺼내들었다.
"필립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 그분에게 배운건 제왕학이 아니라 펜싱이었지만, 그분께서는 리더의 검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셨어. 그분의 의견까지도 무시하겠다는 거니?"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그럴수는 없단 말이라구요…"
멜리장드는 땅바닥에 무릎을 꿓고 고개를 숙이고 흐느꼈다. 내키지는 않은듯 하지만 어떻게든 납득은 시킨건가?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었다. 이어서 내게 칼을 들이대는 사람이 있었다. 에스더였다.
"못가."
"아뇨, 난 갑니다."
"넌 못가, 죤! 그 아나톨리아의 마룡에게 널 넘겨줄바에야 내 손으로 널 죽이는게 훨씬 나아. 죽기 싫으면 닥치고 따라와."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항상 멀리서도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죠. 그러니 아마 나에 대해 잘 알꺼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도 당신을 안다고 감히 자신을 해보고선… 게임을 한번 해볼까요? 내가 그대로 목을 들이 밀어 칼끝에 달려들면, 당신이 칼을 거둘지? 안거둘지?"
"뭐? 뭐… 지금 무슨…"
"하나, 둘, 셋! 내가 이겼군요."
그녀는 칼이 불에 달궈지기라도 한 것처럼 셋을 외친 순간 내가 목을 들이 밀지도 않았는데 검을 떨어뜨렸다. 나는 검을 주워서 손잡이를 그녀쪽으로 향하게 해서 건내주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못죽여요. 당신이 구한 생명이니깐요. 그래서 당신에게만은 사과합니다. 구해준 생명을 함부로 내다버리는 한심한 짓거리를 해서…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그녀는 말없이 칼을 나꿔채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방금전의 소동으로 모두들 다시 말문을 잃었다. 검으로 위협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되자 더는 할말이 없어진듯 다들 멍하니 나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모두들 수고가 많았습니다. 이제 며칠후면 모든 난민들이 이곳에 모인다고 했었죠? 몇 달밖에 안된 시간이었지만, 힘겨운 시간이었고, 위기의 순간이 너무 많았죠. 그 순간순간마다 모두 힘을 합쳐 이곳까지 온 길을 인도한 주님에게 감사드리고, 여러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조금 마무리는 아쉽지만… 데네브는 성공하였습니다. 앞으로 단 한명의 낙오자가 예견된 것 외에는 더 이상 아무런 피해도 없이 무사히 난민들은 제국과 비잔틴의 품에 안길것입니다.
저의 역할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황제 폐하가 세우신 큰 뜻을 부족한 제가 이어받아, 겨우 여기까지 해낸 것이 천운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진심으로 행복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세상에 제가 나온 삶의 의미에 대해 고뇌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런 필요도 없는 존재라는 자조감에 세상을 등지고 살아가려 하였죠. 하지만 이곳에서 저는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어울려 소통하며 난생 처음 어울려 살아가는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희생이라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그냥 인질이 되어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안전을 담보하고자 합니다. 괜찮은 결말입니다. 서로 미소지으며 작별인사를 하고 서로의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만나길 바랍니다. 저는 다만, 그해 여름의 엑소더스에서 만났던 어느 유쾌한 광대로 여러분의 기억에 남는다면 이 세상 그 어디에 있더라도… 흐믓한 미소를 지을것입니다. 다시 한번…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들은… 아무도 더 말을 하지 못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복받치는 것이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참 거지 같은 3류 연극이다. 죽고 싶지 않다. 이성을 잃고 인형처럼 구속당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지금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별 볼일이 없던 나의 삶에 처음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할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 상황에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수 없었다. 나는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세상이 끝난 것 처럼 좌절하고 있는 나의 동료들에게 말했다.
"지금, 여기 남아 있는 사람 중에 외교 담당자와 제국 출신들은 내일 서둘러 안젤모의 함대의 접선 장소로 가서 배를 타고, 리마솔 기지로 가도록 하세요. 그리고 난민들을 이송할 바지선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세요. 그리고 공주님과 다른 사람들도 혹시 모를 제국의 망설임이나, 아니면 준비가 늦어질 것을 대비해 인원을 아르메니아의 아다나로 이동하는 내역을 협상하기 위해 비잔틴으로 먼저 출발하세요.
앞으로 일주일, 카이쿠바드는 약속을 지키리라 생각되지만, 식량의 사정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사람들도 꾸역꾸역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는 상황에서… 아무래도 우리의 후속 조치를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벌어 놓은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겠죠. 이곳에는 난민들을 통솔할 최소한의 인원만 남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대기하고 있는 카이쿠바드의 잔류부대에 일주일 후 가겠다는 연락을 하세요.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별다른 배웅은 필요없습니다. 조용히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큰 걱정은 안하지만 가급적이면 난민들의 소요를 생각해서 이 사실은 외부에 알리지 말아주시길 바랍니다. 남은 일주일 동안 평소와 다름없이 난민들을 돌보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다가, 갑자기 성지에 바람처럼 왔듯이, 다시 바람처럼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으로… 데네브 작전의 종료를 공식 선언합니다. 앞으로 일주일의 시간이 남았지만, 큰 의미는 없으니 이만 마치고, 앞으로는 제국과 비잔틴을 도와 남은 사람들을 보살펴 주세요.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몸을 돌려 막사를 걸어 나왔다. 그리고, 뒤에서 결국 참지 못한듯 케두스와 리엔과 다른 사름들이 오열하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런 그들을 외면한채로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밤하늘에 뜬 달과 별이 마치 당장이라도 지상에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아름다운 밤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끝까지 응석부리지 않고, 것멋들린 멍청이로 남은 나 자신을 칭찬하며 한참동안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일주일의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당장, 다음날 나의 각료들 중에 상당수가 나의 마지막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여 이곳을 떠나 리마솔과 아다나로 이동하였다. 나는 그래도 마지막에는 결국 내 말을 충실히 수행해준 그들에게 감사하고, 마음속으로 그들이 받았을 감정적인 고통에 미안함을 느끼며 조용히 시간을 보내었다.
며칠후 난민들의 마지막 그룹이 오론테스 강변에 위치한 우리 캠프에 도착하고, 강변에는 백만여명의 백성들의 텐트와 짐으로 마치 작은 도시 같은 풍경이 펼쳐졌다. 다행히도 카이쿠바드는 약속을 지켜서 다음날 바로 대부분의 군단을 철수시켜 오론테스강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천여명의 기병대만을 남겨서 멀리서 우리를 감시할뿐 이렇다할 적대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나는 나름 바쁜 시간을 보내었다. 평소와는 별로 다름없지만, 노인들의 수발을 도와주고, 여자들의 가사를 도와주며, 고아들과 놀아주는 쓸데없지만 유익한 행동을 하며 남은 시간을 난민들, 아니… 나의 백성들과 함께 보냈다. 항상 미소지으려 노력했다. 그들과 함께 웃고 떠들며 밥을 먹었다. 그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 후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애써 잊으며 남은 시간을 마지막으로 행복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일주일의 시간은 지나갔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어두컴컴한 새벽에, 나는 조금 일찍 일어나서 얼마 되지 않는 간단한 짐을 꾸렸다. 그리고 문득 손에 들어오는 물건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프였다.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참 오랫동안 부르지 못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쓴 웃음을 지으며 나는 내 거처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틈에 몰래 가려고 했는데, 예상치도 못한 방문객이 있었다.
"왕자님, 어디 가시나요?"
일곱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었다. 낯익은 얼굴, 카심 노인의 손자였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총기가 있어 보이는 얼굴 가득 궁금한 표정을 가득 안고 나에게 물어보고 있었다. 한동안 카심 노인과의 인연으로 놀아준 적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모습이 귀여워서 놔뒀었다. 멜리장드가 리마솔로 떠난 상황에서 언제부터인가 나의 수발까지 들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소년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좋은 아침. 어린이가 일어나기는 너무 이른 시간인듯 하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잠시 가야 할곳이 있단다."
"어디를 가시나요? 먼곳이 아니라면 따르겠습니다."
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아니다. 나 혼자서만 다녀와야 하는 일이란다. 너는 여기서 남아 남은 사람들과 네 동생들과 할아버지를 지켜드려야지."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난 차마 상처입힐수 없었다. 나는 문득 이제는 거추장스러워질 것 같은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미소지으며 아이에게 하프를 건내주었다.
"나는 나를 지켜줄 사람이 많단다. 아직 어린 너는 나보다는… 그래, 여기있는 내 하프를 지켜다오. 망가뜨리지 않고 잘 간직하고 지켜줄수 있겠니?"
나는 반쯤 농담으로 한말이었지만, 아이는 그게 무슨 큰 사명인듯 굳은 각오를 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반드시 제가 왕자님의 소중한 물건을 지켜내겠습니다."
"고맙구나."
그리고 나는 소년을 남겨두고 천막촌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른 새벽이라 주변에 사람들은 거의 보이질 않았다. 나는 별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무사히 천막촌의 끝에 도달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사람들에게 인사도 안하고… 그냥 갈건가요?"
"여정을 거치면서 조금은 의사소통할만큼 아랍어를 익혔지만, 여전히 조금은 어색한지라… 뭔가 우스꽝스럽기만 할 것 같아서요. 그리고 말이 통하는 사람들은 이제 다 떠나고 당신만 남은 것 같은데요. 그래도 마지막으로 작별을 하게 되는게 당신이라서 다행입니다. 아그네 공주님을 따라 아다나로 떠났을꺼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의 은총이군요."
그녀는 왠지 슬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뒷편에 카이쿠바드의 부대를 보며 말했다.
"아직, 라와드와 아이샤와 크리스틴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만나길 추천하고 싶지는 않군요. 그토록 고생스러운 여정의 끝이 이런 식으로 마무리 되다니… 허망하기 그지 없군요.
"그러게요. 하지만, 뭐 어쩌겠어요. 세상살이라는 것이 원래 그런게 아닐까요? 출생의 비밀을 가진 왕자가 떨쳐 일어나 불의를 응징하는 검으로 세상을 바로잡고 마왕을 물리치고 돌아와 공주님과 결혼하는 이야기는 동화속에서나 있는 법이죠. 현실은 후광을 빵빵하게 먹고도 밥값도 못하는 폐출된 왕자가, 터무니 없는 대량 난민 발생 소동을 일으키고, 그것을 방해하는 적들도 마왕은 커녕, 나름 자기 진영에서 타당한 목적과 정의를 가진 자들이고, 마지막에는 결국 힘의 순리대로 까분 대가를 치루는 것이 현실이죠.
하지만… 즐거운 꿈이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깨고 싶지 않을 만큼 행복했어요. 종교와 민족을 넘어 모두와 함께 해서 좋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 서로 설득하고 공감하며 의견을 나눈 것도 좋았습니다. 모두 함께 같은 꿈을 꾸며 걸어나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것은 당신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있어줘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말없이 한참을 나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생각을 바꿀 마음은 없는건가요? 그렇다면, 당신 한명이라면 어떻게든 저들의 공세를 피해 피신시킬 수도 있습니다만…"
"이미 결정된 일인걸요. 바꿀수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저는 그냥 추방당한 왕자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만은… 왕으로서 죽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만백성을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자가 왕이라고 말씀하셨죠. 저의 하찮은 목숨으로 수백만 백성들이 압제와 죽음의 고통을 벗어난다면, 제게 주어진 역량 이상의 값진 결과가 되겠죠.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머리를 잡고 살며시 그녀의 이마에 키스했다. 그녀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마지막 인사를 건내었다.
"이제 가야 할 것 같군요. 아무쪼록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시길 기원하겠습니다. 주제넘은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친어머니와 계부를 너무 어려워 하지는 마시길 바래요. 당신이 들려준 이야기 속의 그분들은 당신을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남은 시간을 같이 하세요. 이만 저는 떠나겠습니다. 안녕히…"
그리고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내 귀에 입을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해요."
"네? 뭐라고요?"
난 그녀의 말에 당황해서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차마 더 보지 못하겠다는 듯, 몸을 돌려 우리 진지를 향해 걸어가버렸다. 나는… 왠지 믿을수 없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다시 마음을 다잡고 발걸음을 돌렸다.
첫댓글 과연 적의 의도는 무엇일지...
정말 이 시리즈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군요. 2014년의 연대기 투표가 있다면 반드시 일등을!
일전에 죽은 샤를 카페는 실물인척한 카게무사고 저놈이 실체라면?
상비군이 그렇게 너프되었는데 저런 둠스택을 끌고 다니다니
음....?글을 잘쓰시네 ㄷㄷ